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5대 왕 경종 이야기: 공포 정치의 유산과 과도기 군주의 비극 (King Gyeongjong of Goryeo)


고려 제5대 국왕 경종(景宗) 심층 분석


광종의 그림자 속에서 즉위한 청년 군주

고려 제4대 국왕 광종(光宗)은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과 피의 숙청을 통해 고려 초기의 정치 지형을 뒤흔들었다. 

그의 치세 말기는 공신과 호족, 심지어 왕족까지 무참히 제거되는 공포 정치의 시대였으며, 이는 고려 사회 전체에 깊은 상처와 불안을 남겼다. 

바로 이 격동의 유산 속에서, 그의 장남이자 후계자 아들인 경종(景宗) 왕주(王伷)가 스물한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광종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과 감시 속에서 보낸 유년기는 청년 군주의 정신 세계와 통치 철학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본 글은 고려 제5대 국왕 경종의 생애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겪었던 불안한 성장 과정, 즉위 후 광종의 유산을 뒤엎으려 했던 초기 정책의 명과 암, 고려 경제사의 초석을 놓은 전시과(田柴科) 제도의 제정, 그리고 고려 왕실의 특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복잡한 가족 관계에 이르기까지, 그의 짧지만 중요한 6년의 치세를 다각도로 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포스팅은 경종의 생애를 시기별로 나누어 그의 정치적 결정과 개인적 고뇌의 궤적을 추적할 것이다. 

또한, 그의 핵심 업적인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고, 정치적 환멸 속에 맞이한 그의 마지막 선택이 고려사에 어떤 전환점을 마련했는지 분석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러한 분석을 종합하여 광종의 폭압적인 통치와 성종(成宗)의 제도적 안정기 사이에서 '과도기적 군주'로서 경종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평가하고자 한다.


1. 공포 속에서 자라난 왕세자: 아버지 광종의 그림자

군주의 유년기 경험은 국가 경영의 가장 예측 불가능한 변수 중 하나다. 

특히 선왕의 폭압적 통치 아래 형성된 후계자의 트라우마는, 왕조의 연속성을 담보하는 동시에 급진적 반동 정치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과 같다. 

경종의 사례는 이 위험성을 입증하는 고려 초기의 가장 명백한 증거이다. 

그의 성장 배경을 지배한 것은 아버지 광종이 자행한 공포 정치의 서늘한 그림자였으며, 이는 즉위 후 그의 모든 정치적 행보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가 된다.


불안했던 어린 시절

경종은 아버지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며 자랐다. 

숙청의 칼날은 왕실조차 피해 가지 않았으며, 광종은 유일한 적자(嫡子)인 경종마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960년(광종 11)의 기록에 따르면, 경종은 두려움 때문에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 부자간의 냉랭하고 불안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훗날 성종 대의 명신 최승로(崔承老)는 경종의 유년 시절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경종은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부인의 손에서 자랐던 까닭에 문 밖의 일을 보아서 안 적이 없습니다. 다만 천성이 총명하기 때문에 광종 말년을 당하여 능히 후회할 만한 과오를 면해 천자의 지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평가에 담긴 의미

최승로의 평가는 경종의 생존 전략과 심리 상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부인의 손에서 자랐다’고 기록한 점을 고려할 때, 경종이 광종의 의심을 피하고 생존할 수 있었던 데에는 어머니 대목왕후(大穆王后)의 적극적인 보호가 결정적으로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대목왕후는 광종의 부인이자 누이였지만, 호족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킨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에 반대하는 등 정치적으로 광종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정치적 성향이 다른 부모 사이에서 경종이 겪었을 심리적 압박은 상당했을 것이다.


‘후회할 만한 과오를 면했다’는 대목은 그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얼마나 극도로 자신을 억제하고 자기 검열을 했는지를 암시한다. 

천성적인 총명함은 학문적 성취가 아닌, 살벌한 궁중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로 발현되었던 셈이다.


왕위 계승 과정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경종은 11세가 되던 965년(광종 16), 다음 왕위를 이을 후계자인 ‘정윤(正胤)’으로 책봉되었다. 

