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천왕의 개혁: 위기 속에서 왕권을 세우고 진대법을 만든 왕 (King Gogukcheon of Goguryeo)


시대를 초월한 리더십: 고구려 고국천왕의 생애


1. 혼란의 시대, 개혁 군주의 등장

2세기 말, 고구려는 대내외적으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내부적으로는 5부족 연합체의 전통이 여전히 강력하여 왕권이 온전히 확립되지 못했고, 외부적으로는 중국 대륙이 후한(後漢)의 쇠락과 황건적의 난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등장한 고구려 제9대 군주 고국천왕은 단순한 왕위 계승자를 넘어, 국가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했던 '개혁 군주'였다. 

그의 통치는 고구려가 직면한 위기를 돌파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이 논평은 고국천왕의 생애와 업적을 통해 시대를 초월하는 리더십의 본질을 탐색하고, 그의 선택과 결단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을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는 단순한 고대 군주가 아니었다. 

국가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었던 그의 통치 철학은 위기관리, 인재 등용, 민생 안정이라는 세 가지 핵심 축으로 발현되었다. 

이는 당대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구려의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제부터 그의 드라마틱한 즉위 과정과 남다른 인물상을 시작으로, 그가 어떻게 혼란의 시대를 돌파하고 고구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는지 본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격동의 시대, 왕재(王才)의 등극

고국천왕의 즉위는 순리에 따른 평탄한 승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와 한 개인의 비범한 역량이 결합된 필연적인 선택에 가까웠다. 

그의 등극 과정과 인물상에 대한 기록은 그가 왜 개혁 군주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암시한다.

고국천왕의 이름은 남무(男武) 또는 이이모(伊夷謨)로, 신대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이미 부왕 재위 시기인 서기 176년에 군신들의 청으로 왕태자에 책봉되어 일찌감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했다. 

서기 179년 신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맏아들 발기(拔奇)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 사람들(國人)은 그가 "어질지 못하다(不肖)"는 이유로 이미 왕태자였던 고국천왕의 정통성을 재확인하며 그를 왕으로 옹립했다. 

이는 당시 고구려 사회가 단순히 혈통의 순서를 넘어, 리더의 자질과 역량을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다만, 그의 즉위와 관련하여 형 발기와의 왕위 분쟁 기록은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삼국사기》는 발기가 요동의 공손강(公孫康)에게 의탁했다고 기록하지만, 공손강의 활동 시기는 고국천왕 사후인 204년 이후이므로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해당 기록이 후대인 산상왕 대에 있었던 형제간의 분쟁과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역사적 논란과 별개로, 《삼국사기》는 고국천왕의 인물상을 매우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외모와 힘: 키가 9척(九尺)에 달하는 씩씩하고 뛰어난(雄偉) 용모를 가졌으며, 솥(鼎)을 들어 올릴 만큼 강한 힘을 지녔다.

• 통치 스타일: 남의 말을 경청한 뒤 결단했으며, 관대함과 엄격함(寬猛)을 적절히 조화시켜 정사를 처리했다.


이처럼 압도적인 신체적 능력과 신중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통치 스타일은 그가 펼쳐나갈 과감한 개혁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개인적 자질은 혼란한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의 전형이었으며, 그는 곧 자신의 역량을 증명해야 할 거대한 위기들과 마주하게 된다.


대한민국역사복원협회의 이대선 회장이 그린 고국천왕.


3. 위기 속에서 왕권을 벼리다: 고국천왕의 위기관리 리더십

모든 리더십은 위기를 통해 그 진가를 증명한다. 

고국천왕 역시 즉위 초부터 대외적 침략과 대내적 반란이라는 두 가지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는 이 위기들을 단순히 수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절호의 기회로 전환시키는 탁월한 전략가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3.1. 대외적 위기: 좌원(坐原) 전투의 승리와 군사적 역량 입증

서기 184년, 혼란기 중국의 후한(漢) 변방의 태수세력이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국천왕은 먼저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 막게 했으나, 초기 전투에서 패배하며 위기는 한층 심각해졌다.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운 순간, 고국천왕은 직접 전면에 나섰다.

그는 날쌔고 용감한 정예 기병(精騎)을 직접 이끌고 출정하여 좌원(坐原)에서 한나라 군대와 맞붙었다. 

왕이 직접 이끄는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전투는 고구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삼국사기》는 당시의 승리를 "베어진 (적의)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고 기록하며 그 규모를 생생히 전한다.

