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무왕, 당 제국을 두드리다: 장문휴 등주 기습과 ‘해동성국’의 서막 (King Mu of Balhae)


신생국 발해, 세계제국 당나라에 맞서다: 무왕 이야기


고구려의 후예,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다

698년, 고구려 멸망의 잿더미 속에서 마지막 불씨가 피어올랐습니다. 

장군 대조영이 흩어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만주 동모산 기슭에 세운 나라, 고구려의 기상을 계승한 발해(渤海)였습니다. 

존재 자체가 거대한 제국 당나라에 대한 도전이었던 이 신생국은 건국부터 험난한 운명을 예고했습니다.

아버지 대조영의 뒤를 이어 719년에 왕위에 오른 이가 바로 2대 왕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입니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발해는 동아시아 최강대국 당나라와 남쪽의 신라, 그리고 북방의 여러 세력들 틈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젊은 군주 무왕은 갓 태어난 나라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짊어지게 됩니다.

이 글에서는 강력한 국가를 꿈꿨던 무왕이 당나라라는 거대한 제국과 어떻게 맞서 싸웠는지, 그 과정에서 동생과의 갈등과 주변국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보겠습니다.


1. 갈등의 서막: 흑수말갈과 흔들리는 형제

1.1. 당나라의 견제와 '흑수말갈'이라는 불씨

발해가 영역을 확장하며 강성해지자,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당나라는 이를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나라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발해의 동북쪽에 위치한 흑수말갈(黑水靺鞨)이었습니다. 

흑수말갈은 여러 말갈 부족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726년, 당 현종은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흑수말갈 지역에 당나라의 관청인 흑수주(黑水州)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논쟁)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조치가 아니었습니다. 

이전까지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교류할 때는 반드시 발해를 거쳐 알리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번에는 아무런 통보도 없었습니다. 

이는 흑수말갈이 당나라를 등에 업고 벌인 외교적 도발이자, 지역의 맹주로서 발해의 위상을 정면으로 짓밟는 행위였습니다.


무왕은 이 사건을 '전방의 당나라와 후방의 흑수말갈이 손을 잡고 발해를 공격하려는 위협적인 협공(挾攻) 시도'로 판단했습니다. 

50여 년 전, 신라와 당나라의 협공으로 고구려가 무너졌던 역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2. 이상이 달랐던 형제: 무왕과 대문예

위기를 직감한 무왕은 위협의 싹을 미리 잘라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동생 대문예(大門藝)에게 군사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선제적으로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대문예의 생각은 형과 달랐습니다. 

그는 과거 당나라의 궁정에서 숙위(宿衛, 일종의 인질)로 8년간 머물며 당의 압도적인 국력을 직접 목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 당나라는 맞서 싸울 상대가 아닌, 신중하게 관계를 맺어야 할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흑수말갈을 공격하는 것은 곧 당나라를 등지는 것입니다. 강성했던 고구려도 30만 대군으로 맞섰지만 결국 멸망했습니다. 지금 발해의 힘은 고구려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당나라에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한 명은 발해의 자주를, 다른 한 명은 발해의 안위를 우선했던 형제의 신념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무왕 (형): "흑수말갈과 당의 연합은 발해의 생존을 위협하는 협공이다. 위협의 싹을 미리 잘라야 한다."

대문예 (동생):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세계 최강대국입니다. 섣불리 공격하면 발해의 멸망을 자초할 것이오."


결국 무왕은 계속해서 명령에 불복하는 대문예를 토벌군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사촌 형인 대일하(大壹夏)로 교체했습니다. 

자신을 처벌하려는 형의 분노에 두려움을 느낀 대문예는 결국 군영을 탈출하여 당나라로 망명하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맙니다.


1.3. 격화되는 외교전

자신의 동생을 당나라가 받아주고 벼슬까지 내리자 무왕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는 당 현종에게 사신을 보내 대문예를 '반역자'라 칭하며 처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당 현종은 발해를 길들일 좋은 패인 대문예를 내어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무왕에게 "대문예를 멀리 영남(嶺南)으로 유배 보냈다"고 거짓으로 통보하고는, 몰래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각되었고,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무왕은 세계제국 당나라의 황제를 향해 전례 없이 파격적인 외교 문서로 꾸짖었습니다.


"대국(大國)은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속일 수가 있소이까?"


이 무렵, 당나라에 외교 사절로 가 있던 무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중 한명이였던 대도리행(大都利行)마저 갑자기 사망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논쟁)

발해에 왕위 계승자가 사라진 절묘한 시점을 포착한 당 현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망명한 대문예를 발해의 새로운 왕으로 세울 수도 있다는 암시를 보내며, 형제간의 갈등을 발해의 왕조 자체를 뒤흔드는 지정학적 무기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외교 문서에 담긴 먹물은 피와 불꽃으로 번역될 운명에 처했습니다.


2. 대제국을 향한 반격: 발해의 대당(對唐) 전쟁

2.1. 제1차 공격: 바다를 건너 당의 심장을 치다 (732년)

과연 건국 30년 남짓한 신생국이 세계제국의 심장을 향해 칼을 겨눌 수 있었을까? 

