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타워의 붕괴와 이후: 9.11의 사실, 논쟁, 교훈 (9/11 attacks)


 9.11: 강철의 심장이 무너진 날


지하드의 그림자, 과오의 시대

1. 새로운 전쟁의 씨앗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뉴욕 (New York, 미국의 경제 중심지이자 상징적인 도시)의 아침은 눈부시도록 맑았다. 

하지만 이 완벽한 가을 하늘 아래, 역사는 이미 10여 년간 숙성되어 온 증오의 폭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은 단순한 종교적 광기가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이해관계와 미국의 중동 개입에 대한 뿌리 깊은 반발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Soviet-Afghan War)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은 냉전 (Cold War)의 대리전 구도 속에서 소련 공산군에 맞서 싸우던 아프간 무슬림들, 즉 무자헤딘 (Mujahideen, 이슬람 전사)을 CIA (미국 중앙정보국)를 통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 (Saudi Arabia) 출신의 부유한 사업가 오사마 빈 라덴 (Osama bin Laden, 알카에다의 창시자이자 테러 주동자)이 지하드 (Jihad, 성전) 네트워크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마크타브 알키다마트(MAK)'를 세워 아랍권 자원자와 자금을 모집했다.


1988년, 소련군이 철수하자 빈 라덴 (Osama bin Laden)은 아랍계 전투원들의 네트워크를 조직화하기 위해 페샤와르 (Peshawar, 파키스탄 도시)에서 '알카에다 (Al-Qaeda, 아랍어로 근본/기초라는 뜻)'를 창설했다. 

초기에는 아프간 전쟁의 후신 성격이 강했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그들의 주적은 미국으로 명확하게 바뀌었다.


알 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라덴


전환점은 1990년 걸프 전쟁 (Gulf War)이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빈 라덴 (Osama bin Laden)은 사우디 왕가에 자신의 무자헤딘 조직을 이용한 군사 지원을 제안했다. 

그러나 사우디 왕가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미군이 사우디 (Saudi)에 주둔하게 되자, 빈 라덴은 사우디 왕가를 이슬람 율법을 어긴 '타크피르' (배교자)로 간주하고 지하드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는 1996년 파트와 (Fatwa, 이슬람 율법학자의 종교적 의견)를 내려 아라비아반도에서 비무슬림을 추방할 것을 명령했다.


빈 라덴 (Osama bin Laden)이 미국 (America)을 공격 목표로 삼은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이해관계였다. 

그는 1982년 레바논 내전 (Lebanese Civil War) 당시 이스라엘 공군이 미국제 무기로 베이루트 (Beirut) 도심 고층 빌딩들을 폭격하는 모습을 TV로 보고 미국의 마천루와 국방부 청사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국의 노골적인 이스라엘 지원에 대한 보복이었다.


알카에다 (Al-Qaeda)의 최종 목표는 미국의 군사력 기반인 경제에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빈 라덴 (Osama bin Laden)은 "경제가 타격을 입으면 그들은 재건을 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따라서 미국 경제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 (World Trade Center, WTC)를 주요 테러 목표로 선정했다.


2. 미국 정보당국의 실패

테러의 계획은 치밀했지만, 그 실행 과정에는 수많은 경고와 징후들이 미국 정보당국에 포착되었다. 

그러나 기관 간의 불신과 정보 공유 거부라는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대참사를 막을 기회를 놓쳤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비판점이다.

2000년 1월, CIA (중앙정보국)는 나와프 알하즈미 (Nawaf al-Hazmi)와 칼리드 알미드하르 (Khalid al-Mihdhar)가 미국 비자를 소지하고 로스앤젤레스 (Los Angeles)에 입국한 사실을 확인했지만, 이 정보를 FBI (연방수사국)에 제때 전달하지 않았다.


CIA 알렉 스테이션, 2000년 7월 (가상 대화) 

마크 로시니 (Mark Rossini, FBI 요원): "이봐, 이건 분명 FBI에 알려야 하는 일이야. 그들이 미국 복수 입국 비자를 가지고 있잖아. 이 사실을 숨기는 건 법을 위반하는 거야."

 CIA 장교 (Mark Rossini의 선임): "아뇨. 이건 FBI의 사건도 아니고, FBI의 관할 영역도 아닙니다." 


