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 정도전, 조선의 설계자: 이성계 동맹부터 왕자의 난까지의 대서사 (Jeong Do-jeon)


삼봉 정도전, 혁명의 설계자


어둠 속의 설계자 

1398년 (태조 7년) 8월.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신생국의 도읍 한양 (유교적 이상을 담아 정도전이 설계한 수도)은 고요했지만, 권력의 중심부인 강녕전 (국왕 태조 이성계의 침소) 주변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태조 이성계 (조선의 창업군주)는 급작스러운 병으로 위중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정도전 (鄭道傳, 1342~1398년. 조선 건국의 최고 공로자이자 설계자)은 당시 국가의 전권을 쥐고 있던 최고 권력자였다. 

그는 문하시랑찬성사 (최고 행정관청의 2인자), 동판도평의사사, 판호조 등 군국 (軍國)의 요직을 겸임하며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 정안군 이방원 (李芳遠, 훗날 태종)이었다. 

이방원은 어린 이복동생인 방석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세자)에게 왕세자 자리를 빼앗기고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된 채 절치부심 (切齒腐心)해 온 상태였다. 


(남은의 첩 집 – 현재의 종로구청 자리, 송현방 근처)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정도전은 남은 (南誾, 개국공신이자 정도전의 동지), 심효생 (개국공신) 등 동지들과 함께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군주의 생사가 오가는 위중한 시기에 최고 재상 (宰相)이 신료답지 않은 처신으로 술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의 크나큰 과실이자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이는 경계심이 없었거나, 혹은 당시 정국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는 정치력과 처세술의 부재를 강하게 비판받는 부분이다. 

술잔이 오가고, 늦여름의 습한 공기가 어색한 농담으로 채워질 무렵, 문밖이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남은이 취중에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밖이 왜 이리 소란한가? 이 밤중에… 군사들의 움직임이 느껴지네.” 

정도전은 호방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하하! 남 장군 (남은), 자네는 근심이 태산이구먼. 이 도성 안에 군사를 움직일 자가 누구란 말인가. 왕자들의 사병 (私兵)은 이미 혁파 (革罷)되었고, 삼군부 (三軍府)의 병권은 이 삼봉 (정도전의 호)이 쥐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삼군부는 제도적 병권 기관으로, 실병력은 왕자·군영 네트워크의 영향이 컸다는 지적이 있다.) 

바로 그 혁파가 완전히 이행되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간과했던 왕자들의 무력 기반이 이 순간,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이방원은 사병을 완전히 혁파하려 했던 정도전에 대한 위기의식과 증오를 바탕으로 그를 제거하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전하 (태조 이성계)께서 이미 이방원 (정안군)을 전라도로, 방번을 동북면으로 보내야 한다고 재가하셨네. 이제 우리의 재상 중심 정치 (신권 중심의 정치 체제)는 완벽히 안정될 걸세.” 


바로 그 순간, 문이 박살 나며 이방원의 사병 (私兵)들이 들이닥쳤다. 

이방원: “삼봉 정도전! 너의 죄를 모르느냐! 어린 서자 (庶子)를 앞세워 감히 종친들을 해 (害)하려 하고 조종 (祖宗)을 어지럽히려 하지 않았느냐!” 

정도전은 민부 (전 판사 민부)의 집으로 도망쳤으나, 배가 불룩한 사람이라는 묘사로 인해 집주인이 그를 이방원에게 고발했다. 

이는 당시 사서 (史書)에 기록된 정도전의 외모적 특징이다. (논쟁: 이 기록은 태종 집권 후 악의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있다.) 


정안군 앞으로 끌려 나온 정도전. 

그는 침실 안에서 자그마한 칼을 쥐고 있었으나 (태조실록 등 후대 편년사에 보이는 기술로, 정권 편향 가능성이 지적된다·논쟁), 소근 (이방원의 종자)의 호통에 칼을 버리고 기어 나오듯 절박하게 나왔다고 한다 (태조실록 기록, 논쟁). 

정도전: (비굴한 태도로)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 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태조 즉위년에 공 (이방원)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살려 주소서.” 

이방원은 싸늘하게 답했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 (奉化伯)이 되고도 부족하여 어찌 이 지경으로 악행을 저지르느냐!” (정도전은 1396년에 봉화백에 봉작되었다. 봉화 정씨 출신으로 봉화 지방의 호장 세력이었던 연고로 받은 작위였다.) 


이방원은 결국 정도전을 베어 죽였다. 

조선 건국 최대의 공로자이자 혁명의 설계자는 너무나도 기습적으로, 술자리에서 그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해 현재 묘소는 가묘 (假墓)이다. 


