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8대 아달라 이사금: 박씨 왕조의 황혼과 석씨 왕조의 새벽 (King Adalla of Silla)


신라 8대 아달라 이사금: 기록과 설화 사이, 한 왕조의 황혼


격동의 시대, 수수께끼의 군주

신라 초기, 나라는 아직 하나의 통일된 왕국이라기보다 박(朴)·석(昔)·김(金) 세 성씨의 강력한 부족 연합체에 가까웠습니다. 

왕위는 혈통에 따른 확고한 계승이 아닌, 세력 간의 각축과 연합을 통해 위태롭게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정치 지형의 한가운데, 제8대 국왕 아달라 이사금(阿達羅 尼師今, 재위 154~184)이 서 있습니다. 

그는 신라 건국을 이끈 박씨 왕조의 초기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군주로서, 신라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명확한 기록보다 해석의 여지가 더 많은 공백과 설화로 채워져 있습니다. 

재위 기간의 마지막 10년은 『삼국사기』에서 통째로 사라졌고, 그의 치세에 벌어진 기이한 일들은 ‘연오랑 세오녀’라는 신비로운 설화 속에 암호처럼 숨겨져 있습니다. 

아달라 이사금의 시대는 왜 이토록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을까요?

이 포스팅은 『삼국사기』에 남겨진 단편적인 기록과 『삼국유사』에 실린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교차 분석하여, 기록과 설화라는 두 개의 퍼즐 조각을 맞춰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초기 박씨 왕조의 쇠퇴 과정과 새로운 지배 세력인 석씨 왕조의 등장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한 군주의 비극적 운명 속에 담긴 신라 초기 권력 변동의 역동성을 재구성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1. 영토 확장과 국력 신장: 아달라 이사금의 초기 치세 (154~160년)

아달라 이사금의 즉위 초기는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습니다. 

그는 선대 왕들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신라의 영향력을 경주 분지를 넘어 소백산맥 너머까지 확장하려는 뚜렷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는 신라가 단순한 부족 연맹체를 넘어, 영토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소백산맥을 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신라는 이 시기 소문국(현 의성), 감문국(현 김천), 사벌국(현 상주) 등 경북 내륙의 소국들을 차례로 복속시키며 배후지를 단단히 다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토 확장은 필연적으로 서쪽의 강자 백제와의 충돌을 예고하는 전략적 포석이기도 했습니다.


아달라 이사금의 초기 치세에 이루어진 주요 업적들은 그의 국가 경영 철학과 전략적 비전을 잘 보여줍니다.

• 계립령(鷄立嶺) 개척 (156년): 재위 3년, 신라는 계립령에 길을 열었습니다. 

현재의 문경 하늘재로 추정되는 이 길은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길을 낸 것을 넘어, 경상도 내륙에 갇혀 있던 신라의 시야가 한강 유역을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 죽령(竹嶺) 개통 (158년): 2년 뒤, 아달라 이사금은 변방의 관리였던 죽죽(竹竹)에게 명하여 죽령 길을 개통했습니다. 

이 길은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핵심 교통로로서, 신라가 소백산맥이라는 지리적 장벽을 넘어 중원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신라는 잠재적 경쟁자인 백제와 국경을 맞대고 본격적인 경쟁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 지방 제도 정비: 영토 확장과 더불어 지방에 대한 통제력 강화도 병행되었습니다. 

재위 4년 감물현(甘勿縣, 현 충북 괴산)과 마산현(馬山縣, 현 충남 보령의 남포면)을 설치한 기록은 신라가 새로 획득한 정복지를 단순한 점령지가 아닌, 중앙 정부의 통치를 받는 행정 구역으로 편입하며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해 나갔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치세 초반의 아달라 이사금은 영토를 넓히고 제도를 정비하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성공적인 군주였습니다. 

그의 정책들은 신라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동시에, 인접한 백제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운명은 곧 대내외적 위기와 맞물려 그의 왕국을 송두리째 흔들게 됩니다.