당시 알렉 기지 (Alec Station, CIA의 오사마 빈 라덴 추적 조직)에 파견되어 있던 FBI 요원들은 알하즈미 (Nawaf al-Hazmi)와 알미드하르 (Khalid al-Mihdhar)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지만, CIA (중앙정보국)는 이를 거부하거나 "FBI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라며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법적 규제와 기관 간의 경쟁적인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정보 당국끼리의 상호 삽질과 알력싸움은 테러리스트들의 미국 내 활동을 눈 감아준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수사관은 단 한 명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1년 8월, FBI 미네소타 지부 (FBI Minnesota Field Office)는 비행학교 수강생 자카리아스 무사위 (Zacarias Moussaoui)를 조사하며 항공기 테러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FBI 본부 차원의 적극적인 대응은 없었다. 

무사위 (Zacarias Moussaoui)는 보잉 747기 조종 훈련을 고집하다 체포되었지만, FBI 본부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며 광범위한 수사를 불허했다. 

당시 미국 당국은 알카에다 (Al-Qaeda)의 위협을 '해외 미군 기지 공격'이나 '항공기 납치를 통한 인질극' 정도로 오판했으며, 감히 미국 본토를 겨냥한 대규모 자살 공격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다른 치명적인 과실은 허술한 항공 보안이었다. 

9/11 테러 당시 탑승객 신원 파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조종실 문도 잠그지 않았다. 

스위스 나이프 (Swiss knife) 같은 작은 칼 (4인치 미만)은 기내 반입이 허용되었고, 실제로 납치범들은 이 작은 칼을 이용해 범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보안 취약점을 개선하라는 정부 보고서와 의회 권고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무시되었다.


릭 레스콜라 (Rick Rescorla, 모건 스탠리 보안 전문가)라는 인물은 일찍이 비행기를 이용한 타워 공격 가능성을 예측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1993년 WTC 폭탄 테러 이후 공중 공격에 대비해 모건 스탠리 (Morgan Stanley 금융지주회사) 직원들을 상대로 주기적인 비상 대피 훈련을 실시했다.


이 모든 과실의 축적 속에서, 오사마 빈 라덴 (Osama bin Laden)이 설정한 테러 개시의 날은 날이 갈수록 묵묵히 다가왔다.


3. 운명의 아침: 첫 번째 충돌 (08:46 AM)

9월 11일 화요일 아침 7시 59분, 아메리칸 항공 11편 (AA11, 보잉 767기)이 승객 81명과 승무원 11명을 태우고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 (Boston Logan International Airport)을 출발해 로스앤젤레스 (LAX)로 향했다. 

납치범 5명 (모하메드 아타 포함)이 탑승하고 있었다.


8시 13분경, 매사추세츠주 (Massachusetts) 상공에서 모하메드 아타 (Mohamed Atta, AA11편 납치 주동자)를 비롯한 테러리스트 5명이 AA11편을 납치하기 시작했다. 

납치범들은 승무원 캐런 마틴 (Karen Martin)과 바바라 애러스테기 (Barbara Arestegui)를 칼로 찔렀고, 승객 대니얼 르윈 (Daniel Lewin, 탑승객)이 모하메드 아타를 저지하려다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8시 19분, 승무원 베티 옹 (Betty Ong, AA11편 사무장)이 아메리칸 항공 예약센터에 기내 전화로 납치 사실을 보고했다.

베티 옹 (Betty Ong): "뒷쪽 3번인데, 조종석에서 응답이 없고 비즈니스석에 누군가가 칼에 찔렸다. 메이스 (Mace, 최루 스프레이)를 뿌린 건지 다들 숨을 쉴 수가 없다. 모르겠다. 납치되는 것 같다."


8시 21분, AA11편의 트랜스폰더 (Transponder, 항공기 식별 장치)가 꺼졌지만, 관제센터는 레이더망으로 항로를 계속 추적할 수 있었다.

8시 24분, 모하메드 아타 (Mohamed Atta)가 실수로 기내 방송 대신 항공 관제센터에 교신 버튼을 잘못 누르면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하메드 아타 (Mohamed Atta): "우리가 항공기들을 접수했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을 것이다. 공항으로 돌아가고 있다."

항공 관제사들은 이를 통해 납치 사실을 확신했고, 8시 37분 52초에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 북동부방공단 (NEADS, North East Air Defense Sector)에 납치 사실을 알렸다. 

훈련 중이던 오티스 주방위 공군 기지 (Otis Air National Guard Base)에서 F-15기 두 대가 요격을 위해 긴급 출격했지만, 이미 AA11편은 뉴욕 맨해튼 (Manhattan, 뉴욕의 핵심 구역)을 향해 급강하 중이었다.


08시 46분 40초, 운명의 시각. 

아메리칸 항공 11편이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 (1WTC)의 93층~99층 사이에 시속 710km의 속도로 충돌했다.