이방원은 정도전에 대한 증오가 워낙 커서, 그의 집터 (현재 종로구청 자리)를 몰수하여 말을 먹이는 관청인 사복시 (司僕寺)로 사용했다. (정도전 집터를 사복시로 썼다는 서술은 상징적 폄하 행위로 해석되나, 세부는 견해 차가 있다.)


정도전 표준영정

성리학의 맹아와 사생활의 그늘

혼돈의 시대와 향리 (鄕吏) 출신 

정도전은 1342년 (고려 충혜왕 3년) 정운경 (鄭云敬, 형부상서)과 우씨 부인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현재 단양 삼봉 (도담삼봉이 있는 충청북도 단양군)의 외가에서 태어났다고도 하지만 (논쟁: 출생지를 두고 영주와 단양 간의 갈등이 있다), 부친의 근거지인 영주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부친 정운경은 청백리 (淸白吏)의 표상으로 《고려사》 양리전 (良吏傳)에 수록될 정도로 존경받는 관리였다. 

정도전의 본관은 봉화 정씨로, 봉화 지방에서 대대로 호장 (지방 세력의 실질적 지배자)을 세습해 온 향리 출신이었다. 

신흥사대부 (新興士大夫)의 일원이었지만, 그에게는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신분적 약점이 있었다. 

그의 외조모가 노비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모계 혈통의 천한 출신 (賤根)은 훗날 그가 정적들에게 탄핵당할 때마다 신분적 약점을 공격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러한 약점은 그에게 강력한 자주 의식과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科擧)을 주장하게 만든 동력이었을지 모른다 (논쟁).


성리학의 각성과 친구의 맹세 

정도전은 당대 최고의 지성을 대표했던 이색 (李穡, 대사성/성균관 박사)의 문하에서 정몽주 (鄭夢周, 포은), 이숭인 (도은), 이존오 등과 함께 성리학 (性理學)을 배웠다. 


고려 말 안향 (安珦)이 원나라에서 처음 들여온 성리학은 도덕 정치, 왕도 정치, 민본사상 등을 강조하며, 당시 젊은 학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는 권문세족에게 집중된 권력 체제의 모순과 불교계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적 무기였다. 

1362년 (공민왕 11년), 21세의 나이로 과거 (문과 동진사)에 급제하며 본격적으로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1366년,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달아 당하자 그는 고향 영주에서 주자가례 (朱子家禮)에 따라 3년 상을 치르는 여묘살이 (상주가 무덤을 지키는 일)를 실천했다. 


당시 백일 탈상 (百日脫喪)이 일반적이었던 관행을 거부한 그의 행동은 성리학적 이상을 실천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 여묘살이 기간에 정몽주가 보내준 책이 바로 《맹자 (孟子)》였다. 

《맹자》는 불가피한 경우 역성혁명 (易姓革命)의 필연성을 강조한 책이었고, 이는 정도전의 마음에 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영주 여묘, 정몽주가 찾아와 맹자를 건네는 장면) 

정몽주: "삼봉, 이 땅의 썩어 문드러진 폐부를 도려낼 칼날은 오직 성리학뿐이네. 허나, 이 맹자는 우리가 언젠가 넘어야 할 선 (線)에 대해 말하고 있네. 왕도 (王道)가 무너지면 천명 (天命)은 백성에게서 떠난다고. 군주가 그 임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인심이 돌아서고 천명이 떠난다. 자네의 고뇌가 깊음을 아네.” 

정도전: (흙 묻은 손으로 맹자를 받아 들며) “포은 (정몽주의 호)! 이 폐단의 근원은 권문세족 (權門勢族)의 토지 겸병과 사원 경제 (寺院經濟)의 횡포에 있네. 농민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고, 나라의 세금은 고갈되었네. 이 썩은 고목을 베어내지 않고 어찌 새싹을 틔울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유자 (儒者)의 소임은 경세제민 (經世濟民) 아닌가.” 


이 시기 정몽주와 정도전은 학문적 동지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정도전은 정몽주를 ‘우리나라 도덕과 문장의 으뜸’이라 극찬했고, 자신이 척불 (斥佛) 운동을 하는 것도 정신적으로 정몽주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권신과의 충돌과 나주 유배 

정도전이 관직에 들어선 시기는 공민왕 (恭愍王)의 개혁 정책이 추진되던 때였다. 

공민왕은 친원파 (親元派) 숙청, 반원 자주 정책을 펼치며 권문세족 척결을 위해 신진 사대부를 적극 양성했다. 

정도전은 공민왕의 후원 아래 탄탄한 관직 생활을 했으나,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 (禑王)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인임 (李仁任, 친원파 권신), 경복흥 등 친원파 (親元派)가 권력을 장악했고, 정도전의 정치적 행로는 순탄치 않게 되었다. 


