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 영웅인가, 급진적 이상주의자인가 (Che Guevara)


 혁명가의 초상: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불멸성


의사의 가운, 혁명의 서막

1. 로사리오의 유복한 청년 (아르헨티나)

1928년, 아르헨티나 제2의 도시 로사리오(Rosario, 아르헨티나 중동부의 주요 도시)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에르네스토 게바라(Ernesto Guevara, 훗날 '체'로 불리게 될 혁명가)가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바스크-아일랜드 혈통(Basque-Irish lineage)을 가진 유복한 집안으로, 그의 부모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년기부터 에르네스토는 폐렴으로 인해 2살 때부터 심각한 천식(asthma)을 앓았고, 평생 이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럭비 같은 격렬한 스포츠를 사랑했고, 발작이 오면 산소 흡입기(oxygen inhaler)를 사용한 뒤 다시 경기에 복귀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전통 가우초 복장을 하고 당나귀를 탄 5세 게바라, 1933년

1948년,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University of Buenos Aires)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후안 페론(Juan Perón, 포퓰리즘으로 유명했던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에르네스토의 친구이자 동행자였던 알베르토 그라나도(Alberto Granado, 생화학 전공 의대생 친구)는 회상했다. 

"에르네스토는 책상에서 벗어나 직접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 중남미 대륙 전체)를 두 눈으로 보고 싶어 했지. 책상에 앉아서 병을 고치는 의사보다는, 움직이는 대륙의 의사가 되려 했네"


2.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The Motorcycle Diaries, 1951년 남미 대륙 횡단 여행 기록)

1951년, 23세의 의대생 에르네스토는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포데로사'(La Poderosa, '강력한 것'이라는 뜻의 낡은 모터사이클 애칭)라는 오토바이를 타고 약 9개월 동안 8,000km를 달리는 대륙 횡단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 초반, 이들은 철없이 들뜬 청년들이었다. 

오토바이 배기관이 터지고, 브레이크를 도난당하는 등 고난을 겪었지만. 그러나 이 여행은 에르네스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칠레의 구리 광산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근로 조건, 안데스 산맥(Andes Mountains)을 따라 이동하며 목격한 소작농들의 가난한 삶, 그리고 페루 아마존 강변의 산파블로 나환자 요양소(San Pablo Leper Colony)에서의 자원봉사 경험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나환자 요양소에서 환자들은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에게 '맘보탕고'(Mambo-Tango)라는 이름의 나무 뗏목을 선물하기도 했다.


밤마다 에르네스토는 일기를 썼다. 

그는 "가난과 굶주림, 질병을 목격했다. 돈이 없어 아픈 어린이를 치료받게 할 수도 없고, 희망마저 포기한 중남미의 아버지들을 보았다"


어느 날, 알베르토가 농담조로 말했다. 

"에르네스토, 자네는 여기서도 계속 콜레도(Cholito, 페루의 나환자 환자를 부르는 애칭)들의 의사 노릇을 해야겠어. 의사 가운이 자네에겐 잘 어울려."

에르네스토는 뗏목 위에서 아마존 강물(Amazon River)을 바라보며 답했다. 

"아니, 알베르토. 이들을 돕는 것이 진정한 사명이라면, 의료만으로는 부족해. 가난은 질병의 증상일 뿐, 근본적인 병은 사회 구조 자체에 있어. 나는 더 이상 개혁적인 청년이 아니라, 이 구조를 부수어야 할 혁명가가 되어야 할 것 같네"


이 여행은 에르네스토를 '의사 게바라'에서 '혁명가 게바라'로 바꾸어 놓았고, 그는 라틴 아메리카를 개별 국가들의 집합이 아닌, 통합적인 해방 투쟁이 필요한 단일 구조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3. 과테말라의 배신과 마르크스주의 (1954년)

1953년 의대를 졸업(알레르기 연구로 면허 취득)한 에르네스토는, 세 번째 여행을 떠나 과테말라(Guatemala, 중앙아메리카 국가)에 도착했다. 

당시 과테말라는 하코보 아르벤스(Jacobo Árbenz, 개혁적인 대통령) 정부 하에서 토지 개혁(land reform)이 진행 중이었다. 

인구의 2%가 농지의 70%를 차지하는 불평등한 상황에서 아르벤스 대통령은 땅을 수용하여 농민들에게 재분배했다.


이때 에르네스토는 페루 출신의 여성 운동가 일다 가데아(Hilda Gadea, 첫 번째 부인, 여성 운동가)를 만나 사회주의 사상에 급속히 눈을 뜨고 결혼했다.

