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토리 에르제베트: 피의 백작부인은 왜 소녀들을 죽였나? (Báthori Erzsébet )


바토리 에르제베트: 피의 백작부인, 분열된 왕국의 여인


역사와 전설의 경계에서

바토리 에르제베트(Erzsébet Báthory)는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여성 연쇄 살인범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를 단지 잔혹한 살인마로만 규정하는 것은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헝가리 왕국을 휩쓸었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괴물로 변모했는지를 놓치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에르제베트를 단순한 범죄자가 아닌, 시대의 모순과 권력의 역학을 비추는 복잡한 역사적 인물로 재조명하는 데 있다. 

후대에 덧씌워진 '피의 백작부인'이라는 섬뜩한 전설의 베일을 걷어내고, 당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녀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 이 글의 핵심 목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몇 가지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왜 역사상 가장 끔찍한 여성 살인마가 되었는가? 

수백 명의 소녀를 고문하고 살해했다는 혐의는 과연 사실이었는가, 아니면 그녀는 거대한 부와 권력을 노린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었는가? 

이 글은 그녀의 서사를 통해 한 시대의 첨예한 권력 투쟁, 여성에게 부과된 젠더 역할, 그리고 초기 근대 사법 체계가 지닌 명백한 한계를 심도 있게 탐구하고자 한다.

이 복잡한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은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무대로 들어가는 것이다. 

합스부르크, 오스만 제국, 그리고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조각난 분열된 왕국, 헝가리의 혼란스러운 배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제1부: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세계 - 분열된 왕국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16세기 헝가리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 시대적 맥락은 바토리 가문과 같은 대귀족이 어떻게 법 위에 군림하는 막대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권력이 어떻게 에르제베트의 삶과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하치 전투 이후의 헝가리

1526년 모하치 전투는 헝가리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오스만 제국에 참패하며 국왕 루이 2세가 전사하자, 헝가리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 끝에 국토는 세 조각으로 분열되었다. 

서북부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는 '로열 헝가리', 중남부는 '오스만 헝가리', 그리고 동부는 사실상 오스만의 속국인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나뉘었다. 

이러한 삼분할은 국경 지대에 거대한 권력 공백을 만들었고, 이는 바토리 가문과 같은 대귀족 가문이 약화된 중앙 권력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신들의 영지 내에서 사실상의 주권자(de facto sovereigns)로 군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귀족 권력의 법적 기반

당시 헝가리 귀족의 권력은 1517년에 성문화된 법전 '트리파르티툼(Tripartitum)'에 의해 강력하게 보장되었다. 

이 법전은 귀족의 권리와 특권을 명시하고 농노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 

귀족들은 다이어트(Diet)라 불리는 의회에서 국왕을 직접 선출할 권리를 가졌으며, 자신의 영지 내에서는 사실상 절대적인 사법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같은 대귀족의 잔혹한 행위가 어떻게 수년간 공적인 문제로 비화되지 않고 묵인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배경을 제공한다.


종교 및 사회적 환경

종교적으로도 헝가리는 분열되어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가톨릭 신앙을 고수했지만, 바토리와 나다스디 가문을 포함한 헝가리의 많은 유력 가문들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칼뱅파, 루터파)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종교적 대립은 정치적 갈등의 또 다른 축을 형성했다.


더욱이 오스만 제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은 헝가리 사회 전체에 만연한 폭력과 불안정성을 심화시켰다.

국경 지대에서의 잔혹 행위는 일상이었고, 그녀의 남편 역시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는 동시에 악명 높은 잔인함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행위는 평화로운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살던 세계를 규정했던 만연한 폭력성이 가정 내에서 극단적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이처럼 격동의 시대, 헝가리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인 바토리 가문에서 한 여인이 태어났다. 

그녀의 성장과 혼인은 분열된 왕국의 권력 지형을 더욱 공고히 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제2부: 한 귀족 여성의 형성 - 성장, 교육, 그리고 결혼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초기 생애와 결혼 과정을 분석하는 것은 그녀의 정체성 형성과 사회적 지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녀는 후대의 전설처럼 태생부터 '괴물'이었던 것이 아니라, 당대 귀족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역할과 최고 수준의 교육을 충실히 이행한 인물이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두 거대 가문의 결합

에르제베트의 결혼은 당대 헝가리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두 가문, 바토리와 나다스디의 결합이었다. 

바토리 가문은 나다스디 가문보다 더 유서 깊고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다. 

남편인 페렌츠 나다스디(Ferenc Nádasdy)가 아내의 성을 채택한 사실에서 그 중요성이 드러나는데, 이는 당시 바토리 가문이 나다스디 가문보다 더 명예롭고 유서 깊었기 때문이다.


