혼돈의 시대를 끝낸 최후의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키가하라에서 에도 막부까지 (Tokugawa Ieyasu)


혼돈의 시대를 끝낸 최후의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대서사시


시대를 기다린 남자

일본 전국시대를 상징하는 세 명의 거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성격을 비유한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버리겠다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 보이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시는 이에야스를 '인내'의 화신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과연 '인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까요? 

그의 삶은 쇠락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기나긴 인질 생활의 고난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일본 전체를 손에 쥐는 천하 통일이라는 대서사시로 막을 내립니다. 

이 전기는 단순히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읽고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낸 전략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의 모든 중요한 순간을 따라가며 그의 진정한 모습을 탐구할 것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제1부: 시련의 인질 시절 (1543-1560)

1. 쇠락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다

1543년 1월 31일, 미카와 국(三河国)의 오카자키 성(岡崎城)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될 이 아이의 아명은 '다케치요(竹千代)'. 

아버지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 어머니는 오다이노가타(於大の方)로, 당시 각각 17세와 15세의 어린 부부였습니다.

다케치요의 탄생은 축복이었지만, 가문의 상황은 위태로웠습니다. 

할아버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松平清康)가 가신에게 암살당한 '모리야마의 변' 이후 마쓰다이라 가문의 세력은 크게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동쪽에는 강력한 이마가와 가문이, 서쪽에는 떠오르는 오다 가문이 버티고 있어, 마쓰다이라 가문은 두 강대 세력 사이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처지였습니다.


2.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을 떠돌다

인질 생활의 시작 

아버지 히로타다는 가문의 생존을 위해 동쪽의 강자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원조를 요청합니다. 

그 대가는 아들 다케치요를 인질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마가와 가문으로 향하던 다케치요 일행은 오다 가문에 의해 납치되었고, 그는 2년간 오와리(尾張)에서 첫 인질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적진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오다 가문의 대우는 의외로 관대했다고 전해집니다.


슨푸에서의 세월: 고난이자 학습의 시간 

1549년, 아버지 히로타다가 가신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이후 다케치요는 오다 가의 인질이었던 오다 노부히로(織田信広)와의 인질 교환을 통해 이마가와 가문의 본거지인 슨푸(駿府)로 보내집니다. 

이곳에서 그는 8세부터 19세까지, 10년이 넘는 세월을 인질로 살게 됩니다.

이 시기는 단순한 고난의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마가와 가문의 군사(軍師)였던 다이겐 셋사이(太原雪斎) 스님 밑에서 학문과 병법을 배우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훗날 그의 통치 철학과 전략적 사고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학습의 기간이었습니다. 

굴욕적인 인질 생활 속에서도 그는 미래를 위한 내실을 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혼과 첫 출전 

슨푸에서의 인질 생활 중, 그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조카인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정략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1558년, 마침내 첫 출전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오다 가문 측으로 넘어간 데라베 성(寺部城) 공략에서 그는 뛰어난 방화 작전으로 두각을 보이며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드러냅니다. 

이 승리의 공으로 그는 할아버지의 이름 한 글자를 받아 '모토야스(元康)' 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 길고 긴 인질 시절은 그가 훗날 천하를 손에 쥐는 데 필요한 '인내'와 '전략적 사고'를 체득한 결정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츠키야마도노. 이에야스의 정실

제2부: 미카와 영주, 독립을 향한 첫걸음 (1560-1570)

1. 기회는 혼돈 속에서 온다: 오케하자마 전투

1560년, 일본 전국시대의 판도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2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를 침공했으나,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 공격을 받아 허무하게 전사한 것입니다.

당시 이마가와 군의 선봉으로 참전했던 이에야스는 주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립니다. 

그는 즉시 군대를 돌려 자신의 고향인 오카자키 성으로 귀환했습니다. 

5월 23일, 성을 지키던 이마가와 측 관리가 슨푸로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성에 입성하며 10여 년간의 인질 신세에서 벗어나 독립의 기회를 잡습니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를 '이마가와 가문을 배신한 행위'로 평가하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지만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약소 영주에게 이 선택은 가문을 재건하고 생존하기 위한 필연적인 전략이었습니다.


2. 살아남기 위한 선택: 기요스 동맹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그의 앞날은 험난했습니다. 

이마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생존하기 위해, 그는 또 한 번의 파격적인 선택을 합니다. 

