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홀로 선 독재자, 연개소문(淵蓋蘇文)
불길한 별의 탄생
1장. 쇠락한 대국의 그림자 속에서
7세기 초, 고구려(高句麗, 북방의 대제국)는 장수태왕(長壽太王) 시대의 영광을 뒤로하고 서서히 노쇠해가는 거대한 성채와 같았다.
내부적으로는 왕권이 약화되고, 호족공화제(豪族共和制)라는 귀족연립정권(貴族聯立政權) 체제 아래 대대로(大對盧, 고구려의 수상직)를 비롯한 최고위 귀족들이 국정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평양(平壤)의 동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신흥 귀족 세력의 일원으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연씨 가문은 대대로 최고위 관직인 막리지(莫離支,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최고위 관직) 를 세습해 온 명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연자유(淵子遊), 아버지는 동부대인(東部大人) 연태조(淵太祚)였다.
연개소문의 본명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당나라(唐, 618년 건국된 중원의 통일 제국)의 기록에는 당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기록되었으며, 그의 성씨 '연(淵)'은 당나라 피휘(避諱) 문화에 근거한 후대 추측이다. (추정)
일본의 기록인 『일본서기』에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표기되는데, 이는 ‘연(淵)’을 뜻하는 고구려 고유어인 ‘이리’ 혹은 ‘나리’나 ‘어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연씨 가문이 "샘(泉)이나 물(淵)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적 설화와 연결된다. (논쟁)
일부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 개금(蓋金)으로도 표기되는데, 이는 '소문'을 '금(金)'의 뜻을 빌려 기록한 것일 수 있다.
연개소문은 젊은 시절부터 웅장한 용모와 걸출한 담력, 위엄을 겸비하여 영웅적 풍모를 지녔으나, 그 성격은 흉악하고 잔인하며 포악하다는 평판이 지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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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개소문 영정(상상도) |
노대신 A (국내성계 구 귀족): "동부대인(東部大人) 연태조(淵太祚)가 세상을 떠났지만, 아들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그 자리를 세습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흉악하고 잔인한(凶惡殘忍) 성품을 보시오. 그를 막리지에 앉힌다면, 나라의 운명은 그의 손아귀에 사유(私有)될 것입니다!"
연개소문 (당시 청년 귀족): (고개를 숙이고, 겉으로는 공손하나 눈빛은 차갑다) "여러 대인(大人)들의 걱정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저는 조정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단지 저에게 임시로 직위를 맡겨 보십시오. 만약 제가 한 치의 실책이라도 저지른다면, 그때 가서 폐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머리를 조아려 간청합니다."
연개소문은 결국 애걸 끝에 아버지의 직위를 승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을 통해 기존 귀족들이 자신의 가문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며, 왕실 중심으로 권력을 재편하려는 영류왕(榮留王, 고건무, 제27대 왕)의 중앙집권적 개혁 의도를 분명히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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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작 칼과 꽃에서의 영류왕 |
2장. 외교적 갈등과 정변의 도화선
연개소문이 직위를 계승할 무렵,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이 중원을 통일하고 중화 중심의 천하 질서를 강요하며 고구려를 압박하는 상황이었다.
영류왕은 장수(將帥) 출신으로 수나라(隋, 581년 수립된 통일 왕조)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바 있었으나, 당의 압력 앞에서 강경책보다는 온건책을 선택했다.
그는 평화를 통해 국력을 재정비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내부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사회적 배경 및 정책적 갈등
• 영류왕의 개혁: 영류왕은 귀족의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중앙군으로 흡수하여 고구려의 동원 역량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개혁을 25년에 걸쳐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의 결과, 645년 고구려는 역사상 최대 규모인 2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추정)
• 친당 외교의 상징: 영류왕은 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628년(영류왕 11년)에는 당에게 고구려의 역도(域圖, 지도)를 바쳤으며, 635년에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경관(京觀, 전사자 시체를 모은 승전 기념탑)을 당의 요구에 따라 헐어버렸다.
연개소문: (숨기지 않는 분노) "폐하! 역도(域圖)를 바치고, 수나라 오랑캐를 물리친 우리의 승전탑마저 스스로 허물다니! 이는 어찌 된 일입니까? 당 태종(李世民)은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中華)에 복속시키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습니다. 저자세로 일관하는 것은 우리 민족적 자존심(民族的自尊心)을 무너뜨리고 나라의 기강을 흔들 뿐입니다!"
