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를 향한 기나긴 기다림: 고구려 7대 차대왕의 비극적 일대기
그림자 속의 왕자, 수성
고구려 역사상 가장 오래 왕좌를 지킨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그의 통치가 90년을 넘어가던 무렵, 이미 늙은 왕의 손아귀에서 권력의 모래알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거대한 그늘 아래, 한 남자가 숨을 죽인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의 친동생이자 왕국의 군사와 국정을 모두 장악한 실세, 수성(遂成).
그는 형의 시대가 저물고 자신의 시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삼국사기》는 수성이라는 인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며 그의 운명을 암시한다.
"그는 용감하고 체격이 건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한 마음은 적었다." — 《삼국사기》
용맹과 위엄. 왕이 될 자질은 충분했으나, 그에게는 결정적으로 ‘인자함’이 부족했다.
이 한 문장은 훗날 그가 폭군이 되어 피의 숙청을 일으키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것임을 예고하는 서늘한 복선과도 같았다.
이제 수성이 어떻게 실권을 장악하고 왕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는지, 그의 왕자 시절로 돌아가 살펴보자.
1부: 칼을 품은 야심가
수성의 이름이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21년, 후한(後漢)의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였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왕명을 받아 출전한 이는 바로 왕자 수성이었다.
그는 정면 대결 대신 기만술을 택했다.
적에게 거짓으로 항복할 듯한 태도를 보여 방심하게 만든 뒤, 군사를 험한 지형에 매복시켰다.
수성 왕자: "항복이라니, 당치 않소. 지금은 고개를 숙여 적을 방심하게 만들 때요. 진짜 사냥은 그들이 등을 보였을 때 시작될 것이오!"
수성의 계략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후한군은 방어 태세를 풀었고, 바로 그 순간 고구려군의 맹렬한 역습이 시작되었다.
적을 격파한 수성은 기세를 몰아 현도와 요동까지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수성의 위상을 하늘로 치솟게 했다.
늙은 태조대왕은 그에게 군사와 국정 전반을 맡겼고, 이로써 수성은 왕이 아니었지만 사실상 왕과 다름없는 '섭정' 이 되었다.
권력의 맛을 본 수성의 야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132년부터 그는 관나부의 미유(彌儒), 비류나부의 양신(陽信)과 같은 측근들과 함께 노골적으로 왕위를 넘보기 시작했다.
측근들은 "대왕께서는 너무 늙으셨습니다. 이 나라는 새로운 태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며 끊임없이 그를 부추겼고, 수성의 마음속에서는 검은 야심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수성의 야심에 모두가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우보 고복장(高福章)은 그의 흉계를 간파하고 태조대왕에게 충언을 올렸고, 현명한 좌보 목도루(穆度婁)는 닥쳐올 피바람을 예감했다.
목도루는 132년에 이미 수성의 야심을 눈치채고 병을 핑계로 물러나려 했으며, 훗날 차대왕 즉위 후 고복장이 처형되자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은퇴하게 된다.
이는 수성을 부추긴 미유, 양신과 같은 측근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조정의 균열이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기나긴 기다림과 음모 끝에, 마침내 수성은 76세의 나이로 왕좌에 오르게 되었다. (논쟁)
하지만 그 방식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2부: 마침내 열린 시대, 그러나 피로 물든 즉위
146년, 수성은 측근들과 함께 쿠데타를 모의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칼을 뽑기 직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태조대왕이 먼저 수성을 불러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나는 너무 늙어 만기(萬機)에 귀찮음을 느낀다. 하늘의 역수가 네 몸에 있다... 너로 하여금 즉위케 하니, 영원히 영광을 누릴지어다!" — 태조대왕이 수성에게
형식은 평화로운 양위였지만, 그 이면에는 수성의 군사적 압박과 늙은 왕의 체념이 깊게 깔려 있었다.
피를 보기 전에 스스로 물러난 태조대왕의 결정으로, 수성은 고구려의 제7대 왕, 차대왕(次大王) 으로 즉위했다.
76세.
왕이 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다.
오랜 기다림에 지친 차대왕은 조급했고, 자신의 권력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만한 모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공포의 서막은 즉위 이듬해인 147년에 올랐다.
차대왕은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왕족이자 우보였던 고복장을 가장 먼저 처형했다.
충신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좌보 목도루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자, 조정에는 서슬 퍼런 공포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48년, 차대왕의 칼날은 가장 유력한 경쟁자였던 태조대왕의 아들들에게 향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莫勤)' 을 살해했다.
형의 비참한 죽음을 전해 들은 둘째 아들 '막덕(莫德)' 은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맞이했다.
권력의 기반을 피로 다진 차대왕의 통치는 점점 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늘마저 등을 돌린 듯한 재앙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3부: 폭군의 시대와 하늘의 경고
차대왕의 폭정은 일상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진실을 말하는 자를 벌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했다.
어느 날 사냥터에서 만난 흰 여우를 보고 불길함을 예언한 무당은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임금께서 덕을 닦으시면 화를 바꾸어 복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조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차대왕의 오만함을 건드렸을 뿐이었다.
그는 덕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라는 충고를 "요사스럽다"는 말로 치부하며 그 자리에서 무당을 죽여버렸다.