2. 균열의 시작: 대내외적 위기와 민심 이반 (160~173년)

안정적으로 국력을 키워가던 아달라 이사금의 통치에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은 연이은 재앙으로 경고를 보내는 듯했고, 밖으로는 백제와의 갈등이 격화되었으며, 안으로는 왕권을 위협하는 반란의 조짐까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위기 속에서 왕권은 흔들리고 민심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의 경고: 연이은 재앙과 민심 악화

아달라 이사금의 고난은 재위 7년(16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삼국사기』는 당시 신라를 덮친 재앙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 재위 7년: 폭우로 수도 금성의 북문이 무너지고 가옥이 침수되는 큰 홍수가 발생했습니다.

• 재위 8년: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농작물을 초토화시키고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 재위 17년: 수도 서라벌에 큰 지진이 발생했으며, 우박과 서리가 내려 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러한 천재지변은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 ‘왕의 부덕(不德)’의 결과로 해석되었습니다. 

백성들은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왕의 통치 능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흉흉해진 민심은 곧 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졌습니다.


외부의 적, 내부의 반란: 백제와의 갈등 격화

민심이 흔들리는 와중에 대외 관계와 내부 통제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재위 12년(165년), 신라 최초의 반역 모의 사건으로 기록된 '아찬 길선(吉宣)의 모반 사건'이 터졌습니다.(사료간 기년 차이 존재)

길선의 반란은 사전에 발각되었으나, 그는 국경을 넘어 백제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달라 이사금은 백제에 길선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백제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나라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외교적 갈등은 곧 군사적 충돌로 비화했습니다.


1. 신라의 선제공격과 퇴각: 분노한 아달라 이사금은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군이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자 군량이 떨어져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해야 했습니다.

2. 백제의 역습: 2년 뒤인 167년, 백제는 역으로 신라 서쪽의 두 성을 함락시키며 반격에 나섰습니다.

3. 신라의 대규모 반격: 이에 아달라 이사금은 일길찬 흥선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기병 8,000을 포함한 28,000여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이는 초기 신라의 국력을 감안할 때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국가의 총력을 기울인 대규모 군사 작전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신라의 거센 공세에 위협을 느낀 백제는 결국 사로잡았던 신라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요청했습니다.


비록 군사적 위신을 회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연이은 재앙과 전쟁, 그리고 내부 반란은 아달라 이사금의 리더십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러한 천재지변과 외침, 내란의 소용돌이는 단순히 아달라 왕국의 기반을 흔드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대 사회에 깊은 불안감을 드리웠고, 그 불안은 신라의 해와 달이 나라를 버렸다는 강력한 신화,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 속에서 목소리를 얻게 됩니다.


3. 사라진 해와 달: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상징과 해석

아달라 이사금 재위 4년(157년)의 일로 기록된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단순한 옛이야기를 넘어, 당시 신라 사회가 겪고 있던 급격한 변화와 정치적 격변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중요한 텍스트입니다. 

이 설화는 표면적으로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가 되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왕권의 향방과 지배 세력의 이동이라는 심상치 않은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먼저, 『삼국유사』에 기록된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해 바닷가에 살던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 연오랑이 바닷가에서 해초를 따던 중, 그가 딛고 있던 바위가 갑자기 움직여 그를 태우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를 비범한 인물로 여겨 왕으로 삼았습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된 아내 세오녀가 그를 찾아 나섰다가 바위 위에 놓인 남편의 신발을 발견하고 그 바위에 올라섰습니다. 

그러자 바위는 또다시 세오녀를 태우고 일본으로 가 부부는 극적으로 재회했고, 세오녀는 귀비(貴妃)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연오랑과 세오녀가 떠나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고 온 세상이 암흑에 잠겼습니다. 

일관(日官)이 점을 치니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던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의 귀환을 요청했지만, 연오랑은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라 돌아갈 수 없다"며 거절하고, 대신 세오녀가 짠 고운 비단을 내주며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사신이 돌아와 그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신라의 해와 달은 다시 빛을 되찾았습니다.