1562년, 과거의 적이자 주군을 죽인 원수였던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기요스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이 동맹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강력한 방패 뒤에서 자신의 내실을 다지기 위한 전략적 기다림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동맹은 이후 노부나가가 사망할 때까지 20년간 굳건히 유지되며, 이에야스가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이 되어주었습니다.


3. 미카와를 통일하다

독립과 동맹 이후, 이에야스는 내부의 과제에 직면합니다. 

영지 내에서 발생한 종교 반란인 '미카와 잇코잇키(三河一向一揆)' 는 일부 핵심 가신들마저 가담할 정도로 큰 위기였습니다. 

미카와 잇코잇키가 무서운 이유는, ‘적이 쳐들어온 전쟁’이 아니라 ‘내 땅 안에서 갈라지는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반란에는 농민과 승려만이 아니라, 무장을 가진 지방 세력과 일부 가신까지 섞여 들어갔습니다.

즉,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칼을 겨눈 상대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어제까지 같은 편이던 사람들’이 된 겁니다. 

이때 그가 얻은 교훈은 단순합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진짜 승부는 “다시 함께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잇코잇키를 정리한 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더 어려운 문제를 마주합니다.

무조건 다 베어버리면, 다음 반란은 더 깊고 더 오래 갑니다.

반대로 다 용서하면, 내부 질서는 무너집니다.

이 ‘정리의 기술’을 일찍 배웠다는 점이, 훗날 일본 전체를 다스릴 때의 그 냉정함과 실용주의로 이어졌습니다.

전국시대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용맹만이 아니라, “어디까지 벌주고, 어디서부터 안아줄지”를 계산하는 머리였으니까요.


오카자키의 다이주지 사찰 정토종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1564년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잇코잇키를 격파했다


그는 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써 오히려 가신단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미카와 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1566년, 마침내 미카와를 완전히 통일한 그는 자신의 위상을 한 단계 격상시키기 위한 장기적인 포석을 둡니다.


1. 관직 획득: 조정으로부터 '미카와노카미(三河守)'라는 관직을 받습니다.

2. 성씨 변경: 기존의 '마쓰다이라(松平)'에서 '도쿠가와(徳川)' 로 성씨를 바꿉니다.


이는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가문이 명문 무가인 겐지(源氏)의 후예임을 내세워 훗날 쇼군이 될 수 있는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치밀한 계산이었습니다.

미카와 통일은 그가 더 이상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는 약소 영주가 아닌, 전국 시대의 주요 플레이어로 발돋움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제3부: 노부나가의 그림자 아래서 (1570-1582)

1. 시련과 성장: 미카타가하라 전투의 참패

1572년, 이에야스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습니다. 

'가이의 호랑이(甲斐の虎)'라 불리던 당대 최강의 무장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그의 영지로 진격해온 것입니다.

이에야스는 2만 7천의 다케다 군에 맞서 고작 1만 1천의 병력으로 무리하게 전투를 벌였습니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 

수많은 충성스러운 가신을 잃었고, 그 자신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말 위에서 실금할 정도로 큰 공포와 굴욕을 겪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입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 그림


'우거지상 그림' 일화 

하마마쓰 성으로 겨우 도망쳐 온 이에야스는 특이한 명령을 내립니다. 

화공을 불러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자신의 굴욕적인 모습을 그대로 그리게 한 것입니다. 

이 그림은 '우거지상(しかみ像)' 이라 불리며, 그는 이 그림을 곁에 두고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전승)

이 일화는 패배를 잊지 않고 와신상담하며, 실패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 그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에야스의 우거지상(しかみ像)


2. 복수와 역전: 나가시노 전투의 승리

미카타가하라에서의 치욕을 씻을 기회는 3년 뒤에 찾아왔습니다. 

1575년, 신겐의 뒤를 이은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가 다시 침공해오자,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연합하여 맞섭니다.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노부나가가 고안한 혁신적인 전술을 선보입니다. 

바로 철포(조총) 3단 사격 전술입니다. (논쟁)

이 전술 앞에 당대 최강을 자랑하던 다케다의 기마 군단은 무너졌고, 연합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이 전투를 통해 이에야스는 미카타가하라의 복수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위협이었던 다케다 가문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습니다.


나가시노 전투를 묘사한 병풍


3. 비정한 결단: 아내와 아들을 버리다

1579년, 도쿠가와 가문에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동맹자인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아내 쓰키야마도노를 살해하고,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노부야스에게 자결을 명한 것입니다.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해석이 존재합니다.