이때 그는 성인식인 관례(冠禮)를 치르고, 군사 통수권과 비서실장 격의 고위 관직인 ‘제군사(諸軍事)·내의령(內議令)’에 임명되었다. 

11세의 소년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는 후계자로서 그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경종의 유년기는 아버지에 대한 깊은 공포와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자기 통제로 점철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정치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즉위 후 단행한 ‘반(反)광종’ 정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 반작용의 시대: 광종의 유산을 뒤엎다

새로운 군주가 선왕의 정책을 뒤집는 것은 단순한 과거에 대한 반발을 넘어, 기존의 정치 구도를 재편하고 새로운 지지 기반을 확보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다. 

21세에 즉위한 경종이 펼친 ‘반(反)광종’ 정책은 억눌렸던 정치적 불만을 해소하려는 계산된 시도였으나, 억제되었던 증오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는 데 따르는 내재적 위험성을 간과함으로써 예기치 못한 혼란을 야기했다.


광종 시대의 청산 조치

경종은 즉위 직후, 아버지의 시대를 부정하는 일련의 조치를 신속하게 단행했다. 

이는 광종 치하에서 고통받았던 세력의 민심을 수습하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는 의도였다.


• 사면 및 복권: 광종 시절 억울하게 귀양 가거나 투옥되었던 인물들을 대거 석방하고, 죄에 연루된 자들을 사면했다.

• 인사 정책: 광종 대에 승진하지 못했던 인물들을 발탁하고, 억울하게 관작을 빼앗긴 자들을 복직시켰다.

• 민생 안정: 백성의 채무와 조세 부담을 경감하고, 공포 정치의 상징이었던 임시 감옥을 철거했으며, 타인을 모함하던 참소글들을 모두 불태웠다.


'복수법'의 시행과 그 파국

경종의 초기 개혁 중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광종 시대의 피해자들이 직접 가해자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허용한 이른바 ‘복수법’이었다. 

이는 억울한 희생자들의 원한을 풀어주려는 선의에서 출발했으나, 그의 트라우마적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 순진한 정의관과 정치 세력의 야심에 대한 이해 부족이 낳은 치명적인 정책 실패였다.

당시 집정(執政)이었던 왕선(王詵) 등 호족 세력은 이 법을 악용하여 정적을 제거하고 사적인 원한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무분별한 살육이 벌어졌고, 급기야 태조 왕건의 아들인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 사후 효지태자)과 원녕태자(元寧太子)마저 왕선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은 큰 충격에 빠졌다. 

왕실의 어른마저 사적 복수의 희생양이 된 것은 제도의 실패를 넘어 국기(國基)의 문란을 의미했다.


권력 분산과 혼란 수습

복수법이 초래한 참상에 직면한 경종은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는 왕선을 귀양 보내고 사적인 복수를 전면 금지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종은 권력 독점의 폐해를 인식하고, 기존의 단일 집정 체제를 개편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순질(筍質)과 신질(申質)을 각각 좌집정(左執政)과 우집정(右執政)으로 임명하여 권력을 분산시키고 상호 견제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특정 인물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발생하는 전횡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결론적으로 경종의 초기 정책은 광종의 공포 정치를 종식시키려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으나, 복수법과 같은 미숙한 정책은 또 다른 혼란을 야기했다. 

이 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종식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제도 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3. 고려 경제의 초석을 놓다: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제정

안정적인 국가 운영의 핵심은 관료 체계를 뒷받침하는 공정하고 체계적인 보상 시스템을 확립하는 데 있다. 

경종이 976년(경종 원년)에 제정한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는 단순한 토지 분배 제도를 넘어, 고려 왕조의 중앙집권적 통치 기반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제도였다. 

이는 혼란스러웠던 그의 치세 중 가장 중요하고 긍정적인 치적으로 평가받는다.


역분전의 한계

경종 이전 고려의 토지 분급 제도는 태조 왕건이 제정한 역분전(役分田)이었다. 

이는 후삼국 통일 전쟁 과정에서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의 성격으로 토지를 나누어 준 제도였다. 

