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페인: 상식으로 미국을, 인권으로 프랑스를 바꾼 혁명 사상가 (Thomas Paine)


토머스 페인: 펜으로 두 혁명을 이끈 세계 시민


시대를 뒤흔든 혁명 사상가

"페인의 펜이 없었다면 워싱턴의 칼은 쓸모없었을 것"

존 애덤스, 미국 2대 대통령


역사는 때로 한 개인의 손에 들린 펜이 수만 자루의 칼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극적인 순간을 연출한다.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은 바로 그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경구를 온몸으로 증명한 인물이다. 

영국 출신의 이방인이었음에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그의 삶은 역설 그 자체였다. 

그의 저서 『상식』은 영국과의 화해를 모색하던 아메리카 식민지의 여론을 단숨에 독립으로 이끌었고, 『인권』은 프랑스 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대서양 양안의 구체제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 영웅으로 남지 못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급진적인 사상, 특히 제도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그를 '추악한 무신론자'로 낙인찍히게 만들었고, 한때 그를 칭송했던 미국 사회는 그에게 냉대와 증오를 퍼부었다. 

'잊혀진 건국의 아버지'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 그는 사후 10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시대를 초월한 선각자로 복권될 수 있었다.

본 문서는 실패로 점철된 한 장인의 삶이 어떻게 두 혁명의 사상적 도화선으로 타오를 수 있었는지,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핵심 저작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페인의 펜 끝에서 터져 나온 '상식'의 힘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그 지적 여정을 따라가 본다.


토머스 페인


1. 실패의 연속에서 혁명의 중심으로: 페인의 초기 생애

토머스 페인의 삶은 37세의 나이로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딛기 전과 후로 극명하게 나뉜다. 

혁명가 페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담금질했던 영국에서의 실패와 좌절의 시간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가 기존 사회 제도의 모순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훗날 그의 사상을 날카롭게 벼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1.1. 퀘이커 신앙과 불운했던 영국 시절

1737년, 토머스 페인은 영국 잉글랜드 노퍽의 한 퀘이커 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차별받던 퀘이커 신앙은 모든 인간의 내적 신성을 인정하는 평등을 강조하고 사회 정의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퀘이커 교도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평등주의, 인류애, 평화주의는 훗날 그의 급진적 민주주의 사상의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가난 때문에 13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코르셋 제작 기술을 배웠지만 실패했다.

이후 세무 관리, 사략선 선원, 교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나 어느 것 하나 안정적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특히 세금징수원으로 일하며 동료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글을 썼다가 해고당한 경험은, 불의한 체제에 도전하는 개인이 어떻게 억압받는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불안정한 삶 속에서 그는 정치와 사회 제도의 모순을 직접 체험하며 기존 질서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키워나갔다.


1.2. 아메리카에서의 새로운 시작

불운했던 페인의 인생은 런던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을 만나면서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의 비범한 지력과 재능을 높이 평가한 프랭클린은 그에게 미국 정착을 권유하며 소개장을 써주었다.

1774년, 37세의 나이에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필라델피아로 이주한 페인은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아메리카는 인지세법과 보스턴 차 사건 등으로 식민지 모국 영국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페인은 '펜실베이니아 매거진'의 편집자로 일하며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감지했고, 그의 펜은 곧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준비를 마쳤다. 

영국에서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그에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양분이 되었으며, 아메리카 대륙은 그의 사상이 만개할 거대한 무대가 되어주었다.


2. 『상식』과 『위기』: 미국 독립을 촉발한 펜의 힘

1770년대 중반,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의 압제에 신음하면서도 완전한 독립에 대해서는 주저하고 있었다. 

대다수 주민들은 여전히 영국 국왕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었고, 영국과의 화해를 통한 자치권 확대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겼다. 

바로 이 교착 상태를 깨뜨리고 독립이라는 급진적 선택지로 여론의 물길을 돌린 것이 토머스 페인의 펜이었다.


2.1. 『상식』 (Common Sense): 독립 여론의 도화선

1776년 1월 10일, 페인이 익명으로 출간한 46쪽 분량의 소책자 『상식』은 아메리카 대륙에 핵폭탄급 충격을 던졌다. 

조지 워싱턴이나 벤저민 프랭클린조차 독립에 미온적이던 상황에서, 『상식』은 혁명의 당위성을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상식'의 문제로 제시했다.


