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을 제치고 즉위한 파사 이사금, 월성과 영토 확장의 시작 (King Pasa of Silla)


신라의 기틀을 다진 왕, 파사 이사금 이야기


1. 형을 제치고 왕이 된 동생, 파사 이사금

1.1. 신라 5대왕, 파사 이사금 소개

신라가 아직 작은 나라였던 시절, 주변의 강한 나라들 틈에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왕이 있었습니다.

바로 신라의 제5대 왕, 파사 이사금(婆娑 尼師今)입니다. 

그는 3대 유리왕의 둘째 아들로, 서기 80년부터 112년까지 약 32년간 나라를 다스리며 혼란했던 신라 초기의 기틀을 단단히 다진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1.2. 왕위 계승의 숨겨진 이야기

파사 이사금의 즉위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지만, 일각에서는 유리왕의 동생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어 그의 혈통에는 조금 더 복잡한 사연이 숨어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당시 왕위는 유리왕의 맏아들인 '일성(逸聖)'에게 돌아가는 것이 순리였습니다. 

하지만 4대 탈해 이사금이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뜻밖의 결정을 내립니다.

"일성이 비록 맏아들이기는 하지만, 위엄과 현명함이 파사에 미치지 못하다."

신하들은 맏아들 대신 동생인 파사를 왕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형과 동생의 운명이 바뀐 것을 넘어, 당시 신라가 얼마나 현명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간절히 원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주변 나라들의 위협 속에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이끌어갈 인물로 파사가 선택된 것이죠.

이렇게 신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왕위에 오른 파사왕. 

그가 왕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2.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의 미래를 준비하다

2.1. 어진 왕의 첫걸음

파사 이사금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따뜻한 성품과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서기 81년, 그는 세 가지 중요한 일을 단행합니다.

1. 시조묘 참배: 가장 먼저 나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묘에 직접 찾아가 제사를 지내며 왕으로서의 정통성과 책무를 다졌습니다.

2. 백성 구휼: 전국의 여러 고을을 직접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피고, 나라의 창고를 활짝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했습니다.

3. 대사면 단행: 사형수와 같은 중죄인을 제외한 모든 죄수를 풀어주어 백성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파사 이사금이 왕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백성들의 삶을 먼저 돌보는 어진 군주였음을 보여줍니다.


2.2.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명령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파사 이사금은 이듬해인 서기 82년, 나라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명령을 내립니다.


“지금 창고가 비고 군기가 둔하여 쓰지 못하게 됐는데 만약 큰물이 지거나 가물이 들고 변방으로 적들이 침입하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군사를 단련하고 전구를 마련하여 군비를 정비해 불의에 대비하도록 하라.”


이 말은 단순한 지시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식량 문제(농사와 양잠)를 해결해 나라의 경제를 튼튼히 하고, 동시에 국방 문제(군사 훈련과 무기 정비)를 해결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려는 파사 이사금의 지혜로운 전략이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파사왕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향한 주변 나라들의 위협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칼을 들어야 할 때를 맞이합니다.


3. 위기의 신라를 지키다: 국방 강화와 영토 확장

3.1. 최초의 방어선, 성을 쌓다

파사 이사금 시대의 신라는 서쪽으로는 백제, 남쪽으로는 가야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크고 작은 침입이 잦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수도인 서라벌(경주) 안에서만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서기 87년, 그는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 지역을 벗어난 곳에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이라는 두 개의 성을 쌓도록 명령합니다. 

이는 단순히 적을 막는 것을 넘어, 신라가 국경 지역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3.2. 가야와의 숙명적인 첫 대결

새로 쌓은 성들은 곧바로 시험대에 오릅니다. 

특히 가야와의 전투는 파사 이사금의 군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기 94년, 가야군이 마두성을 포위하며 신라를 위협하자 파사 이사금은 즉시 아찬 '길원(吉元)'에게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출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길원이 이끄는 기병대는 용맹하게 싸워 가야군을 물리치고 첫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가야의 복수는 2년 뒤인 서기 96년에 찾아왔습니다. 

