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레이프 에이릭손의 빈란드 북미 발견기 (Leif Erikson)


행운아 레이프 에이릭손: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아메리카에 닿은 바이킹 이야기


역사의 첫 페이지를 다시 쓰다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은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이름이 역사에 기록되기도 전, 유럽에서 기사들이 성을 쌓고 있던 먼 옛날, 바이킹의 롱십 한 척이 북대서양의 얼음장 같은 물살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그 배의 선원들은 유럽인 누구도 본 적 없는 새로운 대륙의 해안선을 경이롭게 바라보았습니다.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 앞서 북미 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그 주인공은 바로 바이킹 탐험가, 레이프 에이릭손(Leif Erikson)입니다. 

이 이야기는 교과서 첫 페이지를 다시 쓰게 만든 한 위대한 탐험가의 삶과 모험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붉은 머리 에이리크'의 아들

레이프의 이야기는 그의 아버지, '붉은 머리 에이리크(Erik the Red)'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에이리크 힌 라우디(Eiríkr hinn rauði)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불같은 성격과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거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살인죄로 노르웨이에서 추방당했고, 에이리크 역시 그 피를 물려받은 듯했습니다.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그는 자신의 하인들이 일으킨 산사태에 보복한 이웃을 죽여 첫 번째 추방령을 받았습니다. 

이후 바이킹의 신성한 유물인 '세트스토크르(setstokkr 신비로운 기둥)'를 둘러싼 시비가 격렬한 싸움으로 번져 또다시 두 명을 살해했고, 결국 아이슬란드에서 3년간의 추방이라는 가장 무거운 형벌을 선고받았습니다.


더 이상 스칸디나비아에 발붙일 곳이 없어진 에이리크는 서쪽 바다 너머에 있다는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982년, 험난한 항해 끝에 거대한 섬을 발견한 그는 그 척박한 땅에 '그린란드(Greenland)', 즉 '녹색의 땅'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는 얼음으로 뒤덮인 땅의 이미지를 덮고 더 많은 정착민들을 유혹하기 위한, 일종의 교묘한 마케팅 전략이었습니다.


13세기에 아이슬란드 성직자가 쓴 ' 붉은 에릭의 사가' 의 첫 페이지


레이프 에이릭손은 대략 970년경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거친 삶과 서쪽을 향한 집념을 그린란드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배우며 자랐고, 그의 핏속에 흐르는 탐험가의 본능은 이내 그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었습니다.


2. 운명을 바꾼 노르웨이 항해

청년이 된 레이프는 노르웨이의 왕 올라프 1세(Olaf Tryggvason)를 섬기기 위해 머나먼 항해를 떠났습니다. 

왕의 궁정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올라프 왕의 깊은 신앙심에 감화되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는 단순히 종교를 바꾸는 것을 넘어, 오딘과 토르를 섬기던 바이킹 전사 문화와 사회 구조의 근간을 이루던 전통 신앙을 등지는, 그야말로 정체성을 뒤흔드는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


이를 눈여겨본 올라프 왕은 레이프에게 중대한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바로 그의 고향 그린란드로 돌아가 이교도인 바이킹 동족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레이프의 다음 여정은 단순한 귀향이 아닌, 그린란드 최초의 선교라는 역사적 목적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린란드로 향하는 그의 뱃길은 순탄치 않았고, 거친 바다는 그를 역사가 기록할 새로운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3. 전설의 땅, '빈란드'를 발견하다

레이프 에이릭손이 어떻게 북미 대륙을 발견했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요 기록, 즉 사가(Saga)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 오늘날까지 흥미로운 역사적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기록 (사가)
발견 과정
붉은 머리 에이리크의 사가(Saga of Erik the Red)
노르웨이에서 그린란드로 돌아가던 중, 거센 폭풍에 휩쓸려 항로를 이탈했다가 우연히 야생 밀과 포도덩굴이 자라는 비옥한 땅을 발견했다고 전합니다.
그린란드 사람들의 사가
Saga of the Greenlanders
'비야르니 헤르욜프손(Bjarni Herjólfsson)'이라는 상인이 폭풍으로 표류하다 목격했다는 소문을 듣고, 레이프가 그의 배를 사들여 의도적으로 숲이 우거진 미지의 땅을 찾아 탐험에 나섰다고 기록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진실이든, 레이프는 미지의 땅에 도착하여 그곳을 탐험하고 세 곳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닿은 황량한 땅을 '평평한 돌의 땅'이라는 뜻의 헬룰란드(Helluland)라 불렀습니다 (오늘날의 배핀섬.)


다음으로 발견한 곳은 '숲의 땅' 마르클란드(Markland)였는데 (오늘날의 래브라도 반도), 이곳은 그린란드 정착민들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목재를 공급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원의 보고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야생 포도와 풍요로운 목초지가 펼쳐진 땅에 도착하여 '포도의 땅' 또는 '목초지의 땅'이라는 의미의 빈란드(Vinland)라는 이름을 선사했습니다 (오늘날의 뉴펀들랜드)


아메리카에 도착한 레이프 에이릭손


4. '행운아 레이프(Leif the Lucky)'라는 이름의 비밀

이 위대한 발견과 함께 레이프 에이릭손은 '레이프 힌 헤프니(Leifr hinn heppni)', 즉 '행운아 레이프(Leif the Lucky)'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 별명은 그가 거둔 세속적인 행운과 영적인 행운 모두를 아우릅니다.