영류왕 (노련하게): "연개소문! 그대가 보지 못하는가? 수(隋)가 고구려를 치다 망했다. 당은 수와 다르다. 짐은 전쟁을 피할 시간을 벌어 왕권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군권을 통합하고 있소. 그것이 진정 고구려를 지키는 길이다! 당과의 충돌은 국력 낭비일 뿐!"
연개소문은 이 시기 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도교(道敎) 정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643년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에 도사 8명을 초빙하고 『노자도덕경』을 들여와 도관(道觀)을 세우고 불교 사찰을 빼앗아 도교를 육성했는데, 이는 당 왕실이 노자(老子)를 조상으로 받드는 것을 이용해 환심을 얻고, 동시에 왕실 및 구 귀족 세력과 밀접한 불교계와 유교계를 견제하려는 다목적 정치 전략이었다.
하지만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세습 특권 해체와 중앙 관료화를 강력히 추진했다.
영류왕 25년(642년) 1월,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천리장성(千里長城, 부여성에서 발해만 비사성까지 이어진 서부 국경 방어선) 축조 감독관으로 임명하여 중앙 정계에서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 지역으로 축출하려 했다.
이는 영류왕의 피를 흘리지 않는 온건한 개혁의 마무리 단계였다.
3장. 피의 만찬: 180명의 숙청
영류왕과 여러 대신들(대인)은 연개소문이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 감독을 위해 수도 평양을 비운 틈을 타 그를 제거하기로 은밀히 모의했다.
이는 왕권파의 세력 강화와 연씨 가문의 세습 권력을 완전히 해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생존을 건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이었다.
영류왕의 개혁은 정당했으나, 당의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강경파인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한 것은 국론 분열을 심화시키고 인재의 대거 숙청이라는 결과를 낳을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나 제거 모의는 연개소문에게 누설되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연개소문은 선수를 치기로 결단한다.
연개소문: (장성 감독직을 수행한 지 9개월째 되던 해, 642년 10월. 장수들에게 명한다) "왕과 대신들이 나를 역적이라 칭하며 제거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군주의 도리인가! 내가 죽으면 연씨 가문은 멸족할 것이다. 피를 흘리는 대가로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
642년 늦가을 10월, 연개소문은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부병(部兵, 사병)을 동원한 열병식(閱兵式)을 연다는 구실로 대신들을 초청했다.
노장군 B (열병식 참석자): (연개소문을 보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막리지(莫離支)께서는 어찌 이리 병사들을 성대하게 모으셨소. 천리장성(千里長城) 감독은 어찌 두고 오셨소?"
연개소문: (노장군에게 다가가 싸늘하게 속삭인다) "노장군. 오늘 이 자리, 피를 보고자 마련한 만찬이오.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등 나의 가문과 뜻을 달리하는 모든 어른들을 한데 모으기 위함이었지."
손님들이 연회에 참석하여 방심한 순간, 연개소문이 사전에 매복시킨 군사들이 일제히 칼을 휘둘렀다.
이때 무려 100여 명에서 180여 명에 달하는 대신들이 살해당했다. (추정)
이들은 대부분 영류왕의 왕권파 핵심 관료이자 수-당 전쟁을 치러낼 수 있는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연개소문은 사적 원한과 권력 유지를 위해 고구려의 핵심 인재들을 대거 숙청했다.
특히 이 100여 명 이상의 인재 학살은 훗날 당과의 전쟁에서 고구려군 지휘부의 공백을 초래하여 졸전(拙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능한 장교들을 스스로 제거한 것은 마치 독소전쟁 초반의 소련군 대숙청과 같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연개소문은 피범벅이 된 채 말을 달려 궁궐(宮闕)로 돌진했다.
영류왕: (창백한 얼굴로) "연개소문! 이 대역무도한 역적(逆賊)이! 어찌 군주를 시해하려 하는가!"
연개소문: (검을 높이 들며) "군주의 도리를 먼저 저버리신 것은 폐하이십니다! 귀족의 사욕을 위해 국가의 미래를 저버린 것은 폐하이십니다! 제가 아니면 이 고구려를 중화(中華)의 압제로부터 지킬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시해했고, 그 시신을 "몇 동강으로 잘라 도랑 가운데 던져버리는" 극도의 잔혹함과 패륜을 보였다.