가야가 다시 남쪽 국경을 침략하자 파사 이사금은 가소성(기록에선 ‘가성 加城’으로도 적힘)의 성주 '장세(長世)'를 보내 막게 했지만, 안타깝게도 장세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신하의 죽음에 대한 비통한 소식이 서라벌에 전해지자, 파사 이사금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이번에는 신하 뒤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5천 명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습니다. 

왕이 직접 이끄는 신라군의 위세에 가야군은 크게 무너졌고, 신라는 수많은 포로를 잡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두 차례의 전투는 파사 이사금이 위기 상황에서 신하 뒤에 숨는 왕이 아니라,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서는 용맹한 군주였음을 똑똑히 보여주었습니다.

무력 충돌 이후 가야가 사죄 사절을 보내며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곧이어 신라와 가야 사이에는 더 큰 외교적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3.3. 왕궁의 무대, 월성(반월성)을 세우다

전쟁은 국경에서 벌어지지만, 왕의 권위는 수도에서 굳어집니다.

파사 이사금은 계속되는 외침과 국경 분쟁 속에서 “이 나라가 어디서 명령을 내리고, 어디서 결정을 끝낼 것인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봤던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는 파사 이사금 22년(101) 2월, 성을 쌓아 이름을 월성(月城)이라 하고, 그해 7월 왕이 그곳으로 옮겨 살았다고 전합니다. 


이 대목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성 하나를 지었다”가 아니라, 왕궁의 중심을 ‘성 안’으로 확정했다는 선언처럼 읽히기 때문이에요.

월성은 평면이 반달처럼 휘어 있어 반월성이라고도 불렸고, 왕이 머무는 성이라는 뜻으로 재성(在城)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위치는 지금의 경주(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일대입니다. 


즉, 월성은 “전쟁이 나면 숨어드는 피난처”가 아니라, 정치·의례·외교가 돌아가는 상징의 무대였습니다.

다만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기록은 101년에 월성 축조를 말하지만, 고고학 발굴 성과를 보면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본격 축조나 해자(방어용 도랑) 정비가 더 뒤 시기(특히 5세기 전후)와 관련된 정황도 제시됩니다. 

이 말은 “《삼국사기》가 틀렸다”라기보다, 101년의 월성은 ‘최초 조성(초기 단계)’이었고 이후 여러 왕대에 걸쳐 계속 보강되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뜻입니다. (논쟁)


월성 복원 상상도

그리고 바로 다음 해(102년), 파사 이사금은 가야의 수로왕을 불러 ‘판결’을 맡깁니다.

이때의 연회, 예우, 모욕, 그리고 그 뒤의 파국은… 사실상 월성이라는 ‘왕도 무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4. 외교와 전쟁 사이: 금관국 수로왕과의 운명적 만남

4.1. 어려운 재판과 뜻밖의 요청

서기 102년, 신라에 속한 '음즙벌국'(현 경주 안강)과 '실직곡국'(현 삼척) 사이에 땅을 둘러싼 큰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두 나라는 파사 이사금에게 찾아와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파사 이사금은 이 어려운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 않고,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그는 "금관국의 수로왕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고 말하며, 가야의 수로왕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결정은 단순히 어려운 문제를 떠넘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금관국은 강력한 나라로 성장하고 있었고, 건국자이자 고령의 왕이었던 수로왕의 명성은 주변 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파사 이사금은 수로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실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죠. 

또한, 선대왕인 탈해 이사금과 수로왕 사이의 오랜 악연을 풀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현명한 외교적 제스처였을 수도 있습니다.


4.2. 연회장의 모욕과 수로왕의 분노

파사 이사금의 요청을 받은 수로왕은 신라를 방문해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는 현명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준 수로왕을 위해 파사 이사금은 신라 6부를 동원해 성대한 연회를 열어 감사를 표했습니다. 

5부에서는 모두 최고 관직인 '이찬'이 직접 나와 수로왕을 융숭하게 대접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유독 '한기부'에서만 낮은 벼슬의 관리를 내보내 손님으로 온 이웃 나라 왕에게 큰 모욕을 준 것입니다.

이에 수로왕은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종 '탐하리'에게 서릿발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가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여라!"


4.3. 암살범을 둘러싼 또 다른 갈등

수로왕의 명령을 받은 탐하리는 보제를 죽이고, '음즙벌국'으로 도망쳐 그곳의 우두머리인 '타추간'의 집에 숨었습니다. 