1575년 5월 8일, 4,500명이 넘는 하객이 참석한 그들의 결혼식은 단순한 개인의 결합을 넘어, 두 가문의 권력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공고히 하는 거대한 정치적 이벤트였다. 

결혼 선물로 에르제베트는 현재 슬로바키아에 위치한 차흐티체 성(Čachtice Castle)과 주변 17개 마을을 자신의 소유로 받았다.


슬로바키아 차흐티체 성 항공 사진


당대 최고 수준의 교육과 행정 능력

에르제베트는 당대 여성으로서는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다. 

그녀는 라틴어, 독일어, 그리스어에 능통하여 자유자재로 읽고 쓸 수 있었다. 

반면, 위대한 군인이었던 남편 페렌츠는 모국어조차 겨우 읽고 쓰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러한 지적 능력의 차이는 단순한 개인적 성취를 넘어, 훗날 그녀가 남편 사후 나다스디-바토리 가문의 방대한 영지를 독립적으로 경영하며 자율적인 권력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결정적 도구가 되었다.

남편이 오스만 제국과의 기나긴 전쟁으로 수년간 영지를 비웠을 때, 에르제베트는 차흐티체 성을 포함한 광대한 영지를 직접 관리하며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재산을 관리하고, 농노를 감독했으며,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는 등 영주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검은 기사'의 아내로서의 삶

남편 페렌츠 나다스디는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헝가리의 검은 기사(Black Bey of Hungary)'라는 별명으로 불린 전쟁 영웅이었다. 

그의 군사적 명성은 가문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하지만 그의 잦은 원정은 부부 생활에 영향을 미쳤고, 결혼 후 첫 아이를 낳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부부는 슬하에 안나(Anna), 오르시카(Orsika), 카탈린(Katalin), 팔(Pál) 등 여러 자녀를 두었다.

남편의 부재 속에서 영지를 지키고 자녀를 양육하며 보낸 시간은 그녀를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만들었다. 


에르제베트의 가학성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스만 군대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포로의 가죽을 벗기거나, 몸에 꿀을 발라 벌레의 먹이가 되게 하는 잔혹한 처형법을 즐겼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페렌츠는 아내에게 자신의 '전리품' 같은 처벌 노하우를 공유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하녀의 잘못을 다스리는 데 서툰 아내를 위해 직접 시범을 보이거나, 더 고통스러운 고문 도구를 선물하기도 했다. 

에르제베트에게 폭력은 곧 질서였고, 남편이 보여준 잔혹함은 영지를 다스리는 강력한 통치 수단으로 학습되었다. 

그러나 1604년,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녀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차흐티체 성의 고독한 과부가 된 그녀는 이제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페렌츠 2세 나다스디


제3부: 체이테의 과부 - 권력, 의혹, 그리고 몰락

남편 페렌츠 나다스디의 죽음은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보호자이자 통제자였던 남편의 부재는 그녀를 독립적인 권력자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녀를 둘러싼 끔찍한 의혹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결국 몰락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개인적인 비극이 어떻게 헝가리 왕국 전체를 뒤흔든 공적인 사건으로 비화되었는지 추적하는 것은 이 서사의 핵심이다.


권력의 공백과 잔혹성의 심화

1604년 남편이 사망하자, 에르제베트는 나다스디 가문의 막대한 부와 재산을 상속받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그녀의 영지 내에서 그녀의 말은 곧 법이었다.

하녀들을 대상으로 한 잔혹 행위에 대한 소문은 이미 1602년부터 퍼지기 시작했으나, 남편의 사후 그 강도와 빈도는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결정적인 계기는 1609년에 일어났다. 

에르제베트는 하급 귀족의 딸들에게 궁정 예법을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성에 '귀족 여성 학당(gynaeceum)'을 열었다. 

그러나 이곳에 보내진 소녀들이 하나둘씩 의문사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고, 더 이상 농민이 아닌 귀족 가문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식 수사와 체포

귀족 가문의 항의가 빗발치자, 국왕 마티아스 2세는 헝가리의 최고위직인 궁정백(Palatine) 투르조 죄르지(György Thurzó)에게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투르조는 1610년 3월부터 7월까지 공식 수사를 진행하며 수백 명의 증인을 심문했고, 에르제베트의 범죄에 대한 끔찍한 증언들을 확보했다.


마침내 1610년 12월 31일, 새해 전야에 투르조는 에르제베트의 아들 및 사위들과 함께 차흐티체 성을 급습했다. 

성 안에서 그들이 마주한 광경은 참혹했다. 