• 핵심 주장: 페인은 군주제를 '신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 규정하며, "왕이 다스리는 국가는 악마가 우상숭배를 증진시키기 위해 내세운 발명품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세습 군주제의 불합리성을 파고들었고, "섬나라 영국이 거대한 미국 대륙을 지배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고 명쾌했다.

• 파급력: 『상식』의 영향력은 경이로웠다. 

당시 식민지 인구 약 300만 명 중 초판 발행 3개월 만에 12만 부, 첫해에만 50만 부가 팔려나갔다. 

글을 읽을 줄 아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읽었고, 문맹자들을 위해 선술집과 광장에서 낭독회가 열릴 정도였다. 

이 책은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있던 영국 왕정에 대한 마지막 미련과 독립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만들었다.

• 문체: 『상식』의 성공 비결은 엘리트 중심의 정치 담론을 대중의 언어로 번역한, 정치 담론의 전략적 민주화에 있다. 

페인은 어려운 철학 용어나 라틴어 인용을 철저히 배제했다. 

대신, 성경 구절과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에 직접 호소하는 쉽고 직설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이로써 독립이라는 거대한 담론은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식민지 주민의 '상식'이 되었다.


 '상식(Common Sense)' 표지 스캔본


2.2. 『위기』 (The Crisis):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사기를 북돋다

『상식』이 독립의 불씨를 지폈다면, 『위기』는 그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지킨 바람이었다. 

독립전쟁이 본격화되자 페인은 종군하며 1776년부터 1783년까지 논설 시리즈 『위기』를 간행했다.

미국 독립군이 연전연패하며 사기가 땅에 떨어졌던 1776년 12월,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으로 글을 시작했다.


"이것은 인간 영혼을 시험하는 시대다. ... 싸움이 격렬할수록 승리는 더욱 빛난다."


조지 워싱턴은 얼어붙은 델라웨어 강을 건너기 직전, 병사들 앞에서 이 구절을 낭독하며 꺼져가던 항전 의지를 되살렸다. 

페인의 글은 단순한 이론을 넘어, 실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강력한 심리적 무기였던 것이다. 

이 활동을 통해 페인은 단순한 저술가를 넘어 국제적인 혁명가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3. 대서양을 건넌 혁명: 프랑스 혁명에 대한 관여

미국 혁명의 성공 이후, 페인은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미국 혁명은 인류 보편의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었을 뿐이다. 

1787년 유럽으로 돌아간 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의 사상은 한 국가의 독립을 넘어 전 인류의 '인권' 문제로 확장되었다.


3.1. 『인권』 (Rights of Man): 보수주의에 맞선 혁명의 옹호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1790)을 통해 혁명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전통의 가치를 옹호했다. 

이에 페인은 『인권』(1부 1791, 2부 1792)을 출간하여 버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토마스 페인의 인권


페인은 이 책에서 혁명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세습 군주제와 귀족 특권이라는 압제에 맞서 인간의 자연권을 회복하려는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왕과 귀족들은 자연이 아닌 인위적 산물"이라 주장하며,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인권』은 영국 급진주의 운동의 핵심 문헌으로 떠오르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영국 정부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페인을 반란 선동죄로 기소했다. 

체포령을 피해 그는 프랑스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여섯마리의 원숭이에게 인권을 건네는 페인


3.2. 영광과 좌절: 프랑스 국민공회 의원 시절

프랑스에서 페인은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었고,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혁명의 광기는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확고한 공화주의자였지만, 국왕 루이 16세의 사형에는 사형 제도 자체에 대한 원칙적 반대와 인도주의적 이유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는 군주정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혁명이야말로 이성적 원칙과 법치에 근거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급진적인 자코뱅파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1793년 12월 끝내 투옥되고 만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아래에서 그는 단두대의 칼날을 바로 눈앞에 두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다. 

원칙에 기반한 혁명을 옹호했던 그가 파벌적 광기에 휩싸인 혁명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은 역사의 비극적인 아이러니였다. 

옥중에서 겪은 이 시련은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훗날 그의 가장 논쟁적인 저작인 『이성의 시대』를 집필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4. 사상의 진화: 정치 혁명을 넘어 사회경제적 개혁으로

토머스 페인의 위대함은 그가 단순히 군주제를 비판하고 공화정을 옹호한 정치 혁명가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의 사상은 문명의 발전이 낳은 극심한 빈곤과 불평등 문제로까지 나아갔다. 

