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미단 한스·조피 숄 이야기: 나치 독일에 전단지를 던진 뮌헨 대학생들의 마지막 선택 (Hans and Sophie Scholl of the White Rose group)


백장미, 어둠 속에서 피어난 용기: 한스 숄과 조피 숄 이야기


1. 서론: 운명을 가른 전단지

1943년 2월 18일, 뮌헨 대학교의 거대한 아트리움은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를 기다리는 정적에 잠겨 있었습니다. 

불과 몇 분 후면 학생들로 가득 찰 그 공간에서, 한스 숄과 그의 여동생 조피는 마지막 남은 전단지 뭉치를 들고 3층 난간으로 향했습니다. 

잠시 후, 수백 장의 종이가 눈처럼 흩날리며 아래로 떠내려갔습니다. 

이 용감하고도 저돌적인 행동은 나치 정권의 심장부에 던진 저항의 메시지였지만, 동시에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을 발견한 나치 당원인 건물 관리인 야코프 슈미트의 신고로 두 남매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때 히틀러에게 열광했던 평범한 독일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시대의 불의에 눈을 뜨고, 목숨을 걸고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 되었는지를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한스 숄과 조피 숄, 그리고 '백장미단'의 이야기는 어둠 속에서도 양심의 목소리가 얼마나 밝게 빛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한스 숄과 조피 숄


2. 평범한 젊음, 거대한 의심의 시작

2.1. 나치즘에 동조했던 시절

처음에 한스와 조피 숄 남매는 나치즘의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 

한스는 히틀러 유겐트(나치 소년단)의 분대장이었고, 조피는 독일 소녀 연맹(BDM)에서 빠르게 지도자급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들은 나치가 내세운 공동체적 경험, 자연에 대한 강조, 그리고 깃발을 흔들며 행진하는 젊음의 에너지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가정은 다른 목소리가 공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아버지 로베르트 숄은 처음부터 히틀러를 "신의 재앙"이라 부르며 나치에 비판적이었고, 저녁 식탁에서는 언제나 자유로운 토론이 오갔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숄 남매의 내면에 비판적 사고의 씨앗을 심어주었습니다.


2.2. 균열의 시작: 체포와 성찰

청년 시절의 열광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숄 남매의 신념은 여러 결정적인 계기를 통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은 1937년에 일어났습니다. 

19세의 한스는 금지된 청년 단체(d.j.1.11)에 가담했다는 혐의와 함께, 동성애 행위를 처벌하는 형법 175조 위반 혐의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었습니다. (논쟁)

이때까지만 해도 추상적인 정치 문제였던 나치즘은, 그의 가장 사적인 삶을 파고드는 폭력적인 침입으로 돌변했습니다. 

국가가 그의 사상뿐 아니라 그의 정체성과 애정까지 심문하고 재판에 세우는 끔찍한 경험은, 나치즘에 대한 그의 시각을 혐오감으로 바꾸어 놓은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충격은 그의 내면에 깊은 상처와 함께 저항의 싹을 틔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광적인 우울함이 깔려 있다"고 고백했고, 훗날 "전쟁이 내 머릿속의 많은 것을 왜곡시켰을지 모른다"며 내적 고뇌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오빠의 체포는 조피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후 그녀가 경험한 국가 노동 봉사(RAD)는 환멸을 가속화했습니다. 

군대식 통제와 정신을 마비시키는 단조로운 일상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녀를 질식시켰습니다. 

그녀는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서 위안을 찾으며 정권에 대한 의심을 키워나갔고,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 영혼이 굶주리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 위에 전쟁의 참상이 더해졌습니다. 

의무병으로 동부 전선에 복무하게 된 숄 남매와 친구들은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자행되는 유대인 학살과 전쟁의 비인간적인 참상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 모든 경험은 그들의 저항 의지를 돌이킬 수 없는 신념으로 굳혔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과 깊은 성찰은 뮌헨의 대학생들을 단순한 회의론자에서 행동하는 저항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조피 숄


3. 백장미의 탄생: 뮌헨에서의 저항

3.1. 양심의 목소리, 첫 번째 전단지

1942년 여름, 뮌헨 대학교에서 한스 숄과 그의 친구 알렉산더 슈모렐은 마침내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백장미"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전단지를 작성하고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초기 목표는 나치 정권의 범죄에 침묵하는 독일 지식인들의 잠든 양심에 호소하여, 수동적인 저항을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3.2. 백장미단의 핵심 멤버들

백장미단은 소수의 용기 있는 학생들과 한 명의 교수로 구성된 저항 그룹이었습니다.


• 한스 숄 (Hans Scholl): 의대생, 그룹의 창립 멤버이자 행동의 중심.

• 조피 숄 (Sophie Scholl): 생물학 및 철학 전공, 그룹의 핵심 멤버이자 양심의 상징.

• 알렉산더 슈모렐 (Alexander Schmorell): 의대생, 러시아계 독일인으로 한스와 함께 그룹을 창립.

•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Christoph Probst): 의대생, 세 아이의 아버지, 7차 전단지 초안 작성.

• 빌리 그라프 (Willi Graf): 의대생,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그룹의 활동을 확장.