그는 구원의 손길을 스스로 내친 것이었다.
진실을 외면하는 그의 태도는 하늘의 흉조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별들이 한곳에 모이는 기이한 현상을 보고 신하들이 두려워하자, 왕의 분노를 걱정한 한 점술가는 "임금님의 덕"이라 거짓 아첨했다.
차대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현실을 외면했다.
차대왕의 폭정이 극에 달하자 하늘마저 등을 돌린 듯했다.
즉위 이듬해인 147년, 수도를 뒤흔든 지진을 시작으로 왕국은 흉조에 휩싸였다.
149년에는 하늘의 해가 빛을 잃고(일식) 겨울임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으며, 153년에는 여름에 서리가 내리고 땅이 또다시 흔들렸다.
158년과 165년에도 혜성이 나타나고 일식이 반복되자, 백성들은 이를 폭군에 대한 하늘의 분노로 여기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폭정과 불길한 징조 속에서, 고구려에는 새로운 영웅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4부: 영웅의 결단과 폭군의 최후
폭정 속에서 두 아들이 무참히 죽는 것을 지켜보며 별궁에서 분노와 슬픔의 세월을 보내던 태조대왕은 마침내 165년, 11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전승)
한 시대의 위대한 왕이 동생의 폭정을 지켜보다 눈을 감은 그해, 마침내 시대가 새로운 영웅을 불렀다.
그는 연나부(椽那部) 출신의 조의(皂衣), 명림답부(明臨答夫) 였다.
훗날 고구려 최초의 국상(國相)에 올라 청야전술(淸野戰術)로 한나라 대군을 격파한 좌원 전투의 명장이 될 인물이었다.
그는 "계속되는 폭정에 백성이 견디어내지 못함"을 명분으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칼을 들기로 결심했다.
이는 단순한 암살이 아닌, 국가를 구하기 위한 거장이 내린 결단이었다.
165년 10월, 마침내 명림답부가 주도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그는 뜻을 함께하는 신하들과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향했다.
한때 용맹을 떨쳤던 왕이었지만, 94세의 늙은 폭군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차대왕은 자신이 믿었던 신하의 칼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권력을 향한 기나긴 기다림의 끝은 허무한 죽음이었다.
차대왕이 시해된 후, 명림답부와 신하들은 차대왕의 동생 '백고(佰固)' 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그가 바로 고구려 제8대 신대왕(新大王) 이다.
한편, 차대왕의 아들 '추안(鄒安)' 은 정변을 피해 도망쳤다가 훗날 신대왕에게 용서를 받고 '양국군(讓國君)'에 봉해지며 정변은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역사는 차대왕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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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대왕릉으로 추정되는 마선구 2378호 |
역사 속 차대왕의 두 얼굴
차대왕은 고구려 초기 역사의 복잡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의 가계에 대한 기록조차 한국의 《삼국사기》와 중국의 《후한서》가 서로 다르게 전하고 있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의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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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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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왕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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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왕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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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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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복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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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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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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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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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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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당시 고구려의 왕위 계승이 단순한 혈연 관계가 아닌, 여러 부족 세력 간의 복잡한 역학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놀랍게도, 폭군으로 기록된 그의 시호는 '차대왕(次大王)' 이다.
이는 '태조대왕(太祖大王) 다음의 위대한 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이 그가 비록 잔혹한 통치를 했지만, 후대 고구려인들에게는 태조대왕의 정통성을 이은 왕으로 인식되었음을 시사한다.
즉위 전 세운 군사적 공로와 강력한 카리스마가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차대왕은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70년이 넘는 기나긴 기다림이 빚어낸 비극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삶은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 위한 야망이 한 인간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폭군의 피로 얼룩진 통치는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자 청야전술로 나라를 구한 명장, 명림답부라는 불세출의 영웅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 시대의 비극적 종말이, 위대한 재상이 이끌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연 것이다.
이 글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중국 《후한서》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차대왕과 명림답부가 등장하는 시기를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연대·왕위 계승 관계·전쟁 및 정변과 같은 큰 사건의 흐름은 사료를 따르되, 인물의 심리·대사·현장 묘사 등은 이해를 돕기 위한 각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료마다 차이가 나는 가계(예: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의 관계)와 평가 부분은 대표적인 견해를 골라 정리했고, 해석이 갈리는 대목은 한 가지 가능성으로만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정답’이 아니라, 고구려 초창기 권력 투쟁을 입체적으로 상상해 보기 위한 하나의 이야기형 해석으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더 깊은 연구나 정확한 역사 정보를 원하실 경우, 반드시 원 사료와 최신 연구 논문을 함께 참고하시길 권합니다.
This essay follows King Chaedae of Goguryeo, who rose from powerful prince Suseong under his long-reigning brother King Taejo to a short, bloody reign.
After defeating Han forces and controlling army and court, he waited decades for the throne, then took it in old age through pressured abdication.
Gripped by fear, he purged loyal ministers and rival princes, while earthquakes, eclipses and strange omens were read as heaven’s warning.
At last the official Myungnim Dapbu led a coup, killed the tyrant and installed King Sindae, sparing Chaedae’s son.
The tale reveals how delayed ambition can curdle into paranoia and how one violent reign opened the stage for a great re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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