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도살자' 이디 아민: 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용되고 버려졌는가
제국의 총알받이
폭력 전문가의 탄생
이디 아민 다다(Idi Amin Dada)의 초기 생애는 안개에 싸여 있다.
출생연도는 1925년으로 ‘추정’되며, 유년기 기록은 단편적이다.
그에게 제국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스무 살이 되던 1946년 영국령 ‘왕립 아프리카 소총연대(KAR)’에 보조 인력으로 들어가 군인이 되었고, 이후 하사·장교로 승진했다.
KAR은 아민에게 폭력을 연마할 기회의 장이었다.
영국 식민군은 아프리카 군인에게 정치적 통찰력이나 섬세한 지성보다는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맹목적인 충성심을 요구했다.
거대한 체구와 강인한 체력을 지닌 아민은 제국이 원하는 군인의 전형이었다.
제국의 목적은 아프리카의 전통적 권력 구조에서 분리되어 오직 지휘 체계에만 충성하는 '폭력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었고, 아민은 이 역할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영국 장교들은 그를 지적 능력은 부족하지만 '강렬하게 충성스러운'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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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 |
아민의 잔혹성은 복무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950년대 케냐에서 벌어진 마우마우(Mau Mau)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는 무자비함으로 악명을 떨쳤다.
1962년, 우간다 독립 직전에는 케냐 투르카나(Turkana)족 소도둑 소탕 작전을 지휘하며 고문과 학살을 자행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영국 식민 정부는 독립을 앞두고 '정치적 재앙'을 피하기 위해 우간다의 몇 안 되는 흑인 장교였던 그를 불기소 처분했다.
그렇게 아민은 국가가 공인한 폭력 전문가로 성장했다.
그는 이념이나 통치술이 아닌, 오직 총과 생존 본능만으로 무장한 채 독립 우간다의 무대에 등장했다.
권력을 향한 야망
1. 오보테의 해결사
1962년 독립한 우간다의 초대 총리 밀턴 오보테(Milton Obote)는 불안정한 신생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군부의 힘이 절실했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대령 이디 아민에게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무기'를 발견했다.
두 사람의 공생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보테가 정치적 정당성과 방향을 제시하면, 아민은 군사적 폭력으로 그 길을 열었다.
이 기묘한 동맹의 힘이 폭발한 사건이 바로 1966년 멩고 위기(Mengo Crisis) 였다.
당시 우간다 내에서 막강한 자치권을 누리던 부간다(Buganda) 왕국의 국왕 무테사 2세(Mutesa II)가 중앙 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오보테는 이를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아민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1966년 5월 23일 새벽, 아민이 이끄는 군대는 멩고 언덕의 왕궁을 포격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왕궁은 함락되었고, 무테사 2세는 담을 넘어 겨우 망명길에 올랐다.
이 사건으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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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간다의 카바카, 무테사 2세 |
오보테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정적을 제거해 준 아민을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며 권력의 핵심부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들의 공생은 곧 불신과 견제로 변질되었다.
오보테는 아민의 막강해진 영향력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출신 부족인 랑고(Lango)족과 동맹 관계인 아촐리(Acholi)족 출신 장교들을 군 요직에 앉히며 군 내부에 분열의 씨앗을 심었다.
정치인과 장군의 위태로운 동거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2. 적대적 인수: 1971년 쿠데타
1971년 1월 25일, 오보테 대통령이 영연방 정상회의 참석차 싱가포르(Singapore)에 머무는 사이, 이디 아민은 마침내 칼을 뽑았다.
그가 두려움 속에서 벌인 선제공격이었다.
당시 아민은 군 자금 횡령과 정적 암살 연루 혐의로 오보테의 조사를 받고 있었고, 체포가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아민에게 충성하는 군인들은 수도 캄팔라의 공항, 라디오 방송국, 의회 등 주요 시설을 신속하게 장악했다.
이 쿠데타는 단순한 국내 권력 투쟁이 아니었다.
그 배후에는 서방 세력의 암묵적인 지지가 있었다.
오보테의 좌파적 사회주의 정책과 아랍권과의 밀착은 영국과 이스라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특히 이스라엘은 우간다를 반(反)아랍 전선의 교두보로 여겼으나, 오보테의 노선 변경으로 입지가 흔들리자 아민을 대안으로 점찍었다.
이스라엘 군사 고문들은 아민에게 쿠데타 성공을 위한 조언을 건넸고, 영국 정보기관 역시 오보테의 실각을 반겼다. (논쟁)
당시 한 영국 외무부 관계자는 아민을 가리켜 "영국에 우호적이고,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머리가 나쁘다(pro-British, and thick enough to be controlled)" 라고 평가했다.
