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네 번째 왕, 수수께끼의 민중왕
이 자료를 시작하며
고구려의 광활한 역사 속에는 빛나는 정복 군주들뿐만 아니라, 짧은 기록 속에 수많은 질문을 남긴 인물들도 있습니다.
고구려의 제4대 왕, 민중왕(閔中王)이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불과 5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평범하지 않은 왕위 계승 과정과 석굴 무덤에 얽힌 기이한 유언까지.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상상하게 하는 흥미로운 단서들로 가득합니다.
지금부터 민중왕이라는 수수께끼를 함께 풀어가며, 역사 기록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추리해 보는 즐거움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1. 민중왕은 누구일까요?
먼저 민중왕의 기본적인 인물 정보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 왕호: 민중왕(閔中王)
• 이름: 해색주(解色朱)
• 재위 기간: 서기 44년 ~ 48년 (총 5년)
• 가족 관계: 2대 유리명왕의 아들이자 3대 대무신왕의 동생 (『삼국사기』 기록 기준)
민중왕의 왕호인 '민중(閔中)'은 그의 무덤이 있던 지역인 '민중원(閔中原)' 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처럼 무덤이 위치한 지명을 왕의 호칭으로 삼는 것은 모본왕, 고국천왕 등 고구려 초기 왕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작명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유리명왕의 아들이자 대무신왕의 동생. 왕위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던 그가 어떻게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을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민중왕의 첫 번째 수수께끼가 시작됩니다.
2. 예상치 못한 왕위 계승
『삼국사기』에 따르면, 민중왕의 왕위 계승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루어졌습니다.
"선왕인 대무신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아들이자 태자인 해우(훗날의 모본왕)가 너무 어려서 국정을 돌볼 수 없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대무신왕의 동생인 해색주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 기록만 보면, 어린 조카를 대신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숙부의 숭고한 결단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평화로운 계승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권력 투쟁의 결과로 이루어진 '왕위 찬탈' 일 수 있다는 시각입니다.
그의 짧았던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의심은 더욱 깊어집니다.
3. 짧지만 평탄하지 않았던 5년
민중왕의 재위 5년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기록에 남은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백성을 위한 구휼 정책
즉위 2년, 동쪽 지방에 큰 홍수가 발생해 백성들이 굶주리자, 민중왕은 나라의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했습니다.
이는 왕으로서 백성을 아끼는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 대규모 백성의 이탈
재위 4년, '대승(戴升)'이라는 인물이 무려 1만여 가구의 백성을 이끌고 적국이나 다름없는 한나라의 낙랑군으로 투항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고대 국가에서 1만 가구는 엄청난 인구이자 노동력으로, 이들의 이탈은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심각한 손실이었습니다.
단순한 민심 이반으로 보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나도 컸습니다.
과연 이들은 왜,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떠나려 했던 것일까요?
이 질문은 왕의 기이한 유언과 죽음의 미스터리로 곧장 이어집니다.
• 기이한 유언
같은 해, 민중왕은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석굴을 자신의 무덤으로 정하고, 다음과 같은 특이한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곳에 묻고, 다시 능묘를 만들지 말라."
왕릉을 새로 만들지 말라는 그의 유언은 검소함의 표현이었을까요? 아니면, 왕위 찬탈로 정통성이 흔들리던 왕이 거대한 능묘를 지을 만큼의 권위나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쓸쓸한 증거였을까요?
특히 그가 남긴 석굴 무덤에 대한 유언은 그의 죽음과 관련된 거대한 미스터리를 낳았습니다.
4. 석굴 무덤에 얽힌 미스터리
민중왕의 마지막 2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다시 배열해 보면, 마치 한 편의 추리 소설처럼 부자연스러운 흐름이 눈에 띕니다.
1. 재위 4년: 아직 건강하게 사냥을 다닐 정도로 팔팔했던 왕이 갑자기 석굴을 자신의 무덤으로 정합니다.
2. 같은 해: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나라를 떠나는 대규모 이탈 사건이 발생합니다.