복도에는 고문으로 사망한 소녀의 시신이 방치되어 있었고, 다른 소녀는 고문당한 채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에르제베트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다.

현장에서 투르조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다. 

에르제베트가 직접 기록했다는 '희생자 명단 일기장'이었다. 

거기엔 그녀가 죽인 소녀들의 이름과 날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논쟁: 이 일기장은 훗날 그녀의 죄를 확정 짓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으나, 일각에서는 투르조가 그녀를 확실히 파멸시키기 위해 조작한 문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하지만 당시 투르조가 마주한 광경은 어떤 변명으로도 덮을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생지옥이었다.


사법 처리와 '가문 협약'

사건의 처리는 매우 이례적이엇다. 

에르제베트의 범행을 도운 공범들, 즉 유모였던 일로나 조(Ilona Jo)와 하녀 도로티아 센테스(Dorottya Szentes) 등은 공식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 후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하지만 정작 주범인 에르제베트 본인은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자신의 성에 가택 연금되는 것으로 처벌이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투르조와 바토리 및 나다스디 가문 사이에 맺어진 '가문 협약'이 있었다. 

헝가리 최고 명문가의 일원이 공개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는 것은 가문 전체의 명예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협약은 단순한 가문 보위를 넘어, 귀족 계급 전체의 법적, 사회적 특권을 수호하려는 계급 보존 행위였다. 

공개 재판은 헝가리 귀족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특권 체계를 위협할 위험한 선례를 남길 수 있었기에, 투르조는 그녀를 법정에 세우는 대신 사회적으로 완전히 격리하는 방안을 가족들과 합의했던 것이다.


최후

에르제베트는 차흐티체 성의 자기 방에 유폐된 채 남은 생을 보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세상과 단절된 채 고독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1614년 8월, 그녀는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피의 백작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제4부: '피의 백작부인' 해부 - 역사와 전설의 분리

바토리 에르제베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과 후대에 창작된 끔찍한 신화를 명확히 구분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특히, 그녀가 강력하고 부유한 과부였기 때문에 정치적, 성별적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주장이 왜 초기 근대 헝가리의 역사적 맥락과 부합하지 않는지를 전문적인 시각으로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음모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

• '성별 음모론'에 대한 반박: "강하고 부유한 과부는 사회에 위협적이다"라는 인식은 서유럽에서는 존재했을지 모르나, 초기 근대 헝가리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성별 음모론'은 강력한 귀족 과부가 광대한 영지를 경영하는 것이 사회적 위협이 아닌 규범이었던 초기 근대 헝가리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설득력을 잃는다. 

그녀의 몰락은 그녀의 지위가 아닌, 귀족 사회의 선을 넘은 그녀의 행위 자체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정치적 음모론'에 대한 검토: 합스부르크 왕가가 그녀의 막대한 재산을 노리고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 역시 단순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공식 수사는 왕가가 아닌, 피해를 입은 다른 귀족 가문들의 항의로 시작되었다. 

또한 수사를 지휘한 투르조 궁정백은 그녀를 처벌하기보다는 오히려 가문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공개 재판을 피하는 '가문 협약'을 주도했다. 

이는 사건의 본질이 단순한 재산 강탈 음모가 아님을 시사한다.


사법 절차의 정당성 평가

에르제베트의 공범들이 재판 과정에서 고문을 통해 자백을 강요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현대적 관점에서 '조작 재판(show trial)'으로 규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해석일 수 있다.

당시 초기 근대 유럽의 사법 체계에서 고문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표준적인 수사 절차 중 하나로 여겨졌다. 

따라서 절차상의 잔혹함이 재판 결과의 조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설의 탄생과 확산

역사 속 에르제베트와 전설 속 '피의 백작부인' 사이에는 명백한 간극이 존재한다.

역사적 기록 (Historical Record)
후대의 전설 (Later Legend)
수십에서 수백 명의 하녀와 하급 귀족 여성을 고문하고 살해한 혐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처녀의 피로 목욕했다는 이야기 및 650명의 희생자 주장.
동기는 기록되지 않았으며, 가학성향으로 추정됨.
흡혈귀, 늑대인간, 흑마법사 등 초자연적 존재로 묘사됨.
가택 연금 상태에서 사망.
성에 벽으로 막힌 채 감금되어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


피로 목욕을 했다고 하는 헝가리 귀족 여성 바토리의 초상화


특히 '처녀의 피로 목욕했다'는 가장 유명한 전설은 그녀가 사망한 지 100년 이상이 지난 1760년대에 예수회 학자 라슬로(Laszlo)에 의해 처음 기록되었다. 