좌원 전투의 승리는 단순한 국방의 성공을 넘어선다. 

이는 국왕이 직접 전장을 지휘하여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자신의 군사적 권위와 리더십을 나라 안팎에 확실히 각인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 승리를 통해 그는 국가의 최고 군사 통수권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3.2. 대내적 위기: 외척 세력의 반란과 숙청

외부의 위협을 막아낸 고국천왕에게 더 큰 도전은 내부에서 찾아왔다. 

당시 왕후 우씨(于氏)의 친척인 중외대부 어비류(於畀留)와 평자 좌가려(左可慮) 등 외척 세력은 막강한 권세를 등에 업고 횡포를 일삼았다. 

그들의 자제들은 백성의 자녀를 겁탈하고 토지와 주택을 빼앗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러 나라 사람들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고국천왕이 이들의 죄를 물어 처벌하려 하자, 그들은 190년부터 반란을 도모하여 마침내 191년 4연나(四椽那)와 함께 봉기해 왕도를 공격했다. 

왕후의 친족이 왕에게 칼을 겨눈 이 사건은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국가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위기였다. 

고국천왕은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수도 인근의 기내(畿內) 병력을 직접 동원하여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이 반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고국천왕은 낡은 부족 세력과 외척에 의존하는 기존 정치 시스템의 한계를 절감했다. 

이는 그에게 혈연과 지연을 넘어 국가를 위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대내외적 위기를 연이어 극복한 경험은, 이후 그가 단행할 대대적인 국가 개혁의 강력한 동력이자 명분이 되었다.


4. 국가 개혁의 대업: 고국천왕 리더십의 정수

두 차례의 큰 위기를 성공적으로 수습한 고국천왕은 이제 국가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에 나섰다. 

그의 개혁은 단순한 위기 대응을 넘어, 고구려의 미래를 위한 체계적인 청사진을 그리는 과정이었다.

그는 인재 등용, 행정 개편, 민생 안정이라는 세 가지 방향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며 자신의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4.1. 능력주의의 선포: 농부 을파소(乙巴素)를 국상(國相)으로 삼다

외척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국천왕은 사사로운 연고로 관직이 주어지는 폐단을 통감하고, 능력 중심의 새로운 인사 시스템이 절실함을 깨달았다. 

그는 4부(四部)에 신분과 배경을 가리지 말고 현명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명했다.

이에 동부(東部)의 안류(晏留)가 천거되었으나, 그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있다며 겸손히 사양했다. 

그가 추천한 인물은 바로 서압록곡 좌물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을파소(乙巴素)였다. 

을파소는 유리왕 시절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후손이었지만, 당시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밭을 갈며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불러 중외대부(中畏大夫)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을파소는 '더 높은 직책이 아니면 뜻을 펼 수 없다'며 사실상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왕은 그의 숨은 의도를 즉시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는 모든 신하들의 예상을 깨고, 국가 최고 관직인 국상(國相) 에 그를 임명하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당연히 조정의 귀족들과 왕실 친척들은 농부 출신을 최고 재상으로 삼은 것에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고국천왕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는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일족까지 멸할 것이다!" 라는 교서를 내려 을파소에게 절대적인 힘을 실어주었다. 

이는 낡은 연고주의를 타파하고 오직 능력에 따라 인재를 쓰겠다는, 그의 국정 운영 철학을 만천하에 공표한 상징적인 조치였다.


4.2. 중앙 집권의 초석: 5부(五部) 체제 개편

을파소를 등용하는 과정의 기록에서부터 '동부(東部)'와 같은 방위명 부(部)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고국천왕 대에 고구려의 행정 체제에 중대한 개편이 단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로 본다.

기존의 5부(계루부, 연나부 등)가 각 부족의 독자성이 강한 연맹체적 성격을 띠었다면, 고국천왕은 이를 왕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적 성격의 동·서·남·북·중부로 재편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는 각 부족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모든 행정 단위를 국왕의 통치 아래 두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이 개편은 고구려가 부족 연맹 국가에서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는 핵심적인 초석이 되었다.


4.3. 애민(愛民) 정신의 제도화: 진대법(賑貸法)의 시행

고국천왕 리더십의 정점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즉 애민(愛民) 정신을 구체적인 제도로 구현한 데 있다. 