3. 다음 해(재위 5년): 왕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4. 그의 사후: 왕위를 빼앗겼던 조카, 즉 대무신왕의 아들인 모본왕이 다시 왕위에 오릅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혹시 민중왕은 정통성 문제로 인한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석굴에 감금된 후 제거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지지 세력이 바로 고구려를 떠나 낙랑으로 투항한 1만여 가구의 백성들이 아닐까?
물론 이것은 기록에 없는 상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저 안개 너머에 있는 법, 역사는 때로 이렇게 희미한 단서들로 빈칸을 채워나가는 추리의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민중왕을 둘러싼 또 다른 흥미로운 논쟁은 그의 이름에서 시작됩니다.
5. 왕의 이름이 '해(解)씨'라고? - 고구려 왕실의 성씨 논쟁
민중왕의 이름이 '해색주(解色朱)'라는 점은 고구려 초기 왕실의 성씨에 대한 뜨거운 논쟁, 즉 '해씨 고구려설' 의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이 가설의 핵심은 고구려의 초기 왕은 본래 '해(解)씨'였으나, 6대 태조대왕 때 '고(高)씨'에게 왕위를 빼앗기며 왕실이 교체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류 학계에서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해(解)씨'와 '고(高)씨'는 성씨가 교체된 것이 아니라, 같은 대상을 다르게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일부 학자들은 '해'가 당시 '태양'이나 '하늘'을 뜻하는 고구려 말을 소리 나는 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고, '고'는 '높다'는 뜻으로 같은 대상을 다르게 표기한 것이라고 봅니다.
즉, 성씨가 바뀐 것이 아니라 표기법의 차이일 뿐이라는 주장이지요.
'해씨 고구려설'과 이에 대한 주류 학계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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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씨 고구려설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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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학계의 견해 (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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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초기 왕의 성은 해(解)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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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解)씨와 고(高)씨는 같은 왕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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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해색주'는 해씨 왕족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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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태양(해)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고, '고'는 높다는
뜻으로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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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태조대왕 때 고(高)씨가 왕위를 차지하며 왕실이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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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표기는 다르지만, 결국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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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민중왕의 이름 하나가 고구려 초기 왕실의 정체성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입니다.
많은 궁금증을 남긴 민중왕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기억될 수 있을까요?
6. 결론: 업적보다 질문을 남긴 왕
민중왕은 광개토대왕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5년은 자연재해와 대규모 백성 이탈 등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많은 단서를 남겼습니다.
• 예상치 못한 즉위 과정은 고구려 초기 왕위 계승의 이면을 엿보게 합니다.
• 석굴 무덤과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는 기록된 역사가 전부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 '해색주'라는 이름은 고구려 왕실의 성씨와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결국 민중왕은 우리에게 위대한 업적 대신 위대한 질문들을 남긴 왕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정해진 답을 외우는 것보다, 희미한 기록의 조각들로 사라진 이야기를 상상하고 추리해보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배우는 진짜 즐거움이 아닐까요?
이 글은 『삼국사기』 등 남아 있는 사료를 바탕으로, 고구려 제4대 왕 민중왕의 짧은 재위와 석굴 무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여러 가설을 추리 형식으로 풀어낸 재구성 글입니다.
본문 속 ‘왕위 찬탈’ 가능성, 석굴 감금설, 1만 가구 집단 이탈의 배경처럼 직접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부분은 현재 일부 연구자들이 제기하는 가설과 합리적 상상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으로, 정설이 아니라 해석의 한 방향일 뿐입니다.
민중왕의 이름 ‘해색주’와 관련된 ‘해씨 고구려설’ 역시 학계 다수 의견과 다른 견해가 공존하는 (논쟁) 지점입니다.
글을 읽으실 때는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사료의 빈칸을 함께 상상해 보는 하나의 역사적 시나리오로 즐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Minjung, fourth king of Goguryeo (r. 44–48 CE), unexpectedly succeeds his brother Daemusin because the crown prince is too young.
He opens granaries after floods but faces a huge defection of 10,000 households and asks to be buried in a simple rock cave.
Later scholars see hints of power struggles and debates over the royal surname, so he is remembered less for deeds than for the mysteries he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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