정도전은 1375년 (우왕 원년) 북원 (北元, 원나라가 명나라에 밀려 북쪽으로 간 후 칭한 이름) 사신이 오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조정 대신들의 회의) 

이인임: “명 (明)은 아직 만만치 않은 세력이다. 북원과의 이중 통교 (二重通交)를 통해 국경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 

정도전: (강직하게) “북원은 이미 해 (害)가 된 지 오래입니다. 선왕 (공민왕)께서 명나라를 섬기기로 결책을 결정했습니다.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려야 합니다!” 


이인임의 노여움을 산 정도전은 1375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나주 거평 부곡 (羅州 居平部曲)으로 유배되었다. 

이 유배 생활은 세상의 모순에 분노했던 정도전을 완전히 혁명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3년간 부곡 (部曲, 천민들이 살던 지역) 민중들과 생활하며 농민들의 참상을 직접 경험했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수탈로 인해 백성들은 농토를 버리고 떠돌거나 도적이 되는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목격했다. 

그는 고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혁명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유교의 천리 (天理)에 대한 신념을 담은 《심문천답 (心問天答)》을 저술했다. 

이 책은 불교의 인과응보 (因果應報)에 대한 유교적 비판을 담고 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정도전은 영주, 단양, 북한산 등지에서 야인 (野人) 생활을 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삼봉재 (三峯齋)라는 학당을 세웠으나, 주변 권문세족들의 방해와 박해로 인해 세 번이나 강제로 헐리는 수모를 겪었다. 

이는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그의 강직하고 과격한 성품이 낳은 결과였으며, 그를 싫어하는 반대 세력이 조정과 지방에 굳건했음을 시사한다. 


정도전의 부인인 경주 최씨 (慶州崔氏, 경숙택주 최씨)는 이 시기 가문의 어려움을 겪으며 남편에게 호소했다고 전해진다. 


(영주, 초려 (草廬)에서) 

최씨: “대감 (정도전), 평생 부지런히 독서하며 입신양명 (立身揚名)하여 처자가 우러러 의지하고 가문에 영광을 가져오리라 기대했습니다. 허나 지금은 경쇠 (磬, 악기)를 걸어 놓은 것처럼 한 섬의 식량도 없는데, 아이들은 춥고 배고프다고 웁니다. 끝내는 나라 법에 저촉되어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고, 가문은 흩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것이 대감의 학문이 이룬 결과입니까!” 

정도전: (씁쓸하게)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여 고려 왕조가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들에게는 인 (仁)의 생명도, 입법 (立法)의 공적 지배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도 없네. 나는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내 소임으로 삼았네. (그의 호인) 삼봉 (三峰)은 이 단양의 세 봉우리를 보고 지은 호 (號)이지. 하지만 이 삼봉은 내 마음속의 세 봉우리. 유학 (철학), 역사학, 정치학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뜻일세.” 


이 시기 정도전은 온후함이 없고, 타협을 모르는 강직함으로 인해 많은 적을 만들었다. 

이는 재상 (宰相)으로서 필요한 처세술과 정치력의 부재를 강하게 보여주는 그의 인간적인 실책이었다. 

특히 우현보 (禹玄寶)의 집안을 숙청할 때, 그를 음해하고 조롱했다는 이유로 우현보의 아들 셋을 곤장형으로 죽인 일은 (전승) 사적인 앙갚음이 개입되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 사건 이후 우가 (禹家)는 정가 (鄭家)와 혼인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후대에 남겼다 (전승).


킹메이커, 이성계를 이용하다

혁명의 파트너를 찾아서 

고려 말은 권문세족과 불교 세력의 횡포 외에도 남방의 왜구 (倭寇)와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던 위기 상황이었다. 

이러한 잦은 외부 침략은 무장 세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고, 최영, 이성계, 최무선 등이 구국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1383년 (우왕 8년) 가을, 정도전은 함주 (함길도 함흥) 막사로 들어가 동북면 도지휘사 (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장군 이성계를 찾았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혁혁한 무공과 그의 휘하 군대가 호령이 엄숙하고 정제 (整齊)된 모습을 보고 혁명의 성공을 직감했다. 


정도전: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성계: “무엇을 이름인가?” 

정도전: (순간 혁명의 야심을 감추며)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이 만남은 머리 (정도전의 지성)와 힘 (이성계의 군사력)이 결합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장량 (張良)이 한고조 (漢高祖)를 이용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스스로 조선왕조 건설의 최고 주역임을 자부했다. (논쟁: 태종 이방원은 이를 정도전의 본분을 망각한 오만한 실언으로 여겼으며, 실제 역사에서 정도전은 장량처럼 책략가 역할을 한 적이 없다는 비판도 있다). 


