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도시의 비명: 난징 이야기
역사의 법정에 서다
1937년 겨울,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南京)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비극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불과 6주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한 도시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혹 행위가 펼쳐지는 거대한 무덤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희생자들을 한 줄로 눕히면 그 길이가 난징에서 항저우까지 322km에 달하고, 그들이 흘린 피는 1,200톤에 이를 것이라는 계산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사건을 기억하며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可以寬恕, 但不可以忘却)"는 경고를 되새깁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에게 역사의 진실을 마주할 용기와 평화의 소중함을 묻는 현재 진행형의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한 도시에서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전쟁의 광기가 난징을 집어삼키던 그 순간으로 함께 들어가 보려 합니다.
전쟁의 불씨가 어떻게 타올랐고, 그 불길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어떤 상처가 남았는지, 그 참혹했던 역사의 현장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생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제1부: 전쟁의 불길, 난징으로 향하다
1.1. 피로 물든 상하이, 복수심에 불타는 군인들
1937년 7월, 루거우차오(蘆溝橋 일본군의 군사도발) 사건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의 막이 올랐습니다.
일본군은 단 3개월 안에 중국 대륙을 점령하겠다며 호언장담했지만, 상하이에서 예상치 못한 중국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3개월간 이어진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서야 겨우 상하이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이 끔찍한 전투는 일본군 병사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와 함께 중국에 대한 맹렬한 복수심을 심었습니다.
"수많은 전우가 여기서 죽어 나갔다. 이 빚은 반드시 갚아줘야 해."
"저항하는 놈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겠다."
하지만 비극의 원인은 단순한 복수심만이 아니었습니다.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향하는 급속한 진격 과정에서 보급선이 끊기자, 굶주림에 시달린 병사들은 약탈을 일삼으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황폐해졌고 군기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여기에 "투항한 병사에게 줄 식량이 없다"는 이유로 포로를 잡지 말고 죽이라는 비공식적 방침과, 중국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잘못된 인종차별적 시각까지 더해지면서 이성을 잃은 군대는 통제 불능의 광기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결국 상하이를 점령한 이들은 군 수뇌부의 '전선 불확대' 방침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퇴각하는 중국군을 추격하며 당시 수도였던 난징으로 칼끝을 겨누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비극의 서막이었습니다.
1.2. 버려진 수도, 공포에 휩싸인 시민들
상하이가 함락되자 중국 국민정부 수뇌부는 난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11월 20일, 그들은 장기 항전을 위해 수도를 멀리 떨어진 충칭(重慶)으로 옮긴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날 이후, 도시의 거리에는 부유층과 정부 관리들의 자동차 행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온갖 짐을 싣고 서쪽으로, 더 안전한 곳으로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미처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50만에서 60만 명의 시민들은 도시에 남겨졌습니다.
그들의 귓가에는 난징 방위 사령관 탕성즈(唐生智) 장군의 목소리만 라디오를 통해 울려 퍼졌습니다.
"난징을 필사적으로 지켜 생사를 함께하겠다!"
그러나 그의 공허한 외침은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 소리에 묻혀만 갔습니다.
지도자들이 떠난 텅 빈 도시, 식량은 바닥나고 거리에는 절망만이 가득했습니다.
시민들은 복수심에 불타는 일본군이 성문 바로 앞까지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에 떨며, 하루하루를 공포 속에서 버텨내야 했습니다.
이처럼 전쟁의 불길이 난징으로 향하는 동안, 일본군 내부에서는 복수심과 광기가, 난징 내부에서는 혼란과 공포가 커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운명의 날이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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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민국 장군 탕성즈 |
제2부: 함락, 그리고 여섯 번의 지옥 같은 주
2.1. 1937년 12월 13일, 무너진 성문
12월 10일, 난징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항복을 권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중국군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즉시 일본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결사항전을 외치던 탕성즈 사령관은 불과 이틀 뒤인 12월 12일 밤, 부하들과 시민들을 버리고 홀로 양쯔강을 건너 도망쳤습니다.
지휘관을 잃은 중국군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12월 13일 난징은 완전히 함락되었습니다.
이때 총사령관 마쓰이 이와네가 병으로 자리를 비우자, 사령관 대리를 맡고 있던 황족,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 왕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습니다.
"난징에 살고 있는 잠재적인 적들을 모조리 죽여라."