아메리칸 항공 11편 테러 사건


조셉 파이퍼 (Joseph Pfeifer, 뉴욕 소방국 제1대대 서장): "맨해튼 가에서는 듣기 힘든 비행기 소리가 들렸죠. 그것도 아주 크게." 

(폭발음) 주변 사람들: "이런 젠장! (Holy Shit!)"


충돌은 평화로운 일상을 순식간에 재난 현장으로 뒤바꿔 놓았다. 

충돌 당시 마침 뉴욕시 (New York City) 신참 소방관 (Tony Benetatos)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던 프랑스 출신 영화제작자 쥘 노데 (Jules Naudet)가 이 충돌 장면을 우연히 촬영했고, 이는 1WTC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모습이 제대로 담긴 영상으로 남아 있다.


이 충돌로 AA11편 탑승객 전원과 북쪽 타워 해당 층 인원 수백 명이 즉사했으며, 건물 외벽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릭 레스콜라 (Rick Rescorla)의 경고대로 공중에서의 공격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4. 혼란 속의 오판과 두 번째 충돌 (09:03 AM)

첫 번째 충돌 직후, 뉴욕은 대혼란에 빠졌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한 '조종사의 실수나 비행기 오작동'으로 충돌한 사고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이 시점부터 고의적이고 연쇄적인 테러 공격이라고 인지한 사람들도 많았다.


오전 8시 49분경, 언론은 사고를 긴급 보도하기 시작했고, WTC에서는 비상대피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사고가 1WTC (북쪽 타워)에서만 일어났다고 판단한 항만청 직원들은 2WTC (남쪽 타워)에 있는 사람들의 피난을 중단시키고 "긴장하지 말고 제자리에 편안히 있으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WTC 2WTC 방송실 (가상 대사): "친애하는 입주민 여러분, 1WTC에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저희 건물은 안전합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제자리에 복귀해 주십시오."

이 오판은 곧 치명적인 비극이 되었다. 

2WTC (남쪽 타워)에 있던 사람들은 몇 분 후 그들의 건물에도 비행기가 충돌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미 옆 건물이 무너질 가능성을 고려하면 당장 대피하는 것이 옳았으나, 이 정도 규모의 사고는 전례가 없었기에 붕괴를 예측한 사람은 적었다.


그 시각,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 (UA175, 보잉 767기)은 납치된 상태로 뉴욕 상공을 급강하하고 있었다.


오전 9시 0분, UA175편 탑승객 피터 핸슨 (Peter Hanson, 승객)이 아버지 리 핸슨 (Lee Hanson)에게 두 번째 전화를 걸었다.

피터 핸슨 (Peter Hanson): "상황이 나빠지고 있어요, 아빠. 스튜어디스가 칼에 찔렸어요... 비행기가 덜컥거리면서 움직여요. 조종사가 여객기를 조종하는 것 같진 않아요. 하강하고 있는 것 같고. 시카고나 어딘가로 날아가서 건물로 뛰어들 계획인가 봐요. 걱정하지는 마세요 아빠. 그렇게 되면 엄청 빨라질 거에요. 세상에, 세상에."


09시 03분 02초.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방송 카메라가 불타는 1WTC (북쪽 타워)를 향한 상태에서 두 번째 테러가 일어났다.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세계무역센터 남쪽 타워 (2WTC)의 77층~85층 사이에 시속 950km의 속도로 충돌했다.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2WTC에 충돌하는 모습


CBS 제보자 테레사 르노 (Teresa Renault): "아, 또 하나 있어요. 방금 또 비행기가 충돌했어요... 맞아요! 세상에, 방금 또 비행기가 다른 건물에 충돌하고 바로 그 건물 한가운데로 날아갔어요. 폭발이에요, 맞아요, 세상에, 바로 건물 한가운데서요."


이 장면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생중계를 통해 수천만 시청자들에게 전송되었다. 

앵커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말을 잇지 못했고, 미국인들은 "미국이 공격받았다 (America Under Attack)"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첫 번째는 사고일 가능성이 있었지만, 바로 옆 건물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자 이는 고의적인 테러 공격임이 명백해졌다. 

알카에다 (Al-Qaeda)는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쌍둥이 빌딩 (Twin Towers)을 시간차 공격 대상으로 선택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5. 절망의 선택과 백악관의 마비

두 번째 충돌 후, 두 타워의 상층부에 갇힌 사람들은 지옥도에 직면했다. 

충돌 부위 위에 갇힌 사람들은 열기와 유독가스를 견디지 못했고, 그들 앞에는 두 가지 잔혹한 선택지 밖에 없었다.

내부에서 고통스럽게 질식사하거나, 수백 미터 상공에서 뛰어내려 생을 끝내는 것.


