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와 숙제: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징의 재조명
1.0 불멸의 이름을 남긴 형제, 백이와 숙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형제의 이야기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충절과 지조의 상징으로 기능해왔다.
왕위를 서로에게 양보하고, 폭력으로 세워진 새로운 왕조의 곡식을 거부하며 수양산에서 굶어 죽음을 택한 이들의 행적은 단순한 옛이야기를 넘어, 각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올바름과 신념의 가치를 묻는 살아있는 텍스트로 존재해왔다.
이들의 이야기는 왕조가 교체되는 거대한 변혁기마다 소환되어, 개인의 신념과 시대의 흐름이 충돌할 때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져왔다.
이 문서는 백이와 숙제 이야기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후대에 덧붙여진 문학적 허구를 구분하여 그 실체에 다가서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모든 이야기의 원형을 제공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기록을 중심으로, 이들의 행적이 어떻게 기록되고 해석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이들의 상징성이 시대의 요구에 따라 충절의 화신에서 위선적인 이상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백이와 숙제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원전인 사마천의 「백이열전(伯夷列傳)」을 면밀히 분석하며 모든 논의를 시작하겠다.
2.0 모든 이야기의 시작: 사마천의 『사기』 「백이열전」
사마천이 쓴 『사기』 70편 열전(列傳)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백이열전」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마천은 이 파격적인 배치를 통해 단순한 인물 소개를 넘어, 역사 서술의 근본적인 목적과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백이열전」은 백이와 숙제라는 인물을 통해 역사가 무엇을 기록해야 하며, 불공정한 세상 속에서 올바름이란 과연 무엇인지 묻는 사마천 자신의 철학적 절규와도 같다.
|
| 백이와 숙제 |
2.1 「백이열전」에 기록된 서사
『사기』 「백이열전」에 기록된 백이와 숙제의 일대기는 후대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극적인 서사로 구성된다.
1. 왕위 양보와 출분(出奔)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두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인 숙제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숙제는 장남인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그러나 백이는 "아버지의 명이다"라며 이를 거절하고 나라를 떠났고, 숙제 또한 왕위에 오르지 않고 형을 따라 나라를 떠났다.
결국 나라 사람들은 둘째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2. 서백창(西伯昌)에게의 귀의 시도
두 형제는 당시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덕망 높은 서백창(주나라 문왕)의 소문을 듣고 그에게 의탁하고자 길을 떠났다.
3. 무왕(武王)의 정벌을 막아서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서백창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은(殷)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치기 위해 동쪽으로 출정하려 했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효(孝)라고 할수있습니까? 신하 신분으로 군주를 죽이는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무왕의 신하들이 그들을 해치려 했으나, 군사(軍師)인 강태공(姜太公)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라며 그들을 부축하여 보내주었다.
5. 수양산(首陽山) 은거와 불식주속(不食周粟)
무왕이 마침내 은나라를 평정하고 주(周)나라를 세우자, 천하가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었다.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의리를 지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不食周粟)고 맹세하고 수양산에 은거했다.
6. 「채미가(采薇歌)」와 최후
그들은 수양산에서 미(薇)를 캐 먹으며 연명했다. (고사리로 추정)
굶어 죽기 직전,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심경을 담은 「채미가(采薇歌)」라는 노래를 지었다.
7. 노래를 마친 두 형제는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흥미롭게도 사마천 자신이 저술한 『사기』의 다른 편인 「주본기(周本紀)」에서는 서백창이 살아있을 때 형제가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서사의 시간적 순서에 차이를 보인다.
이는 사마천이 「백이열전」의 극적 효과와 철학적 메시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기록과의 엄밀한 연대기적 일관성까지 희생시키며 서사를 의도적으로 구성했음을 시사한다.
2.2 사마천의 숨겨진 의도: "천도(天道)는 과연 옳은가?"
「백이열전」은 총 788자 중 백이의 행적을 다룬 부분이 215자에 불과할 정도로, 사마천 자신의 사평(史評)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격적인 구성을 보인다.