그러나 미국은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 과테말라의 바나나 산업을 지배하던 미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중앙정보국(CIA)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사주했다. 

결국 아르벤스 정부는 전복되고 개혁은 중단되었다. 

미국은 냉전기 공산화 확산을 우려했고, 동시에 UFCO의 이해와 맞물려 CIA가 쿠데타를 지원했다.


에르네스토는 이 사건을 목격하고, 평화적인 개혁으로는 결코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으며 무장 투쟁만이 답이라고 확신했다. 

의사 게바라는 이제 완벽한 혁명가로 변신했다.


코만단테의 탄생

1. 멕시코 망명과 '체' (1955년)

아르벤스 정권이 무너진 후, 에르네스토에게도 암살령이 내려졌고, 그는 아내 일다 가데아와 함께 멕시코(Mexico, 북아메리카 남부 국가)로 망명하여 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1955년 7월, 에르네스토는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쿠바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쿠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 전복을 목표로 했던 혁명 지도자)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Raúl Castro, 피델의 동생이자 동료 혁명가)를 만났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3년 몬카다 병영 습격(Moncada Barracks attack) 실패 후 석방되어 멕시코에서 '7월 26일단'(26th of July Movement, 혁명 전위대)을 조직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에르네스토의 혁명 의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둘은 밤새도록 토론했고, 에르네스토는 하룻밤 만에 무장 게릴라 투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카스트로가 에르네스토를 부르던 애칭이 바로 "체"(Che)였다. 

체(Che)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무언가를 강조하거나 상대를 부를 때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인데, 이는 이후 에르네스토 게바라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2. 그란마호의 참패와 게릴라 (1956년)

1956년 11월 25일 새벽 1시 30분, 체와 피델 카스트로를 포함한 82명의 혁명 대원들은 8인승 레저 보트 '그란마호'(Granma, '할머니'라는 뜻의 요트 이름)를 타고 멕시코를 출항하여 쿠바(Cuba, 카리브해의 섬나라)로 향했다.


배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 탑승해 위생 환경이 열악했고,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폭풍 속에 출발했기 때문에 7일 후 쿠바 라스폴로라다스 해안(Las Coloradas)에 도착했을 때 대원들은 지쳐 있었다. 

게다가 상륙 계획이 쿠바 정부에 유출되어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친미 독재자) 정부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82명 중 겨우 12~17명만이 생존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절망에 빠졌지만, 체는 카스트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들은 '17명이나' 살아남았네! 이 정도면 바티스타 자식의 생명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야!"

살아남은 소수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Sierra Maestra, 쿠바 동부의 험준한 산맥)으로 잠복하여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체는 당시 유일한 군의관(doctor)이었으나, 그 인내심, 상황 분석, 냉정한 판단력으로 곧 혁명군 지도자의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와 그의 부하들. (왼쪽 두번째 체 게바라)

3. 혁명의 두뇌, 그리고 인간적인 갈등

체 게바라는 혁명군 내에서 제2군 '코만단테'(Comandante, 사령관/지휘관)에 임명되며 피델 카스트로에 이은 명실상부한 2인자(second in command)가 되었다.

그의 리더십은 뛰어났다. 

그는 '포로는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관철시켜 대중의 지지(popular support)를 얻었다. 

또한 혁명군의 정치 방송국 '라디오 레베르데'(Radio Rebelde, 스페인어로 '반군 라디오'라는 뜻)를 설립하여 산속의 사상을 민중에게 보급하고 봉기를 호소했다. (민중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엄격한 도덕적 규율) 

게릴라전의 성공은 민심에 달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58년 12월 29일, 체는 제2군을 이끌고 쿠바 제2의 도시 산타클라라(Santa Clara, 쿠바 중앙부 도시)에 돌입했다. 

시민들의 대거 가세로 정부군을 제압하며 수도 아바나(Havana, 쿠바의 수도)로 가는 길을 열었다.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는 도미니카 공화국(Dominican Republic, 카리브해 섬나라)으로 망명했고, 혁명은 성공했다. 

체는 혁명적인 업적으로 쿠바 시민권(Cuban citizenship)을 부여받고 새 정부의 각료가 되었다.


4. 사생활과 가족

체 게바라는 공식적으로 두 번 결혼하여 총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은 일다 가데아(Hilda Gadea)로, 과테말라에서 만나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해준 여성 운동가였다. 