이성계는 군사적 아웃사이더로서 주류 고려 사회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고, 정도전은 서얼 혈통의 아웃사이더로서 주류 진입에 고심하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최대한 합법적이고 단계적인 방법으로 신왕조를 세우는 ‘이성계 왕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위화도 회군과 토지 개혁 (과전법) 

이성계와 정도전의 세력은 조준 (趙浚) 등 다른 신진 사대부들과 협력하며 성장했고, 마침내 1388년 (우왕 14년), 위화도 회군 (威化島 回軍)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성계가 군사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정권 장악 후, 이들은 전제 개혁 (田制改革), 즉 과전법 (科田法)에 신속히 착수했다. 

이는 사전 (私田)의 확대로 곤궁해진 농민 생활과 어려워진 국가 재정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개혁이었다. 

정도전은 계민수전 (計民授田), 즉 전국의 토지를 국가 (公家)에 귀속시키고 인구수를 헤아려 백성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무상 분배하는 이상적인 정전제 (井田制) 모델을 추구했다. 

그의 정치철학의 핵심인 민본사상 (民本思想)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이다 (民者 國之本而君之天)’라는 주장에 명확히 드러났다. 


(토지 개혁 논의. 조준, 정도전, 이성계의 대화) 

정도전: “백성이 토지를 경작하게 했을 뿐인데, 힘이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소출의 절반을 빼앗깁니다.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도적이 되니,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가 관리하고, 인구수대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계민수전)!” 

조준: (고개를 저으며) “삼봉의 이상은 높습니다. 허나 구가 세족 (舊家世族)들이 이 개혁을 방해하고 원망할 것입니다. 지금은 현실을 고려해야 할 때입니다.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주면 당장 국가 재정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일단 경기의 토지만을 몰수하여 관리들에게 수조권 (收租權)을 나누어주는 과전법을 시행하여, 신진 관료의 생활을 보장하고 국가 재정의 기반을 확충해야 합니다.” 


결국, 정도전의 이상적인 계민수전은 구가 세족들의 강력한 반대와 급진파 사대부 내부 (조준)의 현실적 입장 차이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실제로 토지 개혁을 주도하고 실질적 공적을 세운 인물은 조준이었다. 

정도전은 이 결과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전조 (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 배나 낫지 않겠는가”라며 과전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폐가입진 (廢假立眞: 가짜 혈통으로 왕위에 오른 왕을 폐위하고 진짜 혈통을 왕위에 세움)의 명분으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 (恭讓王)을 옹립했다. (논쟁: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은 조선 왕조의 조작으로 보는 것이 현대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조선의 설계자, 신권의 이상

조선 건국과 유교 국가의 기틀 

1392년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의 선위 (禪位)를 받는 형식으로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로 즉위했다. 

정도전은 개국 1등 공신으로 책록되었고, 조선 건국에 대한 공로로 '유종공종 (儒宗功宗)'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는 국호 (國號)를 ‘조선’으로, 도읍지를 한양 (현재 서울)으로 선정하는 모든 일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양 천도는 고려의 구신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새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장면: 경복궁 궁궐 터 선정 논쟁) 

무학대사 (왕사, 풍수지리의 대가): “이곳 한양 땅에 세우는 궁궐은 인왕산 (백악산 서쪽)을 등지고 동향 (東向)으로 지어야 나라가 오래도록 융성합니다. 백악 (북악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지으면 훗날 검은 옷을 입은 도적 (이방원 세력 암시)이 동쪽에서 쳐들어올까 두렵습니다 (전승·사료 확증은 약함).”

정도전: (단호하게) “자고로 모든 제왕은 남쪽을 보며 정사 (政事)를 폈습니다. 유교 (儒敎)의 이념상 남향이 옳습니다. 또한 무학대사가 추천한 인왕산 아래 터는 너무 좁아 왕궁으로 적당하지 않습니다.”


결국 태조 이성계는 유교적 이상주의를 추구한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었고, 경복궁 (景福宮)은 북악산 아래 남향으로 세워졌다. 

정도전은 경복궁의 이름뿐 아니라 근정전 (勤政殿), 사정전 (思政殿), 강녕전 (康寧殿) 등 주요 전당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의 이름까지 유교적 덕목과 가치관에 기반하여 지었다.


재상 중심의 신권 정치(臣權政治)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 (1394년. 조선 건국의 이념적 가치와 통치 규범을 제시한 책. 훗날 《경국대전》의 모체가 됨)과 《경제문감 (經濟文鑑)》 (1395년. 재상, 대간 등 신하의 직분과 치도를 밝힌 책) 등을 저술하여 새로운 나라의 통치 체제와 법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가 구상한 체제의 핵심은 신권 (臣權)을 강조한 재상 중심의 정치였다. 