• 쿠르트 후버 (Kurt Huber): 철학 교수, 그룹의 정신적 멘토이자 6차 전단지 작성.


이렇게 모인 청년들과 교수는 각자의 양심에 따라, 목숨을 건 위험한 저항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4. 용기 있는 행동, 침묵을 거부한 목소리

4.1. 전단지를 통한 저항의 확산

백장미단은 총 6개의 전단지를 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타자기로 친 원고를 우편으로 부치는 소규모 방식이었지만, 나중에는 등사기를 구해 수천 부를 인쇄했습니다. 

그들은 뮌헨뿐만 아니라 베를린, 빈, 함부르크 등 독일 전역의 도시에 전단지를 퍼뜨리며 저항의 목소리를 확산시켰습니다. 

전단지에는 나치 정권의 범죄, 특히 유대인 학살에 대한 고발과 독일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대들의 악한 양심이다. 백장미는 그대들을 평온 속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2. "히틀러 타도": 벽에 새겨진 외침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장미단의 저항은 더욱 대담해졌습니다. 

그들은 밤을 틈타 뮌헨 시내의 건물 벽에 "히틀러 타도", "자유"와 같은 구호를 페인트로 새겼습니다.

이는 그들의 저항이 더 이상 익명의 편지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에게 직접 말을 거는 공개적인 행동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나치 정권의 심장부를 겨누었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5. 마지막 날들: 재판과 처형

5.1. 체포와 심문

1943년 2월 18일, 한스와 조피가 뮌헨 대학교에서 여섯 번째 전단지를 배포하다 관리인 야코프 슈미트에게 발각된 순간,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게슈타포에 체포될 당시 한스는 친구를 보호하려는 절박한 시도를 했습니다. 

그의 주머니에는 크리스토프 프롭스트가 작성한 일곱 번째 전단지 초안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찢어 삼키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 초안은 곧바로 프롭스트의 체포로 이어졌습니다.


5.2. 죽음 앞에서의 신념과 마지막 말

체포된 지 불과 나흘 만인 2월 22일, 한스 숄, 조피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는 '인민재판소'의 악명 높은 판사 롤란트 프라이슬러 앞에 섰습니다. 

재판은 정의를 위한 절차가 아닌, 정해진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형식적인 쇼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같은 날 오후, 그들은 뮌헨의 슈타델하임 교도소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그들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조피 숄: "태양은 아직도 빛나고 있다." (Die Sonne scheint immer noch.)

한스 숄: "자유여 영원하라!" (Es lebe die Freiheit!)


6. 자유의 씨앗, 꺼지지 않는 유산

백장미단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용기 있는 저항은 다음과 같은 깊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1. 저항의 확산

그들이 작성한 여섯 번째 전단지는 영국으로 밀반출되어 연합군에 의해 수백만 장 복제되었습니다.

"뮌헨 대학생들의 성명서"라는 제목으로 독일 상공에 뿌려진 이 전단지를 통해, 그들의 목소리는 독일 전역에 울려 퍼졌습니다.


2. 독일 내 저항의 상징

전쟁이 끝난 후, 백장미단은 비겁함이 만연했던 시대에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 용기의 상징으로 재평가되었습니다. 

오늘날 독일의 수많은 학교, 거리, 광장이 그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뮌헨 대학교 중앙 광장은 '숄 남매 광장(Geschwister-Scholl-Platz)'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3. 미래 세대를 위한 교훈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전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불의에 침묵하는 것의 위험성과 개인의 양심에 따른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과거의 영웅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에게 용기란 무엇인지 묻는 살아있는 교훈입니다.


7. 결론: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

조피 숄이 남긴 것으로 알려진 한 글은, 안일한 생존만을 택하는 다수가 초래하는 위험성을 날카롭게 통찰하며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진정한 피해는 그저 '살아남기'를 원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 의해 자행됩니다. 그저 평화롭게 남겨지길 원하는 정직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작은 삶이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의해 방해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파도나 적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환상입니다. 안전하게 지내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작은 공처럼 웅크리는 그 사람들도 결국 죽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불타오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백장미단의 이야기는 단순히 어두운 시대의 영웅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라고 묻는, 현재진행형의 질문입니다. 

그들의 짧지만 불꽃같았던 삶은, 우리에게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용기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이 글은 2차세계대전기 독일 저항운동 ‘백장미단’과 한스·조피 숄 남매에 관한 역사 연구와 공개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서사입니다.

주요 사건, 연대, 인물 관계는 알려진 사료를 따르되, 장면 묘사와 내면·대사는 독자의 몰입을 위해 일부 소설적으로 각색되었습니다.

개별 인용문과 해석은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최신 연구 성과에 따라 세부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음을 함께 밝힙니다.


The essay follows Hans and Sophie Scholl from enthusiastic Nazi youth to leaders of the White Rose resistance. 

Family debates, arrest, forced labor and exposure to Nazi crimes transform their beliefs.

Through leaflets and graffiti they call Germans to oppose Hitler. 

Arrested at Munich University in 1943 and executed days later, they become lasting symbols of conscience and moral cou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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