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2대 왕 다루, 온조의 뒤를 잇다: 초기 백제 나라 세우기의 모든 것 (King Daru of Baekje)


백제의 새벽을 연 왕, 다루 이야기


1. 새로운 시작, 아버지의 나라를 잇다

백제의 제2대 왕 다루(多婁). 《삼국사기》는 그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릇이 크고 넓으니 위엄과 명망이 있었다(器宇寬厚 有威望)." 

아버지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세운 작은 나라 '십제(十濟)'를 이제 막 '백제(百濟)'라는 이름으로 일으켜 세운 직후, 갓 스러진 아버지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궁궐에서, 젊은 왕은 이제 막 씨앗을 틔운 나라의 연약한 운명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논쟁)

그의 앞에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나라의 운명이 놓여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다루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시조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재위 2년(서기 29년)의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조상에게 왕의 자리에 올랐음을 고하는 의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뿌리는 부여와 고구려를 세운 위대한 동명왕에게 있다"고 선포함으로써, 이제 막 역사를 시작한 신생 국가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 여러 배경을 가진 백성들의 마음을 '백제'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모으기 위한 중요한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2. 나라의 기틀을 다지다: 백성의 삶을 돌본 정책

2.1. "이제 굶주리지 않게 하리라": 쌀농사의 시작

다루왕 6년(서기 33년), 그는 나라 남쪽의 여러 고을에 "처음으로 논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는 초기 백제사에 있어 획기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이전까지 밭농사에 의존하던 경제 구조에서, 안정적으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벼농사를 국가 차원에서 장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안정적인 식량 확보는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며, 나아가 잉여 생산물을 바탕으로 국가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쌀 한 톨에 나라의 미래를 심은 셈입니다.


2.2. 위기 속 빛난 리더십: 백성을 구휼하다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연재해는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지자, 다루왕은 즉시 "사사로이 술을 빚는 것을 금지"시킵니다. 

귀한 곡식이 술로 낭비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직접 동부와 서부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스스로 살아갈 힘이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1인당 곡식 두 섬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기록에 묘사된 그의 '관대하고 후덕한' 성품이 단순히 말이 아닌, 백성을 향한 구체적인 정책으로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2.3. 더 강한 나라를 위한 준비: 인재 등용과 조직 정비

나라의 규모가 커지면서 혼자서 모든 것을 다스릴 수는 없었습니다. 

다루왕은 동부 출신의 흘우(屹于), 북부 출신의 진회(眞會)와 같이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국정을 맡겼습니다. 

특히 재상직인 '우보(右輔)' 한 명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을 '좌보(左輔)'와 '우보' 둘로 나누어 행정 체계를 더욱 전문화하고 안정시켰습니다. 

이는 단순히 관직 수를 늘린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국가의 규모에 맞춰 행정 시스템을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려는 그의 깊은 고민의 결과였습니다.


3. 끊임없는 도전: 북방의 말갈과 남방의 신라

3.1. 북쪽 국경을 지켜라: 말갈과의 끈질긴 싸움

다루왕 시대의 백제는 북쪽의 말갈(靺鞨)로부터 끊임없는 침입에 시달렸습니다. 

《삼국사기》는 이들을 말갈이라 기록했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들이 만주에 있던 퉁구스계 말갈이 아니라, 한반도 중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예맥 계통의 다른 부족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논쟁)

하지만 백제는 끈질기게 맞서 싸웠습니다.


연도 (다루왕 재위)
주요 내용
결과
3년 (서기 30년)
흘우 장군,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 격파
백제 승리
4년 (서기 31년)
곤우 장군, 고목성에서 말갈 격파
백제 승리
7년 (서기 34년)
말갈, 마수성 함락
백제 패배
29년 (서기 56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해 우곡성 축조
방어 강화


초기에는 흘우와 같은 명장들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마수성을 빼앗기는 등 패배의 쓴맛도 보았습니다. 

다루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방어선을 더욱 튼튼히 하며 북방의 위협에 맞섰습니다.