이론
내용
노부나가 명령설
며느리 도쿠히메(노부나가의 딸)가 남편 노부야스와 시어머니 쓰키야마도노가 다케다 가문과 내통했다고 모함하자, 노부나가가 의심을 품고 이들의 죽음을 명령했다는 설.
가문 내분설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하마마쓰파와 아들 노부야스를 중심으로 한 오카자키파 사이의 권력 다툼이 원인이었으며,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의 명령을 핑계로 내부 반대 세력을 숙청했다는 설.

진실이 무엇이었든, 이 사건은 이에야스가 천하 통일이라는 대의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과 혈육마저 희생할 수 있는 비정하고 냉철한 현실주의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이 비극적인 결단을 통해 이에야스가 권력의 정점에 다가서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음이 명백해졌습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마지막 관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제4부: 천하를 향한 길 (1582-1598)

1. 혼노지의 변과 절체절명의 위기

1582년, 일본 역사를 뒤흔든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납니다. 

천하 통일을 눈앞에 뒀던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허무하게 사망한 것입니다.

당시 이에야스는 소수의 인원만 거느린 채 교토 인근의 사카이(堺)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기나이(畿内) 지역은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미카와로 돌아가기 위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합니다. 

닌자로 유명한 핫토리 한조(服部半蔵) 등의 도움을 받아 험준한 이가(伊賀) 산맥을 넘는 이 탈출기는 '이가고에(伊賀越え)' 라 불리며, 그의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혼노지의 변


2. 히데요시와의 대립과 굴복

노부나가의 사후, 그의 후계자로 급부상한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1584년 벌어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에서 이에야스는 전술적으로는 히데요시 군대를 격파하며 우위를 점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전체의 판도를 읽는 히데요시의 정략에 밀려 결국 화친을 맺게 됩니다. 

이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힘을 보존하려는 이에야스의 신중하고 전략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이후 히데요시는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를 이에야스에게 시집보내고, 심지어 어머니까지 인질로 보내는 등 집요한 회유와 압박을 가했습니다. 

결국 1586년,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으로 가 히데요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며 그의 권위 앞에 굴복합니다. 

이는 단순한 굴복이 아니라, 라이벌이 힘을 과시하며 스스로를 소모할 동안 자신의 힘을 보존하려는 계산된 '전략적 기다림'이었습니다.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그의 인내가 현실 정치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3. 새로운 거점, 에도를 건설하다

1590년, 히데요시는 간토(関東)의 호조(北条) 가문을 멸망시킨 후, 이에야스에게 거대한 상이자 동시에 교묘한 견제책을 내놓습니다. 

기존의 익숙한 조상 대대로 뿌리 내린 지역인 영지 도카이(東海) 5개국을 내놓는 대신, 새로 정복한 간토 8개국을 영지로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카이 지방은 당시 일본의 중심이었던 교토와 오사카가 위치한곳과 매우 가까워, 히데요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물리적 거리를 벌려버리는 생각 이었던것입니다.

이것이 간토 이봉(関東移封)이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사건이며, "고향 집을 비우고, 낯선 시골로 가라" 라는 히데요시의 치밀한 묘책 이었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영토가 늘어난 영전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를 중앙 정치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낯선 땅에서 기반을 새로 닦게 하려는 히데요시의 계산이었습니다.


호조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의 에도를 추측한 지도


그러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의도를 역이용하여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를 감행합니다. 

그는 당시에는 잡초가 무성한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에도(江戸 지금의 도쿄)' 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고, 간토 지방을 일본 최대의 강력한 기반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 가신 배치: 도쿠가와 사천왕 등 핵심 가신들을 외곽의 요충지에 배치하여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 인재 등용: 패배한 호조, 다케다 가문의 유능한 가신들을 지방관으로 등용하여 현지 민심을 안정시키고 행정 효율을 높였습니다.

• 인프라 개발: 대규모 치수 사업과 체계적인 도시 계획을 통해 에도를 정치, 경제, 교통의 중심지로 개발하여 훗날 일본의 수도가 될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에도를 키운 건 성벽만이 아니었습니다.

도시는 사람이 모이면 반드시 “물”이 필요합니다.

마실 물, 씻을 물, 불을 끌 물, 그리고 더러운 물을 흘려보낼 길까지요.