그는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더라도 사회경제적 평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성은 실현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는 국가의 역할을 기존의 재산 보호에서 나아가, 모든 시민의 사회경제적 안녕을 보장하는 적극적 주체로 재정의하는 혁명적 전환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진화는 당대에는 이해받기 어려웠지만, 오늘날 현대 복지국가의 사상적 원류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4.1. 『이성의 시대』 (The Age of Reason): 이신론과 제도 종교 비판

페인은 프랑스 감옥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이성의 시대』(1794, 1796)를 집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종교관을 명확히 밝혔는데, 이는 그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그는 초월적 신의 존재는 인정했지만, 성경과 교회를 포함한 모든 제도적 종교는 "인간의 발명품"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이신론자(理神論者)였다. 

페인은 성경이 신의 계시라는 것을 부정했으며,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부도덕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내 마음이 곧 내 교회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책으로 인해 그는 '무신론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한때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던 경건한 미국인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4.2. 『토지 정의』 (Agrarian Justice): 시대를 앞선 복지 국가 구상

페인의 마지막 주요 저작인 『토지 정의』(1797)는 그의 사상적 정수를 보여준다. 

이 책은 1795년 프랑스 헌법이 재산 자격에 따라 선거권을 제한한 것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었다. 

페인은 이를 혁명의 평등주의적 약속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고, 정치적 권리의 전제 조건으로서 보편적 경제권을 철학적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그는 존 로크의 노동가치론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근본적으로 그를 넘어섰다. 

로크와 마찬가지로 노동을 통해 창출된 가치('인공적 소유')는 개인의 것이라 인정했지만, 그 토대가 되는 대지 자체('자연적 소유')는 인류의 공동 상속재산으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당대 재산권 이론과 결별하며 급진적 사유를 펼쳤다.


핵심 개념
설명
자연적 소유 vs 인공적 소유
토지는 창조주가 인류에게 준 공동재산(자연적 소유)이며, 인간의 노동을 통해 창출된 가치(개량)만이 개인의 소유(인공적 소유)가 될 수 있다고 구분했다.
사회적 부의 공유
토지 사유화는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자연적 상속권'을 박탈한 행위다. 따라서 모든 토지 소유자는 공동체에 '기초 지대(ground-rent)'를 빚지고 있으며, 이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 제안
10%의 상속세를 거두어 '국가 기금(National Fund)'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이 기금을 통해 모든 사람이 21세가 될 때 15파운드를 일시불로 지급하고, 50세 이상에게는 매년 10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하자는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다. 이는 현대 기본소득 또는 기초자산 개념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더 나아가 페인은 부의 축적 과정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었다. 

그는 "개인 재산의 축적은 많은 경우에 그것을 생산한 노동에 너무 적게 지불한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지적하며, 마르크스보다 수십 년 앞서 노동 착취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4.3. 『인권』 2부의 사회 개혁안

페인의 사회 개혁 구상은 이미 『인권』 2부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제시된 정책들은 현대 복지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토지 정의』는 바로 이러한 정책들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는, 사상적으로 성숙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 대중교육 지원

• 빈민 구제 및 실업 구제

• 노인 연금 제도

• 누진 소득세 도입

• 산모 수당 지급


이러한 제안들은 그가 단순한 혁명 선동가를 넘어, 사회 보장 제도의 청사진을 그린 선구적인 사상가였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정치 혁명보다 더 급진적이었던 그의 사회경제적 사상은 동시대인들의 이해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고, 이는 그가 말년에 고립되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5. 평가의 변천: 잊혀진 영웅에서 선각자로

한때 미국 독립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토머스 페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생애 후반과 사후에 극적으로 추락했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복권되었다. 

이러한 평가의 변천사는 시대정신과 개인의 사상이 어떻게 충돌하고, 또 후대에 이르러 재해석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5.1. 당대의 냉대: "추악한 작은 무신론자"

1802년, 페인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영웅에 대한 환대가 아닌, '무신론자'에게 가해지는 냉대와 증오였다. 

당시 미국은 '제2차 대각성 운동'이라 불리는 기독교 부흥 운동의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성의 시대』를 쓴 페인은 독립의 공헌자이기 이전에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추악한 작은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 

노예제에 대한 그의 일관된 반대 입장은 노예 소유주였던 조지 워싱턴과 같은 옛 동지들과의 결별로 이어지며 그의 고립을 더욱 심화시켰다. 