경북 포항시 호미곶면 '연오랑 세오녀 상'


이 신비로운 이야기는 여러 층위의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신라 초기 기록의 연대가 한 갑자(60년)씩 끌어올려졌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 사건이 실제로는 파사 이사금 대의 일이었을 수 있다는 견해도 존재합니다.


정치적 해석: 왕권의 실추와 지배 세력의 이탈

설화에서 '해와 달'은 절대적인 권위, 즉 왕권 혹은 신성한 지배자를 상징합니다.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는 것은 왕권이 심각하게 훼손되었거나 국가적 정통성에 큰 위기가 닥쳤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탈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습니다.

• 박씨계 유력 세력의 망명: 아달라 이사금 시대에 격화된 박씨, 석씨, 김씨 간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밀려난 박씨계 유력 세력이 일본으로 망명한 사건을 은유한다는 해석입니다. 

이들의 이탈로 인해 박씨 왕권의 기반이 크게 흔들렸음을 ‘사라진 해와 달’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 지방 토착 세력의 이탈: 신라에 새로 편입된 영일만 유역의 강력한 토착 세력이 신라의 중앙 통치에 불응하고 집단으로 일본으로 이주한 사건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현재 포항시 남구 오천읍 일대를 중심으로 했던 근기국(斤耆國) 세력이 그 주체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이는 신라가 영토를 확장했지만, 피정복 지역을 완전히 통합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음을 시사합니다.

어떤 해석이든,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탈은 아달라 이사금의 통치 기반에 심각한 손실을 가져온 정치적 사건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문화·기술사적 해석: 선진 기술의 일본 전파

다른 한편으로 이 설화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합니다.

연오랑은 제철 기술, 세오녀는 직조 기술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당시 진한(신라)은 동북아시아의 주요 철 생산지였으며, 직조 기술 또한 매우 발달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연오랑과 세오녀의 도일(渡日)은 단순히 사람의 이동이 아니라, 당시 한반도의 발달된 제철 및 직조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 집단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의 사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정치적 격변과 기술·문화의 전파라는 복합적인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상징의 보고입니다. 

설화가 암시하는 ‘왕권의 상실’이라는 상징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의문의 ‘기록 공백’과 어떻게 연결될까요? 

이 질문은 우리를 박씨 왕조의 마지막 미스터리로 안내합니다.


4. 기록되지 않은 10년: 박씨 왕조의 종언

아달라 이사금의 통치를 둘러싼 가장 큰 미스터리는 그의 재위 마지막 10년에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재위 21년(174년)부터 31년(184년) 사망할 때까지 약 10년간의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기이한 ‘기록의 공백’은 단순한 자료의 누락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히려 이는 기록될 수 없었던, 혹은 의도적으로 삭제된 치명적인 정변이 발생하여 박씨 왕조가 몰락했음을 암시하는 강력한 증거일 수 있습니다.

여러 단편적인 기록과 정황을 종합하면, 박씨 왕조의 몰락과 석씨 왕조의 등장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재구성해 볼 수 있습니다.


• 왕위 계승의 미스터리: 『삼국사기』는 아달라 이사금의 죽음을 "아들이 없이 죽자 국인(國人)들이 벌휴(벌휴 이사금, 석씨)를 왕으로 세웠다"라고 간략하게 기록합니다. 

'국인', 즉 귀족회의의 추대로 평화롭게 왕위가 넘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정치적 음모가 숨어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 왕비 내례부인의 역할에 대한 의혹: 결정적인 단서는 왕비에게 있습니다.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는 '내례부인 박씨(內禮夫人 朴氏)'입니다. 

그런데 훗날 10대 왕위에 오르는 내해 이사금(석씨)의 어머니 역시 이름이 '내례부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별다른 추가 설명이 없다는 점과, 벌휴 이사금의 장손이 아닌 차남의 아들인 내해가 왕위를 계승한 정황을 볼 때, 두 내례부인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 정변 가설의 재구성: 이 단서들을 바탕으로 매우 극적인 가설이 세워집니다. 

