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이야기, 도미설화: 문헌에서 구전으로, 어떻게 변화했을까?
1.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는 이야기
오래된 이야기는 박물관의 유물처럼 한곳에 고정된 채 먼지만 쌓여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입과 마음을 거치며 새로운 옷을 입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며 그곳의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며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백제 시대의 '도미설화'는 바로 이러한 이야기의 생명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에 짧게 기록된 하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여러 지역에서 각기 다른 모습의 구전 설화로 뿌리내리고, 오늘날에는 현대적인 문화 콘텐츠로까지 재탄생하게 되었는지 그 흥미로운 변화 과정을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제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인 『삼국사기』의 기록부터 살펴보겠습니다.
2. 모든 이야기의 시작: 『삼국사기』 속 도미 부부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도미설화는 모든 변형된 이야기의 원형이 되는 뿌리입니다.
그 내용은 왕의 폭력적인 욕망에 맞선 한 부부의 고난과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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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도미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이야기는 백제의 개루왕(蓋婁王)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평범한 백성인 도미에게 아름답고 정절이 곧기로 소문난 아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도미를 불러 그의 아내를 시험해 보겠다고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원전에는 '개루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많은 후대 해석과 현대 창작물에서는 이 인물을 비극적 최후를 맞은 '개로왕(蓋鹵王)'과 동일시하여 이야기에 역사적 비애를 더하기도 합니다.(논쟁)
왕은 먼저 신하를 자신처럼 꾸며 도미의 집에 보냅니다.
하지만 도미의 아내는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의 계집종을 단장시켜 대신 들여보내 첫 번째 위기를 넘깁니다.
이에 분노한 왕은 죄 없는 도미의 두 눈을 뽑아 강물에 띄워 보내고, 이번에는 직접 도미의 아내를 겁탈하려 합니다.
그녀는 "지금은 월경으로 몸이 더러우니 며칠 뒤 목욕을 하고 오겠습니다"라고 둘러대어 두 번째 위기에서 벗어날 시간을 법니다.
궁을 탈출한 도미의 아내는 강가에서 기적적으로 배를 만나 남편이 있는 섬에 도착합니다.
부부는 극적으로 재회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구려 땅으로 넘어가 평생을 가난한 나그네로 살다가 생을 마칩니다.(전승)
이 이야기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을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세 가지 깊은 울림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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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미부인 표준영정(제60호_1995년 지정, 윤여환 作) |
1. 지혜로운 여성상
도미의 아내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정절을 지키기만 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녀는 왕의 첫 번째 시험에 계집종을 대신 보내고, 두 번째 위기에서는 월경을 핑계로 시간을 버는 등 적극적인 지혜와 기지를 발휘하여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적인 여성상을 보여줍니다.
2. 권력자의 폭정과 그 한계
개루왕은 자신의 절대 권력을 이용해 백성의 아내를 탐하고, 무고한 도미의 눈을 멀게 하는 등 잔인한 폭정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도 결국 도미의 아내를 차지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이는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도 한 인간의 굳건한 의지와 신념까지는 꺾을 수 없다는 권력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3. 행복하지만은 않은 결말
부부가 다시 만났다는 점은 분명 희망적이지만, 그들이 고향을 등지고 타국에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단순한 '권선징악' 구조를 넘어섭니다.
악한 왕은 벌을 받지 않고, 선한 부부는 온전한 행복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은 복합적인 여운을 남기며 당시 피지배층이 겪어야 했던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바로 이 안타까운 결말,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비극적 여운이 후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 부부를 자신들의 땅으로 데려와 새로운 뿌리를 내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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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루왕의 손길에서 벗어나 재회한 도미와 부인 |
3. 이야기가 땅에 뿌리내리다: 지역의 옷을 입은 도미설화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 자체로도 완결된 이야기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특정 지역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사람들의 정서와 결합하여 훨씬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로 재탄생했습니다.
마치 씨앗이 땅에 뿌리내려 그 토양에 맞는 꽃을 피우는 것과 같습니다.
3.1. 충남 보령: '아랑'이라는 이름을 얻고 삶의 터전을 갖다
도미설화는 오늘날 충남 보령을 대표하는 설화로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문헌 속 인물이었던 도미 부부는 보령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터전을 얻고, 지역 사람들의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보령에는 도미 부인이 태어났다는 '미인도(美人島)'와 부부가 살았다는 '도미항(都彌項)' 등 설화와 관련된 지명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지역 공동체는 1994년 그녀의 영정을 모신 '도미부인사당'을 세우고 훗날 부부의 '합장묘'까지 조성하며 그들의 넋을 기렸습니다.
특히 보령의 사람들은 이름 없이 '도미의 아내'로만 불리던 그녀에게 '아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이는 그녀를 한 명의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려는 따뜻한 마음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충남 보령 지역의 구전 설화는 원전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도 몇 가지 흥미로운 변화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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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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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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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 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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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의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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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호소민 (평범한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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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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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위기를 피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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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종을 대신 보내고(1차), 월경을 핑계(2차)로 대는 등 복합적인
기지를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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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종 없이, 월경 등 자신의 몸이 더럽다고 주장하는 방법만으로
위기를 극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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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화는 이야기를 더욱 민중 친화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막연한 '백성'이었던 도미에게 '목수'라는 구체적인 직업을 부여해 손에 잡히는 현실감을 더했습니다.