간토로 옮겨온 1590년 무렵부터, 이에야스는 에도 주변의 물길과 치수(治水) 문제를 손보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장 화려한 전과가 보이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게 도시의 생명줄이었습니다.

전국시대의 무장들은 대개 ‘전투에서 이기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달랐습니다.

전투가 끝나도 사람이 살려면, 도시는 굴러가야 했습니다.

작은 어촌이 거대한 정치 중심지로 변하는 과정은, ‘칼의 승리’가 아니라 ‘생활의 설계’가 쌓인 결과였습니다.

에도는 그가 가진 장기적인 안목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무대였습니다.


도쿠가와 사천왕


여기서 잠깐, ‘도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이라는 말이 왜 중요할까요. 

이 별칭은 “이에야스 곁에서 전장을 지탱한 네 명의 기둥”을 가리키는 말로 전해집니다.

혼다 다다카쓰(本多忠勝),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 사카이 다다쓰구(酒井忠次). 

하지만 이 네 사람을 소개하는 이유는 “멋있어서”가 아닙니다.

이에야스는 전국시대 내내 ‘혼자서 천하를 잡은 영웅’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고, 사람으로 버티는 방식”을 끝까지 밀어붙인 인물이었습니다.

에도 개발도 똑같았습니다.

성과 성만 키운 게 아니라, 요충지마다 믿을 만한 사람을 박아 넣고, 그 사람들이 지역을 관리하고 군사를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강한 나라는, 결국 칼이 아니라 “사람과 체계”로 돌아갑니다.

이에야스는 그걸 너무 일찍 깨달았던 사람이었습니다.


4. 힘을 비축한 시간: 임진왜란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일본명: 분로쿠·게이초의 역)은 이에야스에게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는 출병 거점인 규슈의 나고야 성(名護屋城)에 주둔하며 직접 조선으로 군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 전략적 불참은 최고의 통찰이었습니다. 

다른 다이묘들이 조선 출병으로 막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소모하는 동안, 이에야스는 자신의 힘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훗날 히데요시 사후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데 있어 그 어떤 군사적 승리보다도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히데요시의 죽음이 임박하면서, 십수 년간 칼을 갈며 힘을 비축해 온 이에야스에게 마침내 천하를 잡을 최후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제5부: 천하 통일 (1598-1614)

1. 천하를 건 승부: 세키가하라 전투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은 다시 혼돈에 빠져들었습니다. 

도요토미 정권 내부에서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등 무력을 중시하는 '무단파'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중심으로 한 행정 관료인 '문치파'의 갈등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이에야스는 이 갈등을 교묘히 이용하며 불만을 품은 무단파 다이묘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마침내 1600년 9월 15일, 천하의 패권을 건 결전의 날이 밝았습니다.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東軍)과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西軍)이 세키가하라(関ヶ原) 벌판에서 맞붙었습니다. 

전투는 팽팽하게 진행되었지만, 전투의 향방을 결정지은 것은 이에야스의 사전 공작이었습니다. 

서군에 속해 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전투 중 결정적인 순간에 동군으로 돌아서면서 서군의 진형은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단 하루 만에 끝난 이 전투의 승리로 이에야스는 사실상의 천하인이 되었습니다. 

세키가하라는 “하루짜리 전투”였지만, 승리 직후부터 시작되는 싸움은 훨씬 길었습니다.

바로 땅을 다시 나누는 싸움, 즉 영지 재편입니다.

이에야스는 패배한 쪽 다이묘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 땅을 다시 배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상을 주고 벌을 준 게 아니라, 더 무서운 일을 합니다.

사람을 “등급”으로 나눠버린 겁니다.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함께한 집안은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세키가하라 이후에 들어온 집안은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 

도자마는 힘이 세더라도, 핵심 정치 자리에서 멀어지기 쉬운 구조가 됩니다.

반대로 후다이는 “막부를 실제로 굴리는 손”이 됩니다.

이 한 번의 구분이, 이후 260여 년 체제의 뼈대를 만들었습니다.

칼로 이긴 뒤에, 분류로 묶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분류는,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한 족쇄가 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병풍.


2. 에도 막부를 열다

쇼군 취임 

1603년, 이에야스는 마침내 조정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되어 에도(江戸)에 막부(幕府)를 개창합니다. 

이로써 이후 260여 년간 이어질 평화의 시대, '도쿠가와 시대'의 막이 올랐습니다.