정도전: (《조선경국전》을 펼치며) “국왕의 직책은 재상과 의논하는 데 있다. 군주의 자질에는 혼명강약 (昏明強弱)의 개인차가 있으니, 왕권주의보다는 천하의 인재 가운데 선발된 재상이 국정을 보필하고 실질적인 권한 (輔相과 宰制)을 행사해야 한다.” 


정도전은 재상의 역할을 보상 (輔相, 군주를 보필하고 악한 점은 바로잡음)과 재제 (宰制, 백관과 만민을 다스려 공평하게 함)로 설명했다. 

재상은 군주가 부당한 길로 나아가면 견제하고 정당한 길로 나아가면 균형을 맞추어야 했다. 

이는 군주와 신하가 국정을 함께 관리하는 군신공치 (君臣共治) 또는 군신분치 (君臣分治)의 이상이었다. (이는 당시 전제군주제가 기본이던 시대에 입헌군주제에 가까운 혁신적인 구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또한 대간 (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의 위엄과 명망을 강조하며, 재상과 대등한 직무를 수행하여 왕권 전제를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척불론과 사상적 일원화의 비판 

정도전은 고려 귀족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그는 《불씨잡변 (佛氏雜辨)》 (1398년 저술. 불교 교설에 대한 철학적 평론서)을 지어 불교의 윤회설, 인과설, 지옥설 등의 비합리성과 인륜을 파괴하는 사회적 폐단을 공격했다. 

정도전은 유교적 입장에서 사후 세계관이 현실을 바꾸려는 민중의 의지를 꺾고 혹세무민 (惑世誣民)한다고 보았기에,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했다. 


( 《불씨잡변》 일부를 낭독하며) 

정도전: “군자 (君子)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함과 같아 모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옥설 (地獄說) 때문에 악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理)와 기 (氣)의 개념을 응용하여 볼 때, 불교의 교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그릇되게 하여 공의 (公義)를 망각하고 인륜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그의 이러한 척불 (斥佛) 노력은 조선의 사상적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업적이었으나, 정도전 개인의 행보에서는 모순적인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불심 (佛心)이 지극했던 주군 태조 이성계가 불교를 숭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했으며, 심지어 불교에 대해 긍정적인 시를 짓거나 승려들과 교류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모순은 정치가로서의 실용주의와 유학자로서의 이상주의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성리학적 이상을 국가 이념으로 강하게 밀어붙인 자의 위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세자 책봉과 정치적 고립 

정도전의 몰락은 태조의 후계자 문제, 즉 세자 책봉에서 시작되었다. 

태조의 정비 (正妃)인 신의왕후 한씨 (神懿王后 韓氏) 소생의 장성한 아들 6명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이 있었으나, 정도전은 계비 (繼妃)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어린 아들 방석 (芳碩, 11세)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적극 관여했다. 

정도전은 자질이 일정하지 않은 국왕이 전권을 행사하는 것보다는 어린 세자가 즉위해야 자신 (재상)이 국왕을 보필하며 신권주의 (臣權主義)를 강력하게 펼칠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다. 


이 결정은 성리학의 기본 원칙인 적장자 계승 (嫡長子繼承)의 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는 혁명의 정당성을 맹자 (孟子)의 역성혁명론에서 찾았던 정도전 스스로가 자신의 이념을 배신하고 권력의 사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한 행위였다. 

이로 인해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한씨 소생의 왕자들과 조준을 비롯한 일부 공신들마저 정도전에게 등을 돌리며 정치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요동 정벌과 외교적 위기 

정도전은 군사력을 재상 중심으로 집중시키고 왕자들의 기반을 해체하기 위해 사병 (私兵)을 혁파하려 했다. 

동시에 요동 정벌 (遼東征伐) 계획을 추진했다. 

표면적으로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자주 의식을 확립하려는 야심찬 계획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왕자들을 견제하고 병권 (兵權)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명나라 (明, 주원장)를 크게 자극했고, 명나라는 조선에서 올린 표전문 (表箋文) 내용의 불손함을 트집 잡아 정도전을 요동 정벌 계획의 주동자로 지목하는 등 강경 반응을 보였다. ( ‘정도전 압송’ 직접 요구로 단정하기는 신중하다는 견해가 있다.) 


(조정 대신들과 태조의 대화) 

태조 이성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짐이 보낸 표전문 (외교 문서)이 명 황제 (주원장)를 모욕했다 하여 정도전을 잡아 올리라니, 이것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조준: “전하, 정도전의 요동 정벌론은 위화도 회군의 대명분을 스스로 갉아먹는 것입니다. 지금 군량이 넉넉지 못하며, 백성들은 토목 공사 (한양 천도)로 원망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이 상태로 요동에 도착하기 전에 나라가 패망할까 염려됩니다!” 