WTC 상층부 생존자 (가상 대화): "숨을 쉴 수가 없어! 연기가 너무 심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사람이 보였어. 차라리 저렇게라도..."


시간이 지나자 약 200명 이상이 열기를 피해 뛰어내려 투신했다. 

이 비극적인 광경은 뉴스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었다. 

이들을 The Falling Man(추락하는 사람)라고 불렀는데, 이 광경을 목격한 소방대원들은 쾅! 하는 굉음을 계속 들으면서 무력감과 애처로운 분노를 삭여야 했다. 

이 투신자 중 한 명이 지상에서 대기 중이던 뉴욕 소방국 소방관 대니얼 서 (Danniel T. Shur)를 직격하여 대니얼 서 소방관이 현장에서 순직하는 비극도 있었다. 

이는 9/11 테러 현장에서 발생한 최초의 응급요원 순직이었다.


The Falling Man(추락하는 사람)


한편, 플로리다주 (Florida)의 초등학교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던 조지 W. 부시 (George W. Bush, 당시 미국 대통령)는 앤드루 카드 (Andrew Card, 백악관 비서실장)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귓속말로 전달받았다.

앤드루 카드 (Andrew Card): "두 번째 항공기가 두 번째 타워에 충돌했습니다. 미국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부시 (George W. Bush) 대통령은 이 보고를 받고도 아이들과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약 7분 동안 교실에 머물렀다고 해명했지만, 그의 굳어지는 표정은 당시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 대통령과 보좌진이 읽던 동화책 'The Pet Goat (애완 염소)'의 마지막 구문이 "More to come (앞으로 더 많이)"이었다는 절묘한 사실은 훗날 도시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워싱턴 D.C. (Washington D.C., 미국의 수도)에서는 딕 체니 (Dick Cheney, 당시 부통령)가 백악관 지하 벙커 (Presidential Emergency Operations Center)로 급히 피신했고, 미 정부의 지휘 체계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백악관 벙커의 시스템조차 냉전 (Cold War) 이후 제대로 개량되지 않아 영상과 소리가 따로 나오는 낙후된 상태였으며, 통신마저 원활하지 않았다.

이 혼란의 순간, 납치된 세 번째 비행기, 아메리칸 항공 77편 (AA77)이 워싱턴 D.C. 상공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6. 세 번째 테러: 국방의 심장부 피격 (09:37 AM)

뉴욕에서 비행기 두 대가 초고층 건물을 들이받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진 지 불과 34분 만에, 워싱턴 D.C. (Washington D.C., 미국 수도)에서도 납치된 세 번째 항공기가 목표물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아메리칸 항공 77편 (AA77, 보잉 757기)은 오전 8시 54분경 오하이오주 남부 상공에서 납치범 하니 하뇨르 (Hani Hanjour, AA77편 납치 주동자)를 포함한 5명의 테러범에게 장악되었다. 


납치 직후, 하뇨르 (Hanjour)는 항공기의 트랜스폰더 (Transponder, 항공기 식별 장치) 전원을 껐고, AA77편은 이후 36분 동안 관제센터의 기본 레이더망에 탐지되지 않는 상태로 워싱턴 D.C.를 향해 날아갔다.


이 시점, 미국 공군과 연방항공국 (FAA)은 이미 두 번의 충돌로 인해 지휘 체계가 완전히 마비 상태였다. 

미 공군은 적국의 침공만 상정하고 있었기에 내륙에서 날아오는 민항기 공격에는 제대로 된 초기 대응을 하지 못했고,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미 충돌한 AA11편을 찾는 헛수고를 벌이기도 했다.


오전 9시 35분, 딕 체니 (Dick Cheney, 당시 부통령)는 백악관 지하 벙커 (대통령 비상 작전 센터)로 급히 피신했고.

백악관 지하 벙커 (PEOC) (가상 대화): 딕 체니 (Dick Cheney): "워싱턴으로 비행기가 접근 중이라고? 납치된 민항기인가?" 

보좌관 (Richard Clarke): "레이건 공항 관제사가 경고했습니다. 통신 두절, 궤적은 백악관을 향하고 있습니다." 

체니 부통령 (Dick Cheney): "우리는 격추 권한이 필요하다."


오전 9시 37분 46초, 하니 하뇨르 (Hanjour)가 조종하는 아메리칸 항공 77편은 시속 853km의 속도로 워싱턴 D.C. (Washington D.C.) 인근 버지니아주 알링턴군 (Arlington County)에 위치한 미 국방부 청사 펜타곤 (The Pentagon, 미군의 군사적 중심부)의 서쪽 면에 충돌했다.