조기 승계 

그러나 그는 쇼군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불과 2년 뒤인 1605년,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쇼군직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후계 구도를 확실히 하여, 사후에 발생할지 모를 권력 다툼의 싹을 미리 잘라내고 막부의 안정성을 다지려는 그의 치밀한 계획이었습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3. 막후의 지배자: 오고쇼 정치

쇼군직에서 물러난 이에야스는 슨푸 성(駿府城)에 머물며 '오고쇼(大御所, 상왕)' 로서 막후에서 실권을 행사했습니다. 

에도의 쇼군 히데타다와 슨푸의 오고쇼 이에야스가 함께 통치하는 '2중 정치' 체제를 통해 그는 국가 시스템의 기틀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이 시기에 그가 제정한 핵심적인 법령들은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 철학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슨푸성


• 기독교 금교령: 서양 세력이 막부의 통치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선교사를 추방하고 신자들을 탄압하며 쇄국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 천황과 귀족(공가)의 활동을 학문과 의례에 국한시켜 정치적 권한을 완전히 박탈하고, 막부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 다이묘들의 성 신축을 금지하고, 막부의 허락 없는 혼인을 통제하는 등 다이묘들을 강력하게 통제하여 막부 중심의 중앙집권적 질서를 구축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에도 막부의 통치 체제는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게 아닙니다.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 1603년 이후에도, 막부와 각 번(藩, 다이묘 영지)이 맞물려 굴러가는 체제는 시간이 걸려 다듬어졌고, 안정된 형태는 뒤로 가서 더 굳어졌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에야스의 역할이 작아지는 건 아닙니다.

그는 “완성”을 혼자 해낸 사람이 아니라, “완성될 수밖에 없는 설계”를 먼저 깔아둔 사람이었습니다.

천황과 귀족의 영역을 의례로 묶고, 다이묘의 행동을 규칙으로 묶고, 외부 세력의 통로를 좁히고, 이 모든 것을 ‘국가 시스템’으로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전국시대의 승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하나입니다.

자기 생존에만 집중하다가, 자기 다음 세대에서 무너지는 것.

이에야스는 끝까지 “내가 죽은 뒤”를 계산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전쟁은, 전투에서 끝나지 않고 제도로 이어졌습니다.

막부의 기틀을 완성한 이에야스에게 남은 마지막 과업은, 미래의 잠재적 위협인 도요토미 가문을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제6부: 최후의 싸움, 도요토미 가문을 멸하다 (1614-1615)

1. 전쟁의 명분: 호코지 종명 사건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제거하기 위해 교묘하고도 무서운 책략을 사용합니다. 

도요토미 가문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재건한 교토 호코지(方広寺) 대불전의 종에 새겨진 명문이 그 빌미가 되었습니다.

"國家安康(국가안강), 君臣豊樂(군신풍락)"

이에야스는 이 글귀를 억지로 해석하여 트집을 잡았습니다. 


호코지 종에 새겨진 명문


'國家安康'은 자신의 이름인 '이에야스(家康)'의 한자를 갈라놓아 저주하는 것이며, '君臣豊樂'은 '豊臣(도요토미)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슨푸 시절 다이겐 셋사이에게 배운 학문과 병법은 훗날 그의 통치술의 근간이 되었지만, 호코지 종명 사건에서는 그 지식이 한 가문을 멸망시키는 무서운 책략의 도구로 변모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억지였지만,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으로는 충분했습니다.


2. 오사카 겨울 전투 (1614)

1614년 겨울, 이에야스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도요토미 가문의 마지막 보루인 오사카 성을 공격했습니다. 

이것이 '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 입니다. 

도요토미 군은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가 활약한 '사나다마루'라는 강력한 외성 덕분에 선전하며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에야스는 힘으로 성을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기만적인 강화 조약을 제안합니다. 

그는 조약의 조건으로 오사카 성의 바깥 해자(垓子)를 메우게 한 뒤, 약속을 어기고 안쪽 해자까지 모조리 메워버렸습니다. 

이로써 일본 최고의 요새라 불리던 오사카 성은 방어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벌거숭이 성이 되었습니다.


오사카 공성전 - 1614년 겨울 전역


3. 오사카 여름 전투와 도요토미의 멸망 (1615)

이듬해인 1615년 여름, 이에야스는 약속을 깨고 다시 오사카 성을 공격했습니다. 

