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마우 항쟁: 1952 비상사태부터 1963 독립까지 (Mau Mau Uprising)

 

1952년, 케냐 고원의 붉은 흙은 더 이상 평온한 대지의 색이 아니었다.

흰 목화밭을 일구는 농부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그 색을 닮았고, 

수탈당한 땅을 바라보는 키쿠유족(케냐 중앙 고지대 주류)의 가슴에 맺힌 피멍이 그 색을 닮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가장 서럽게 붉은 흙을 적신 것은 저항과 진압이 함께 낳은 피였다(논쟁).

그 피를 본 자 중 하나가 바로 냐무(가상인물)였다.


냐무는 열여덟 살의 어린 청년이었지만, 이미 여러 해 동안 그의 가족은 고지대 ‘화이트 하이랜드’(백인 정착지) 정책 이후 이어진 토지 상실과 저임금 소작을 견뎌왔다.

백인 정착민들은 그들의 선조가 대대로 살던 땅을 점유했고, 냐무의 아버지는 푼돈을 벌기 위해 정착민 농장에서 장시간 노동을 했다.

냐무의 어머니는 정착민 저택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도시에는 통행증·세금·노동 규정이 늘었고, 농가들은 일용직으로 밀려났다(논쟁).

냐무의 눈에 비친 세상은 분명했다. 땅과 임금, 통행의 규칙이 사람의 삶을 바꾸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냐무는 밀밭에 숨어 열리는 비밀 회의에 참석했다.

어둠 속에서 키쿠유 지도자들이 모여 맹세(oath)를 돌렸다.

맹세는 잔혹한 의식이라기보다 연락·식량·잠자리를 나눠 책임지는 내부 규칙이었다(논쟁).

마우마우(Mau Mau, 식민당국이 붙인 명칭), 그들 스스로는 "케냐 토지와 자유군(KLFA)"라 불렀다.

백인을 몰아내고 빼앗긴 땅을 되찾을 때까지 돕고 숨기겠다는 약속이 이어졌다.

그 밤, 냐무는 자신의 일을 정했다. 낮에는 농부의 아들, 밤에는 연락책.


키암부의 마우마우 동굴 입구 / Entrance to Mau Mau Cave, Kiambu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1952년 10월 7일, 정부에 협력하던 키쿠유 추장 워루히우(Chief Waruhiu)가 

나이로비(수도) 인근 가치에에서 피격 사망했다.

사건 뒤 경찰 검문과 가택 수색이 급증했고, 

정착민 단체와 총독부(에블린 베어링)는 강경조치에 합의했다.

10월 20일, 케냐 전역에 비상사태(Emergency)가 선포되었고, 

같은 밤 ‘조크 스콧(Operation Jock Scott 아프리카인 정치 지도자들 대규모 체포작전)’이라 불린 대검거가 시작됐다.

조모 케냐타(독립운동 지도자, 훗날 케냐 초대 대통령)를 포함한 이른바 '카펭구리아 6인(케냐 민족주의 지도자)'이 1952년 말~1953년 초에 걸쳐 ‘비밀결사 관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재판의 증거·절차 공정성은 (논쟁)).


진압이 거세질수록 숲은 더 많은 일을 떠안았다.

데단 키마티(Dedan Kimathi, KLFA 지휘자), 스탠리 마텐게(지휘관), 워루히우 이토테(‘제너럴 차이나’, 지휘관)가 아베르데어 숲·케냐 산 자락에서 회의를 주도했다.

작전은 단순했다. 낮에는 은신, 밤에는 도로·경찰초소 기습과 정착민 농장 파괴(논쟁).

도시 셀은 연락·자금·은닉처를 관리했고, 냐무 같은 연락책이 통행증 시간대를 피해 오갔다.


데단 키마티 동상 전경 / Statue of Dedan Kimathi in Nairobi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저자 Murungaru)
위키미디어 공용

1953년 3월 라리 학살(Lari massacre 마우마우 반군의 학살사건) 이후, 

보복과 재보복이 연쇄로 이어졌다.

