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란 누구인가: 생애, 4대 비극, 언어 혁명까지 한 번에 정리 (William Shakespeare)


시대를 초월한 거장, 윌리엄 셰익스피어: 당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왜 우리는 400년 전 인물을 이야기하는가?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은 단언했습니다. 

"셰익스피어를 식민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 

이에 앞서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역시 "국가를 모두 넘겨주는 때에도 셰익스피어 한 명만은 못 넘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전승)

이처럼 한 국가의 자존심이자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평가받는 인물, 그가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입니다.


이 소개서는 한 가지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한 명의 작가가 어떻게 한 국가, 나아가 전 세계의 문화에 이토록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그가 남긴 불멸의 유산을 통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런던 최고의 극작가가 되었는지, 그의 작품들이 어떻게 시대를 관통하여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곳을 탐색하는지, 그리고 왜 그의 언어가 오늘날까지 우리의 일상 속에 살아 숨 쉬는지를 따라가는 흥미로운 여정이 될 것입니다.

이제, 시간의 장막을 걷고 16세기 영국으로 떠나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을 만나봅시다.


1. 스트랫퍼드에서 온 사나이: 셰익스피어의 초기 생애

1.1. 유년 시절과 배경 (1564-1582)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64년 4월 26일(세례일 기준), 영국 중부의 소도시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장갑 제조업자이자 피혁 가공업, 중농(中農)을 겸하던 부유한 상인으로, 마을의 읍장까지 지낸 유력 인사였습니다. 

덕분에 셰익스피어는 비교적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1577년경부터 그의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시대의 비극이 숨어있었습니다. 

그의 집안이 가톨릭을 믿었는데, 당시 성공회를 국교로 삼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가톨릭교도들이 국가의 반역자로 낙인찍혔던 종교적 박해가 가문 몰락의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추정/논쟁)

아버지가 문맹이라 재산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도 그의 삶을 순탄치 않게 만들었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가 대학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는 고향의 '킹 에드워드 6세 학교(King Edward VI School)'에서 라틴어와 고전 문학을 배우며 학문적 기초를 닦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훗날 동시대 극작가 벤 존슨은 그를 두고 "라틴어에도 그만이고 그리스어는 더욱 말할 것이 없다" 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의 천재성이 정규 고등 교육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타고난 재능과 세상에 대한 깊은 관찰력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합니다.


1.2. 결혼과 사라진 7년 (1582-1592)

1582년, 18세의 셰익스피어는 8살 연상인 앤 해서웨이와 결혼하여 딸 수재나와 쌍둥이 남매 햄닛, 주디스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1585년 쌍둥이가 태어난 직후부터 1592년 런던 연극계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기까지, 약 7년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시기는 '잃어버린 연대(the lost years)' 라 불리며,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며 이 공백의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추측만 있을 뿐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7년의 공백기 끝에, 셰익스피어는 마침내 역사의 무대 전면에 등장합니다. 

그의 새로운 무대는 바로 당대 세계의 중심지, 런던이었습니다.


앤 해서웨이


1.3. 지방 유력자와 충돌한 젊은 셰익스피어 (전승)

셰익스피어의 이른 청년기를 둘러싸고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사슴 밀렵 전설’입니다(전승).

고향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근처에는 토머스 루시 경이라는 지방 유력자의 영지, 찰콧 공원(Charlecote Park)이 있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젊은 셰익스피어는 친구들과 함께 이 땅에 몰래 들어가 사슴이나 토끼를 잡다가 발각되었고, 심한 꾸지람과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루시 경을 풍자하는 익살스러운 시를 지어 마을에 퍼뜨렸고, 격분한 루시 경은 그를 더 강하게 처벌하려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더 이상 이곳에선 살 수 없다”고 느끼고 런던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뒤따릅니다.

또 다른 전승에서는 셰익스피어가 후에 쓴 희곡 〈헨리 4세〉 속 인물 ‘셜로(Justice Shallow)’를 통해 루시 경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 해석이 사실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방 유력자와 갈등을 빚었던 경험이 그의 작품 속 권력자 풍자와 서민 시각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충분히 가능하지요(전승).

실제로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입증할 자료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전설은 “촌마을의 문제적 청년이 어떻게 런던으로 옮겨 가 극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는 상징적인 에피소드로, 셰익스피어의 삶을 입체적으로 떠올리게 해 줍니다.


2. 런던의 샛별, 무대를 뒤흔들다

2.1.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계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통치하던 런던은 르네상스의 물결 속에서 국운이 융성하고 문화적 창조력이 폭발하던 도시였습니다. 