아메리칸 항공 77편이 충돌한 미 국방부 청사 펜타곤의 모습


충돌 직전 하뇨르 (Hanjour)는 오토파일럿을 해제하고 수동으로 비행기를 조종하며 펜타곤을 향해 급강하 기동을 펼쳤다. 

펜타곤 (The Pentagon) 충돌 당시 AA77편은 5개의 가로등을 쳤고, 오른쪽 날개는 휴대용 발전기에 부딪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펜타곤 충돌 현장 인근 (가상 대화): 매리 리먼 (Mary Lehman, 운전자): "비행기가 지상을 향해 급경사로 내려갔어요. 군용기인 줄 알았어요! 저렇게 위험하게 757기를 탈 수는 없을 겁니다!" 

짐 미크라제브스키 (Jim Miklaszewski, NBC 펜타곤 주재 기자): "지금 당장 누구를 놀라게 만들고 싶진 않지만, 분명 몇 분 전 이곳 펜타곤에서 거대한 폭발이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공격으로 탑승객 전원과 펜타곤 근무자 125명을 포함하여 총 189명이 사망했다. 

충돌 지점은 당시 보수 공사가 막 완료된 구역이 많았는데, 이는 사상자를 줄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미국 정부는 국방의 핵심부가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졌다.


7. 강철 심장부의 영웅: UA93편의 반격 (10:03 AM)

아메리칸 항공 77편 (AA77)이 펜타곤에 충돌했을 무렵, 네 번째 납치된 비행기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UA93, 보잉 757기)은 워싱턴 D.C. (Washington D.C.)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납치범 지아드 자라 (Ziad Jarrah, UA93편 납치 주동자)가 조종한 이 항공기의 최종 목표는 백악관이나 미국 국회의사당 (Capitol Building, 미국의 입법부 상징)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동북부의 원자력 발전소도 잠재적 타겟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UA93편의 승객들은 지상의 가족이나 친지들과 휴대폰 통화에 성공했고, 이 통화를 통해 이미 세계무역센터 (WTC)와 펜타곤 (The Pentagon)에서 자살 테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의 일반적인 항공기 납치는 인질극을 목적으로 했으나, 승객들은 이 납치가 곧 자신들의 죽음과 더 큰 국가적 파국을 의미함을 깨달았다.


UA93편 기내 (가상 대화 - 통화 내용 재구성): 토드 비머 (Todd Beamer, 탑승객): "저들이 비행기를 인질로 삼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저들은 우리와 함께 자폭할 겁니다. 우리는 뭔가 해야 합니다."


오전 9시 57분, 토드 비머 (Todd Beamer), 마크 빙엄 (Mark Bingham), 톰 버넷 (Tom Burnett) 등 승객들은 필사적으로 테러리스트들과 싸우며 조종석을 되찾기 위한 반격에 나섰다. 

납치범 지아드 자라 (Ziad Jarrah)는 승객들을 뿌리치기 위해 기체를 일부러 흔드는 격렬한 기동을 벌였고, 승객들이 조종실 문을 부수기 직전인 오전 10시 3분 11초, 테러범들은 계획된 목표물 충돌을 포기하고 펜실베이니아주 섕크스빌 인근 광산 들판에 항공기를 추락시켰다.


추락 후 피어난 버섯구름의 모습


탑승객 44명 전원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이었지만, 이들의 영웅적인 저항과 희생 덕분에 워싱턴 D.C.의 정치적 핵심부 공격이라는 더 치명적인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이후 미국인들에게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이 사건을 다룬 영화 《플라이트 93 (United 93)》이 제작되기도 했다.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테러 사건 경로


8. 강철의 붕괴: 쌍둥이 타워의 최후

UA93편이 추락한 직후, 뉴욕에서는 믿기 힘든 최악의 재난이 현실이 되었다. 

항공기 충돌과 화재로 인한 복합적인 구조적 손상을 버티지 못한 세계무역센터 (WTC) 쌍둥이 빌딩이 차례로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9시 59분 00초: 먼저 충돌한 북쪽 타워 (1WTC)보다 늦게 피격당했던 남쪽 타워 (2WTC)가 충돌 후 불과 56분 만에 완전히 붕괴했다. 남쪽 타워가 먼저 무너진 이유 중 하나는 UA175편의 충돌 속도가 더 빨랐으며, 충돌 위치나 각도의 차이로 인해 구조적 손상이 더 치명적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0시 28분 25초: 남쪽 타워 붕괴 후 약 29분 뒤, 아메리칸 항공 11편이 충돌했던 북쪽 타워 (1WTC) 역시 완전히 주저앉았다. 충돌 지점 아래층에 있던 소방관들 대부분이 조셉 파이퍼 (Joseph Pfeifer, 뉴욕 소방국 제1대대 서장) 소방경이 내린 대피 명령을 통신 제약으로 인해 받지 못하여, 수많은 구조대원이 잔해더미 속에 매몰되었다.