왕비 내례부인이 당시 석씨 가문의 실력자였던 벌휴의 둘째 아들 이매(伊買)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고, 이에 격분한 아달라 이사금이 이매를 죽여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앙심을 품은 내례부인이 이매의 아버지인 벌휴와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켜 남편 아달라 이사금을 살해하고 벌휴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추론입니다.


물론 이러한 재구성은 여러 자료에 기반한 추론적 해석으로, 정설이라기보다는 아달라의 '잃어버린 10년'과 박씨 왕조의 갑작스러운 종언을 설명하는 유력한 가설 중 하나입니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기록되지 않은 10년’은 아달라 이사금이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하거나 유폐되어 있었던 치욕의 시간이자, 석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아달라 이사금의 죽음으로 신라 건국 초기를 이끌었던 박씨 왕조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석씨의 시대가 새롭게 열렸습니다. 

그의 비극적인 말년은 신라 초기 왕위 계승이 얼마나 치열하고 무자비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배동 삼릉 전경


5. 역사와 신화가 남긴 유산, 배동 삼릉

아달라 이사금의 시대는 기록의 공백과 설화의 상징성 속에서 막을 내렸지만, 그의 존재는 신라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경주 '배동 삼릉'은 그의 복잡한 역사적 위상과 후대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유산입니다.

아달라 이사금은 두 얼굴의 군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신라의 영토를 소백산맥까지 확장하여 훗날 삼국 경쟁의 기틀을 마련한 진취적인 군주였습니다. 

그의 치세 초반에 이루어진 영토 확장은 신라가 더 큰 국가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연이은 자연재해와 내부 반란, 그리고 격화되는 대외 갈등이라는 복합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된 비운의 군주이기도 합니다.

그의 역사적 아이러니는 사후에 더욱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경주 배동에 있는 그의 무덤은 무려 728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신라 말기에 다시 왕위를 차지한 박씨 왕들인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과 함께 나란히 조성되어 '삼릉(三陵)'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라 하대에 부활한 박씨 왕조가 자신들의 정통성과 역사적 뿌리를 초기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아달라 이사금에게서 찾으려 했던 상징적인 행위로 해석됩니다. 

비록 비극적으로 왕조를 마감했지만, 그는 후대 박씨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시조와 같은 존재로 기억된 것입니다.

물론, 무덤의 양식이 통일신라 시대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추정되어, 현재의 능이 실제 아달라 이사금의 무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학계의 견해도 존재합니다. 

이는 고대사를 해석하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입니다.

최종적으로 아달라 이사금의 시대는 명확한 기록보다는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설화와 후대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한 군주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 신화와 역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신라 초기 권력 구조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화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귀중한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이 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연대 기록과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설화 전승을 함께 놓고, 아달라 이사금(阿達羅 尼師今) 치세를 ‘기록으로 확인되는 부분’과 ‘설화를 통해 해석되는 부분’으로 나눠 재구성한 글입니다.

특히 연오랑·세오녀 설화의 의미(정치적 이탈, 기술·문화 전파 등)는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연구자 해석이 갈리는 영역이므로, 본문에서 제시한 설명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읽어 주세요.

또한 『삼국사기』의 “말년 10년 기록 공백”처럼 사료 자체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은, 단정 대신 정황과 비교를 통해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Adalla Isageum (r. 154–184) ruled in early Silla’s confederation of Park, Seok, and Kim clans. 

He opened key passes over the Sobaek range and expanded the state’s reach. 

After 160, floods, locusts, and earthquakes, plus the Gilseon plot and Baekje wars, weakened royal authority. 

In Samguk yusa, Yeono-rang and Seo-nyeo’s departure makes the sun and moon fade; it is read as a symbol of elite defection or of iron/weaving skills moving to Japan (debated). 

Samguk sagi is silent for his last decade; Adalla died without an heir and nobles raised Seok Beolhyu, ending Park rule. 

Baedong Samneung later associated him with late Park kings, but the tomb attribution is uncer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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