이 행위는 자신의 정변에 대한 공포를 국내에 심고, 자신을 향한 왕권파의 원한에 대한 극단적인 반발을 보여주는 정치적 의도였다.
연개소문은 곧 영류왕의 동생인 대양(大陽)의 아들인 장(臧)을 새로운 왕 보장왕(寶藏王, 제28대 왕, 642~668년)으로 옹립했다.
보장왕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왕이었으며, 연개소문은 대막리지(大莫離支, 최고 권력자의 관직)에 올라 고구려의 실질적인 독재자가 되었다.
4장. 운명적인 담판: 김춘추와의 파국
연개소문은 쿠데타 직후 강력한 중앙집권적 리더십을 내세우며 국정을 통제했다.
그는 군사와 행정 조직을 재배치하고, 당나라에 굴복하지 않는 강경한 자주 정책을 고구려의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정권은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지방 세력의 지지를 충분히 얻지 못하는 내부적 불안정성을 안고 있었다.
안시성(安市城, 요동 방어선) 성주가 연개소문의 집권에 복종하지 않은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연개소문이 집권한 직후, 남쪽 신라(新羅)에서는 김춘추(金春秋, 훗날 태종무열왕, 신라의 실권자이자 외교의 귀재)가 평양성을 방문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642년 늦가을).
김춘추는 사위의 실수로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이 백제(百濟)에 함락당하자, 그 패전의 책임을 피하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구려에 백제 협공을 위한 군사 원조를 요청하러 왔다.
김춘추: (보장왕 앞에서 읍하며, 실권자 연개소문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다) "대막리지(大莫離支)께서는 부디 백제의 무도함을 헤아려 주십시오. 고구려와 신라가 손을 잡고 백제를 친다면, 이는 곧 중원(中原)의 당(唐)에 맞설 굳건한 동방의 연대가 될 것입니다."
연개소문: (웅장하고 걸출한 담력으로 김춘추를 내려다본다) "신라의 귀골(貴骨)이 여기까지 왔으니, 그 정성은 가상하오. 허나, 동맹이라 함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법. 신라가 과거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죽령(竹嶺,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의 고개)과 조령(鳥嶺) 이북의 땅을 먼저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어주겠소."
연개소문이 영토 반환을 요구한 것은 당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권 안정화와 전과를 통한 정치적 입지 강화라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성급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춘추는 이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김춘추: "대왕(보장왕)께서는 이웃과 친선(親善)하는 데 뜻이 없으시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연개소문: (격노하며) "배짱이 대단하군. 그렇다면 네 목숨을 이곳에 두고 가거라!"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별관(別館)에 감금했다.
김춘추는 간신히 "귀국하는 즉시 영토를 반환하겠다"는 거짓 편지를 보장왕에게 바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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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무열왕 김춘추 |
연개소문은 불필요한 강경 자세와 성급한 영토 회복 욕심으로 신라와의 화평(和平) 가능성을 단칼에 거부하고, 오히려 신라를 당(唐)과의 연합으로 밀어 넣는 치명적인 외교적 실책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남쪽과 서쪽에서 모두 적을 마주하는 고립 무원(孤立無援)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 결성의 가장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배경 중 하나는 이러한 유교적 충(忠)의 기준뿐 아니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정당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5장. 당 태종과의 자웅을 겨루다 (1차 고구려-당 전쟁)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弑害)하고 권력을 찬탈한 행위는 당 태종에게 고구려 침공의 정당한 명분(弔民伐罪)을 제공했다.
당 태종은 644년 약 20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연개소문을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를 침략했다.
이세민은 본인도 쿠데타로 황제가 되었음에도, 연개소문의 대역죄를 비난하는 아이러니를 보였으나, 이는 중화 중심의 천하 질서를 거부하는 고구려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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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태종 이세민 |
연개소문은 북방민족인 설연타(薛延陀) 세력과 연합하여 당의 후방을 교란하는 전통적인 고구려 외교 전략을 구사하여, 당 태종이 군사를 돌리도록 압박했다.
당군은 파죽지세로 요동성(遼東城)과 백암성(白巖城) 등 서부 방어선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수도 평양(平壤)을 향해 진격했으나, 안시성(安市城, 요동 방어선 상의 주요 요새)에서 발목이 잡혔다.