건물의 붕괴는 항공기의 충돌 그 자체의 충격과, 충돌 시 유출된 수만 리터의 제트 연료가 일으킨 대규모 화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제트 연료의 연소 온도 (약 900℃)는 철골 (강철)이 녹는점 (약 1,400℃)보다는 낮았으나, 강철이 녹지 않아도 그 열기로 인해 충분히 약화될 수 있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건물을 무너뜨리려면 철강을 녹일 필요 없이, 열을 가해 구조적 강성을 잃게 만들기만 해도 된다. 

이는 마치 물을 뿌려 약화된 종이 기둥이 위에 얹힌 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충돌로 인해 내화 코팅이 벗겨지고 강철이 약화되자, 위층 건물의 막대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이 붕괴로 세계무역센터에 있던 소방관 343명, 뉴욕 경찰국 경찰관 72명을 포함하여 총 2,996명에 달하는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릭 레스콜라 (Rick Rescorla, 모건 스탠리 보안 전문가) 역시 더 많은 직원을 구하기 위해 대피 지휘를 하다가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순직했다.


붕괴된 자리에는 거대한 잔해더미인 그라운드 제로 (Ground Zero, 폭발 진원지)만 남았고, 화재는 이후 99일이 지나서야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잔해 해체에만 8개월 반이 걸렸다.


이 대규모 참사는 냉전 종식 후 미국이 테러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기관 간의 정보 공유 부재, 그리고 허술했던 항공 보안 (작은 칼 반입 허용, 조종실 문 무방비) 등의 과실이 최악의 시나리오와 결합하여 발생한 재앙이었다.


9. 제7세계무역센터의 붕괴와 논란 (17:20 PM)

오후 5시 20분 33초, 쌍둥이 빌딩 부속 건물이었던 제7 세계무역센터 (7WTC, 47층 규모)마저 붕괴하였다. 

이 건물은 비행기가 직접 충돌하지 않았기에, 붕괴 원인은 북쪽 타워 붕괴 시 튕겨 나온 잔해가 건물을 덮치면서 발생한 구조적 손상과 그로 인한 내부 화재의 여파로 추정된다. 

다행히 인원은 모두 대피하여 사상자는 없었다.


이 7WTC의 붕괴는 이후 9.11 테러 음모론의 핵심 논란 중 하나가 되었다. 

음모론자들은 비행기에 맞지 않은 건물이 왜 자유낙하 속도에 가깝게 무너졌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이것이 부시 행정부의 자작극이거나 테러 정보를 알고도 방관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MIHOP/LIHOP). 

이들은 정부가 정치적 이득 (이라크 전쟁 명분, 군수 산업 이익)을 위해 테러를 조작하거나 묵인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공식 조사 결과와 전문가들은 항공기 충돌 당시의 충격, 제트 연료 화재, 그리고 붕괴 속도에 대한 음모론자들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거나, 충돌 후 지속된 화재 열기가 건물을 무너뜨릴 정도로 충분히 강철을 약화시켰다는 과학적 반론을 내놓았다.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항공기들의 충돌 경로


10. 영공의 봉쇄와 공포의 확산

펜타곤 피격 직후, 미국 정부는 유례없는 규모의 조치를 취했다.

오전 9시 42분: 미 연방항공국 (FAA)의 최고 권한자였던 벤 슬라이니 (Ben Sliney, 이 날이 국장직 업무 시작일이었다)는 미국 전역의 영공을 봉쇄하라는 SCATANA (항공교통업무 우발계획, Security Control of Air Traffic and Air Navigation Aids) 집행 명령을 내렸다. 

이는 냉전 시대에 제정된 후 9.11 테러 때 처음으로 실제로 실시된 조치였다.


미국 상공에 떠 있던 약 4,200대에 달하는 모든 민간 항공기들은 강제로 착륙해야 했으며, 국제선 비행기는 미국 영공 진입이 불허되었다. 

뉴욕항도 봉쇄되었다.


노란 리본 작전 (Operation Yellow Ribbon): 미국 영공으로 접근 중이던 수많은 국제선 항공기들이 출발지로 회항할 수 없는 지점을 지난 상태였기에, 캐나다는 '노란 리본 작전'을 발동하여 이 비행기들을 자국 공항으로 유도했다. 뉴펀들랜드의 작은 공항인 갠더 국제공항에는 당시 인구의 두 배에 달하는 수많은 승객과 승무원들이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훈훈하고 특별한 일화가 발생하기도 했다.

