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기』 130권: 본기·세가·열전의 탄생사 (Sima Qian)



 이 글은 한나라 궁정 기록·전기·자필 편지 전승과 사서(『사기』『한서』)의 교차 대조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식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합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 표기합니다.


장안(長安) 미명 직전의 차가운 공기가 전각의 깃발을 낮게 흔들었다.

한 무제(漢武帝, 황제)가 늘 그렇듯 이른 시각에 조회를 열었고, 

이릉(李陵, 한 장수)의 패전 보고가 넓은 돌 바닥 위로 퍼져 나갔다.

군신들의 시선이 서로를 찔렀다.

누군가는 이릉을 욕했고, 누군가는 침묵했다.

태사령(太史令) 사마천(司馬遷, 『사기』 저자)은 천문·역법 보고를 들고 서 있었지만, 

발끝이 자연스레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신이 아는 바를 아룁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또렷했다.

“이릉은 보병과 노병 몇 천으로 흉노 대군을 맞았습니다.

물자와 원군이 끊긴 전장에서 끝까지 싸운 자입니다.”

장막 뒤에서 누군가 흠칫했다.

그 말은 곧 “책임은 더 높은 곳에 있다”는 뜻으로도 들릴 수 있었다.

무제의 표정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대는 역모자를 두둔하는가.”

공기가 식었다.

그날 오후, 사마천은 옥문을 지나갔다.


Emperor Wu of Han — court portrait (later dep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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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문이 닫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가볍고 짧았다.

어둠에 눈이 익자, 그의 머릿속에 다른 방 하나가 켜졌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 전임 태사령)의 마지막 밤이었다.

“하늘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일은 곧 사람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일이다.”

병상에서 아버지는 거친 숨 사이로 말했다.

“내가 못 마친 『태사공서』를 네가 끝내라.

왕과 제후, 승자와 패자, 상인과 백성, 장부와 여인.

모두 한 책 속에서 서로를 비춰야 한다.”

그 약속이 오늘 목숨보다 무겁다는 사실을, 사마천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젊은 날의 여정을 떠올렸다.

초·제의 옛 도읍을 걸었고, 산동의 사당에서 낡은 비문을 베끼며 사관의 문장을 배웠다.

관창의 붓 끝이 마르면 강을 건넜고, 죽간(竹簡)의 매듭이 풀리면 다시 묶었다.

그의 기록은 늘 같은 방식으로 쌓였다.

사건의 뼈대를 놓고, 그 위에 사람을 올리고, 마지막에 의미를 묻는다.

그 의미가 누구의 편이 되지 않도록, 수치를 조심하고 단어를 아꼈다.


사마천 목판 삽화 초상(만소당죽장화전 수록판)
Woodblock portrait of Sima Qian (Wanxiaotang Zhuzhuang Huazh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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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리(獄吏)가 그에게 선택을 내밀었다.

사형, 혹은 궁형(宮刑, 거세).

“죽음을 택하면 명예는 남을 것이고, 삶을 택하면 수치가 남을 것이다.”

누군가 속삭였다.

사마천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삶을 택하면, 기록이 남는다.”

그는 그날 밤 결심을 붓으로 적었다.

살아 남아 쓰겠다고.

이 선택의 기록을 마지막 장까지 데려가겠다고.

그 결심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후일 편지 속에서 한 줄의 격문처럼 압축되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 번의 죽음이 있으되, 그 무게는 다르다는 뜻의 문장.

그러나 그는 긴 인용 대신, 한 문장의 방향만 남겼다.

살아서 쓰는 편을 고른 사람이라는 고백.


출옥 후의 궁정은 낯설었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침묵이 되었고, 붙잡아 주던 손길은 눈길로 바뀌었다.

사마천은 입술을 다물고 기록실로 걸어 들어갔다.

하루는 본기(本紀)를 펼치고, 하루는 세가(世家)와 열전(列傳)에 손을 얹었다.

그의 책은 이렇게 나뉘었다.

황제의 연대를 모은 본기.