서방의 반응은 단순한 방관이 아니었다.
이는 사실상의 추인이자,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새로운 대리인에 대한 전략적 투자였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영국과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아민 정권을 승인하며 지지를 공식화했다.
대중 앞에 선 아민은 교활한 연기를 펼쳤다.
"나는 정치인이 아니라 군인일 뿐입니다. 상황이 안정되면 민주적 선거를 통해 민간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겠습니다."
그는 오보테 정권하에서 억압받던 정치범들을 석방하며 해방자의 이미지를 연출했다.
많은 우간다 국민들은 독재자 오보테를 몰아낸 아민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맞이한 새로운 지도자는 훨씬 더 끔찍한 괴물이었다.
피의 통치
1. 공포 정치의 서막: 숙청과 학살
권력을 장악한 아민의 첫 번째 과업은 잠재적 위협을 뿌리 뽑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보복이 아닌, 쿠데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냉철한 엘리트 교체 전략이었다.
그의 칼날은 군 내부에 남아있던 전임 대통령 오보테의 지지 기반, 즉 아촐리(Acholi)족과 랑고(Lango)족 출신 군인들을 향했다.
이들은 아민의 쿠데타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하게 조직된 내부 세력이었다.
쿠데타 직후 몇 달간 우간다 전역의 군부대에서는 조직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아민에게 충성하는 서부 나일강 지역 출신 군인들이 아촐리와 랑고족 동료들을 색출하여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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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간다 육군 장교 톰 마사바의 처형 직전 모습 |
1971년 3월 8일, 캄팔라의 말리레(Malire) 막사에서는 32명의 아촐리 및 랑고족 장교들이 폭발물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제사법위원회(ICJ)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의 학살은 끔찍한 수준이었다.
캄팔라 외곽의 마킨디예(Makindye) 군 교도소에는 '싱가포르 룸(Singapore Room)'이라 불리는 고문실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수많은 장교들이 총살당하거나 철퇴로 맞아 죽었다.
바닥의 피가 마를 날이 없어 1cm 가까운 두께로 굳어버렸을 정도였다.
탄자니아 국경 인근의 무투쿨라(Mutukula) 감옥에서는 수감된 군인들이 집단으로 처형된 후 암매장되었다.
1년 만에 약 5,000명에 달하는 군인과 경찰이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민의 폭력은 군에만 머물지 않았다.
베네딕토 키와누카 대법원장의 후임이었던 마케레레 대학 부총장 프랭크 칼리무조(Frank Kalimuzo) 역시 살해되었으며, 전 내무장관 바질 바타링가야(Basil Bataringaya)의 머리는 음바라라 막사에 효수되었다는 끔찍한 증언도 나왔다.
이러한 공포 정치를 집행하기 위해 아민은 새로운 보안 조직을 창설했다.
대통령 직속의 국가조사국(State Research Bureau, SRB) 과 경찰 내 특수조직인 공공안전부(Public Safety Unit, PSU) 는 법 위에 군림하는 아민의 사냥개였다.
이들은 납치, 고문, 초법적 살인을 일삼으며 우간다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1971–79년 대략 10만–30만명 사망(국제기구·연구자 추정치))
2. 경제 전쟁: 또 다른 형태의 숙청
1972년 8월, 군부 엘리트 교체를 마친 아민은 또 다른 숙청을 시작했다.
그의 '경제 전쟁(Economic War)' 선포는 독립적인 경제 권력 기반을 파괴하고,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새로운 경제 엘리트를 창출하려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이번 목표는 우간다 경제의 중추를 장악하고 있던 아시아계(주로 인도, 파키스탄계) 소수민족이었다.
영국 식민 시절 이주해 온 이들은 상업과 전문직에 종사하며 부를 축적했지만, 아프리카 원주민 사회와 융화되지 못하고 경제적 착취의 상징으로 여겨져 대중의 반감을 사고 있었다.
아민은 이 민족주의적 분노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는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황당한 이유를 대며, 우간다에 거주하는 모든 아시아인에게 90일 이내에 전 재산을 포기하고 국외로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렸다.
이 조치는 단기적으로 빈곤에 시달리던 아프리카계 국민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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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네덜란드에 도착한 인도계 우간다 난민들 |
그러나 장기적으로 우간다 경제에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1. 전문 지식과 네트워크의 상실: 수만 명의 아시아계 상인, 기술자, 전문직 종사자들이 한꺼번에 떠나면서 우간다 경제를 지탱하던 기술, 경영 노하우, 국제 무역 및 신용 네트워크가 하루아침에 소멸했다.