이 명령은 도시 전체를 피로 물들일 조직적인 대학살의 끔찍한 신호탄이었습니다.
2.2. 인간 사냥: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은 학살
일본군은 난징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패잔병 소탕'을 명분으로 무차별적인 인간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기준은 단순했습니다.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살이 박힌 젊은 남자' 는 모두 중국군 패잔병으로 간주되어 즉결 처형당했습니다.
당시 인구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던 현실에서, 이는 사실상 모든 젊은 남성을 죽이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습니다.
학살의 방식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잔혹함의 끝을 보여주었습니다.
• 생매장: 일본군은 포로들에게 스스로 무덤을 파게 한 뒤, 산 채로 묻어버렸습니다.
• 소각: 사람들에게 휘발유를 뿌린 뒤 장작불로 태워 죽였습니다.
• 총검술 훈련: 살아있는 중국인 남자들을 총검술 훈련의 '연습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 양쯔강 유기: 단일 규모로 가장 큰 학살은 막부산(幕府山) 근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곳에서 약 57,000명의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한 뒤, 시신 처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대부분을 양쯔강에 던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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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 대학살에서 즉결 처형을 위해 모인 중국인들 |
당시 종군 특파원이었던 오마타 유키오는 자신이 목격한 장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 포로들의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 다음 날 이런 방식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포로들은 강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3. 100인 참수 경쟁과 광기의 기록
전쟁의 광기는 급기야 인간의 목숨을 오락거리로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일본군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는 일본도로 누가 먼저 100명의 목을 베는지 경쟁을 벌였습니다.
더 끔찍한 사실은, 이 '살인 경쟁'이 당시 일본의 신문에 자랑스러운 무용담처럼 대서특필되었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나카 군기치(田中軍吉) 라는 장교는 혼자서 300명의 목을 베었다고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참수 경쟁'은 당시 일본군 내부에 만연했던 인간성 말살과 생명 경시 풍조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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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서 보도 된 100인 참수경쟁 기사 |
2.4. 여성들에게 가해진 참혹한 폭력
난징의 여성들에게 6주는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일본군은 어린 소녀부터 70대 노인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여성을 겁탈했습니다.
강간 피해 여성은 최소 2만 명에서 최대 8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군은 군법상 강간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거인멸을 위해 악용했습니다.
그들은 여성을 윤간한 뒤,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 피해자를 그 자리에서 잔혹하게 살해하는 '선간후살(先姦後殺)' 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 리슈잉(李秀英) 임산부의 증언: 당시 임신 7개월이었던 리슈잉은 일본군에게 배를 찔려 아이를 잃고, 온몸에 37곳의 자상을 입었습니다.
• 주씨 일가의 비극: 일본군은 60대 할아버지에게 며느리를, 17세 아들에게 어머니를 강간하라고 강요하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끔찍한 사실은 외부 세계에만 알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1938년 1월, 당시 일본 외무대신이었던 히로타 고키(広田弘毅)는 본국에 보낸 비밀 전문에서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최소 30만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일본 정부 역시 난징에서 벌어지는 참상의 실체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6주간 난징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혹 행위가 벌어지는 생지옥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키려 했던 작은 불빛이 있었습니다.
제3부: 어둠 속의 등불, 그리고 끝나지 않은 재판
3.1. 난징 안전지대와 의인들
지옥으로 변한 난징에도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독일 지멘스사의 직원이자 나치 당원이었던 욘 라베(John Rabe) 를 중심으로 한 외국인들은 일본군의 만행으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난징 안전지대(Nanjing Safety Zone)' 를 설치했습니다.
욘 라베는 자신이 나치 당원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이용해 일본군의 접근을 막으며 약 2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의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그는 참상을 보다 못해 아돌프 히틀러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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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에 있는 욘 라베의 집 |
욘 라베 외에도 많은 외국인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중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 윌헬미나 보트린(Wilhelmina Vautrin): 진링 여자대학에서 수많은 여성을 보호했지만, 끔찍한 참상을 목격한 정신적 충격으로 미국으로 돌아간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도시의 유일한 외과의사로서 밤낮으로 부상자들을 치료했지만, 그 역시 평생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과 노력은 전쟁의 광기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주는 어둠 속 등불과도 같았습니다.