무엇보다 '계집종'을 대신 보내는 귀족적인 설정을 없앤 점이 중요합니다.
이로써 아랑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대신 오직 자신의 몸과 지혜만으로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하는, 더 절박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거듭납니다.
가진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녀의 승리는 더욱 감동적이고 통쾌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3.2. 경남 진해: 부부의 흔적을 품었던 곳
놀랍게도 도미 부부의 흔적은 백제 땅이었던 보령뿐만 아니라, 옛 신라 땅이었던 경남 진해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원래 경남 진해에는 도미의 무덤으로 알려진 '도미총(都彌塚)'이 있었습니다.
이는 도미설화가 백제의 국경을 넘어 신라 지역까지 널리 퍼져나갔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한 나라의 이야기가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나라에까지 전해질 만큼, 도미 부부의 이야기가 지닌 감동의 힘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03년, 진해에 있던 도미총은 충남 보령의 도미부인사당 옆으로 옮겨져 부부가 함께 잠든 합장묘로 새롭게 조성되었습니다.
이는 각기 다른 지역에서 따로 전승되던 부부의 흔적이 마침내 하나로 합쳐진 매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오랜 시간 흩어져 있던 이야기가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이야기가 지역과 만나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면, 현대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을까요?
4.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현대적 재탄생
도미설화의 생명력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이야기는 다양한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며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뮤지컬 <아랑가>입니다.
뮤지컬 <아랑가>는 도미설화의 핵심 줄거리를 바탕으로 현대적인 감각과 상상력을 더해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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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아랑가 |
• '아랑'이라는 이름의 사용
뮤지컬은 『삼국사기』의 '도미의 아내' 대신, 충남 보령의 구전 설화에서 차용한 '아랑'이라는 이름을 주인공에게 부여했습니다.
이를 통해 캐릭터에 뚜렷한 개성을 부여하고, 그녀를 한 명의 독립된 주체로 세우는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 새로운 갈등 구조 추가
원전에는 없는 창의적인 설정들이 추가되어 극의 재미를 더했습니다.
예를 들어, 개로왕이 꿈속에서 먼저 아랑을 만난다는 판타지적 요소를 더하거나, 도미의 정치적 경쟁자인 '도림'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켜 단순한 치정 문제를 넘어선 정치적 암투와 갈등 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를 통해 극적인 긴장감을 한층 높였습니다.
이렇듯 도미설화는 현재에도 활발히 변주되며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5. 이야기는 왜, 어떻게 살아남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도미설화가 걸어온 여정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삼국사기』의 짧은 기록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충남 보령과 경남 진해라는 지역의 색채를 입고 더욱 풍성해졌으며, 마침내 뮤지컬 <아랑가>라는 현대적인 형태로 우리 곁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도미설화의 변화 과정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려줍니다.
좋은 이야기는 결코 박제된 채 멈춰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시대를 건너오며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 그리고 새로운 상상력을 끊임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스스로의 모습을 바꾸고 성장하기에, 이야기는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에도 낡지 않고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도미설화는 바로 그 살아있는 이야기의 힘을 증명하는 가장 아름다운 사례입니다.
이 글은 『삼국사기』 도미설화 기록과 충남 보령·경남 진해 일대의 구전 설화, 그리고 현대 뮤지컬 〈아랑가〉 등 2차 창작물을 함께 참고해 구성한 서사형 해설 글입니다.
역사 기록이 남아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옮기되, 인물의 심리나 장면 전환, 표현 일부는 독자의 몰입을 돕기 위해 서술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도미·도미의 아내(아랑)·개루왕/개로왕처럼 실존 여부·시기·세부 행적에 논쟁 여지가 있는 지점은 학계 통설을 우선 따르되, 지역 전승과 현대 재해석이 덧입혀진 층위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소개했습니다.
설화 특성상 서로 다른 버전이 공존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지명과 인명은 한국어 표기를 우선 사용하고, 필요한 경우에만 한자나 원어를 병기했습니다.
이 글은 학술 논문이 아닌 교양·콘텐츠 기획을 위한 안내 성격의 글이므로, 더 깊은 연구나 창작을 준비하신다면 반드시 원문 사료와 전문 연구서를 추가로 확인해 주세요.
This article follows how the Baekje folktale of Domi and his wife changes over time.
It begins with the brief “Samguk Sagi” account of a clever wife who outwits a predatory king, saves her blinded husband and escapes with him, choosing exile over surrendering her dignity.
The story is then rooted in Korean places like Boryeong and Jinhae, where local legends, shrines and graves give the nameless wife a name, Arang, and turn Domi into a carpenter.
Finally, modern works such as the musical “Arangga” add new characters and conflicts, showing how a good story survives by changing while keeping its core of resistance, love and integ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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