정도전: “대국 (大國)을 자처하는 저들이 표문 (表文)을 가지고 트집 잡는 것은, 성장하는 조선의 세력에 위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요동 진출을 막으려는 쐐기 박기일 뿐입니다. 우리는 명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결국 정도전은 이 외교적 위기와 조준 등 동료 공신들의 반대 속에서 고립되었고, 태조는 그를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요동 정벌은 실행되지 못했다.


파국과 후대의 평가

왕자의 난 (1398년, 무인정사) 

정도전은 사병 혁파와 왕자 이방원의 외지 파견을 추진하며 이방원에게 생존의 위협을 가했다. 

이방원은 ‘정치적 관계와 인간적 갈등, 그리고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복합적인 이유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세력을 제거했다. 

이 난은 재상 중심의 신권주의가 강력한 왕권주의를 주장한 이방원에게 패배했음을 의미했다. 


정도전의 집터가 사복시 (말을 먹이는 관청)로 사용된 일은 그가 역적의 오명을 썼던 비극적인 상징으로 남았다. (비록 현대에 직접적인 속담이나 단어가 유래된 것은 아니지만, 권력자의 집이 몰수되어 말이나 짐승을 다루는 곳으로 전락한 이 사건은 권력의 무상함과 정치적 패자의 비참한 말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후대에 ‘역적의 터’라는 오명을 남겼다.)


절명시 ‘자조 (自嘲)’와 인간적 고뇌 

정도전이 피살되기 직전, 자신의 삶을 정리한 시 ‘자조 (自嘲, 스스로를 비웃다)’를 남겼다는 전승이 있다 (전승: 절명시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높음). 


(정도전의 마지막 순간, 술자리에서 일어나 허탈하게 읊조린다.) 

정도전: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기에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操存省察兩加功 (조존성찰양가공) 책 속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다네. 不負聖賢黃卷中 (불부성현황권중) 삼십 년 긴 세월 쉬지 않고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 三十年來勤苦業 (삼십년래근고업) 송정 (松亭)에 한 번 취하니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松亭一醉竟成空 (송정일취경성공)” (여기서 조존성찰은 맹자와 주자가 이야기한 성리학의 수양 방법을 의미하며, 송정은 그가 최후를 맞은 남은의 첩이 있던 송현방의 정자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이 시는 성리학적 이상에 충실했던 삶이 혁명이라는 현실 정치 (松亭一醉) 앞에서 무너졌다는 자조적인 탄식을 담고 있다. 

만약 이 시가 그의 절명시가 아니라면, 태조실록에 기록된 비굴한 모습과 배치되는 ‘영웅적 최후’를 그렸다는 전승이다. 

하지만 이방원 측의 기록에 의한 비굴한 최후이든, 영웅적 고뇌가 담긴 시이든, 최고 권력자가 가장 위중한 순간에 자신의 목숨줄인 정적 (이방원)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한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다. 


정도전의 아들 중 둘째, 셋째, 막내 (정영, 정유, 정담)는 아버지와 함께 무인정사 때 전사했다. 

정담은 ‘자결했다’는 기록도 있다. 

맏아들 정진 (鄭津)은 지방에 있어 화를 면했으나, 수군 (水軍)의 일개 병사로 강등되었다가, 몇 년 후 태종 이방원에 의해 판나주목사로 복권되고 세종 대에는 형조판서까지 역임했다. 


정도전의 후손들 (증손자 정문형 등)은 이후 조선 시대에 고위 관직을 지내며 영달을 누렸는데, 이는 태종이 정도전을 역모죄 (逆謀罪)가 아닌 종친 모해죄 (宗親謀害罪)로 몰아 삼족 (三族)을 멸하지 않고 정적으로만 간주했음을 시사한다.


후대 사림 (士林)의 박한 평가와 재평가 

정도전은 조선왕조를 유교 사회로 만드는 기틀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를 이은 조선왕조 사림 (士林)들의 평가는 후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왕조 유교의 도통 (道統, 유교의 정통 계보)에서도 제외되었다. 


사림들은 군주를 성군으로 만드는 군주의 마음 (王權)에 통치의 핵심이 달렸다고 보았기에, 재상 중심의 신권주의를 주장한 정도전의 사상은 환영받지 못했다. 

사림들은 오히려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충절의 표본으로 성역화하고, 정도전은 ‘주군을 배신한 간적 (奸賊)’이라는 이중적인 평가를 내렸다. 

정도전은 조선왕조 500년 내내 역적의 오명을 썼다. 

정약용 (丁若鏞, 실학사상가)도 조선왕조 유림들에게 높이 평가받지 못했던 것처럼, 역사적 평가는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었다. 