KLFA의 민간인 공격, 친정부 키쿠유 민병(홈가드)의 응징, 

식민경찰·군의 강경 작전이 동시에 기록되었다(규모·책임 비율 (논쟁)).

숫자보다 분명했던 것은 공포가 마을의 어둠을 늘렸다는 사실이었다.


도시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식민당국은 1954년 4월 ‘앤빌 작전(Operation Anvil)’으로 나이로비를 봉쇄했다.

2주 남짓한 기간에 5만 명 이상이 검거되었고, 

약 2만 명은 랑가타(Langata) 수용소로, 3만 명은 보호구역(리저브)으로 이동 조치됐다(수치 (논쟁)).

이와 병행해 키쿠유·엠부·메루 거주지에는 ‘빌리지화’(강제 취락화)가 확대되어, 약 100만 명 이상이 철조망과 감시초소 안 마을로 재배치되었다는 추정이 널리 쓰인다(규모·조건 (논쟁)).


냐무가 합류한 숲속 부대는 키마티의 지휘 아래 훈련을 받았다.

칼과 창, 소총 몇 정에 의지했지만, 산등성이와 협곡을 아는 발이 전술이었다.

한밤중 정착민 농장 습격, 새벽 전개, 낮 은신.

그 사이 도시에서 붙잡힌 동료는 수용·심문·강제노동으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을 탔다(운영 방식·규모 (논쟁)).

냐무의 임무는 더 조심스러워졌다.


하천을 건너는 영국군 순찰대 / British Army patrol crossing a stream during the Mau Mau rebellion
Imperial War Museums via Commons, CC0(공개 도메인)
위키미디어 공용

1954년, 지휘관 이토테(‘제너럴 차이나’)가 생포되면서 숲 내부의 신뢰는 흔들렸다(협조 여부 (논쟁)).

회의 장소는 더 자주 바뀌었고, 도시 암살이 늘었다.

식량과 탄약보다 정보가 먼저 닳아갔다.


1956년 10월 21일, 키마티가 생포됐다.

추격대를 지휘한 이언 헨더슨(식민경찰)이 들것에 실린 그의 사진을 전단으로 살포했고, 

숲의 사기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키마티는 1957년 2월 18일 카미티 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가 떠난 뒤, 숲의 전투는 작은 반경으로 접혔다.


마우마우 전사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면패스 / Mau Mau safe conduct pass (surrender leaflet)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1959년 3월 3일, 홀라 수용소(Hola)에서 

재활노동 거부 집단에 대한 집단 구타로 11명 사망·수십 명 부상이 발생했다.

의사 보고서·신문·의회 질의가 이어지면서 영국 내 여론이 변했고, 

케냐 비상사태는 1960년 해제되었다.

케냐는 1963년 독립, 1964년 공화국으로 나아갔다.


식민지 시대 고문 피해자 추모비 / Memorial for victims of torture in colonial era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냐무는 수용에서 풀려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 회관 벽의 명단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돌아온 이의 이름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전승).

그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서사가 아니라, 토지·노동·통제에 맞선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이었다.

피로 샀던 그 시간은, 케냐의 독립으로 연결되었다.

붉은 흙은 더 이상 슬픔만의 색이 아니었다. 기억의 색이 되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Set in Kenya’s “White Highlands,” Nyamu, a Kikuyu courier, joins the KLFA oath network as land loss, pass laws, and low wages mount. 
After Chief Waruhiu’s killing, the 20 Oct 1952 Emergency brings raids and the Kapenguria Trials. 
Forest units under Dedan Kimathi strike; Nairobi is sealed in Operation Anvil (1954).
 Kimathi is captured (1956) and executed (1957). 
The Hola camp killings (1959) shift opinion; Emergency ends in 1960 and Kenya gains independence in 1963.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