그러나 지급 기준이 ‘성품의 선악과 공의 많고 적음’이라는 매우 주관적인 잣대에 의존했기 때문에, 국가의 관료 체계가 정비됨에 따라 새로운 기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시정전시과의 혁신성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시정전시과는 관료와 군인들에게 급료로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전지(田地)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시지(柴地)를 지급하는 제도였다. 

이는 국가의 경제 기반인 토지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관료들에게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려는 목적을 가졌다. 

고려 후기의 정치가 이제현(李齊賢)은 토지 제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착한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경계가 바르지 못하면 정전이 공평하게 나누어지지 못하고 관리들의 녹봉도 불공평하게 된다.”


객관적 기준으로의 전환

시정전시과의 가장 큰 혁신은 지급 기준의 변화에 있었다. 

이 제도는 광종 때 제정된 자삼(紫衫)·단삼(丹衫)·비삼(緋衫)·녹삼(綠衫)의 4색 공복(公服) 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관품(官品)의 높낮이에 따라 토지를 차등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는 역분전의 주관적 기준에서 벗어나 국가가 정한 객관적인 관직 체계에 따라 보상을 분배하는 시스템으로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물론, 시정전시과는 초기 제도였기에 여전히 ‘인품(人品)’을 병행하여 고려하는 과도기적 특징을 지녔다. 

여기서 ‘인품’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을 넘어, 군주가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충성도(忠誠度)를 의미하는 정치적 잣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불안정한 왕권을 가진 경종이 객관적 제도를 도입하면서도 자신에게 충성하는 세력을 우대할 수 있는 개인적 권한의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그럼에도 공적인 기준인 관품을 중심으로 제도를 설계했다는 점에서, 이는 고려가 시스템에 기반한 국가로 발전하는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시정전시과는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목종 대의 개정전시과와 문종 대의 경정전시과로 이어지며 고려 왕조의 경제적 근간이 되는 토지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다진 경종은 왕실 내부의 안정을 위해 복잡한 혼인 관계를 통해 권력의 토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4. 근친혼의 절정: 피로 얽힌 권력과 가족

고려 초기 왕실의 근친혼은 단순한 풍습이 아니었다. 

이는 왕실 혈통의 신성성을 유지하고, 유력 호족 세력과의 중첩된 결속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었다. 

특히 경종 대에 이르러 근친혼이 그 절정에 달했다는 사실은, 당시 고려 왕실이 처한 정치적 상황과 권력 구조의 특수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겹사돈으로 얽힌 왕실

경종은 총 다섯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들 모두가 사촌 관계였다는 점은 고려 왕실 족내혼(族內婚)의 복잡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각 왕후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구분
시호/작호
관계
비고
제1비
헌숙왕후 김씨
고종사촌
신라 경순왕의 딸. 신라계 세력 포섭 목적.
제2비
헌의왕후 유씨
친사촌, 고종사촌
숙부 문원대왕의 딸.
제3비
헌애왕후 황보씨
친사촌, 외사촌, 고종사촌
훗날 '천추태후'. 유일한 아들 목종(穆宗)을 낳음.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
친사촌, 외사촌, 고종사촌
헌애왕후의 친동생. 훗날 현종(顯宗)의 어머니가 됨.
후궁
대명궁부인 유씨
친사촌, 고종사촌
숙부 원장태자의 딸.


근친혼의 정치적 해석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근친혼은 태조 왕건이 자신의 혈통을 신라의 ‘진골(眞骨)’처럼 특별하고 신성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구사했던 전략에서 비롯되었다. 

왕건의 아들, 딸들이 서로 혼인함으로써 왕실의 혈통적 순수성을 지키고 외부 세력의 도전을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경종의 혼인 역시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특히 그가 황주 황보씨 가문의 자매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를 나란히 왕후로 맞이한 사실이 주목된다.

황주 황보씨는 경종의 어머니인 대목왕후의 친정이자,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호족 세력이었다. 