하지만 1959년 혁명 성공 직후 헤어졌으며, 일다와의 사이에서 딸 이루디다(Hilda) 1명을 낳았다.


그의 두 번째 부인 알레이다 마치(Aleida March, 쿠바 혁명 동지)는 게릴라 활동을 함께 했던 인물이며, 이들은 1959년에 재혼하여 4명의 자녀(알레이다, 카밀로, 셀리아, 에르네스토)를 두었다. 

장녀 알레이다 게바라(Aleida Guevara, 맏딸, 소아과 의사)는 훗날 아버지에 대해 "사랑할 줄 아는 분"으로 기억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혁명가라면 '로맨티스트'여야 하며, 타인을 존중할 줄 알아야 연대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 콩고 혁명에 가담하기 전, 잠시 쿠바에 돌아와 가족을 만났을 때, 5살이었던 장녀 알레이다는 외모가 변한 아버지(아마도 변장을 위해)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로부터 느꼈던 사랑을 통해 아버지임을 짐작했다고 한다. 

그날 밤, 아버지는 그녀의 뒷목 상처를 치료해주었고, 그녀는 적포도주에 물을 타 마시던 아버지의 취향을 떠올려 포도주잔에 물을 따라주기도 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스스로 떠나다

1. 쿠바의 두뇌: 정치가 체의 역할과 과실 (1959년 이후)

혁명 영웅이 된 체 게바라는 쿠바 신정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 수비대 사령관(La Cabaña fortress)으로 잠시 근무하며 반혁명 세력과 바티스타 비밀경찰 출신들에 대한 신속한 군사재판과 처형을 지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처형 인원은 자료에 따라 수십 명에서 수백 명까지 크게 엇갈리며, 정치적 진영에 따라 숫자가 과장되어 전파되기도 했다.

비판자들은 이 처형이 법적 절차 없이 인민재판(popular trial)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며, 그를 무자비한 인물로 평가한다. 

당시 쿠바에 살았던 사람들은 체를 '아바나 백작'(Count of Havana)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체는 쿠바국립은행 총재(National Bank President, 1959년1961년)와 산업부 장관(Minister of Industry, 1961년) 등을 맡아 '쿠바의 두뇌'로 불리며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는 토지 개혁(land reform)을 주도하고 중앙은행을 설립했으며, 특히 보건 의료 체계를 다지는 데 집중했다. 

그는 옛 친구 그라나도를 쿠바로 초청해 임상 연구소를 맡기고, 의과대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오늘날 쿠바의 높은 의사 비율과 낮은 영아 사망률은 이 시기의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체는 금융이나 경제 전문가가 아니었다. 

당시 농담으로 떠돌던 이야기에 따르면, 카스트로가 회의 중 "여기 경제 전문가(Economista)가 있나?"라고 묻자 체가 "공산주의자(Comunista)를 찾는 줄 알았다"며 손을 들어 국립은행 총재가 되었다고 한다. (전승)


그의 급진적인 산업화(공업화) 정책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nationalization)는 자본 이탈(capital flight)과 맞물려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했다. 

그는 노동의 이유를 물질적 이익이 아닌 도덕적 동기(moral incentive)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노동자의 경영 참여 기구 등을 설립했으나, 결과적으로 쿠바 경제 성적은 좋지 않았다.

체는 돈을 혐오하여 국립은행 총재 재직 시, 지폐에 풀 네임 대신 대충 '체'라고만 서명하는 파격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경제 전문가로서의 실무 능력 부족과 무리한 국유화 정책)


2. 소련과의 갈등과 이별 (1965년)

체 게바라는 외교 활동도 활발히 펼쳤는데, 1959년 통상 사절단으로 일본 히로시마(Hiroshima, 원자 폭탄 투하 지역)를 방문하여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일본인들에게 "왜 미국에 원폭 투하의 책임을 묻지 않는가"라고 질문했다고 전해진다.


체 게바라 외교사진

하지만 쿠바의 동맹국이었던 소련(USSR, 구소련)과의 관계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 이후, 체는 소련이 쿠바를 이용하려 한다고 회의감을 품었다.


그는 소련을 향해 "어떤 사회주의 국가(소련)는 제국주의적 착취의 공범"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1965년 1월, 알제리 연설). 

체는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 모델이 제3세계에 적합하지 않으며, 소련이 쿠바를 설탕(사탕수수) 보급 기지로만 이용하려 한다고 보았다.

이 발언은 소련의 격노를 샀고, 결국 피델 카스트로는 체를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할 수밖에 없었다.