안시성(安市城)은 연개소문 정변 당시 새로운 권력에 복종하지 않았던 반대파의 거점이었으나, 당의 침공이 시작되자 고구려 전체의 방어 의지를 상징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당 태종은 안시성의 견고한 방어 체계와 성주 및 백성들의 결사 항전에 막혔다.
당군은 60일 동안 성벽보다 높은 토산(土山)을 쌓았는데, 토산이 폭우로 무너지자, 고구려군이 이 틈을 타 토산을 점령하여 오히려 당군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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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시성에서 토성을 쌓는 당나라 군 |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15만 명의 중앙군을 파견했으나, 욕살(褥薩)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이끈 이 군대가 안시성 외곽의 주필산(駐蹕山, 안시성 근처)에서 당군의 유인술에 걸려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고연수와 고혜진 등 36,800명의 병력이 당 태종에게 항복했다.(전승)
이 대규모 군대가 패배한 결정적인 이유는 연개소문이 정변 때 경험 많고 유능한 원로 장수들(예: 대로 고정의)을 대거 숙청하고, 경륜이 부족한 소장급 인물들을 지휘관으로 기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운 집권 세력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냉철한 군사 전략을 압도한 결과였다.
그러나 안시성은 굴복하지 않았고, 90여 일 간의 포위 끝에 혹독한 요동의 겨울과 당군의 심각한 보급 문제(요택)로 인해, 당 태종은 결국 참담한 패주(敗走)를 결정한다 (645년 9월 18일).
고구려군은 후퇴하는 당군을 추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당 태종 (이세민): (요택을 건너며) "고구려는 짐에게 평생의 치욕을 안겼다. 내 아들들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마라. 너희들이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1차 고구려-당 전쟁의 승리는 쿠데타로 불안정했던 연개소문 정권의 권위를 극적으로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기존의 3년 임기 대대로를 넘어 태대대로(太大對盧)라는 무기한 종신직을 신설하여 독재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는 당 태종 이세민과 으뜸 무장이었던 소정방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겨준 당대 손꼽히는 명장이자 위대한 전략가였다.
권력의 사유화와 비극적인 유산
6장. 독재 체제와 권력의 세습
연개소문은 정변 이후 고구려의 전통이었던 호족공화제(豪族共和制)를 타파하고 연씨 가문의 독무대를 만들었으며, 장수태왕(長壽太王) 이래의 서수남진(西守南進 서쪽 국경을 수비하고 남쪽으로 진출한다) 정책을 남수서진(南守西進 신라와 백제는 방어하고 당나라로 국경을 확장한다)으로 변경하는 등 강력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정보를 활용한 기민한 위기 대응력과 명확한 비전 제시를 통해 조직을 통합시켰으나, 그의 권력은 인격화된 독재 체제였기에, 제도화된 권력보다 자의성이 강했고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연개소문에게는 연남생(淵男生), 연남건(淵男建), 연남산(淵男産)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연남생 삼형제는 이름에 '남(男)' 자 돌림자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삼국시대 말기부터 한국사에서 돌림자를 사용하는 문화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아들인 연헌충(淵獻忠)과 연헌성(淵獻誠) 역시 '헌(獻)' 자 돌림자를 사용했다.
연개소문의 부인(연남생의 어머니이자 연헌성의 조모)에 대한 기록도 존재하는데, 그녀는 연남생이 당나라로 망명할 때 함께 갔거나 고구려 멸망 후 당으로 왔으며, 682년 당나라에서 사망했다.
묘지명에는 그녀가 679년 아들 남생이 병으로 먼저 죽었을 때 손자에게 위로를 건넸다는 기록이 있다.
연개소문의 여동생 연수영(淵秀英)에 대한 민간 전설도 있으나, 사서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아 실존 여부는 희박하다.
전설 속에서 그녀는 수군을 양성하여 당 수군을 격파했다고 한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권력을 국가 제도로 환원하거나 왕에게 돌려주지 않고, 세 아들에게 나누어 세습시키려 했다.
이것이 연개소문의 가장 큰 정치적 과실이었다.
연개소문: (집무실에서 아들들을 바라보며) "남생(男生), 너는 나의 장남이자 이 나라의 병권(兵權)을 짊어질 후계자다. 비록 나이가 어리나, 너의 위세로 연씨 가문의 권력을 이어나가야 한다."