두 자매와의 혼인은 외가와의 연대를 강화하고, 어머니로부터 이어진 정치적 지지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명백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들이 부계 성씨인 왕씨가 아닌 외조모의 성씨인 황보씨를 사용한 것은, 이들의 어머니 또한 왕실의 족내혼으로 태어난 왕씨였기에 고려 초기의 관습에 따라 모계 성을 따른 것이다. (논쟁)

결론적으로 경종의 혼인 정책은 왕실의 안정과 권력 강화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고려 왕실의 폐쇄적이고 복잡한 가족 관계를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처럼 제도적, 혈연적 기반을 다지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통치 말년에 이르러 깊은 정치적 환멸에 빠지며 국정에서 멀어지게 된다.


5. 정치로부터의 도피: 환멸과 마지막 나날들

군주가 국정에서 손을 놓고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현상은 단순히 개인의 나태함으로 치부할 수 없다.

이는 극심한 정치적 스트레스와 무력감이 초래하는 권력 공백의 위험을 내포하며, 국가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 

통치 후반기, 경종이 보여준 정치적 무기력은 그의 개인적 비극인 동시에 고려 조정이 직면한 또 다른 위기였다.


최승로의 비판적 평가

경종의 통치 후반기 모습은 최승로의 신랄한 비판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경종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오락에 빠졌다고 지적하며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치의 법도를 알지 못하여 권호(權豪)에게 오로지 맡겼기 때문에 피해가 종친에게까지 미치고... 정사를 게을리 하여 드디어 여색에 빠져서 향악을 즐기고 잇따라 바둑과 장기로써 종일토록 시간을 보내니, 경종의 좌우에는 오직 중관(中官)과 내수(內竪)뿐이었습니다.”


최승로의 지적은 경종이 국정 운영을 권세가들에게 일임한 채, 여색과 향악, 바둑과 장기 등 오락에 몰두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곁에는 올바른 조언을 해 줄 신하 대신 내시들만 남았다는 것은, 그가 정상적인 국정 시스템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었는지를 방증한다.


정치적 환멸의 원인

경종이 이처럼 정사에 뜻을 잃고 현실을 도피하게 된 원인은 복합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경험한 아버지의 공포 정치는 그에게 깊은 정치적 트라우마를 남겼다. 

복수법의 실패로 인한 참상은 경종에게 정치적 행위의 파괴적 잠재력을 각인시켰을 것이며, 이는 그의 유년기 트라우마와 결합하여 국정 운영에 대한 깊은 회의감으로 이어졌다. 

또한,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하들의 정쟁과 권력 다툼은 정치 자체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980년(경종 5), 신하 왕승(王承)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최지몽(崔知夢)의 사전 경고로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경종의 정치적 불안감과 인간에 대한 불신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론적으로 경종의 말년은 정치적 성과보다는 개인적인 도피와 회의로 특징지어진다. 

그의 짧은 생애는 이렇듯 비극적으로 저물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병세가 위독해진 그가 마지막으로 내린 결정은, 그의 재위 기간을 다른 시각에서 평가하게 만드는 현명한 선택이었으며 후대에 큰 칭송을 받게 된다.


6. 마지막 예지(叡智): 아들이 아닌 사촌에게 왕위를 넘기다

왕위 계승 결정은 한 왕조의 운명을 좌우하는 가장 중차대한 정치적 행위이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앞둔 경종이 자신의 갓난아들이 아닌, 사촌 동생에게 왕위를 넘긴 결정은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국가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이성적이고 현명한 선택으로 평가받는다.


경종의 마지막 결단

981년(경종 6), 병세가 위독해진 경종은 중대한 기로에 섰다. 

그에게는 헌애왕후(천추태후)가 낳은 유일한 아들 왕송(王誦, 훗날 목종)이 있었으나, 이제 갓난아기에 불과했다. 

만약 이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경우, 외척과 권신들에 의한 왕위 찬탈 시도와 끝없는 정치적 혼란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이는 광종의 공포 정치와 즉위 초의 혼란을 겪으며 안정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경종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성종으로의 선위(禪位)

고심 끝에 경종은 자신의 사촌 동생이자 처남인 개령군 왕치(王治, 훗날 성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왕치는 학식이 높고 현명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으며, 성인이었기에 즉시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 수 있는 인물이었다. 