1965년 4월, 체는 쿠바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사무실 책상에 "쿠바에서 내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내용의 편지만 남겼다.


3. 쿠바를 떠나며 남긴 유산

체는 떠나기 전 자녀들에게 편지를 남겼다.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고통당하고 있는 부정(不正)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는 인간이 되거라. 그것이야말로 혁명가로서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므로"

그는 쿠바의 안락한 2인자 자리를 버리고 혁명의 최일선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실존주의 철학자)는 쿠바 방문 당시 체 게바라를 만나 대화한 후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떠남은 쿠바 혁명의 지도자들이 겪었던 권력다툼이나 부패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후대에 그의 고결함과 숭고한 이상을 상징하는 행동으로 평가되었다.


불가능한 꿈을 쏘아 올리다

1. 콩고의 좌절 (1965년)

쿠바를 떠난 체는 아프리카 콩고(Congo, 당시 내전 중이던 벨기에령 콩고 민주 공화국)로 향했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혁명의 불씨를 지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콩고에서의 11개월간의 투쟁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체가 만난 로랑 카빌라(Laurent Kabila, 콩고 반군 지도자)는 독선적이고 탐욕스러웠으며, 현지 반군들은 규율이 없고, 미신('다와', 마법의 약을 마시면 총알을 맞아도 괜찮다고 믿음)을 믿으며, 술집과 매춘굴을 드나드는 오합지졸이었다.


체는 콩고 반군에게 분노하여 "너희들 같은 남자와 싸우느니 여자들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다그치기도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낄낄거리며 웃었다고 한다. (전승)

이처럼 체가 쿠바에서 성공적으로 적용했던 게릴라 전술(Guerrilla warfare)은 생소한 문화와 언어 장벽(스페인어는 적도 기니 한 나라만 공식 사용), 그리고 이념적 헌신 부족으로 인해 아프리카에서는 실패했다.

결국 체는 "이런 병력으로 승리란 불가능하다"고 좌절하며 콩고를 떠났다.


2. 볼리비아의 고립과 포코 이론의 몰락 (1966년)

1966년, 체 게바라는 남미 볼리비아(Bolivia, 남미 중앙부 국가)로 잠입했다. 

그는 볼리비아가 남미 5개국과 국경을 접하는 요충지이므로, 이곳에서의 성공이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혁명의 불씨를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체는 마오쩌둥(Mao Zedong,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자)의 혁명 전략(농민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전)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게릴라전 이론인 '포코 이론'(Foco theory, 소규모 전위대가 게릴라전을 통해 혁명의 중심을 만드는 이론)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볼리비아는 혁명 기지로서 최악의 선택이었다.

첫째, 볼리비아는 이미 1950년대에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자작농 비율이 높았고. 농민들은 독재 정권에 지쳤어도, 이미 경제적 안정을 어느 정도 확보한 상태였다. 

둘째, 체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백인 엘리트로, 원주민(인디오) 문화가 강한 볼리비아 농민들에게는 말이 통하는 외부인일 뿐, 진정한 혁명 동지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에게 볼리비아는 단지 '여행하다 거쳐간 곳'에 불과했으며, 현지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체는 산중에서 47명의 게릴라 부대를 조직했으나, 현지 농민들의 냉담함과 CIA(미국 중앙 정보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Bolivian Army)의 끈질긴 추격에 고립되었다.


3. 최후의 순간 (1967년)

1967년 10월 8일, 체는 추로 협곡(Quebrada del Yuro, 볼리비아의 계곡 지형) 전투에서 정부군 레인저 부대의 매복에 걸려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당시 체는 롤렉스 GMT 마스터 시계(Rolex GMT Master watch, 정확도가 높아 게릴라 전투에 유용하다고 판단하여 소지)와 혁명 군자금 15,000달러를 가방에 지참하고 있었다.


체는 라 이게라 마을(La Higuera, 볼리비아의 작은 촌락)의 한 학교 건물에 감금되었다. 

당시 볼리비아 대통령 레네 바리엔토스(René Barrientos,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볼리비아 대통령)는 곧바로 처형을 명령했다. 

미국 린든 존슨 행정부(Lyndon B. Johnson Administration) 역시 남미 게릴라 운동의 상징을 살려두는 것을 꺼렸기에 처형을 지지했다. 