연개소문은 장남 연남생을 28세(추정)의 젊은 나이에 삼군대장군 (고구려 병권 총괄) 자리에 앉혔고, 세 아들 모두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국정에 참여하게 했다.
이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 사유화의 발로였으며, 고구려 입장에서는 불운한 선택이었다.
연개소문은 후계자 선정 시스템을 제도적으로 마련하지 못했다.
그는 세 아들에게 권한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고위 관직을 나누어 줌으로써, 사후 내분(內紛)의 씨앗을 스스로 뿌렸다.
연개소문은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이 후계자 선정에서의 실패 하나만으로도 고구려 멸망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7장. 백제의 몰락과 2차 여당 전쟁
649년,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는 아들 당 고종(唐高宗)에게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당 고종은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고는 당이 천하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부친의 실패를 교훈 삼아 대규모 전면전 대신 규모가 작은 군대를 자주 보내 고구려 국력을 조금씩 소모시키는 장기 소모전 전략으로 전환했다.
이때 고구려의 우방이었던 백제(百濟)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공격으로 660년에 멸망했다.
백제의 멸망은 고구려에게 치명적인 충격이었다.
고구려는 이제 남쪽의 신라(新羅)와 서쪽의 당(唐)으로부터 양면 협공을 받는 고립된 처지에 놓였다.
661년, 당나라는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2차 고구려-당 전쟁을 재개했다.
연개소문: "백제가 그리 허망하게 무너졌다니! 김춘추(金春秋) 그 외교의 귀재가 결국 당의 손을 잡아 동방의 질서를 뒤흔들었구나! 당이 이제 육로뿐 아니라 바닷길(수군)까지 이용해 평양(平壤)을 노릴 것이다!"
연개소문은 아들 연남생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압록강(鴨綠江) 방면에서 당군에 맞서게 했다.
이는 연개소문의 패착이었다.
혹독한 보급선·지형 문제와 당 수군·육군의 연합 압박이 겹쳤고, 경험 없는 연남생은 661년 압록강 전투에서 처참하게 대패했으며, 3만 군사는 전멸하고 남생 혼자만 겨우 도망쳐 왔다.
이는 아버지의 권력욕 때문에 능력을 검증받지 못한 아들에게 병권을 맡긴 연개소문의 인사 실패가 낳은 참사였다.
육로가 열리자 당군(唐軍)은 평양성까지 육박하여 포위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연개소문이 직접 평양성 방어에 나서, 수성(守城)을 바탕으로 장기전을 펼쳤다.
마침 혹독한 겨울이 다가왔고, 신라군의 지원도 백제 잔존 세력에게 막히면서 당군은 추위와 보급 문제에 시달렸다.
연개소문은 662년 2월, 당군이 지치자 평양성 인근 사수(蛇水/薩水)에서 총반격에 나섰고, 당나라 야전군 사령관 방효태(龐孝泰, 645년 1차 침공 참전 명장)와 그의 아들 13명을 모두 전사시키며 당군을 크게 궤멸(潰滅)시켰다.
이때의 승리로 당군 사령관 소정방(蘇定方)도 철수하여, 2차 여당 전쟁도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수 전투는 살수대첩(薩水大捷), 안시성 전투와 더불어 고구려가 중국 왕조와 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 중 하나로 꼽힌다.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당태종과 당고종 모두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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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개소문의 사수전투. 정영렬. 1975년 작 |
8장. 연개소문의 죽음과 권력 공백 (665년)
2차 전쟁의 승리 이후, 고구려는 다시 일시적인 평화를 얻었으나, 20여 년간 고구려를 철권통치했던 연개소문이 665년에 사망했다.
연개소문: (병상에서) "남생, 남건(男建), 남산(男産)... 내 평생 당(唐)의 천하 질서에 맞서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동방의 독자적인 천하를 지키려 했다. 허나,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것은 내부의 분열이다. 너희 세 형제는 물고기와 물처럼 (如魚得水) 서로 화합하여 고구려를 지켜야 한다. 권력을 다투지 말라."
"물고기와 물처럼"
연개소문이 세 아들에게 '형제가 고기와 물같이 사이좋게 지내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기록은 인간관계에서의 조화를 강조하는 현대적 표현의 문맥적 기원을 상상하게 한다.