실질적인 명예 회복은 근현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정조 (正祖) 대의 그의 문집인 《삼봉집 (三峯集)》이 왕명으로 간행되며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고종 (高宗) 대 (1865년)의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이 경복궁 (景福宮)을 중건하면서 왕궁의 설계자였던 그의 공로를 인정해 문헌 (文憲)이라는 시호 (諡號)를 내리고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경복궁을 설계한 공은 인정받았으나, 조선왕조를 설계한 공은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삼봉집 목판

정도전의 업적과 기여 

정도전이 건국 후 활동한 기간은 극히 짧았으나 (7년), 그가 제시한 국가 모델은 500년 조선왕조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유교 국가의 정립: 고려의 불교 중심의 통치 이념을 청산하고 성리학적 합리성에 입각한 통치 체제와 법제 (예제, 樂詞)를 구축했다. 

《조선경국전》을 통해 제시된 조선의 통치 규범은 《경국대전》의 모체가 되었다.


재상 중심 정치: 군주의 자질 차이에 구애받지 않고 천하의 인재가 중심이 되어 정치를 펴는 신권주의 (재상 중심)를 구상했다. 

이는 왕권과 신권의 견제와 균형을 통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를 목표로 했다.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 지방 세력 (향리)의 중앙 정계 진출을 보장하고, 공정한 인재 평가 및 선발 제도 (과거 제도, 좌주문생제 비판), 그리고 지방 통치 제도 개혁을 통해 조선이 고려보다 나은 중앙집권 국가가 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혁명과 배신의 경계선

이색, 정몽주와의 결정적 결별 

정도전의 혁명적 행보는 그의 학문적 스승과 동문들과의 결별을 의미했다. 

이색은 조선 건국을 거부하고 고려에 충절을 지킨 수성파 (守成派) 사대부의 종장이었다. 

정도전은 혁명 후 이색에 대해 강력하게 숙청을 주장했는데, 이색을 외딴 섬 유배(논쟁)로 보내려 했을 때, 태조 이성계가 “섬에 귀양 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다”라며 반대하고 육지로 유배 보냈다는 일화는 정도전의 과격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장 비극적인 결별은 정몽주와의 관계였다.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개혁하여 지키고자 하는 수성 개혁파를 대표했으며, 정도전은 근본적인 부정을 통한 역성혁명파를 대표했다. 


(공양왕 재위기, 두 사람의 마지막 정치적 논쟁) 

정몽주: “삼봉! 나는 자네의 경세제민 (經世濟民)의 뜻에 동의하네. 허나 왕실 (王室)은 혈연 (血緣)으로 맺어진 절대 불변의 관계이네. 군주 (君主)가 문제가 있더라도 신사는 충성을 지키는 것이 대의 (大義) 아닌가!” (수성파는 사적인 인정을 중시하는 혈연 중심의 유교 (친친 親親)를 강조했다). 

정도전: (분노하며) “포은! 군주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충성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명 (天命)과 인심 (人心)에 합치될 때에만 정통성이 있는 것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듯, 군주가 도 (道)를 어기면 혁명은 필연적입니다. 지금 고려는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백성들의 신임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상적, 정치적 차이는 이들을 돌이킬 수 없는 적으로 만들었다. 

1392년 (공양왕 4년), 이성계의 낙마 사고로 정몽주가 일시적으로 실권을 잡자, 그는 정도전을 ‘가풍이 부정하고 천근 (賤根)을 감추기 위해 모함했다’는 신분적 약점을 들어 강력하게 탄핵하고 투옥시켰다.


정도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이방원은 정몽주를 선죽교 (善竹橋)에서 철퇴 (鐵槌)로 격살 (擊殺)하는 돌발적이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국면을 전환시켰다. 

이는 정도전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었지만, 이성계 정권의 정통성에 큰 흠집을 남겨 많은 지식인이 조선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선죽교 (북한 개성)

정도전은 고려 말의 폐단을 극복하려 했으나, 결국 스승과 동료를 버리고 피를 묻혀 혁명을 완성했다.

혁명가로서 대업 (大業)을 위해 사적인 인의 (仁義)를 희생했다는 평가와 잔혹한 패륜아라는 비판이 공존한다.


중앙 집권 체제와 관료 정치 

정도전은 조선의 통치 구조를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로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는 지방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향리 (鄕吏)의 지위를 수령의 행정 보조원으로 격하시키고, 관찰사 (觀察使)를 파견하여 중앙 통제를 강화했다. 

그의 인사 제도 개혁은 능력 위주였다. 

그는 과거 제도에서 좌주문생제 (座主門生制)를 ‘공적인 인재 선발을 사사로운 은혜 베풀기로 만든 것’이라 강하게 비판하며 혁파하려 했다. 