당시 CIA 고문단은 체를 즉결처형해 ‘혁명 아이콘화’를 막으라고 조언했고, 볼리비아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1967년 10월 9일, 처형 집행자로 마리오 테란 살라사르 병장(Mario Terán Salazar, 볼리비아 병장)이 지명되었다. 

테란은 이후 이 순간을 "내 생애 최악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테란 살라자르 병장

테란 병장이 총을 겨누었을 때, 체는 미소를 지으며 일갈했다.

"진정하고 잘 조준하시오. 당신은 한 사람을 죽이는 것 뿐이오." 

"그 순간, 체(Che)가 매우 거대하게 보였다. 눈이 강렬하게 빛났지. 그가 내 위에 있는 것 같았고 나를 뚫어지게 본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또는 장교의 마지막 질문에, "혁명의 불멸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라고 답했다고도 한다.

테란은 한 발 물러서 눈을 감고 총을 쐈다. 

체 게바라는 향년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4. 유해 은폐와 불멸의 상징

볼리비아 정부는 체가 '교전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는 거짓 발표를 했으나, 기자들의 의혹을 샀다.

미 중앙 정보국 요원들은 혁명 잔당들의 시체 회수를 막기 위해 시신을 화장할 것을 요구했으나, 볼리비아 정부는 이를 묵살하고 은밀한 매장을 주장했다.

체 게바라의 신원 확인을 위해 그의 양 손목이 잘려 아르헨티나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내졌다.


그의 시신은 바예그란데(Vallegrande, 볼리비아의 도시) 근처 공동묘지에 급히 암매장되었다.

30년 후인 1997년 7월 12일, 체의 유해는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발굴의 결정적 증거는 손뼈가 없는 유골이었다) 쿠바 산타클라라(Santa Clara, 쿠바 혁명의 결정적 승리 장소)의 특별 묘지에 안장되었다. 

체가 쿠바를 떠난 지 32년 만의 일이었다.


문화적 영향과 후대의 평가

1. 혁명가의 초상과 자본주의의 역설

사후 체 게바라는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켰으며, 저항과 가치 전복의 아이콘이자 불멸의 투쟁가가 되었다.

그를 상징하는 사진은 쿠바 사진작가 알베르토 코르다(Alberto Korda)가 1960년 아바나 혁명 광장(Havana Revolution Square)의 추모 집회에서 찍은 '영웅적 게릴라'(Guerrillero Heroico)이다. 

베레모(beret)에 별이 박혀 있고, 덥수룩한 수염과 강렬한 눈빛이 담긴 이 사진은 20세기 이미지 정치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체 게바라를 상징하는 사진

자본주의를 배척했던 체 게바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미지는 록밴드 포스터, 티셔츠, 손목시계, 심지어 여성 속옷 광고에까지 사용되며 인기 있는 '대중 우상'이자 '자본주의자들이 만든 공산주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이러한 상업적 남용에 대해 체의 유족(둘째 부인 알레이다 마치와 자녀들)은 이미지 훼손을 막고 그의 정신적 유산(spiritual legacy)을 지키기 위해 관련 회사들을 상대로 법적 소송을 준비했다. 

사진작가 코르다 역시 보드카 회사와의 소송에서 승리한 뒤, 보상금 5만 달러를 쿠바 의료 체계에 기부하며, "체의 이미지를 술과 같은 제품 홍보에 남용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체 게바라의 외손자 카넥 산체스 게바라(Canek Sanchez Guevara)는 쿠바 사회의 경직성에 환멸을 느껴 아나키스트(anarchist)가 되었으며, 쿠바 혁명이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을 탄생시켰을 뿐"이고 반민주주의 체제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2. 후대의 정치적, 사회적 평가

쿠바는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개인숭배’ 연출을 조심하는 편이지만, 체 게바라만큼은 순교적 최후 때문에 국가적 상징으로 예외적으로 소비된다.

실제로 쿠바 3페소 화폐(Cuban 3 peso note) 도안에도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쿠바 3페소 화폐 도안

후대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긍정적 평가(혁명가): 안락한 삶을 버리고 혁명의 최일선에서 싸우다 죽은 고결함. 특히 제3세계의 민족 해방 투쟁의 상징. 

부정적 평가(정치가): 혁명 이후 반혁명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 지휘(인권 문제). 경제 정책 실패(무리한 국유화와 중앙집중 계획).

혁명 직후의 처형에 대해서는 ‘필요한 혁명적 정의’였다고 보는 입장과, ‘적법절차 위반’으로 보는 입장이 뚜렷하게 갈린다(논쟁).