특히 연극은 중세 민중극의 전통과 르네상스 고전주의가 결합하며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고, 런던 시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대중 여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주된 활동 무대는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 이었습니다. 

템스강 남쪽 사우스워크(Southwark)에 위치한 이 극장은 1599년에 세워졌으며,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걸작들이 초연된 곳입니다. 

글로브 극장은 1613년 공연 중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고, 1642년 청교도 혁명으로 인해 폐쇄되는 등 영문학사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


2.2. 배우 겸 극작가로서의 성공

셰익스피어는 1592년경 이미 런던에서 주목받는 작가였습니다. 

당시 대학 출신 작가였던 로버트 그린이 그를 향해 "대학도 안 나온 주제에 품격 떨어지는 연극을 양산한다" 고 비난한 기록은, 역설적으로 그의 성공에 대한 기성 문단의 시기 어린 증거가 되었습니다.


1592년부터 1594년까지 끔찍한 페스트가 창궐하여 런던의 극장들이 문을 닫는 위기가 있었지만, 이후 셰익스피어는 '궁내부장관 극단(Lord Chamberlain's Men)' 의 전속 작가이자 간부 단원, 그리고 조연급 배우로 활동하며 안정적인 창작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 극단은 훗날 제임스 1세가 즉위하면서 '국왕 극단(The King's Men)' 으로 개칭되며 왕실의 후원을 받는 최고의 극단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런던 연극계의 중심으로 우뚝 선 셰익스피어는 이제 그의 천재성을 마음껏 펼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의 펜 끝에서 탄생한 이야기들은 때로는 유쾌한 웃음으로, 때로는 비통한 눈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3. 거장의 작업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세계

3.1. 웃음과 사랑의 연금술: 셰익스피어의 희극

셰익스피어의 희극은 주로 네 가지 핵심 요소를 통해 전개됩니다.


• 사랑: 젊은 남녀의 열정적인 사랑과 그 과정에서 겪는 시련.

• 오해와 혼란: 얽히고설킨 관계와 우연이 빚어내는 혼란스러운 상황.

• 신분 착각: 남장 여자 캐릭터나 뒤바뀐 신분으로 인한 유쾌한 소동.

• 행복한 결말: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여러 쌍의 연인이 결혼하며 끝나는 축제 같은 마무리.


대표작으로는 요정과 인간의 세계가 어우러져 사랑의 마법을 그리는 한여름 밤의 꿈 이 있으며,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베니스의 상인 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단순한 악역을 넘어, 당대 사회의 편견과 인간 내면의 복수심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며 희극 속에 깊은 사회적, 비극적 요소를 녹여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의 희극은 단순한 웃음을 넘어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온 세상은 무대요, 모든 남자와 여자는 한낱 배우일 뿐."

뜻대로 하세요 중에서


3.2. 권력의 비극과 인간의 야망: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셰익스피어 비극의 정수는 주인공이 자신의 '성격적 결함(tragic flaw)' 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는 외부의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비극이 초래되는 로미오와 줄리엣과는 구별되는 지점이며, 로미오와 줄리엣이 4대 비극에 포함되지 않는 주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도회의 로미오와 줄리엣(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1막 5장)


그의 4대 비극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연을 가장 깊이 있게 탐색한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작품명
주인공
핵심 결함
주제
대표 대사
햄릿 (Hamlet)
햄릿 왕자
우유부단
복수, 존재의 의미, 도덕적 딜레마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오셀로 (Othello)
오셀로 장군
질투
질투, 배신, 인종 문제, 사랑과 파멸
"오, 조심하시오, 전하, 질투를. 그것은 녹색 눈의 괴물이니."
리어왕 (King Lear)
리어 왕
교만, 분별력 상실
진실과 거짓, 효도, 정신적 몰락
"나는 죄를 저지르기보다는 죄의 피해를 더 많이 입은 사람이오."
맥베스 (Macbeth)
맥베스 장군
야망
야망, 죄책감, 권력의 타락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이여!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햄릿, 호라티오, 마르셀루스, 햄릿 아버지의 유령


3.3. 영국의 서사시: 셰익스피어의 사극

셰익스피어의 사극은 단순한 역사 기록의 재현이 아닙니다. 

그는 역사를 무대 위로 가져와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투영하는 거울로 삼았습니다. 

특히 후계자 없이 늙어가던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정치적 불안감은 그의 사극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는 여러 편의 사극을 통해 영국 왕조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거대한 서사시를 창조한 것입니다. 

이야기의 연대기 순으로 보면, 이 대서사는 리처드 2세 에서 시작하여 헨리 4세 (1, 2부)와 헨리 5세 를 거쳐 헨리 6세 (1, 2, 3부), 그리고 마침내 리처드 3세 로 마무리됩니다. 