세속적인 행운은 그가 빈란드 탐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발휘되었습니다. 

그는 난파되어 조난당한 바이킹 선원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목숨과 귀중한 화물을 모두 구조했습니다.

험난한 북대서양에서 조난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에, 이 구조 활동은 그에게 큰 칭송과 함께 행운아라는 명성을 안겨주었습니다.


영적인 행운은 그가 노르웨이 왕에게서 부여받은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그린란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으며, 특히 그의 어머니 '툐드힐드(Thjodhild)'가 가장 먼저 개종하여 그린란드 최초의 교회를 세운 일화는 그의 선교 활동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가족과 공동체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땅을 발견하고,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며, 새로운 신앙을 공동체에 뿌리내리게 한 그는 진정 '행운아'라는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았습니다.


5. 빈란드에서의 삶과 남겨진 흔적

레이프의 위대한 발견 이후, 그의 형제들을 포함한 다른 바이킹들이 빈란드에 영구적인 정착촌을 세우기 위해 여러 차례 항해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그들이 빈란드에서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실패 원인은 바로 '스크랠링(Skræling)'이라 불린 북미 원주민과의 끊임없는 유혈 충돌이었습니다. 

사가에 따르면, 레이프의 동생 토르발트가 이끄는 탐험대가 잠들어 있던 원주민들을 공격해 살해하자, 분노한 원주민들이 대규모로 보복 공격을 가해왔고 이 과정에서 토르발트는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적으로 절대적 열세였던 바이킹들은 이처럼 적대적인 환경에서 버티지 못하고 결국 빈란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사가' 속 이야기는 신화나 전설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랑스 오 메도(L'Anse aux Meadows)'에서 모든 것을 뒤바꿀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 정착촌 유적: 목재 골격 위에 흙과 잔디를 덮어 지은 전형적인 바이킹 양식의 토탄 건물 8채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 철기 제작 증거: 철을 제련하던 대장간과 용광로, 그리고 철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슬래그)가 발굴되어, 바이킹들이 직접 철제 도구를 제작했음을 증명했습니다.

• 바이킹 유물: 청동 옷핀, 뼈바늘, 실을 잣는 데 사용된 물레가락 등 바이킹의 일상생활을 명확히 보여주는 유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 남쪽으로의 탐험 증거: 현지에서 자라지 않는 호두과 식물인 '버터넛(Butternut)'의 발견은 바이킹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더 남쪽의 따뜻한 지역까지 탐험했음을 시사합니다.

• 정확한 연대 측정: 과학자들은 서기 993년에 발생한 강력한 우주 방사선 폭풍이 남긴 특이한 흔적을 나이테에서 발견했습니다. 이 흔적을 기준으로 나이테를 세어, 바이킹이 정확히 서기 1021년에 그곳의 나무를 베었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했습니다.


이 발견으로 레이프 에이릭손과 빈란드 이야기는 더 이상 전설이 아닌,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랑스 오 메도우(L'Anse aux Meadows)의 노르스 유적지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작품


결론: 최초의 발견, 그러나 잊혀진 역사

레이프 에이릭손은 의심할 여지 없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최초의 유럽인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용기와 탐험 정신으로 가득 찬 바이킹 시대의 위대한 유산입니다.

하지만 그의 발견은 왜 콜럼버스의 발견처럼 전 세계적인 역사적 전환점이 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제한된 전파: 당시 바이킹 사회는 인쇄술이 없었고, 그들의 발견은 아이슬란드 사가와 구전으로만 제한적으로 전해졌습니다.

• 영구 식민지화 실패: 원주민과의 유혈 충돌과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영구적인 정착에 실패하면서 유럽과의 지속적인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 경제적 유인의 부족: 당시 그린란드 정착민들에게는 바다코끼리 상아와 같은 고가치 교역품이 더 중요했습니다. 빈란드는 잠재력이 있었지만, 즉각적으로 그린란드보다 더 나은 경제적, 전략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 후속 교류의 부재: 빈란드 정착이 좌절된 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의미 있는 교류는 수 세기 동안 단절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발견은 유럽 세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점차 잊혀진 역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레이프 에이릭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역사는 단순히 승리한 자들의 기록이 아니라, 고고학적 발굴과 과학적 분석을 통해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새롭게 해석되는 흥미진진한 탐험의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잊혀졌을지언정, 최초의 길을 연 탐험가로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에릭슨 기념 우표 , 1968년 10월 9일 발행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한 글입니다.

이 글은 연대기식 학술 논문이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부분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으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한 정보를 덧붙여 이해를 도왔습니다.


Leif Erikson, son of outlaw explorer Erik the Red, grew up on Greenland’s harsh frontier.

After converting to Christianity in Norway, he sailed home but was blown off course and reached unknown western lands. 

Naming them Helluland, Markland and Vinland, he became the first known European in North America. 

 Later archaeology at L’Anse aux Meadows confirmed a brief Norse settlement around 1021, proving that Vikings crossed the Atlantic 500 years before Columb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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