다만 이는 일반적으로 중국의 '수어지교(水魚之交)' 고사에서 유래했으며, 연개소문이 물(淵/泉)과 관련된 성씨를 가졌다는 점과 그의 유언이 결합하여 역사적 비극을 부각하는 극적 장치로 사용될 수 있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유언과는 정반대로, 후계자를 명확히 지정하지 않고 세 아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놓았다.
그의 죽음은 고구려를 지키던 마지막 보루의 상실이었으며, 그가 철권통치로 눌러왔던 고구려 내부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권력 공백을 초래했다.
결국 연개소문의 사망이 고구려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파국으로 가는 길목
9장. 독재자의 사후(死後)와 분열의 징조
그가 20여 년간 무단 독재 정치를 펼치며 당대 세계 제국이었던 당(唐)의 맹공을 막아냈던 철권 통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생애 동안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과 으뜸 무장 소정방(蘇定方)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겨 줄 정도로 당대 손꼽히는 명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독재자로서 권력을 사유화(私有化)하는 데 집중했기에, 그의 죽음은 고구려를 지탱하던 카리스마의 공백이자 국가 멸망을 앞당기는 결정적인 결과가 되었다.
연남생 (제2대 대막리지): (아버지 연개소문의 장례식 후, 어깨에 막리지의 무거운 짐을 진 채) "아버지의 유언은 곧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일이오. 남건(男建), 남산(男産). 너희들은 나의 동지이며, 연씨 정권의 핵심이다. 부디 한마음으로 당과 신라를 막아내자!"
그러나 이 유언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10장. 형제간의 피와 권력 (연남생의 배신)
연개소문은 자신의 정권이 일정한 제도화된 권력체계를 확립치 못했다는 치명적인 과실을 남겼다.
왕이나 귀족회의와 같은 기존의 권력 장치들을 무력화시킨 결과, 그가 죽자마자 내재되어 온 모순이 폭발했다.
연남생은 아버지처럼 국정을 장악하고 이끌어갈 카리스마나 능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세 아들에게 권력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고위 관직을 나누어 줌으로써, 형제들 주위의 측근들이 이간질을 시작했다.
둘째 연남건(淵男建)과 막내 연남산(淵男産)은 형 연남생이 자신들을 제거할 것이라는 오해와 장남의 무능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666년, 연남생이 지방의 여러 성을 순찰(巡察)하기 위해 수도 평양성(平壤城)을 비운 틈을 타, 연남건과 연남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연남생의 아들인 연헌충(淵獻忠)을 살해하고, 연남건은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올랐다.
연남건: (평양성 성벽 위에서, 남생의 깃발을 꺾으며) "형님은 아버지의 독재(獨裁)만을 물려받았을 뿐, 그 지략과 강인함은 물려받지 못했소! 이처럼 불안한 권력으로 어찌 고구려를 지키겠소! 아버지가 만든 권력은 혈육도 나눌 수 없다! 내가 직접 이 나라를 통솔하겠다!"
아버지의 유언과 달리 원래 사이가 좋았던 삼형제가 권력 다툼에 휩쓸리며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이 연씨 가문의 내분(內紛)은 고구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도망자 신세가 된 장남 연남생은 절망적인 선택을 한다.
그는 국내성(國內城, 고구려 옛 수도)으로 달아났다가, 이듬해인 667년 아들 연헌성(淵獻誠)을 당나라에 보내 항복하고 구원을 청했다.
연남생의 투항은 동생들에 대한 사적인 복수심에 눈이 먼 매국적 행위였다.
이는 나라 말아먹은 것들이라는 극단적인 후대 평가를 받게 된다.
연개소문의 동생이자 남생의 숙부인 연정토(淵淨土) 역시 내분 상황에서 이탈하여 신라(新羅)에 투항했다.
이는 권력의 사유화가 국가의 영토와 주권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나라에게 이는 하늘이 내린 행운이었다.
당은 연남생을 사지절 요동대도독 상주국 현도군 개국공 등으로 책봉하며 그를 고구려 공격의 길잡이(嚮導)로 삼았다.
11장. 멸망의 도화선 (668년)
연남생은 당나라 총사령관 이적(李勣)과 함께 고구려 침공군에 합류했다.
연남생이 요동(遼東) 지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으며, 그가 제공한 고구려의 모든 내부 사정과 요새 정보 덕분에 당군은 파죽지세로 평양성(平壤城)을 향해 진군할 수 있었다.
