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왕좌의 수수께끼: 백제 4대 개루왕 이야기
한평생인 3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지만, 그 모든 기록이 단 일곱 줄에 불과한 왕이 있습니다.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바로 백제의 네 번째 왕, 개루왕(蓋婁王)입니다.
그는 역사책 속 가장 미스터리한 군주 중 한 명으로 남아있습니다.
단순히 기록이 부족한 왕이 아닙니다.
그의 텅 빈 족적은 백제 건국 초기의 숨겨진 권력 다툼과 역사의 거대한 공백을 파헤칠 결정적인 열쇠일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의 이면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함께 풀어가는 흥미로운 역사 탐험이 될 것입니다.
그의 텅 빈 시간 속으로 함께 떠나보시죠.
1. 역사책에 기록된 왕, 개루왕
이 장에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서 《삼국사기》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개루왕의 모습을 이야기로 풀어보겠습니다.
왕의 등극과 성품
개루왕은 제3대 기루왕의 아들로, 128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제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삼국사기》는 그의 성품을 "공손하고 온순하며 행실이 단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묘사를 통해 우리는 그가 격동의 시대보다는 평화로운 시기에 더 어울리는, 조용한 성품의 군주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록에 남은 몇 안 되는 업적
39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그의 구체적인 행적으로 기록된 사건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북한산성 축조
재위 5년인 132년, 개루왕은 북한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생깁니다.
학계에서는 이 성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서울의 북한산성이 아니라,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아차산성 유적에서 '북한산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첫 업적부터 작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셈입니다.
• 길선 망명 사건
재위 후반기인 165년(또는 155년으로도 전함), 신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찬 길선'이라는 인물이 백제로 도망쳐 왔습니다. (논쟁)
이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외교적 갈등을 불러일으킨 큰 사건이었습니다.
개루왕의 결정에 분노한 신라의 아달라 이사금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군량이 부족해 스스로 물러갔다고 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역적을 비호하여 이웃 나라와의 화를 불렀으니 현명하지 못하다"고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훗날 근초고왕 시대에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다시 돌아온 '사기'라는 인물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결코 틀린 말이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3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의 행적은 이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역사가들은 이 침묵의 시간 속에서 더 큰 미스터리를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2. 첫 번째 미스터리: 사라진 34년의 시간
개루왕의 기록이 재위 기간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는 점은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을 낳습니다.
긴 재위, 짧은 기록
개루왕의 재위 기간과 기록의 양을 비교하면 그 불균형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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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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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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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및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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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재위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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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 (128년 ~ 1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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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청년에서 노년이 될 때까지의 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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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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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7줄 (즉위, 사냥, 축성, 천문현상 2건, 길선 망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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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적어서 이상하다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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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 통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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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5년(북한산성 축조) 이후 33년간 공백 (길선 망명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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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긴 시간 동안 왕은 대체 무엇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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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5년 이후, 마지막 기록인 38년까지 무려 33년 동안 개루왕의 행적은 단 한 줄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기나긴 공백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의도적으로 늘린 역사?: 기년 인상설
이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는 백제 초기 왕들의 비정상적으로 긴 재위 기간에 있습니다.
• 1대 온조왕: 46년
• 2대 다루왕: 49년
• 3대 기루왕: 51년
• 4대 개루왕: 39년
• 5대 초고왕: 48년
온조왕부터 초고왕까지 단 5명의 왕이 무려 233년을 통치했다는 기록입니다.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이 때문에 학자들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백제의 역사를 더 오래되고 권위 있게 보이기 위해 초기 왕들의 재위 기간을 의도적으로 늘렸다는 '기년 인상설'을 제기합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개루왕의 텅 빈 기록은 늘어난 시간만큼 채울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자연스러운 부작용일 수 있습니다.
기록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처음부터 채울 역사가 없었던 것이라면? 이 섬뜩한 질문은 개루왕의 가족 관계를 들여다볼 때, 단순한 의심을 넘어 확신에 가까워집니다.
3. 두 번째 미스터리: 뒤엉킨 족보의 비밀
공식 기록상 개루왕의 아들로 알려진 초고왕과 고이왕의 관계는 백제 초기 역사의 가장 큰 논쟁거리입니다.
불가능한 아버지와 아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개루왕의 첫째 아들은 5대 초고왕, 둘째 아들은 8대 고이왕입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시간적으로 도저히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젊은 학자: "선생님,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는 고이왕을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는데, 개루왕이 승하한 지 무려 69년 뒤에 즉위했습니다. 게다가 그 뒤로 52년이나 더 재위했고요. 아들이 아버지보다 100년도 더 뒤에 활동한 셈인데,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노 학자: "바로 그 점이 핵심일세.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고이왕은 70세가 넘어 왕위에 올라 120세 넘게 살았다는 말이 되네. 이것이 바로 개루왕이라는 존재가 후대에 두 왕가를 잇기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일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지."
이처럼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족보는 개루왕의 존재에 대한 더 깊은 의문을 낳았습니다.
왕의 혈통, 두 개의 가문?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학계에서는 여러 가설을 제시합니다.
1. 가공의 왕 가설: 초고왕계와 고이왕계는 원래 서로 다른 혈통의 왕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후대에 역사를 정리하면서, 이 두 개의 다른 왕가를 하나의 족보로 자연스럽게 잇기 위해 '개루왕'이라는 가상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넣었다는 설입니다.
