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과 가야금의 탄생: 대가야 가실왕의 꿈과 신라의 계승 (Ureuk)


 가야금, 천년의 소리를 빚다: 악성 우륵 이야기


1. 가야에서 태어난 음악의 거장

아름다운 가야금 소리는 과연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그 소리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박연, 왕산악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히는 한 위대한 음악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우륵(于勒)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우리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한 왕이 다스리던 고대 왕국, 대가야에서 시작됩니다.


2. 가실왕의 꿈과 우륵의 사명

대가야의 가실왕은 늘 가슴속에 뜨거운 열망 하나를 품고 있었습니다. 

바로 다른 나라를 모방하는 것을 넘어, 가야의 강인한 정신과 아름다운 자연을 오롯이 담아낼 세상에 없는 소리를 만드는 것이었죠. 

이 중대한 임무를 맡길 사람으로 왕은 자신이 가장 아끼고 신뢰하던 음악가, 우륵을 떠올렸습니다.


가야의 음악가 우륵


왕은 우륵을 불러 자신의 오랜 꿈을 이야기하며, 가야의 미래를 빛낼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 달라고 명했습니다. 

왕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우륵은 가야의 정신과 자연을 오롯이 담아낼 새로운 악기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기 시작했습니다.


3. 하늘과 땅의 소리를 담은 악기, 가야금의 탄생

오랜 연구와 노력 끝에, 우륵은 마침내 12개의 줄을 가진 아름다운 현악기, 즉 '12현금(十二絃琴)'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가야금'이라 부르는 악기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륵이 만든 가야금에는 깊은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전승)


• 12개의 줄: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합니다.

• 둥근 윗부분: 하늘을 본떠 만들었습니다.

• 평평한 밑부분: 땅의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우륵은 단순히 악기만 만든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지역의 이름에서 영감을 얻어 가야금을 위한 12개의 새로운 곡을 직접 작곡하며 가야 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전승)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륵의 음악이 가야 땅에 울려 퍼지던 시기, 가야의 국운은 서서히 기울고 있었습니다. 

우륵과 그의 소중한 가야금은 곧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가야금


4. 새로운 터전, 신라에서 울려 퍼진 가야의 소리

진흥왕12년 (551), 가야의 국운이 다했음을 직감한 우륵은 아끼는 제자 이문(尼文)의 손을 잡고, 가야금의 미래를 위해 정든 고향을 등지고 신라로 향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는 한 나라의 음악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위대한 음악가의 고독하고도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그의 명성은 이미 신라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신라의 진흥왕은 우륵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하림궁(河臨宮)으로 불러 직접 연주를 청했습니다.(전승)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비단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철처럼 힘 있는 그 소리에 진흥왕은 숨을 죽였습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은 마치 망해가는 왕국의 슬픔과 그럼에도 살아남으려는 희망을 동시에 노래하는 듯했습니다.

가야금의 아름다운 선율에 감명받은 진흥왕은 이 소중한 음악이 신라 땅에 길이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청금상련, 신윤복 (1758?~1817?)


5. 가야의 음악, 신라에 뿌리내리다

진흥왕은 우륵을 지금의 충주 지역으로 보내, 신라의 젊은 인재들에게 그의 음악을 전수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신라의 젊은 인재들인 계고와 법지에게는 '대나마(大奈麻)'라는 관등을, 만덕에게는 '대사(大舍)'라는 관등을 내려주며 우륵의 제자가 되어 그의 모든 것을 배우도록 명했습니다. 

우륵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세 명의 제자(계고,법지,만덕)를 가르쳤는데, 단순히 악기 연주법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음악과 노래, 춤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을 전수했습니다.


학생 (Student)
배운 내용 (What they learned)
계고 (階古)
가야금 연주 (Gayageum performance)
법지 (法知)
노래 (Song)
만덕 (萬德)
춤 (Dance)

이들의 노력 덕분에 가야금 음악은 신라의 공식적인 궁중 음악으로 채택되었고, 훗날 185곡으로 늘어날 만큼 크게 발전했습니다. (논쟁)

오늘날 충주에 있는 탄금대(彈琴臺)는 바로 우륵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으로 전해져, 그의 흔적을 지금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왕국의 꿈과 천재 음악가의 열정으로 태어난 가야금은 나라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터전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천오백 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마음을 울리는 소중한 유산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신뢰 가능한 사료와 최신 연구를 토대로, 독자의 몰입을 돕기 위해 장면·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확정되지 않은 일화·상징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대목은 (논쟁)으로 표기하며, 인물·지명은 첫 언급에 한자 병기 원칙을 따릅니다. 
사실 오류·보완 제안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Ureuk, revered as one of Korea’s three “music sages,” crafted the 12-string gayageum in Daegaya under King Gasil, seeking a sound expressing land and spirit (tradition). 
As Gaya waned, he moved to Silla in 551, performed for King Jinheung, then taught near Chungju. 
His pupils—Gyego (performance), Beopji (song), Mandeok (dance)—helped embed gayageum in Silla court culture and expand its repertoire; Tangeumdae memorializes his le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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