이적 (당나라 총사령관): (연남생에게) "공(公, 연남생)이 아니었다면, 이 요동의 험준한 산성(山城)들을 어찌 이리 손쉽게 통과했겠소. 연개소문이 만든 천하의 방어선이 아들의 손에 무너지는구나!"
연남생: (굳은 표정으로) "그들이 먼저 나를 배신했습니다. 고구려를 지키려는 저의 뜻을 짓밟은 자는 바로 그들이오. 이 군대가 고구려를 통일하고 나의 이름으로 그 땅을 다스릴 때, 비로소 나의 복수는 완성될 것입니다!"
당군과 신라군(新羅軍)의 연합 공세는 평양성을 향해 조여들었다.
신라는 김춘추(金春秋)가 당 중심의 국제 질서를 활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였기에, 이제 고구려에게는 피할 곳 없는 양면 협공이 현실이 되었다.
668년 8월, 당군 총사령관 이적은 연남생과 함께 평양성(平壤城, 보장왕과 연남건이 최후의 항전을 펼친 곳)을 포위했다.
연남건(淵男建)은 항복을 거부하고 평양성 백성과 지배층과 함께 결사항전을 펼쳤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독재 체제 아래 국가의 조정 장치가 무력화된 고구려는 이미 내부적으로 와해 직전이었다.
결국 연남건의 부하 혹은 성문이 열리는 내부 배신으로 인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705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했다.
연개소문이 죽은 지 불과 3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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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나당연합 전쟁 |
연개소문의 꼭두각시 왕이었던 보장왕(臧)은 결국 둘째 아들 연남산(淵男産)을 보내 항복했다.
보장왕은 당에 끌려가 요동군왕으로 책봉받고, 나중에는 고구려 부흥 운동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당에 의해 유배되었다.
연남건은 끝까지 저항하다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는 당으로 옮겨져 검주(黔州)로 유배되었다.
연남생은 배신의 대가로 평양도행군대총관 등 당나라의 상류층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며 여생을 보냈으며, 679년(46세)에 당나라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서 병사했다.
그의 어머니 (연개소문의 아내)도 연남생을 따라 당나라에 갔으며 682년에 사망했다.
역사의 심판과 평가
12장. 상반된 영웅,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적 논란
연개소문은 사후에도 가장 강렬한 논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그의 삶은 강력한 중앙집권화의 상징이자 무적의 효웅(梟雄無敵之人)이었지만,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킨 씨앗을 뿌린 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당나라 측 기록과 이를 인용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는 연개소문을 흉악하고 잔인하며 포악한 인물로 묘사하며 패륜적인 면모를 극대화했다.
김부식은 연개소문이 곧은 도리로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함과 포악함을 마음대로 하여 큰 역적에 이르렀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김부식은 조상이 신라 왕족이었기에, 신라의 삼국통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구려 멸망의 책임을 연개소문 개인에게 국한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태종은 그를 '당세의 웅걸(雄傑)' 중 하나로 꼽았으며, 송나라의 왕개보(王介甫)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한 이유를 "개소문이 비상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연개소문을 '혁명가의 기백과 재능을 갖춘 인물'이자 외세에 굴하지 않고 자주성을 지키려 한 민족 영웅으로 재평가했다.
근대 사회에서는 사대주의를 나라가 망한 원인으로 보고, 외세에 맞선 연개소문을 찬양했다.
이덕무와 홍대용 같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중국 소설 『규염객전』 속의 규염객이 바로 연개소문을 모티브로 했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연개소문이 젊어서 중국 대륙을 염탐했고, 동아시아 천하를 대표하는 영웅으로 인정받았다는 낭만적인 향수의 발로였다.
현대 학계는 연개소문을 '부정적인 의미의 실패한 정치가'로 평가하며 그의 과실을 강하게 비판한다.
1. 제도화 실패와 독재의 폐해: 연개소문은 권력을 다시 왕에게 돌려주었거나, 혹은 후계자 선정을 제대로 했더라면 고구려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었다. 그는 권력을 1인에게 집중시키고 기존의 귀족회의와 국가 권력 장치들을 무력화시켰으며, 그의 사후 내분을 수습할 어떤 제도적인 장치도 작동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멸망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그는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2. 인재 숙청의 부메랑: 연개소문은 정변 시 100여 명 혹은 180여 명에 달하는 유능한 대신과 장교들을 학살하여 지휘부의 공백을 초래했다. 이는 훗날 주필산 전투 등에서 졸전(拙戰)의 원인이 되었다.