서기 194년, 서리가 내려 극심한 흉년이 들자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해 겨울,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가에 앉아 우는 한 백성을 만났다.

왕이 우는 까닭을 묻자 그는 "가난하여 늘 품팔이로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흉년이 들어 일할 곳이 없어 한 톨의 곡식도 얻지 못해 웁니다."라고 답했다. 

백성의 눈물에 고국천왕은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이 이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나의 죄로다."

그는 즉시 자신의 옷과 음식을 내어주고, 전국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등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을 찾아 구휼하게 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일시적인 구제책이 아닌 항구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니, 이것이 바로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 주도 빈민 구휼 제도인 진대법(賑貸法)이다. 

왕의 이러한 애민정신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것이 진대법이었으며, 비록 기록상 창안자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국상 을파소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탄생한 정책으로 보인다.


항목
내용
시행 시기
매년 봄 3월 ~ 가을 7월 (춘궁기)
대여 품목
관청의 곡식 (官穀)
대여 기준
식구 수에 따라 차등 지급
상환 시기
겨울 10월 (추수 후)
의의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 주도 빈민 구휼 제도로 평가됨


진대법은 단순한 복지 정책을 넘어선다. 

이는 굶주린 백성이 생존을 위해 귀족에게 사사로이 예속되는 것을 막고, 이들을 국가의 세금과 역역을 담당하는 공민(公民)으로 확보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었다. 

즉, 민생 안정과 왕권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혁신적인 정책이었던 것이다.


고국천왕릉으로 추정되는 우산하 2110호 전경


5. 1,800년의 시간을 넘어, 현대 리더에게 고국천왕이 전하는 메시지

고국천왕의 생애는 위기를 돌파하고, 낡은 관습을 타파하며, 백성의 삶을 보듬어 국가의 기틀을 바로 세운 위대한 여정이었다. 

그의 통치가 남긴 유산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에 머무르지 않는다. 

1,800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의 리더들에게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고국천왕 리더십의 현대적 가치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결단력: 그는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반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국가 체질 개선의 동력으로 삼았다. 

위기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여 더 큰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은 그의 전략적 사고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현대의 리더들에게 위기관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2. 기득권을 넘어서는 능력주의: 신분과 배경을 가리지 않고 밭 갈던 농부 을파소를 최고 재상으로 발탁한 그의 파격적인 용인술은 시대를 초월하는 교훈이다. 

진정한 혁신과 성장은 조직의 낡은 기득권과 연고주의를 깨고, 오직 능력과 비전으로 인재를 평가하고 등용할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의 결단이 증명한다.

3. 공감에서 비롯된 지속 가능한 통치: 한 백성의 눈물에서 국가 시스템 개혁의 필요성을 읽어낸 그의 공감 능력은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진대법이라는 제도의 탄생은 리더의 공감이 구체적인 정책과 시스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통치가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포용적 리더십'의 원형이다. 

이는 공동체의 신뢰를 얻고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해야 하는 현대 사회와 기업 경영에 필수적인 가치이다.

고국천왕의 개혁은 왕위의 부자 상속 원칙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 동생이 왕위를 잇는 등 예외적 상황도 있었지만, 고구려가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결정적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이야기는 단지 흥미로운 옛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가 마주한 도전을 어떻게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살아 숨 쉬는 리더십 교과서이다.


이 글은 《삼국사기》 등 공개된 사료를 바탕으로 고국천왕의 즉위 배경, 전쟁·반란 대응, 을파소 등용, 진대법 시행을 한 줄의 이야기로 엮어 설명한 글입니다.

다만 ‘발기와의 분쟁 기록’처럼 연대·인물 비정합으로 해석이 갈릴 수 있는 대목은 연구자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어, 글의 일부는 맥락을 살리기 위한 설명과 서술 방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Gogukcheon of Goguryeo (r. 179–197) ruled when royal authority was still fragile. 

Chosen over an elder brother, he proved himself in crisis: he led cavalry to defeat a Han attack at Jwawon and crushed a revolt by powerful in-laws. 

He then pushed reform, promoting merit over pedigree by appointing Eul Paso—then living as a farmer—as chief minister and strengthening central control. 

In 194, after meeting a starving subject, he enacted the Jindae law, lending state grain in spring and collecting it after harvest, easing hunger while stabilizing the state’s fiscal base. 

His reign stands out for decisive crisis management, bold talent selection, and lasting institutional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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