볼리비아 정부는 최근에도 체 게바라를 '테러리스트'라고 칭하며, 국립공원 내에 있던 체 게바라 박물관(La Pastera, 1952년 체가 하룻밤 묵었던 목초지 창고)의 폐쇄를 정당화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3. 단어/어록의 기원

체 게바라의 삶과 투쟁에서 비롯되어 유명해진 구호들이 있다.

• "조국인가 죽음인가!" (Patria o muerte!): 7월 26일단의 표어이자 체 게바라의 유명한 어록이다.

•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Hasta la victoria siempre): 체가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로 향하며 남긴 말로, 아바나 혁명 광장(Plaza de la Revolución, Havana)에 그의 조형물과 함께 새겨져 있다.

• "체"(Che): 아르헨티나인들이 사용하는 감탄사 또는 호칭에서 유래했으며, 그의 상징이 되었다.


4. 체 게바라의 외로운 투쟁에 대한 비판적 통찰

체 게바라의 혁명적 노선은 좌익 내부에서도 비판을 받는다. 

볼리비아에서의 실패는 '극좌 모험주의'(extreme-left adventurism)로 비판되는데, 이는 현지 농민들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미 토지 개혁이 이루어진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념적 시각만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상은 숭고했지만, 현실 세계의 복잡성(다양한 문화적 배경, 정치적 지형)을 간과했고, 결국 "자신의 아젠다만 들이미는 짓을 막상 제국주의자들이 달고 다니는 빽도 없이 한 결과"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체 게바라의 삶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는 혁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정치가로서는 실패했다.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에서 무리한 경제 정책을 추진했고, 혁명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한 인권 문제(Human Rights issue)라는 비판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강력하다.

체 게바라는 혁명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로 '살아있는 인간성에 대한 사랑'을 꼽았다. 

그가 비록 실천의 과정에서 폭력을 사용하고, 때로는 냉철함을 넘어 잔인하다는 비판까지 받았지만, 그의 혁명의 동기 자체는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고통과 부정(不正)'에 대한 깊은 공감과 연대감에서 비롯되었다.

체 게바라는 "만약 우리들에게 공상가 같다고 한다면, 구제할 방법 없는 이상주의자라고 한다면, 불가능한 일을 생각한다고 한다면, 몇천 번이라도 대답해 주지. [바로 그렇다!]" 라고 말했다.


역사는 종종 성공한 권력자들(Fidel Castro, Mao Zedong 등)의 이야기에 집중하지만, 체 게바라가 스스로 권력의 안락함을 박차고 나가 '새로운 인간'(New Man, 개인적 이익이 아닌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인간)을 향한 불가능한 꿈을 좇아 희생한 고결함은, 시대와 이념을 초월하여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숭고한 이상주의의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는 체 게바라의 실패와 과실(failure and flaw)로부터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현실주의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목숨을 걸고 추구했던, '세상 어딘가에서 고통받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있는' 그 뜨거운 인류애(humanity)는 우리가 복잡하고 이기적인 현대 사회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자질일 것이다.

결국 체 게바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그저 현실에 순응하는 '중산층 의사'로 살 것인가, 아니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가슴 속에 '새로운 세상'이라는 불멸의 꿈을 품고 살아갈 것인가?


이 글은 공개된 역사 기록, 회고록, 연구서 등을 바탕으로 한 서사적 재구성입니다. 

실제 인물·사건·연대는 가능한 한 역사적 합의에 맞췄으나, 장면 묘사·대화·내면 묘사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각색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논쟁이 있는 부분(과테말라 개입 성격, 라 까바니아 처형 규모, 볼리비아 투쟁 평가, 소련과의 노선 갈등 등)은 하나의 해석일 뿐 단정이 아닙니다. 

학술·정치적 용도로 사용할 때에는 1차 문서와 최신 연구를 함께 참고해 주세요.


This article narrates the life of Ernesto “Che” Guevara (1928–1967), from his Argentine middle-class childhood and medical studies to the motorcycle trip that exposed him to Latin America’s poverty.

Those experiences, plus the 1954 CIA-backed coup in Guatemala, pushed him from reformist doctor to armed Marxist. 

In Mexico he met Fidel Castro and became a key comandante in the Cuban Revolution, helping win Santa Clara in 1958 and later serving as minister and central bank chief. 

He later broke with Soviet-style socialism and left Cuba to spark revolutions in Congo and Bolivia. 

Captured and executed in Bolivia in 1967, his image—heroic, romantic, controversial—still resonates worldwide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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