또한 문과와 무과의 중요성을 동등하게 인식하여 병농일치 (兵農一致)의 국방 원칙을 제시했다. 


정도전은 중앙과 지방의 주기적인 인사 교류를 통해 지방 세력의 중앙 정계 진출을 보장하려 했으며, 이는 조선 초기에 일정 부분 실현되었다. 

이 개혁안 중 상당 부분 (수령은 되도록 과거 합격자로 임명, 중앙 각 부처의 재무/인사권 박탈 등)은 이후 태종과 세종 대에 복원되거나 유지되어 조선이 고려보다 안정적인 국가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청년 이방원과 숙명적 대립의 씨앗 

이방원은 조선 건국 당시 아버지 이성계의 무장 세력과 정도전의 신흥 사대부 세력 사이에서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담당했으나, 건국 후 정치적 권한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개국 공신 책봉에서 정도전, 조준 등에게 밀려 권력 핵심에서 배제되었고, 특히 세자 책봉 문제에서 어린 방석이 선택되자 이방원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방원과 하륜의 대화. 1395년경) 

이방원: “정도전은 짐짓 스스로 장량 (張良)인 양 행세하며 아버지를 이용하고, 어린 방석을 앞세워 국왕 위에 재상 (宰相)이 군림하는 나라를 만들려 하는구려. 이 나라가 이씨 (李氏)의 나라입니까, 정씨 (鄭氏)의 나라입니까 (전승)!” 

하륜 (河崙, 이방원의 책사, 훗날 정사공신): “대군 (大君)의 뜻이 옳습니다. 재상 정치는 군주의 자질에 따라 국정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는 명분이 있으나, 결국 권력이 특정 신하에게 집중되는 위험을 내포합니다. 대군께서는 강력한 왕권을 전제로 한 통치 체제 (왕권주의)를 세워야만 합니다.” 


정도전이 주장한 신권주의와 이방원이 지향한 강력한 왕권주의는 양립될 수 없는 숙명적인 갈등이었다. 

정도전은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을 통해 이방원의 군사적 기반을 해체하려 했고, 이방원은 이를 자신과 왕실을 해치려는 ‘종친 모해죄’로 규정하고 선수를 쳤던 것이다.


에필로그

냉혹한 정치 현실의 거울 

정도전은 뛰어난 실천적 경세가 (經世家)이자 유학 사상가였지만, 냉혹한 정치 현실은 그와 이방원 둘 중 하나만을 필요로 했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승리를 넘어 정치 사상의 승패를 가른 사건이었다. 

태종 이방원 (훗날 조선 제3대 왕)은 정도전을 제거한 후 강력한 왕권주의를 펼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들 세종 (世宗)은 정도전의 사상을 일부 복원하고 재상 중심 정치 (의정부 서사제)를 다시 시행했다. 

이는 정도전이 구상했던 국가 경영의 기본 골격이 그만큼 500년 조선의 현실에 부합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정도전은 백성이 근본이 되는 민본주의적 이상과 성리학적 합리성이라는 완벽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 현실의 타협과 인간적 욕망 (권력) 앞에서 좌절했다. 

아무리 훌륭한 이상이라도, 현실적인 정치력과 처세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파국을 맞을 수 있다. 


정도전의 재상 중심 신권주의는 비정상적인 왕 (혼명강약)이 다스리는 시대를 대비한 합리적인 시스템이었지만, 이방원의 강력한 왕권은 혼란한 개국 초기에 신속한 개혁과 중앙 집권을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역사는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리더십의 유형을 선택한다.


정도전은 당대에는 역적이었으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이는 단기적인 현세의 평가에 연연할 것이 아니며, 역사의 신은 시간이 지나면 정당하게 평가한다는 교훈을 준다.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고려사』·『삼봉집』 등 신뢰 가능한 사료와 주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를 소설적으로 각색한 재구성입니다. 

사실과 해석이 엇갈리는 대목은 (전승)·(논쟁) 표기로 구분했으며,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한영 병기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본문 서사 속 대화는 역사적 맥락에 근거한 창작이며, 핵심 사건의 연대·지명·관직명은 사료 기준을 우선했습니다.


Set in late-14th-century Korea, this narrative follows Jeong Do-jeon from provincial origins and Neo-Confucian training under Yi Saek to exile in Naju, where Mencian ideas sharpen his reformist zeal. 

He allies with Yi Seong-gye, engineers Goryeo’s fall, and designs Joseon’s institutions, championing minister-led checks, land reform, and anti-Buddhist critiques—yet breeds enemies through rigor and misjudgment. 

Backing the young prince Bangseok and pushing troop reforms, he collides with Yi Bang-won; the 1398 coup kills him. 

Later censure yields to partial rehabilitation, underscoring how ideals require political craft and durable balances of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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