2. 국제 사회의 제재: 추방된 아시아인 중 다수가 영국 국적자였기에 영국은 즉각 원조를 중단했고, 다른 서방 국가들도 뒤따랐다. 우간다는 국제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다.
3. 새로운 특권층의 부패: 아시아인들이 남기고 간 사업체와 자산은 아민의 측근, 군 장교, 지지자들에게 분배되었다. '마푸타 밍기(Mafuta Mingi, 스와힐리어로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자들'을 의미)'라 불린 이 새로운 특권층은 사업 경영에는 무능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다. 이들은 공장을 해체해 고철로 팔아넘기거나 재고를 헐값에 처분하며 경제를 더욱 빠르게 파괴했다.
'경제 전쟁'의 실패를 보여주는 증거는 명백했다.
아시아인이 운영할 당시 연간 8만 톤의 설탕을 생산하던 카키라(Kakira) 설탕 공장은 '마푸타 밍기'에게 넘어간 뒤 생산량이 사실상 0으로 추락했다.
1973년 우간다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캄팔라에서 몰수된 상점의 72%가 12개월 이내에 정상적인 영업을 중단했다.
우간다 경제는 회복 불가능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3. 광기의 절정: 국제적 고립과 엔테베 작전
아시아인 추방과 영연방 탈퇴 위협으로 서방과의 관계가 파탄 나자, 이디 아민은 새로운 동맹을 찾아 나섰다.
그는 리비아(Libya)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Gaddafi) 와 손을 잡고 막대한 경제 및 군사 원조를 받았으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끌어들여 노골적인 반이스라엘 노선을 걸었다.
국내에서는 공포 정치가 극에 달했다.
아민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사회 저명인사들이 차례로 '실종'되었다.
1972년, 군부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는 판결을 내렸던 베네딕토 키와누카(Benedicto Kiwanuka) 대법원장은 법정에서 군인들에게 끌려가 살해당했다.
1977년에는 자나니 루움(Janani Luwum) 성공회 대주교가 아민 정권의 만행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후, 교통사고로 위장되어 살해되었다.
아민이 직접 총을 쏴 죽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전 외무장관이었던 와누메 키베디(Wanume Kibedi)는 망명 후 공개서한을 통해 아민이 정적들을 개인적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나일강 악어에게 던져준다고 폭로했다.
아민의 식인 행위(cannibalism) (전승) 에 대한 흉흉한 소문도 퍼져나갔다.
그가 정적의 잘린 머리를 냉장고에 보관하며 대화를 나눈다는 이야기는 그의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아민의 국제적 고립과 광기를 전 세계에 각인시킨 결정적 사건은 1976년 엔테베 작전(Operation Entebbe) 이었다.
1976년 6월 27일,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출발해 프랑스 파리로 향하던 에어 프랑스(Air France) 139편이 팔레스타인 및 독일 테러리스트들에게 공중 납치되었다.
항공기는 리비아를 거쳐 아민의 비호 아래 우간다의 엔테베(Entebbe)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아민은 공항에 직접 나가 테러리스트들을 영웅처럼 환대하며 국제 사회를 상대로 인질극의 주도자처럼 행세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인과 유대인 승객들만 따로 분리하여 살해 위협을 가했다.
일주일간의 외교적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스라엘은 초유의 군사 작전을 결심했다.
7월 4일 밤, 이스라엘 최정예 특공대 '사이렛 마트칼(Sayeret Matkal)'을 태운 C-130 수송기 4대가 4,000km를 날아 엔테베 공항을 기습했다.
아민 대통령의 의전 차량과 똑같이 위장한 차량을 앞세워 우간다군의 경계를 뚫은 특공대는 단 90분 만에 인질 102명을 구출하고 테러리스트 전원과 45명의 우간다군을 사살했다.
이 과정에서 작전을 지휘하던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되는 베냐민 네타냐후의 형)이 전사했다.
또한 급습 과정에서 인질 세 명(장자크 마이모니, 파스코 코헨, 이다 보로코비치)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이스라엘군은 철수하며 공항에 주기되어 있던 우간다 공군의 미그 전투기 11대를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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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에 도착한 인질들 |
엔테베 작전의 성공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테러리스트를 비호했던 이디 아민의 국제적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 병원에 입원 중이던 인질 도라 블로흐(Dora Bloch)를 살해하고, 작전에 협조한 케냐를 상대로 보복성 학살을 자행했지만 이미 그의 몰락은 시간문제였다.