이는 그가 백이와 숙제의 삶을 빌려 자신이 평생 품어온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동력은 사마천 개인의 비극적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한무제(漢武帝)의 노여움을 사 궁형(宮刑)을 당하는 치욕을 겪은 그는, 선한 자가 고통받고 악한 자가 번성하는 세상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체감했다.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 없이 언제나 선한 사람의 편이다(天道無親 常與善人)"라는 통념은 그의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공허한 수사에 불과했다.
사마천이 제기하는 다음의 극명한 대조는 단순한 수사적 질문이 아니라, 그의 피맺힌 절규이다.
• 선인의 비극적 삶: 어짊을 쌓고 고결하게 행동했던 백이와 숙제는 굶어 죽었고, 공자가 최고의 제자로 칭송하며 학문을 좋아했던 안연(顔淵)은 가난에 시달리다 요절했다.
• 악인의 영화로운 삶: 반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인육을 먹는 등 온갖 포악한 짓을 저지른 도적 도척(盜跖)은 수천의 무리를 이끌고 천하를 활보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사마천은 "이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라고 울부짖으며 불공정한 현실에 대한 울분(發憤)을 토해낸다.
이처럼 자신의 개인적 비극을 보편적 질문으로 승화시킨 「백이열전」은, 『사기』 열전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선언문이 된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냉소나 허무주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자는 덧없는 부귀보다 후세에 남을 명예와 이름을 중시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백이와 숙제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더라도 그들의 고결한 이름은 역사 속에 영원히 빛날 것이라는 믿음,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역사를 저술한 이유이자 「백이열전」을 통해 역설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였다.
이처럼 사마천이 제시한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는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 기록 자체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여러 학문적 검토가 필요하다.
다음 장에서는 『사기』 이전의 기록과 비교하며 그 역사적 실체를 추적해 보겠다.
3.0 이야기의 검증: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허구
사마천의 「백이열전」은 백이와 숙제 이야기의 결정판처럼 여겨지지만, 그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마천 이전의 문헌 기록과 비교하고, 이야기의 극적인 요소들의 신빙성을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문학적 상징으로 각색되기 이전의 역사적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3.1 『사기』 이전 문헌에 나타난 백이와 숙제
사마천보다 수백 년 앞선 공자와 맹자의 기록은 백이와 숙제에 대한 초기 인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 공자(孔子)의 평가
『논어(論語)』에서 공자는 백이와 숙제를 "옛 현인(賢人)"이라 칭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제자가 그들이 자신들의 선택을 원망하지 않았을지 묻자, 공자는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했겠는가?(求仁得仁 又何怨乎)"라고 답한다.
이는 공자가 그들의 행위를 개인의 신념에 따른 구도적(求道的) 선택으로 보고 존중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자는 그들의 길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는 이들과 달라서, 가한 것도 없고 불가한 것도 없다(我則異於是, 無可無不可)"고 말하며, 자신은 백이와 숙제처럼 절대적인 원칙에 얽매이기보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실용적 태도를 취함을 분명히 했다.
즉, 공자는 그들의 신념의 순수성은 존중하되, 그들의 정치적 선택 자체를 유일한 해답으로 제시하지는 않은 것이다.
• 맹자(孟子)의 관점
맹자는 무왕이 폭군 주왕(紂王)을 친 행위를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정당화했다.
그는 왕답지 않은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라 "한 사내(一夫)"에 불과하므로, 그를 제거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맹자의 논리는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백이와 숙제의 입장과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관점이다.
이처럼 『사기』 이전의 기록에서는 백이와 숙제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대적 충신으로 묘사되기보다는, 각자의 신념에 따라 독자적인 선택을 한 현인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3.2 핵심 요소에 대한 사실 여부 논쟁
「백이열전」의 서사를 극적으로 만드는 몇몇 핵심 요소들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그 사실성에 대한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 무왕의 말고삐를 막아선 행위(叩馬而諫)의 신빙성
이 일화는 이야기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지만, 사실일 가능성은 낮게 평가된다.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에 귀의하여 강태공과 같은 인물들과 교류했으므로, 주나라의 거사 계획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군대가 출병하는 시점에 갑자기 나타나 말고삐를 잡고 간언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많다.