이는 반종교개혁 시기에 가톨릭 세력이 개신교도였던 에르제베트를 악마화하여 정치적,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우리가 흔히 '바토리' 하면 떠올리는 고문 도구, 철의 처녀(Iron Maiden). 

여인의 형상을 한 금속 통 내부에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어, 문을 닫으면 갇힌 이의 온몸을 찌르는 이 장치는 사실 에르제베트 시대의 물건이 아니다. 

이는 18세기 이후 고딕 호러 소설들이 탄생하며 덧씌워진 시각적 장치에 불과하다.

실제 에르제베트의 고문은 훨씬 원초적이고 직접적이었다. 

그녀는 도구를 쓰기보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바늘을 꽂거나, 추운 겨울날 하녀의 몸에 물을 뿌려 얼려 죽이는 방식(빙결 고문)을 택했다. 

'철의 처녀'라는 정교한 기계 장치는 그녀의 악명을 더 자극적으로 소비하고 싶었던 후대의 창작욕이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이다. 

역설적으로 이 가짜 유물은 그녀를 인간 살인마가 아닌, 전설 속의 괴물로 격상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처럼 역사적 인물 에르제베트와 전설 속 '피의 백작부인'을 분리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그녀의 유산이 현대에 던지는 진정한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


바토리 고문도구


에르제베트 바토리의 유산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서사는 단순한 가학적 살인마의 이야기를 넘어, 귀족의 절대 권력이 법과 인간성 위에 군림했던 한 시대의 어두운 초상화를 그려낸다. 

그녀는 개인의 악행을 넘어, 그러한 악행이 장기간 용인될 수 있었던 구조적 모순의 산물이었다.

역사적으로 그녀의 사건은 초기 근대 헝가리 사법 체계의 명백한 한계를 드러낸다. 

귀족이라는 신분은 법의 심판마저 피할 수 있는 방패가 되었고, 정의는 가문의 명예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좌절되었다. 

동시에 이는 대귀족 가문 간의 복잡한 권력 역학과, 남편 사후 독립적인 권력자가 된 여성 귀족이 가졌던 독특한 지위와 그에 따른 취약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다.


결론적으로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유산은 단순한 괴물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이 맞이한 파국적인 실패에 대한 기록이다. 

그녀의 사례는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견제받지 않는 절대적인 귀족 권력이 어떻게 법의 지배가 소멸된 공간을 창조하고, 개인의 타락이 산업적인 규모로 번성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통렬한 증거다. 

'피의 백작부인'이라는 전설은 실제보다 더 끔찍하고 자극적으로 부풀려졌지만, 그 과정에서 사건의 본질, 즉 권력의 남용과 사법 제도의 실패라는 핵심은 희미해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설의 안개를 걷어내고 역사적 진실의 조각들을 맞춰나가는 역사가의 역할이 왜 중요한지가 명확해진다.


이 글은 바토리 에르제베트(Erzsébet Báthory) 사건을 “전설”이 아니라 “당대 헝가리 사회의 구조” 안에서 읽어보려는 시도입니다.

다만 이 주제는 1) 당시 수사·재판 기록의 한계, 2) 고문과 강압적 진술이 흔했던 초기 근대 사법 관행, 3) 귀족 가문 간 이해관계, 4) 종교·정치 갈등 속에서의 선전과 과장, 5) 사건 이후 수십~수백 년 뒤에 덧씌워진 ‘피 목욕’ 같은 후대 전승이 겹쳐져, “사실로 확정 가능한 범위”와 “논쟁적 해석”이 강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서술된 혐의(피해 규모, ‘희생자 명단’ 문서의 성격, 체포 당시 현장 정황, 동기 등)는 자료에 따라 세부가 달라질 수 있으며, 일부는 학계·저술가들 사이에서 평가가 갈립니다.

또한 이 글은 폭력과 학대, 살해 의혹을 다루기 때문에 불편함을 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건의 흐름을 “서사적으로 정리”했지만, 이는 가공이나 선정성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맥락을 붙여 설명하려는 편집 방식입니다. 

정확한 결론이 필요한 경우, 1차 기록(수사 기록·재판 기록)과 신뢰할 만한 연구서를 함께 교차 확인해 읽는 것을 권합니다.


Erzsébet Báthory lived in a Hungary split after Mohács, where weak royal power let great nobles rule their estates. 

Married into the Nádasdy house, she managed vast lands while frontier war normalized violence. 

After her husband’s death (1604), reports of torture and killings—first among servants, later among minor nobles’ daughters—prompted an inquiry led by Palatine György Thurzó. 

In 1610 she was arrested and held in house confinement without a public trial, while her aides were tried and executed. 

Later myths added blood baths and Iron Maiden l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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