3. 치명적인 외교적 오판: 그는 당과의 대결이 급박한 상황일수록 평화가 절실했던 신라의 평화 제의를 거부하여 남북으로 협공을 받는 치명타를 자초했다. 그의 대외정책은 무모한 강경책이었다.
13장. 역사의 교훈
연개소문의 생애는 비왕족 출신으로 우수한 전략 능력을 입증하며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을 손에 넣은 과정과 동시에, 그 권력을 개인의 영달과 가문의 세습에만 집중하여 결국 조국을 파멸로 이끈 비극이었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 강력한 실행력과 위기 대응의 신속성이라는 명장의 리더십을 발휘했으나, 국가 최고 경영자로서의 능력은 부족했다.
연개소문은 외부의 적, 즉 중화 중심의 천하 질서에 맞서 동방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지키려 한 위대한 저항자였다.
6~7세기 고구려와 수·당의 70여 년에 걸친 전쟁은 중화와 알타이계 문명이 충돌한 격동의 역사였다.
이 충돌 속에서 고구려는 살수대첩, 안시성 전투, 사수 전투 등 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내부의 경직성, 지도층의 분열, 그리고 사적인 권력 독점이라는 연개소문 자신이 뿌린 씨앗을 극복하지 못했다.
연개소문 이야기는 우리에게 공동체의 진정한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김춘추(金春秋)가 유리한 역사적 상황과 합법적인 권력 획득을 통해 외교를 펼쳤던 것과 달리, 연개소문은 국가 권력의 사유화라는 유혹에 빠졌다.
연개소문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권신(權臣)의 입장에서 권력을 장악하며 국가를 통솔한 것은 이점보다는 폐해가 많았다.
그의 정권은 폭력에 일방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결속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대단히 뛰어난 군사지휘자의 능력을 지녔지만,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능력을 정변 때 스스로 파괴했다.
우리는 연개소문의 비극을 통해 권력을 사적으로 독점하거나 세습하려는 행위가 결국은 공동체 전체를 파멸시킨다는 역사의 준엄한 교훈을 얻는다.
진정한 리더십은 명확한 비전과 목표 설정 능력뿐만 아니라, 내부의 갈등을 제도적으로 조정하고, 다양성을 통합하며, 책임감을 공유하는 공적인 시스템 구축에 있다.
연개소문이 뿌린 씨앗은 형제의 권력 다툼으로 싹터 고구려라는 거대한 나무를 뿌리째 흔들었으며, 결국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분열로 무너진 고구려의 허망한 최후를 통해 우리는 개인의 카리스마가 제도를 이길 수 없으며, 제도의 부재는 곧 국가의 멸망이라는 인류 보편의 진리를 깨닫는다.
연개소문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불필요한 내부 경쟁을 자제하고 진정한 연대의 대상으로 서로를 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이 글은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등 공인 사료에 전해지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일생을 바탕으로, 당시 국제정세와 고구려 내부 권력구조를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실제 기록이 엇갈리거나 당·신라 측 시각이 강한 대목은 극적 흐름을 위해 한쪽 해석을 택했으며, 전승·평가·후대 비난이 섞인 부분은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따라서 “연개소문=영웅/역적”이라는 단일한 규정이 아니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대제국 당을 막아냈지만 후계 제도화에 실패해 멸망의 씨앗을 남긴 인물이라는 입체적 인식을 전제로 읽어야 합니다.
인물 비행(非行) 묘사는 미화도, 과장도 아닌 당시 정황의 복원 목적이며, 현대 정치에의 단순 치환은 지양해 주십시오.
Yeon Gaesomun, born into a noble Goguryeo family, seized power in 642 by assassinating King Yeongnyu and nearly two hundred officials, establishing a harsh military dictatorship.
His rule strengthened central power and resisted Tang China, achieving major victories such as the defense of Ansi Fortress and the defeat of Tang general Pang Xiaotai at Sasu River.
Yet his violent purges and dynastic ambitions fatally weakened internal unity.
After his death in 665, his sons fought for control—Yeon Namsaeng even defected to Tang—triggering civil war and opening the way for the Tang–Silla alliance to conquer Goguryeo in 668.
Yeon remains a paradox: a brilliant strategist who preserved independence against an empire, yet a ruler whose private tyranny doomed his own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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