이는 후대에 그들의 저항 정신을 극대화하기 위해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수양산의 「채미가(采薇歌)」
이 노래가 백이와 숙제가 직접 지었다는 명확한 문헌적 근거는 희박하다.
특히 노래의 핵심 구절인 "폭력으로 폭력을 바꾼다(以暴易暴)"는 무왕의 혁명을 비판하는 백이와 숙제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마천이 당시에 떠돌던 노래를 인용하여 그들의 저작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 그들이 먹은 '미(薇)'는 고사리였는가?
전통적으로 '미(薇)'는 '고사리(蕨)'로 번역되어,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고사리마저 거부하다 굶어 죽었다는 비극성을 강화하는 소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고사리는 독성이 있어 생으로 먹기 힘들다.
현대의 문헌학 및 식물학 연구에서는 '미(薇)'가 '들완두(野豌豆)'와 같은 콩과 식물이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유력하게 제기된다.
이 해석의 차이는 이야기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고사리' 해석이 '주나라 땅의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상징적 순수성의 극치를 보여준다면, '들완두' 해석은 그들의 저항이 보다 현실적인 정치적 행위였음을 시사한다.
즉, 주나라의 공식적인 녹봉(粟)은 거부하되, 자연에서 나는 식물로 연명하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행위가 신화적 거부가 아닌, 의식적인 정치적 불참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해석적 전환이다.
이러한 역사적 검증은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가 단순한 사실 기록이라기보다는, 사마천을 비롯한 후대 사람들의 가치관이 투영되어 하나의 강력한 '상징'으로 재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음 장에서는 이 상징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살펴보겠다.
4.0 상징의 진화: 충절의 아이콘에서 위선자까지
역사적 인물로서의 백이와 숙제는 시대를 거치며 특정 이념을 대표하는 강력한 '상징'으로 변모했다.
특히 왕조 교체기와 같은 정치적 격변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소환되어 당대의 필요에 따라 새롭게 재해석되었다.
충절의 아이콘으로 굳건히 자리 잡는가 하면, 때로는 시대착오적인 위선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4.1 유교적 충절(忠節)의 화신
공자가 백이와 숙제를 '인을 구한 현인'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후대 유학자들에게 중요한 해석의 기반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선택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과 결합하여, 군주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상징하는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태도 변화는 상징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어떻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반란을 통해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초기에는 무왕의 '혁명'을 막아선 백이와 숙제를 비판했다.
그러나 자신의 왕조가 안정되고 신하들의 충성이 필요해지자, 그는 돌연 태도를 바꿔 백이와 숙제를 충절의 화신으로 추앙하고 사당에 모셨다.
이처럼 통치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들의 상징을 편리하게 이용했다.
4.2 조선 시대의 수용과 극단화
백이와 숙제의 상징은 조선에서 더욱 엄격하고 극단적인 형태로 수용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와 세조의 왕위 찬탈 같은 정치적 격변기에, 그들은 충신과 변절자를 가르는 시금석이 되었다.
특히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조는 이러한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采薇)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땅에 났더니
성삼문은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의 곡식을 거부했지만, 결국 주나라 땅에서 난 식물(薇)을 먹은 것조차 타협이자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백이의 충절을 넘어서려는 조선 선비들의 강직하고 비타협적인 절의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로, 백이와 숙제의 상징이 조선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얼마나 엄격한 잣대로 재해석되었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4.3 근현대의 비판적 재해석
근대에 들어서면서 백이와 숙제를 향한 전통적인 숭배에서 벗어나 그들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시각이 등장했다.
• 루쉰(魯迅)의 풍자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그의 소설집 『고사신편(故事新編)』에서 백이와 숙제를 유교적 위선자의 전형으로 풍자했다.
그는 굶주리는 형제를 가엾게 여긴 암사슴이 젖을 먹여 살려냈으나, 기력을 차린 그들이 오히려 고기가 먹고 싶어 사슴을 잡아먹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고결한 이상 뒤에 숨겨진 인간의 본성을 폭로하며 전통적 성인(聖人)의 권위를 해체하고 조롱했다.