공포와 착오: 대한항공 85편 사건 (KE085) 이 극도의 혼란 속에서, 대한항공 85편 (KE085)이 납치된 것으로 오인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앵커리지 센터에서 여객기 납치 시 행동 요령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조종사가 'HJK' (Hijacked, 납치) 코드를 트랜스폰더에 입력했고, 앵커리지 관제 센터의 지시로 트랜스폰더 코드를 7500으로 변경하자, 미 방위사령부는 이 비행기가 납치된 것으로 판단했다. 알래스카 주지사 토니 놀스 (Tony Knowles)는 KE085편이 목표물에 충돌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고 건물 대피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결국 KE085편은 알래스카주 화이트호스에 안전히 착륙하여 캐나다 기마경찰의 무장 환대를 받은 후에야 단순 의사소통상의 착오였음이 밝혀졌다. 이는 당시 미군과 FAA의 지휘 체계가 얼마나 과민하고 긴장되어 있었는지 보여주는 일화였다.


11. 부시 대통령의 방황과 지도부의 마비

사건 당일 조지 W. 부시 (George W. Bush) 대통령은 플로리다주 (Florida)에 머물고 있었다. 

두 번째 비행기 충돌 소식을 앤드루 카드 (Andrew Card, 비서실장)에게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아이들에게 동화책 'The Pet Goat (애완 염소)'를 읽어주던 중이었고,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이 "More to come (앞으로 더 많이)"였다는 사실은 훗날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는 도시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오전 9시 35분, 부시 대통령은 학교를 떠나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 포스 원 (Air Force One)에 탑승했다. 

하지만 지도부는 워싱턴 D.C.로 즉시 복귀하기를 원하는 대통령을 말렸다.

보좌관: "각하, 현재 다음 타겟은 에인절 (Angel, 에어 포스 원의 암호명)이라는 첩보가 있습니다. 워싱턴으로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에어 포스 원 (Air Force One)은 상당 시간 동안 전투기의 호위 없이 비행해야 했으며, 루이지애나 (Louisiana)의 박스데일 공군기지 (Barksdale Air Force Base)에 착륙했다가, 네브래스카 (Nebraska)의 오펏 공군기지 (Offut Air Force Base)로 이동하는 등 불안정한 동선을 보였다.


미 정부의 지휘 체계는 마비되었고, 백악관 지하 벙커 (PEOC)의 시스템조차 냉전 이후 제대로 개량되지 않아 영상과 소리가 따로 나오는 낙후된 상태였으며 통신마저 원활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 미국 정부의 시스템적 경직성과 준비 부족을 여실히 드러낸 결정적인 과실이었다.

오후 8시 30분,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대국민 연설을 통해 "오늘 아침 얼굴 없는 비겁자들로부터 자유가 공격당했다. 자유는 수호될 것"을 강조하며, 테러와의 전쟁 (War on Terror)을 선포할 것임을 예고했다.


테러리스트


12. 그라운드 제로 (Ground Zero): 아비규환의 현장

오전 10시 28분 25초,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 (WTC1)까지 완전히 붕괴한 후 (아메리칸 항공 11편 충돌 후 1시간 42분 만), 뉴욕 로어 맨해튼 (Lower Manhattan)의 부지는 그라운드 제로 (Ground Zero, 폭발의 진원지)라고 불리는 거대한 폐허로 변했다. 


이날 테러로 총 2,996명이 사망했으며 (테러범 19명 제외 민간인 2,977명), 이는 미국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소방관과 경찰관이 순직한 사건이었다. 

소방관 343명, 뉴욕 경찰관 72명이 구조 활동 중 순직했다. 

그중 뉴욕 소방국 담당 사제였던 마이컬 저지 (Mychal Judge, 신부)는 북쪽 타워 로비에서 떨어진 파편에 맞아 사망하여 9.11 테러의 첫 번째 공식 희생자 (Victim 0001)로 기록되었다.


조셉 파이퍼 (Joseph Pfeifer, 소방경): "제길, 건물이 무너지고 있어! 전 대원, 당장 대피하라! (Evacuate the building!)" 

(잔해 속에서) 항만청 경찰관 존 맥러플린 (John McLoughlin): "여기는... 지옥이야. 파편이 마치 폭격처럼 쏟아졌어.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까?"


희생자의 규모가 워낙 거대했고 유해의 손상이 심해, 2024년 11월 기준으로도 1,103명의 유해 (전체 희생자의 약 40%)가 여전히 신원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이 참상은 사건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수많은 미국인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를 남겼으며, 당시 현장 근처에 있던 구조대원과 시민들은 유해가스와 먼지 (석면 포함) 흡입 후유증으로 암과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테러 당일 사망자보다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다는 주장까지 제기될 정도다.