제후와 공신 가문의 흥망을 그린 세가.

제도와 음악·천문·형법 같은 공통의 숨을 정리한 서(書).

일의 얼개를 표로 묶은 표(表).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결을 드러내는 열전.

총 130권.

그 구조는 권력의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시선을 왕복하기 위한 궤도였다.


그는 먼저 ‘패자의 자서전’을 썼다.

항우(項羽, 초의 영웅)와 번쾌, 한신의 장면 위에 붓을 오래 멈추었다.

승자의 기록은 늘 풍족하다.

그러나 패자의 밤을 적어 두지 않으면, 승리의 낮마저 공허해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패한 자가 왜 싸웠는지, 끝내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지켰는지, 말하게 하라.”

그 문장은 그의 작업대 위에서 암묵의 규칙이 되었다.

그는 연회를 적지 않고, 칼끝의 떨림을 적었다.

찬양을 늘리지 않고, 선택의 무게를 재었다.


어느 날은 악비(樂毅)와 자객 형가(荊軻)의 전기를, 어느 날은 상앙과 장량의 고개를 넘겼다.

세상이 영웅에게만 움직이는 것 같을 때도, 그는 영웅의 곁을 적었다.

숫자와 곡식의 이동, 병기와 교대, 길과 다리, 사대부의 문장과 평민의 수군거림.

이 모든 것이 사건의 진짜 모양을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군가를 신으로 만들지 않았다.

사람의 키만큼만 세웠다.

그게 오래 선다.


밤이면 손가락의 굳은살이 아팠다.

궁형의 상흔은 혼자 있을 때 더 깊어졌다.

그가 종이에 기대어 버틴 문장은 그래서 더 간결해졌다.

“나는 사실을 모은다.

나는 평가를 미룬다.

나는 마지막 장에서야 말하겠다.”

그의 침묵은 자신을 위한 방패가 아니라, 독자를 위한 시간이었다.

독자가 스스로 결론에 닿을 수 있도록 빈칸을 남겨두는 시간.

그 빈칸은 때로 누구보다 큰 소리를 냈다.


임안(任安, 소경·少卿, 그의 벗)이 그에게 서찰을 보냈다.

“그대의 처지를 안다.

그러나 어찌 견디는가.”

사마천은 길게 답을 썼다.

그 편지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유명한 편지로 남았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의 수치를 숨기지 않았고, 창피를 벗 삼아 글을 마치겠다고 밝혔다.

죽음은 쉽다.

마무리는 어렵다.

그는 어려운 쪽을 골랐다.

그 결심이야말로 아버지의 병상과 옥중의 밤, 그리고 지금의 책상 한가운데를 하나로 꿰는 실이었다.


봄이 오고 또 갔다.

그의 책상에는 늘 죽간이 쌓였고, 종종 먼지가 앉았다가 다시 날아갔다.

그는 공방의 장정들과 함께 끈을 갈아 매고, 떨어진 글자를 찾아 붙였다.

때로는 궁궐의 기록창고에서 관인을 내어 보이며 오래된 장부를 열람했다.

서고의 냄새는 불에 그을린 나무와 곡식과 잉크가 뒤섞인 냄새였다.

그 냄새가 머리에 밴 날이면, 그는 문장을 더 단단하게 묶었다.


그는 책의 중반부에서 방향을 살짝 틀었다.

‘천하의 공론’이라 불리는 것의 실체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 없는 사람의 항목을 길게 남겼다.

장터에서 살다 간 사람, 법 앞에서 멈춘 사람, 벼슬길을 등진 사람, 끝내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

그들의 한 줄이 모여, 왕의 한 줄과 맞섰다.

그는 그 균형을 믿었다.

그 균형이 무너지면 기록은 선전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사기 수록 사부 총서본 · Shiji in Chizaotang Siku Huy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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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끝에서, 그는 마지막 매듭을 지었다.

『사기(史記, (어원) “역사의 기록”)』라는 제목을 결정하고, 책의 흐름을 다시 검토했다.