경종의 이 결단에 대해, 그의 치세에 비판적이었던 최승로조차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경종에게도 또한 족히 아름답다고 칭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대저 처음 병환에 걸렸을 때 아직 위독하지 않았는데 침실에서 성상(성종)의 손을 잡고 군국의 큰 임무를 부탁하였으니, 이는 사직의 복일뿐만 아니라 또한 인민의 행복이었다.”


최승로는 경종의 이 마지막 선택을 ‘아름답다고 칭할 만한 것’이라 평하며, 이것이 국가와 백성을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음을 강조했다. 

경종은 죽기 직전 남긴 유조(遺詔)를 통해 자신의 결정을 공식화하고 신하들에게 당부했다.


"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치(治)는 나라의 현명한 친척이며 내(予)가 아끼는 자다. 그는 반드시 조종(祖宗)의 대업(大業)을 받들고 국가(國家)의 창기(昌基)를 보호할 것이다. 아! 너희(爾) 공경재신(公卿宰臣)들아, 내 개제(介弟)를 존경하고 보호하라."


최승로의 평가가 역설적으로 경종의 재위 기간 동안 다른 큰 업적이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그의 현명한 선택은 고려가 혼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안정적인 발전기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영릉 전경


비극적 시대의 과도기적 군주

고려 제5대 국왕 경종의 6년 치세는 짧았지만 고려 초기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는 아버지 광종이 남긴 공포 정치의 상처를 안고 즉위하여, 그 유산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혼란을 겪어야 했던 비운의 군주였다.


본 글에서 분석했듯이, 그의 삶은 복합적인 면모를 지닌다. 

아버지의 의심 속에서 형성된 정신적 트라우마는 즉위 후 ‘복수법’과 같은 미숙한 정책으로 이어지며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도 그는 고려 경제의 근간이 된 시정전시과를 제정하여 국가 시스템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복잡한 근친혼을 통해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으나, 결국 정치에 대한 깊은 환멸 속에 국정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치세는 역설적인 평가를 남긴다. 

그의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긍정적 유산인 시정전시과는 국가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행위였던 반면, 후대에 가장 칭송받은 행위인 성종으로의 선위는 그 스스로가 정치적 한계에 부딪혔음을 인정하는 결정이었다.


결론적으로 경종은 ‘아버지와 신하들에게 눌려 기를 펴지 못한 임금’이었지만, 그의 치세는 광종의 폭압적인 통치와 성종의 제도적 안정기를 잇는 필수적인 ‘과도기’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그의 삶은 짧고 비극적이었지만, 그의 존재와 마지막 선택이 없었다면 고려 초기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경종은 화려한 정복 군주나 위대한 개혁 군주는 아니었지만, 격동의 시대에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을 고뇌하며 완수한 과도기적 군주로 기억될 자격이 충분하다.


이 글은 고려 제5대 국왕 경종의 생애와 통치를, 『고려사』·『고려사절요』 등 기본 사료와 일반적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해설형 글입니다. 

날짜·인물 관계·제도(시정전시과 등)는 가능한 한 사료에 맞추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 서술을 압축하거나 경종의 심리·동기를 합리적 범위에서 추론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부 평가는 학자들 사이에 다른 견해가 공존하므로, 이 글은 “정설”이 아닌 유력한 해석의 한 갈래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보다 학술적인 검토를 원하신다면 전문 연구서·논문과 함께 비교·참고해 주세요.


This article portrays King Gyeongjong of Goryeo as a deeply ambivalent, transitional monarch caught between Gwangjong’s terror and Seongjong’s institutional reform.

Raised under his father’s purges, he came to the throne traumatized and quickly moved to undo Gwangjong’s legacy with amnesties and personnel changes, but his “revenge law” unleashed new violence and forced him to reconfigure power among competing elites. 

His major constructive achievement, the initial Jeonsigwa land-allotment system, laid an economic foundation for a bureaucratic state. 

At the same time, extreme consanguineous marriages reveal how tightly power was bound to royal blood. In his later years he withdrew into pleasure and lost grip on politics, yet his final decision to bypass his infant son and name his cousin Seongjong as heir averted a succession crisis and secured Goryeo’s path toward greater st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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