2. 비류왕계 가설: 개루왕(蓋婁王)의 이름이 아버지 기루왕(己婁王), 할아버지 다루왕(多婁王)과 똑같이 '루(婁)' 자로 끝난다는 점에 주목하는 설입니다.
학자들은 이 '루'자를 백제 건국 시조 비류(沸流)의 후손인 '해씨(解氏)' 왕가를 상징하는 표식으로 봅니다.
이는 공식적인 시조 온조(溫祚)가 세운 '부여씨(扶餘氏)' 왕가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왕실 세력이죠.
이 가설은 백제 초기 왕위가 단일 혈통으로 안정적으로 계승된 것이 아니라, 온조계 부여씨와 비류계 해씨 두 세력 간의 치열한 경쟁과 교체의 장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즉, 개루왕의 시대는 비류계 해씨 가문이 잠시 권력을 잡았던 시기이며, 그의 기록이 지워진 것은 5대 초고왕이 즉위하며 왕권이 다시 온조계 부여씨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 왕위 계승 방식의 차이: 초기 국가에서는 아들에게만 왕위를 물려주는 장자 상속제가 확립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형제나 사촌, 조카 등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다른 방식의 계승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설입니다.
결국 개루왕의 족보는 그가 한 명의 왕이 아니라, 여러 세력이 충돌하던 백제 초기의 복잡한 역사를 상징하는 '이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미스터리한 왕의 이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설화 속에서, 전혀 다른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 세 번째 미스터리: 설화 속 폭군, 또 다른 개루왕?
《삼국사기》 열전에는 <도미 부부 설화>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화에 등장하는 왕의 이름이 바로 '개루왕'입니다.
설화의 내용
백성의 아내를 탐한 폭군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성 도미에게는 모두가 칭찬하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개루왕은 도미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남편 도미의 두 눈을 멀게 하고 강물에 띄워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지혜를 발휘해 왕에게서 탈출했고, 기적적으로 남편을 다시 만나 함께 고구려로 망명하여 여생을 보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설화 속 폭군의 모습은 "공손하고 온순했다"는 역사 속 개루왕의 모습과 완전히 다릅니다.
과연 같은 인물일까요?
과연 그 '개루왕'이 맞을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설화 속 왕이 4대 개루왕이 아니라, 21대 '개로왕(蓋鹵王)'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성품의 불일치: 《삼국사기》는 4대 개루왕을 '온순하고 행실이 바른' 인물로 묘사합니다.
이는 설화 속 폭군의 모습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 지리적 문제: 설화에서 부부는 백제에서 고구려로 탈출합니다.
4대 개루왕 시절에는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낙랑군이 있어 직접적인 이동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21대 개로왕 시대에는 두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 이름의 유사성: 21대 개로왕은 '근개루왕(近蓋婁王)'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근(近)'자가 빠지고, 발음이 비슷한 '개루왕'의 이야기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처럼 설화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더라도 당시 백성들이 왕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엿볼 수 있는 창이 되어줍니다.
이제 모든 조각들을 모아 진짜 개루왕은 어떤 인물이었을지 상상해 볼 시간입니다.
5. 역사의 빈칸이 우리에게 묻는 것
우리는 지금까지 개루왕을 둘러싼 세 가지 미스터리를 살펴보았습니다.
1. 텅 빈 기록: 39년의 재위 기간 중 33년이 공백인 이유
2. 뒤엉킨 족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부자 관계의 비밀
3. 설화 속 다른 모습: 폭군으로 그려진 또 다른 개루왕
그렇다면 개루왕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요?
역사에는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기록이 소실된 비운의 왕이었을까?
온조계와 다른 혈통(비류계) 출신의 왕이었을까?
아니면 후대의 역사가들이 만들어 낸, 족보를 잇기 위한 가상의 왕이었을까?
개루왕의 텅 빈 기록은 우리에게 '역사는 기록된 사실만큼이나 기록되지 않은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의 희미한 존재 자체가, 백제 초기 역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역동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삼국사기》 등 공개된 사료를 바탕으로, 백제 4대 개루왕(蓋婁王)을 둘러싼 기록의 공백과 해석을 독자에게 이해하기 쉽게 재구성한 글입니다.
사료에 명확히 적힌 내용은 사실대로 따르되, 기록이 비어 있는 구간은 맥락 설명을 위해 서술을 보강했습니다.
불확실한 전승은 (전승), 학계 견해가 갈리는 대목은 (논쟁), 정황에 근거한 합리적 가정은 (추정)으로 구분해 읽어주세요.
연도·지명·인물 관계는 사료 간에 어긋나는 경우가 있어, 관심 있는 독자라면 원문 대조를 권합니다.
Baekje’s 4th king, Gaeiru (r. 128–166), ruled for 39 years yet appears in only a handful of lines in the Samguk Sagi.
Recorded acts include building “Bukhansanseong” (often argued to be near Achasan) and sheltering the Silla rebel Gilseon, triggering a brief clash.
After that, decades go silent. Scholars suspect inflated early chronologies, or that “Gaeiru” was later used to stitch rival royal lines (Chogo and Goi) into one pedigree.
A folktale about Domi’s wife names a tyrannical “Gaeiru,” likely a confusion with the later Gaero/Geiru.
The empty record becomes the riddle: history is shaped as much by gaps and debates as by surviving facts. It leaves clue: power reshapes memory and sil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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