1809년, 그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노예 출신 2명을 포함해 단 6명만이 참석했을 뿐이다. 

당시 뉴욕 시티즌(New York Citizen)에 실린 부고 기사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약간의 선행과 많은 해악을 끼치면서 오래 살았다."


이 평가는 이후 100여 년간 그를 따라다녔고, 그는 '잊혀진 건국의 아버지'로 남게 되었다.


5.2. 후대의 복권: 시대를 초월한 세계 시민

페인이 시대를 너무 앞서갔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비극은, 역설적으로 후대에 그가 재평가받는 근거가 되었다. 

사후 100여 년이 흐른 뒤, 그가 생전에 주장했던 급진적인 사상들이 점차 현실화되면서 그의 선구안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한때 베개 밑에 『인권』을 두고 잠들며 "우주의 모든 도시에 금으로 만든 페인의 동상을 건립해야 한다"고 칭송했을 만큼 그의 국제적 영향력은 막대했다. 

물론 페인은 나폴레옹이 독재자의 길을 걷자 그를 "가장 완벽한 사기꾼"이라 비난하며 자신의 반권위주의 원칙을 끝까지 지켰다.


노예제 폐지, 대중교육, 노인 연금, 누진 소득세, 그리고 21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기본소득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장들은 시대가 흐를수록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았다. 

마침내 그는 '미국 혁명의 아버지'이자 '영국의 볼테르'로 복권되었고, 현대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사상적 조상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한 국가의 경계를 넘어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향했으며, 이는 그가 왜 시대를 초월한 '세계 시민'으로 불리는지를 증명한다.


루이스 화이트 하트 호텔에 있는 토머스 페인을 기리는 명판.


여전히 살아있는 '상식'의 힘

코르셋 장인에서 시작하여 두 대륙의 혁명을 이끈 토머스 페인의 삶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경구를 가장 극적으로 증명한 역사였다. 

그의 저서 『상식』은 흩어져 있던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독립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창조하는 도화선이 되었고, 『인권』과 『토지 정의』를 통해 그가 던진 사상적 유산은 미국과 프랑스 혁명을 넘어 현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 정의 담론의 초석이 되었다.


그의 가장 심원한 기여는, 혁명이 단지 정치적 자유의 획득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통찰에 있다. 

페인은 진정한 혁명이란 모든 시민의 존엄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경제적 정의의 토대를 마련할 때 비로소 완수된다고 역설했다. 

당대의 냉대와 오해 속에서 '잊혀진 건국의 아버지'로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사상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들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자유가 없는 곳에 내 나라가 있다"고 외치며 스스로를 '세계의 시민'으로 자처했던 페인. 

그의 삶과 사상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보편적 인권과 정의를 향한 끊임없는 투쟁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의 펜 끝에서 시작된 근본적인 질문, "과연 당신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가?"는 불의와 불평등이 만연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강력하고 유효한 울림을 던지고 있다.


이 글은 토머스 페인의 생애와 사상을 『상식』, 『인권』, 『이성의 시대』, 『토지 정의』 등 그의 주요 저작과 대표적 전기·연구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한 해설형 글입니다. 

사건의 연대·저작의 취지·당대 평가 등은 가능한 한 신뢰할 만한 연구 성과를 따르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장면과 심리, 인과 관계는 합리적인 수준에서 서술자 해석을 가미해 재구성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찬사 일화나 몇몇 명언은 전승·일화의 성격이 강한 부분이 있어, “그렇게 전해진다”는 정도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보다 엄밀한 학술적 검토를 위해서는 원문 자료와 전문 연구서를 함께 참고해 주세요.


This essay traces Thomas Paine’s journey from a failing English corset-maker and tax officer to the pen behind two Atlantic revolutions. 

In America, Common Sense turned hesitant colonists into convinced republicans, while The Crisis kept morale alive during the darkest hours of the War of Independence. 

In Europe, Rights of Man defended the French Revolution and attacked hereditary monarchy, making Paine both a hero and an outlaw. 

His later works, The Age of Reason and Agrarian Justice, pushed further, challenging organized religion and sketching proto–welfare state ideas such as pensions and basic endowments. 

 Branded a “godless” radical, he died poor and hated, yet later generations rediscovered him as a visionary citizen of the world whose “common sense” still questions power, privilege, and inequ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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