이것이 '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 입니다. 

해자가 메워진 성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가 이에야스의 본진까지 돌격하여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붙이는 등 최후의 항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 끝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와 그의 어머니 요도도노(淀殿)는 자결했습니다. 

이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고, 100년 넘게 이어진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는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완전한 통일을 이룬 이에야스는 이제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의 시대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7부: 죽음, 그리고 신이 된 남자 (1616)

1. 최후의 순간

1616년, 이에야스는 73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도미 튀김을 먹고 식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튀김을 먹은 시점과 사망 시점의 간격이 길어 현대에는 위암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의 철학이 담긴 유명한 유훈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감과 같다. 서두르지 마라... 부족함이 지나침보다 낫다."

이 유훈은 역경 속에서도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만족할 줄 아는 지혜를 강조한 그의 인생관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2. 신격화와 영원한 유산

이에야스는 자신의 유해를 닛코(日光)에 안장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닛코 동조궁(日光東照宮)에 웅장한 사당과 함께 모셔졌고, 199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사후에 그는 조정으로부터 '도쇼다이곤겐(東照大権現)' 이라는 신호(神號)를 받아 신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이에야스를 신격화한 것은 단순히 한 위인을 기리는 것을 넘어선 고도의 정치적 장치였습니다. 

막부의 창시자를 신의 반열에 올림으로써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권을 신성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이 신성한 권위는 일본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막부는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에게 닛코 동조궁을 방문하여 참배하도록 강권하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과시하는 외교 무대로 활용했습니다. 

실제로 조선의 인조(仁조)는 막부의 요청에 따라 범종(梵鍾)과 삼구족(三具足, 향로·화병·촛대)을 선물로 보냈으며, 이 유물들은 지금도 동조궁에 남아 이에야스의 유산이 동아시아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대영 박물관 소장)


인내의 화신인가, 냉혹한 현실주의자인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을 돌아볼 때, 서문에서 던졌던 질문에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정말 '인내'의 화신이었을까요?

그의 삶은 분명 기나긴 인내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참고 기다리기만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때로는 아내와 아들을 버릴 만큼 비정하리만큼 냉철한 결단을 내렸고, 종에 새겨진 글귀를 트집 잡아 전쟁을 일으키는 교활한 책략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작은 어촌 에도에서 일본의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복합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인내는 맹목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최적의 기회를 포착하고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전략적 기다림이었습니다. 

그가 이룩한 '에도 시대'라는 260여 년의 평화는 일본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00년의 혼돈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연 최후의 승자, 그의 이름은 일본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글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생애와 전국시대 주요 사건을, 공개된 역사 기록과 연구에서 널리 알려진 흐름을 바탕으로 정리한 서사형 전기입니다.

다만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 전개, 심리 묘사, 대사, 연결 문장은 소설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또한 같은 사건이라도 사료·연구에 따라 해석이 갈리는 지점은 (논쟁), 전해오는 이야기 성격이 강한 내용은 (전승)으로 구분해 이해를 돕고자 했습니다.

날짜는 음력·양력 표기 차이로 달라 보일 수 있습니다. 

글의 핵심은 “사건의 흐름과 선택의 결과”에 있으며, 세부 연대까지 확인이 필요하다면 원문 사료·연표와 함께 교차 확인을 권합니다.


This essay follows Tokugawa Ieyasu from a hostage in Mikawa to the victor who ended Japan’s Sengoku era. 

Raised between Oda and Imagawa, he learned to wait, bargain, and prepare. 

After Imagawa Yoshimoto fell at Okehazama, he reclaimed Okazaki, allied with Oda Nobunaga, stabilized Mikawa, and adopted the Tokugawa name to bolster legitimacy.

Defeat at Mikata-ga-hara became his lesson in restraint. 

His rise demanded sacrifice, including the deaths of his wife and heir amid suspicion.

After Nobunaga’s death, he survived the Kinai chaos and later faced Toyotomi Hideyoshi—fighting, then submitting to preserve strength. 

Transferred to Kantō, he turned Edo into his base. 

With Hideyoshi gone, he exploited splits, won at Sekigahara, founded the Edo shogunate in 1603, and ruled as retired authority through lawmaking. 

Using the Hōkō-ji bell dispute as pretext, he crushed the Toyotomi in the Osaka campaigns, died in 1616, and was enshrined at Nikkō; the framework endu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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