이 장대한 연작을 통해 그는 방탕했던 왕자가 역경을 딛고 위대한 군주로 성장하는 과정(헨리 5세)을 그리기도 하고, 희대의 악인이 권력욕으로 자신과 나라를 파멸시키는 모습(리처드 3세)을 통해 리더십과 권력의 본질을 깊이 있게 탐구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희극, 비극, 사극을 넘나들며 인간 감정의 모든 스펙트럼을 무대 위에 펼쳐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단지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그 자체를 빚어낸 창조자이기도 했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극중 리처드 3세


4. 언어의 마술사, 영어를 창조하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기, 영어는 아직 문법이나 철자가 완전히 표준화되지 않은 유동적인 언어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셰익스피어는 약 1,700~2,000개에 달하는 새로운 단어와 수많은 관용구를 만들어내며 현대 영어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그는 단순히 단어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기존 단어를 새롭게 조합하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 명사의 동사화: 명사를 동사처럼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

• 두 단어의 결합: Eyeball(눈알)처럼 두 단어를 합쳐 신조어 생성.

• 접두사/접미사 추가: 기존 단어에 접두사나 접미사를 붙여 파생어 창조.

그의 언어적 유산은 오늘날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 그가 만든 단어들:

    ◦ Eyeball (눈알)

    ◦ Bedroom (침실)

    ◦ Addiction (탐닉, 중독)

    ◦ Manager (관리자)

    ◦ Fashionable (유행하는)

    ◦ Puke (토하다)

    ◦ Lonely (외로운)


• 그가 만든 관용구들:

    ◦ Break the ice (어색한 분위기를 깨다)

    ◦ Love is blind (사랑에 눈이 멀다)

    ◦ Come full circle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다)

    ◦ Good riddance (속이 시원하다)

    ◦ Wear my heart upon my sleeve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다)


이처럼 셰익스피어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인 언어 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그의 작품과 언어가 시대를 넘어 살아남은 것처럼, 그의 이름과 명성 역시 수많은 논쟁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4.1. 두 번째로 좋은 침대만 남긴 기묘한 유언 (논쟁)

1616년 셰익스피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남긴 유언장에는, 아내 앤 해서웨이를 언급하는 한 줄이 등장합니다.


“내 아내 앤에게는 나의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남긴다.”


이 짧은 문장은 오랫동안 많은 해석을 낳았습니다. 

한동안은 이것이 “셰익스피어가 아내를 소홀히 여겼다”는 증거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유언장에서 집과 땅, 주된 재산은 장녀 수재나에게 돌아가고, 아내에게는 ‘두 번째 침대’만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부부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해석이 꾸준히 따라붙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자들은 다른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당시 상류·중산층 가정에서 가장 좋은 침대는 손님을 맞이하는 ‘집의 체면’이었고, 법적으로는 집과 함께 장녀에게 승계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부부가 실제로 함께 사용하던 침대는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두 번째 침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유언장 속 문장은 “법적·경제적 재산은 장녀에게, 평생을 함께 보낸 혼인 침대는 아내에게” 남긴 셈이 되어, 오히려 부부의 사적인 정이 담긴 마지막 배려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논쟁).


이처럼 한 줄의 문장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차가운 남편’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소박한 애정 표현’의 흔적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해석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이 에피소드는 셰익스피어가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인물임을 잘 보여 줍니다.


4.2. 무덤 위의 저주: “내 뼈를 건드리지 말라”

셰익스피어는 고향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 안에 묻혀 있습니다. 

그의 무덤 위에는 조금 섬뜩하면서도 인상적인 네 줄짜리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대략 이런 의미입니다.


“친구여, 예수를 위해 울려거든 잠든 나를 그냥 두시오.

여기 뼈를 그대로 두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으리라.

그리고 나의 뼈를 옮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무덤


당시 영국 교회에서는 오래된 무덤의 유골을 파내어 다른 곳에 합동 매장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글귀는 “내 뼈를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아주 현실적인 요청이자, 셰익스피어 특유의 짙은 유머 감각이 섞여 있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더 나아가, 셰익스피어가 아내와의 합장을 원치 않았거나, 자신만의 무덤이 훼손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도 내놓습니다(논쟁)

확실한 답은 없지만, 죽은 뒤에도 자신의 육체와 이름이 어떻게 다뤄질지에 민감했던 한 예술가의 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무덤은 실제로 열리지 않았고, 이 저주 아닌 저주는 결과적으로 “셰익스피어의 뼈에 손대지 말라”는 강력한 문화적 장치가 되었습니다.