3.2. 운명적 라이벌의 등장: 신라와의 첫 충돌

남쪽에서는 새로운 경쟁자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다루왕 36년(서기 63년), 백제는 영토를 남쪽으로 넓혀 오늘날의 청주에 해당하는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릅니다. (논쟁)

다루왕은 신라의 탈해 이사금에게 사신을 보내 만남을 청했지만, 신라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이듬해, 백제는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며 두 나라의 기나긴 악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와산성을 두고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여러 차례 벌어졌습니다.


• 서기 64년: 백제, 와산성 공격. 이후 구양성 공격했으나 신라 기병에 패배.

• 서기 66년: 백제, 와산성을 다시 빼앗았으나 곧 신라에 격퇴당함.

• 서기 75년: 백제, 끈질긴 공격 끝에 마침내 와산성 함락.

• 서기 76년: 신라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와산성을 다시 빼앗김.


이 10여 년에 걸친 싸움은 결국 백제의 패배로 끝났지만, 이는 한반도 역사를 관통하는 두 라이벌, 백제와 신라의 수백 년에 걸친 경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백제와 신라의 건국이후 끊임없는 전투. [사진=정재수 작가]


4. 역사 속의 다루왕: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백제 초기 역사는 안개 속에 싸여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두 가지 큰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 비현실적으로 긴 재위 기간: 온조왕 46년, 다루왕 49년, 기루왕 51년... 

초기 백제 왕들의 재위 기간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깁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후대에 역사를 편찬하면서,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대를 늘려 잡은 결과일 수 있다고 추측합니다.


• '루(婁)' 자 돌림의 비밀: 다루왕(多婁王), 그의 아들 기루왕(己婁王), 손자 개루왕(蓋婁王)으로 이어지는 3대의 이름에는 공통적으로 '루(婁)' 자가 들어갑니다. 

이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이들이 온조왕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백제 건국 신화에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비류(沸流)' 계통의 왕족이었을 수 있다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합니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초기 백제는 온조왕의 후손들이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단일 왕조가 아니라, 온조계와 비류계라는 두 강력한 건국 집단이 서로 경쟁하거나 연합하며 나라를 이끌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는 신생 국가의 복잡한 권력 구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과연 다루왕은 온조왕의 아들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강력한 가문의 후예였을까? 진실은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5. 결론: 백제의 주춧돌을 놓은 왕

다루왕은 근초고왕처럼 화려한 정복 군주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시대는 끊임없는 외침과 자연재해로 점철된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안으로는 벼농사를 장려해 경제의 기틀을 닦고, 행정 제도를 정비해 나라의 뼈대를 세웠습니다. 

밖으로는 북방의 말갈과 남방의 신라에 맞서 끈질기게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그가 놓은 튼튼한 주춧돌이 있었기에 백제는 훗날 삼국의 강자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다루왕은 화려한 건물을 지은 건축가는 아니었지만, 그 건물이 천 년을 버틸 수 있도록 가장 깊은 곳에 반석을 놓은 '기초 설계자' 였습니다.


비록 이 전투들의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이 기록들은 두 나라의 기나긴 경쟁 관계의 서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글은 《삼국사기》 등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백제 2대 왕 다루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한 역사 교양형 글입니다. 

서사적 몰입을 위해 장면·심리·대사 등을 적절히 각색했으며, 초기 백제 왕계·지명 비정처럼 학계에 견해 차이가 있는 부분은 가설·추정의 영역임을 전제로 서술했습니다. 

학술 논문이 아닌 입문용 해설·스토리로 읽어 주시고, 보다 엄밀한 연구는 전문 연구서와 논문을 함께 참고해 주세요.


King Daru, second ruler of Baekje, inherits Onjo’s fragile kingdom and shores up its legitimacy through ancestral rites to Dongmyeong. 

He promotes wet-rice agriculture, disaster relief and administrative reform while fending off northern Malgal raiders and confronting the rising state of Silla over frontier forts.

Though later overshadowed by conquering kings, Daru’s reign lays the economic, institutional and strategic foundations that allow early Baekje to survive external threats and eventually emerge as a leading power among Korea’s Three Kingd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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