본기는 기둥처럼 곧게 서야 했고, 세가는 그 기둥 사이의 방을 만들었으며, 서와 표는 바닥의 무늬가 되어 길을 안내했다.

열전은 창문이었다.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며 바람을 만드는 곳.

그는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풍경이 들어오도록.


원고를 어떻게 살릴 것인지가 마지막 고민이었다.

궁정의 책은 궁정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는 사본을 나눠 가지고, 믿을 만한 지기에게 맡겼다(전승).

누군가는 밤에 베껴 적었고, 누군가는 먼 지방으로 가져갔다.

책은 그렇게 궁정의 축대 밖으로 흘렀다.

그리고 그 흘러나간 사본들이 훗날 다른 사관과 문사들의 손에서 다시 살아났다.

오래 버티는 기록은 종종 이렇게 비밀리에 생존한다.


그의 말년은 조용했다(논쟁).

어느 해에 세상을 떠났는지, 어느 관직에서 책을 덮었는지에 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하지만 남은 것만큼은 명확했다.

패자와 장정, 장사치와 여인을 한 자리로 불러 서로를 비추게 한 한 권의 체계.

황제가 읽고, 서리가 읽고, 장터의 글 읽는 이가 읽을 수 있는 문장들.

그 문장은 보기보다 쉽고, 생각보다 깊었다.

쉽지 않으면 돌아오지 못하고, 깊지 않으면 오래 서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사마천 묘표(묘비)
Tombstone of Sima Qian — 사마천 묘역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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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선택은 흔히 영웅담으로 포장되지만, 그는 영웅의 무기를 갖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은 견딘 시간과 종이, 그리고 끝내 덮지 않은 눈이었다.

그 눈으로 그는 자신의 상처를, 타인의 과오를, 나라의 영광을 같은 잉크로 적었다.

그래서 그의 책은 단지 과거의 목록이 아니라, 선택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되었다.

읽는 이는 저울 위에서 자신의 발꿈치를 느낀다.

여기서 더 밀면 어느 쪽이 내려갈지, 문장이 알려 준다.


다시 처음의 전각으로 돌아가 보자.

이릉의 변론이 끝나던 그 순간, 사마천이 한 걸은 뒤로 물러섰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는 편하고 빠른 죽음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우리는 『사기』의 마지막 장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앞으로 걸었다.

앞으로 걷고, 옆으로 물러서고,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그 반복이 한 권의 세계를 만들었다.


밤이 깊어 필선이 흔들릴 때, 그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하늘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일은 곧 사람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 문장을 조용히 책 속에 묻었다.

독자가 언젠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질문을 하게 될 때, 스스로 찾아내도록.

그는 촛불을 낮추고, 마지막 줄을 썼다.

사람의 일은 길고, 평판은 짧다.

기록은 그 사이에서 길을 만든다.

그 길을 지나가는 발걸음마다, 책장이 다시 열린다.


Temple of Sima Qian in Hancheng — 사마천 사당 전경, 언덕 위 전경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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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 사마천의 정확한 생년은 자료가 갈리고, 원고 유통 방식과 사본 분산에 대해서도 구전과 후대 기술이 교차합니다.

(논쟁) 궁형 이후의 관직·직함, 집필 완료 시점(기원전 94년 전후)과 말년의 행적에 관해 학설이 갈려 이 글은 통용되는 견해만을 압축 반영했습니다.

(어원) 『사기(史記)』의 체제는 본기·표·서·세가·열전의 5부로, “윗사람에서 아랫사람까지” 시선을 왕복시키려는 편집 의도가 뚜렷합니다.


At Emperor Wu’s court, historian Sima Qian defended the defeated general Li Ling and was condemned to castration. 

Choosing life over death, he vowed to finish the Shiji—130 scrolls of annals, tables, treatises, noble houses, and biographies. 

He wrote plainly, weighing victors and losers alike, and explained his choice in a famous letter to Ren An. 

Copied and spread, the work outlived him and became China’s classic mirror of history.

 Suffering in silence, he made record-keeping a moral 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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