파사 이사금은 암살범인 탐하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타추간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수로왕과의 문제를 넘어, 신라의 왕명을 정면으로 거역한 중대한 반역 사건이었습니다. 

파사 이사금은 더 이상 이 상황을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4.4. 왕의 분노, 영토를 넓히다

타추간의 거절에 분노한 파사 이사금은 즉시 군사를 일으켜 음즙벌국을 정벌했습니다. 

왕이 직접 나선 강력한 공격에 음즙벌국은 결국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실직국'과 '압독국'(현 경산)이 신라의 위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싸워보지도 않은 채 스스로 항복해 온 것입니다. 

결국, 이 하나의 외교적 위기가 신라가 세 개의 나라를 복속시키는 엄청난 영토 확장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파사 이사금의 단호한 결단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은 파사 이사금은 신라의 영토를 더욱 넓히기 위한 위대한 정복 활동을 시작합니다.


5. 신라의 영광을 넓히다: 파사 이사금의 위대한 정복 활동

음즙벌국 등을 복속시킨 파사 이사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기 106년에는 마두성주에게 가야를 공격하라는 명을 내리는 등 끊임없이 국경을 안정시키려 노력했고, 마침내 서기 108년에는 군사를 일으켜 경상도 내륙 깊숙이 진출하여 여러 나라를 정벌하고 신라의 영토로 병합했습니다.


• 비지국 (比只國, 현 창녕 추정)

• 다벌국 (多伐國, 현 대구 추정)

• 초팔국 (草八國, 현 초계 추정)


이러한 정복 활동을 통해 신라의 영토는 경주 분지를 넘어 현재의 경상도 대부분 지역으로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신라가 경주 분지라는 지리적 한계를 넘어 여러 부족 국가를 직접 지배하는 중앙집권적 영역 국가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기에, 많은 역사학자들이 파사 이사금 시대를 진정한 '고대 국가'의 출발점으로 평가합니다.


사릉(蛇陵) 전경


6. 파사 이사금이 남긴 유산

파사 이사금의 32년 통치는 신라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세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업적
내용과 의의
천년 왕궁 월성(月城) 축조
101년에 반달 모양의 '월성'을 쌓고 왕궁을 옮겼습니다. 이는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천년 가까이 왕궁으로 사용되며, 신라의 정치적 안정과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최초의 영토 확장 군주
잦은 외침을 막아냈을 뿐 아니라, 음즙벌국, 실직국, 압독국 등 여러 나라를 복속시켜 신라의 영토를 경주 너머로 크게 넓힌 최초의 왕입니다.
김씨 세력과의 협력
왕비로 김씨 가문의 딸(사성부인)을 맞이했습니다. 이는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김씨 세력과 손을 잡아 왕권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다스리는 현명한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경주 월성 주변 항공 사진


7. 진정한 신라의 기틀을 세운 왕

파사 이사금은 신라 초기의 혼란을 잠재우고 나라의 기틀을 세운 위대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영토를 넓힌 정복 군주를 넘어,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나라 안을 살피고(내치), 튼튼한 국방력으로 나라 밖의 위협을 막아냈습니다. 

또한, 외교적 위기를 영토 확장의 기회로 만드는 지혜와 결단력까지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신라는 작은 부족 국가에서 벗어나 진정한 고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파사 이사금은 신라 천년 역사의 주춧돌을 놓은 왕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이 글은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내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대목은 (논쟁)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덧붙였습니다.


Pasa Isageum (r. 80–112 CE), Silla’s 5th king, was chosen over his elder brother Iseong as the stronger ruler. 

He honored the founder’s shrine, toured districts, opened granaries, and granted an amnesty. 

He promoted farming and sericulture and ordered weapons readied for disasters and border alarms. 

He built frontier fortresses, beat back Gaya raids, and at times led troops himself. 

A land dispute brought Geumgwan Gaya’s King Suro to Silla; a banquet insult led to an assassination and Pasa’s punitive campaign, after which Eumjipbeol and other polities submitted. 

He later established Wolseong as a royal center and continued expansions that strengthened early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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