독재자의 말로
1. 최후의 도박: 탄자니아 침공
1978년, 아민의 정권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경제는 파탄 났고, 군 내부에서는 연이은 숙청으로 불만이 팽배했다.
위기에 몰린 아민은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최후의 도박을 감행했다.
1978년 10월, 그는 군부 내 반란을 빌미로 이웃 나라 탄자니아(Tanzania)의 국경 지대인 카게라(Kagera) 주를 침공했다.
이는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탄자니아의 대통령 줄리어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 는 아민의 오랜 정적이었고, 오보테를 비롯한 우간다 망명객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니에레레는 아민의 침공을 정권 붕괴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탄자니아 정규군과 우간다 망명객들로 구성된 '우간다 민족해방전선(Uganda National Liberation Front)'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아민의 마지막 희망은 리비아의 카다피였다.
카다피는 약 2,500명의 지원군과 함께 15대의 T-55 전차, 12대의 BTR 장갑차, 12대의 BM-21 다연장 로켓 발사기 등 중화기를 우간다에 급파했다.
그러나 언어도 통하지 않고 정글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던 리비아군은 사기충천한 탄자니아-우간다 연합군에게 속수무책으로 패퇴했다.
마지막 동맹마저 잃은 아민의 군대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1979년 4월 11일, 탄자니아군이 수도 캄팔라(Kampala)에 입성했다.
아민은 관저가 포격당하기 직전, 헬리콥터를 타고 리비아로 도주했다.
그의 8년간의 피의 통치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캄팔라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탄자니아군을 침략군이 아닌 해방군으로 열렬히 환영했다.
2. 망명과 죽음
리비아로 탈출한 아민은 환영받지 못했다.
카다피조차 아민을 부담스러워했고, 결국 그는 이라크(Iraq)를 거쳐 최종 망명지를 물색해야 했다.
1979년 말,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가 그를 받아주었다.
사우디 정부는 그가 이슬람 신자이며 '반이스라엘' 투쟁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하여 망명을 허락했다.
아민은 사우디 정부로부터 매달 상당한 액수의 연금을 받으며 제다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는 여러 명의 아내, 수십 명의 자녀와 함께 대저택에 살며 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조용히 지냈다.
건강을 위해 하루에 오렌지를 40개씩 먹는 기행을 벌여 '자파 박사(Dr. Jaffa)'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전승)
권력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1989년, 그는 자이르(Zaire, 현 콩고민주공화국)로 잠입해 반군을 규합하여 우간다 정권 재탈환을 시도했으나, 자이르 당국에 체포되어 사우디로 송환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 후 아민은 다시는 정치 무대에 나서지 못했다.
2003년 8월 16일, 그는 고혈압과 신부전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7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았으며, 우간다로 돌아가고 싶다는 유언도 거부당했다.
그의 시신은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사우디 제다의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남겨진 교훈
1. 괴물의 유산과 뒤틀린 기억
이디 아민이 축출된 후, 서방 언론과 대중문화는 그를 '식인종', '괴짜 폭군'으로 소비하며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아프리카 독재자의 전형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희화화는 아민의 잔혹성을 부각했지만, 그 이면의 더 중요한 진실을 가리는 역할을 했다.
즉, 아민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키고 이용했던 서방의 책임을 교묘하게 지워버린 것이다.
영국과 이스라엘이 그의 쿠데타를 지지하고, 서방 세계가 그의 초기 통치를 용인했던 사실은 '예측 불가능한 아프리카 광인'이라는 캐리커처 뒤에 숨었다.
이디 아민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괴물'의 일대기가 아니다.
이는 우리에게 권력의 본질에 대한 서늘한 교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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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디 아민을 표현한 캐리커처 (1977년) |
아민은 서방의 이익에 부합했기에 권력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들의 이익에 반하는 순간 가차 없이 버려졌다.
외부의 힘에 의존하는 대리인은 언제든 소모될 수 있는 장기말에 불과하다는 냉혹한 진리를 보여준다.
아민은 폭력으로 군 내부의 경쟁자를 제거하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그 폭력은 군의 규율과 충성심을 파괴했고, 결국 그의 군대는 외부의 공격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폭력으로 세운 권력은 더 큰 폭력이나 내부의 붕괴 앞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아민은 '경제 전쟁'을 통해 서구 중심의 경제 질서에 도전하려 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한 독재자의 의지만으로는 거대한 국제 정치 및 경제라는 구조적 힘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증명했다.
이디 아민의 사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시사점을 던진다.
그의 이야기는 권력의 작동 방식, 국제 관계의 위선, 그리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 때 어떤 비극이 반복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통렬한 증거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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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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