5. 사라지지 않는 유산과 끝나지 않는 논쟁

5.1.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핵심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 과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주제' 가 있습니다. 

사랑, 질투, 야망, 복수, 배신과 같은 감정들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또한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단순히 선하거나 악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순되고, 번민하며, 실수하는 입체적인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복잡성은 캐릭터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관객들이 인물들의 고뇌에 깊이 몰입하게 만듭니다.


존 길버트경이 그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 1849


5.2. 평생 친구이자 라이벌, 벤 존슨이 남긴 솔직한 찬사

셰익스피어에게는 평생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극작가 벤 존슨(Ben Jonson)이 있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두고 “예술적 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다”며 투덜댄 적도 있었고, 가끔은 질투 섞인 비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셰익스피어가 세상을 떠난 뒤, 벤 존슨은 그의 동료들이 편찬한 첫 희곡집, 이른바 ‘퍼스트 폴리오(First Folio)’의 서문에 길고 진심 어린 헌정 시를 남깁니다. 

여기서 그는 셰익스피어를 “에이번의 달콤한 백조(Sweet Swan of Avon)”라 부르며,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는 한 시대를 위한 작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한 작가였다.”


이 한 줄은 이후 셰익스피어를 설명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문장이 되었고, “그의 작품은 특정 시대의 유행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본성을 다뤘다”는 평가를 상징적으로 요약해 줍니다.

가까운 동료이자 때때로 날카로운 비평가였던 벤 존슨이 남긴 이 문장은, 동시대인이 바라본 셰익스피어의 실제 위상과 영향력을 생생하게 전해 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셰익스피어와 존슨이 머메이드 선술집에서


5.3. 셰익스피어는 누구인가?: 저자 논쟁

셰익스피어의 압도적인 명성만큼이나 그를 둘러싼 논쟁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셰익스피어 가상 인물설', 즉 저자 논쟁입니다. 

이 주장은 주로 두 가지 근거에서 출발합니다.


1. 개인적 사료의 부족: 위대한 작가의 삶에 대한 기록(일기, 편지 등)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점.

2. 낮은 학력: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상인의 아들이 어떻게 그토록 해박한 지식을 담은 작품을 쓸 수 있었겠냐는 의문.


하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취급합니다. 

16세기에는 귀족이 아닌 평민의 사사로운 기록이 보존되기 어려웠던 것이 당연했으며, 당시 '그래머 스쿨'의 교육 수준은 현대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수준 높은 고전 교육을 제공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역사적 맥락은, 그가 살아생전 위대한 극작가로 대우받긴 했어도 오늘날과 같은 불멸의 존재는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연극계에는 벤 존슨이나 크리스토퍼 말로처럼 존재감이 거대한 라이벌들이 도처에 있었고, 셰익스피어는 그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의 사적인 기록을 신주단지 모시듯 보존해야 할 이유가 당대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자 논쟁은 계속되었고, 실제 저자 후보로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천재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 귀족이었던 '옥스퍼드 백작' 등이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한 시대가 아닌 만세를 위한 작가

스트랫퍼드의 상인 아들로 태어나 런던의 무대를 정복하고, 마침내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로 자리매김한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의 여정은 한 편의 위대한 드라마와 같았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단지 약 38편의 희곡과 154편의 소네트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유산은 우리가 세상을 보고,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 그 자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극작가 벤 존슨은 셰익스피어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한 시대가 아닌 만세(萬世)를 위한 작가" 

그의 말처럼, 인간의 희로애락이 존재하는 한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들은 시간의 강을 건너 영원히 우리 곁에서 빛날 것입니다.


이 글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생애와 작품 세계, 그리고 그를 둘러싼 여러 전승과 논쟁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인물 소개 글입니다. 

학계의 다수 견해와 공개된 연구 자료를 참고하되, 독서 흐름을 위해 일부 장면과 연결 서술은 서사적으로 정리·각색하였습니다. 

확정되지 않은 일화나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전승)·(논쟁)으로 구분하여 담았으므로, 학술 연구나 인용이 필요하신 경우에는 반드시 전문 연구서와 1차 자료를 함께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This article introduces William Shakespeare, following his path from a glover’s son in Stratford-upon-Avon to most influential playwright in English literature. 

After schooling and mysterious “lost years”, he surfaces in London as actor, shareholder and chief writer for the Lord Chamberlain’s Men at the Globe. 

The piece surveys his comedies, tragedies and English history plays as dramas of love, power, ambition and failure, and shows how he helped shape modern English by coining many words and idioms still in use. 

It also recalls anecdotes such as the “second-best bed” left to his wife and the warning curse on his grave, and closes by briefly noting later debates over who wrote the pl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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