• 마오쩌둥(毛澤東)의 비판
중국 혁명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백이와 숙제를 주 무왕이 이끈 '인민해방전쟁'에 반대한 개인주의자로 규정하며 비판했다.
그에게 백이와 숙제는 낡은 질서에 집착하여 시대의 진보를 가로막는 반동적 인물의 상징이었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필요에 따라 과거의 상징이 어떻게 전복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이다.
이처럼 백이와 숙제라는 하나의 이야기는 해석하는 시대와 사람의 관점에 따라 충절의 성인에서부터 비판과 풍자의 대상에 이르기까지 극적인 변모를 거듭해왔다.
이는 그들의 이야기가 지닌 상징적 힘이 얼마나 강력하고 다층적인지를 증명한다.
5.0 역사와 상징 사이, 끝나지 않은 질문
지금까지의 분석을 종합해 볼 때, 백이와 숙제 이야기는 단일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수많은 시대의 가치가 겹겹이 쌓인 '서사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는 불의한 세상에 고뇌했던 사마천의 철학적 질문, 왕조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려 했던 유교적 이념, 절의를 목숨보다 중시했던 조선 선비의 정치적 신념, 그리고 낡은 권위를 타파하고자 했던 근대의 비판적 시각이 모두 녹아 있다.
그들의 행적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정확한지를 따지는 것을 넘어, 우리는 그들의 '선택'이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정의란 무엇인가?', '올바름을 위한 저항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그리고 '개인의 신념과 시대의 흐름이 충돌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역설적이게도, 백이와 숙제 이야기를 둘러싼 역사적 모호함과 사실적 불일치야말로 그들의 생명력을 유지해 온 원천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명확한 사실로 고정되지 않은 반쯤 신화적인 캔버스였기에, 사마천에서 마오쩌둥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는 그 위에 자신들의 불안과 신념, 그리고 혁명에 대한 열망을 투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백이와 숙제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는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후대에 의해 무엇을 의미하게 되었는가에 있다.
그들은 죽음으로 불멸의 이름을 남겼고, 그 이름은 앞으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질문을 던지는 거울로 남을 것이다.
이 글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을 중심 축으로, 『논어(論語)』·『맹자(孟子)』 등 초기 문헌과 후대의 재해석 자료를 함께 대조해 서사를 구성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무엇이 기록되었는가”뿐 아니라 “어떻게 의미가 만들어졌는가”까지 다루는 재구성 글입니다.
본문에서 사실로 단정하기 어려운 대목, 해석이 갈리는 대목, 후대 창작 가능성이 큰 요소는 각각 (전승)/(논쟁) 등으로 구분해 읽는 것을 권합니다.
특히 ‘말고삐를 잡고 간언했다’는 장면, 「채미가(采薇歌)」의 귀속, ‘미(薇)’의 식물 비정(고사리/콩과 식물 등)은 대표적인 (논쟁) 지점입니다.
이 글의 목표는 백이와 숙제를 “정답”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왕조 교체와 윤리의 충돌 앞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현재형으로 되살리는 데 있습니다.
읽는 분의 관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으며, 그 다름 자체가 이 이야기의 오래된 생명력임을 함께 확인하고자 합니다.
This essay revisits Bo Yi and Shu Qi as a case where history and symbol blur.
Using Sima Qian’s Shiji “Bo Yi Biography” as the core source, it sketches the arc—renouncing the throne, opposing King Wu’s conquest, refusing Zhou grain, and dying on Shouyang Mountain—then flags contradictions and questions whether “Heaven’s way” is just.
It contrasts earlier notes in the Analects and Mencius, tests disputed motifs (the remonstration, the “Cai Wei” song, and what “wei” means), and traces later re-readings: loyalist saints in Confucian and Joseon frames, or targets of modern satire and ideology.
Their endurance lies in how each age rereads their choice as an ethical mirror.
.jpg)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