3.2. 역사의 심판: 전범 재판
전쟁이 끝난 후, 난징의 비극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두 개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중국 국민정부가 주관한 '난징 군사법정' 과 연합국이 주관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 재판)' 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재판을 통해 수많은 만행을 저지른 주요 책임자들이 역사의 심판대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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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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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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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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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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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이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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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지나방면군 사령관 (총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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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국제군사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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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교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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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 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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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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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군사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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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총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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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카이 도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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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 참수 경쟁' 가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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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군사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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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총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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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 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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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 참수 경쟁' 가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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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군사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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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총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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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군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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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인 참수' 가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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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군사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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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총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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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타 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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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외무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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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국제군사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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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교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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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재판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학살을 현장에서 직접 명령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자는 일본 왕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소조차 되지 않고 처벌을 완전히 피했습니다.
역사의 심판은 모든 책임자에게 공정하게 내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3.3. 끝나지 않은 논쟁: 부정과 왜곡의 목소리
오늘날 일본 사회는 난징대학살을 세 가지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1. 대학살파 (大虐殺派): 대규모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2. 중간파 (中間派): 비전투원의 희생은 인정하지만, 이는 계획적인 대학살이 아닌 전쟁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 피해이며, 희생자 수도 수만 명 수준으로 과장되었다고 주장합니다.
3. 부정파 (否定派 / 환상파(まぼろし派)): 난징대학살 자체가 중국 측이 조작한 '환상'이며, 사진과 증거는 모두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극우 세력의 입장입니다.
부정파는 아파(APA) 호텔에 학살 부정 서적을 비치하거나, 교과서에서 관련 내용을 축소·왜곡하는 등 끊임없이 역사를 지우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왜곡에 맞서 진실을 알리려 했던 인물도 있습니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 아이리스 장(Iris Chang) 은 저서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을 통해 서구 사회에 난징의 비극을 알리고 일본 우익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연구 과정에서 겪은 참혹한 자료들과 일본 우익의 끊임없는 협박으로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 결국 2004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이처럼 난징의 비극은 재판으로도 끝나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 역사를 기억하려는 이들과 지우려는 이들 사이의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중국 난징에는 '난징대학살희생동포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기념관 입구와 곳곳에는 희생자 30만 명을 상징하는 '300000' 이라는 숫자가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한 전시 공간에서는 12초마다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대학살 기간 동안 12초마다 한 명씩 무고한 생명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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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생자 30만 명, 난징 대학살 추모관 |
기념관 벽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의 스승으로 삼자 (前事不忘, 后事之師)"
난징의 비극은 단순히 한 도시의 아픔을 넘어, 인류가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될 전쟁 범죄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가 이 끔찍한 역사를 배우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화의 소중함을 지켜내기 위한 우리 모두의 책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난징의 비명은 우리에게 역사적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가 바로 미래로 나아가는 첫걸음임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1937년 난징대학살을 중심으로 중일전쟁기의 사건을 시간 순으로 재구성한 역사 해설입니다.
전투 경과·점령 과정·전범 재판·기념관 조성 등은 가능한 한 알려진 연구와 공개 사료를 바탕으로 삼았고, 일부 숫자(희생자 규모, 현장별 사망자 수)와 구체적 발언, 장면 묘사는 당시 증언·재판 기록·후대 연구를 종합한 추정과 (전승)/(논쟁)에 가까운 요소도 포함합니다.
따라서 개별 인용과 수치는 “이렇게 전해진다/추정된다”는 수준으로 읽어 주시고, 보다 엄밀한 검증이 필요할 경우 원문 사료와 전문 연구서를 함께 참고해 주시길 권합니다.
극단적인 폭력과 학살을 다루지만, 글의 목적은 특정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전쟁 범죄의 실상을 기억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는 역사적 교훈을 공유하는 데 있습니다.
This essay traces how the 1937 Nanjing Massacre unfolded from the Shanghai battle to the fall of China’s capital.
It shows how revenge, racism, and broken discipline turned the Imperial Japanese Army into a force of mass killing, executing prisoners and civilians, and committing widespread rape and destruction over six weeks.
Amid the horror, foreigners in the Nanjing Safety Zone, like John Rabe and Wilhelmina Vautrin, saved tens of thousands.
Postwar tribunals punished some commanders, but key figures escaped justice, and denial still persists in parts of Japan.
The article closes with the Nanjing Memorial’s message that remembering this atrocity is essential to defending human dignity and preventing future war cr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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