732년 9월, 무왕은 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수군을 이끌고 당나라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발해 수군의 목표는 산둥반도의 등주(登州)였습니다. 

등주는 단순한 항구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 당나라 수군의 핵심 거점

• 주요 무역항이자 경제 중심지

• 과거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의 출발지


무왕은 당나라가 발해를 공격한다면 반드시 등주에서 수군이 출발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당의 반격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심장부를 먼저 치기로 한 것입니다.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수군의 기습 공격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발해군은 순식간에 등주성을 함락시키고, 등주의 책임자였던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살해했습니다.

이 공격은 등주의 경제를 완전히 파탄시켰고, 당나라가 도시 재건을 위해 30만 규모의 막대한 세금 감면 조치를 시행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논쟁)

신생국 발해가 세계제국의 본토를 선제공격하여 승리한 이 사건은 동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2.2. 흔들리는 동아시아: 신라의 참전과 암살 시도

궁지에 몰린 당 현종은 나당전쟁 이후 서먹했던 신라에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신라의 성덕왕은 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이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발해 남쪽 국경으로 향하던 신라군은 혹독한 추위와 한 길이나 쌓인 폭설 때문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수많은 동사자만 낸 채 퇴각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신라의 계산된 외교적 행보였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최소한의 군사적 시늉으로 당나라의 환심을 사고, 대동강 이남 영유권 인정이라는 실리를 챙기면서도, 발해와의 전면전은 피하려 했다는 분석입니다.


한편, 당나라가 망명한 동생 대문예를 발해 토벌군의 지휘관으로 내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무왕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논쟁)

그는 당나라의 제2수도인 낙양(洛陽)에 자객을 보내, 천진교(天津橋) 다리 위에서 대문예를 습격했으나 아쉽게도 암살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전승)


2.3. 제2차 공격: 만리장성 앞으로 진격하다 (733년)

1차 공격이 바다를 통한 기습전이었다면, 2차 공격은 육지를 통한 대규모 정면 대결이었습니다. 

733년, 무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거란과 연합하여 당나라 북쪽 국경, 만리장성 바로 앞인 마도산(馬都山) 일대로 진격했습니다. (추정)


무왕이 이끄는 발해-거란 연합군의 맹렬한 기세에 당나라 군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나라는 발해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수백 리에 달하는 길에 돌로 장벽을 쌓는 등 필사적인 방어에 나서야 했습니다. 

이 전투는 신생국 발해의 군사력이 결코 얕볼 수 없는 수준임을 만천하에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의 칼날을 대제국의 심장 가까이 들이댄 무왕. 

이제 그는 피로 얻어낸 발언권을 가지고 발해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3. 새로운 강국의 탄생과 무왕의 유산

3.1. 전쟁의 끝과 새로운 질서

발해의 강력한 공세 이후, 북방의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거란의 세력이 약화되는 등 국제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왕 역시 더 이상의 소모적인 전쟁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는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서로의 포로를 교환하며 길었던 전쟁을 마무리했습니다.


이 전쟁은 발해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그 의미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독자적 위상 확보: 발해는 더 이상 당의 변방 세력이 아닌, 당나라가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동아시아의 독립적인 강국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 국정 안정과 자신감 획득: 외부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며 무왕의 왕권은 강력해졌고, 국정은 안정되었습니다. 이후 무왕은 북방 방위·교통 거점을 다지며 기반을 확장했고, 본격적 천도·도성 정비는 문왕 대에 전개되었다. (논쟁)

• '해동성국'의 초석 마련: 무왕의 강력한 군사적, 외교적 성공은 이후 발해가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해동성국)'로 불리는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강력한 나라를 꿈꾼 군주, 무왕

발해 무왕의 대당(對唐) 전쟁은 동생에 대한 개인적인 분노나 무모한 도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의 후예로서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려는 치밀한 계산과 대담한 결단이었습니다.


그의 강력한 의지와 노력이 있었기에, 발해는 건국 초기의 위기를 극복하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당당히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무왕은 발해 역사에 단순한 정복 군주가 아닌,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 초석을 다진 위대한 군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 등 신뢰 가능한 사료와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한 서사적 재구성입니다.

해석이 갈리는 대목은 (논쟁), 후대 전설·일화는 (전승)으로 표시합니다. 

인물 대사·장면 묘사는 이해를 돕기 위한 창작이며, 연대·지명·관직 등 핵심 정보는 사료 범위 안에서만 사용했습니다.


Balhae’s King Mu (r. 719–737), heir of Goguryeo, faced Tang pressure and the Black Water Mohe. 

A rift with his brother Dae Munye—who defected to Tang—shaped the crisis. 

In 732, admiral Jang Mun-hyu struck Dengzhou by sea; in 733, Balhae and Khitan forces pressed the Great Wall frontier. 

Silla’s aid to Tang proved limited. An attempted hit on Dae Munye is later tradition. 

 After hard blows, Mu pivoted to détente, securing autonomy and laying the groundwork for Balhae’s later flores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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