13. 과실과 책임론: 정보 당국과 항공 보안의 실패

이러한 전대미문의 비극은 알카에다 (Al-Qaeda)의 치밀한 계획뿐만 아니라, 초강대국 미국 정부의 시스템적 경직성과 치명적인 과실이 빚어낸 결과였다.


기관 간의 고질적인 알력싸움과 정보 공유 실패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에 입국해 비행 훈련을 받는 동안, 미국 정보 당국은 파편적인 첩보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CIA (중앙정보국)와 FBI (연방수사국)를 비롯한 기관들은 정보 공유를 극도로 꺼리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CIA의 빈 라덴 추적 조직 (알렉 스테이션)은 납치범 나와프 알하즈미와 칼리드 알미흐다르가 복수 입국 비자로 미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를 FBI에 제때 전달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 정보 당국 내부의 상호 삽질과 알력싸움은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본토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방치하는 결정적인 과실이었다. 

1995년부터 법무부가 민감한 정보를 기관끼리 공유하는 것을 규제한 법적 장벽도 실패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허술했던 항공 보안

당시 미국의 항공 보안은 구멍투성이였다. 

조종실 문은 잠그지 않았고, 심지어 4인치 (10.16cm) 미만의 작은 칼을 포함한 소지품을 전혀 통제하지 않아 납치범들이 이 작은 칼을 이용해 승무원을 위협하고 범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심각한 허점을 개선하라는 의회와 정부 보고서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부시 행정부와 클린턴 행정부 모두 이를 무시했다는 점은 큰 과실이다.


14. 테러와의 전쟁: 미국의 정치적 대전환

이 참극은 미국의 국내외 정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오후 8시 30분, 조지 W. 부시 (George W. Bush)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대국민 연설을 통해 "오늘 아침 얼굴 없는 비겁자들로부터 자유가 공격당했다. 자유는 수호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 국가적 위기 속에서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테러 직후 90%를 기록하며 미국 역사상 최고치를 달성했다. 

미국인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쳤다.


테러와의 전쟁 선포: 부시 대통령은 테러의 배후와 테러리스트를 감싸주는 이들을 구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테러와의 전쟁 (War on Terror)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탑승객 명단 분석 등을 통해 알카에다 (Al-Qaeda)의 소행임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정부는 즉각적인 응징을 요구받았다.


이라크 전쟁의 씨앗: 테러 배후가 밝혀지기도 전, 딕 체니 (Dick Cheney, 부통령)를 비롯한 부시 정권의 실세들은 테러 당일 오후부터 이라크 침공을 논의했다. 

이라크 침공을 주장하던 네오콘 (Neoconservatives, 신보수주의자) 그룹은 9.11 테러를 팩트 체크 없이 곧바로 전쟁으로 돌진하는 정치적 이득의 명분으로 삼았다.


9.11 테러는 본래 알카에다의 소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시 정권은 이 분노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에게 돌려, 결국 이라크 전쟁 (2003년 발발)을 강행했다. 

이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 (WMD)는 실제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는 훗날 부시 정권이 군수업체와 석유기업들의 배만 불렸다는 추악한 비난 여론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테러와의 전쟁 연설중인 부시대통령


15. 사회적 대격변과 문화적 충격

9.11 테러는 미국 사회에 애국심과 증오라는 양면적인 반응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전국적으로 시민들은 현장에 몰려가 헌혈하고 구조를 도왔으며, 성조기가 건물과 차량에 내걸렸다. 

구호 "Never Forget (절대로 잊지 말라)"은 9.11 테러의 상징적인 표어가 되었다.


반면, 테러 직후 미국 내 무슬림 (Muslims), 아랍계 (Arabs), 이란계 (Iranians)는 물론, 이슬람과 전혀 관련이 없는 터번을 쓴 시크교도 (Sikhs)까지 외모나 이름만으로 공공장소에서 조롱과 위협, 증오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이 때문에 악화될 무슬림계 미국인들의 여론을 달래기 위해 9월 17일 모스크를 방문하여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무슬림계 미국인들 역시 소중한 미국의 국민이다"라고 연설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회 현상은, 미국 내 이슬람 단체들이 알카에다 (Al-Qaeda)의 만행을 신속하게 규탄하고, 일부 무슬림 이민 2세들은 자신이 미국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군에 자원입대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무슬림 군인의 숫자가 2000년 3,500명에서 2004년 6,200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유럽의 무슬림 이민자 사회와는 대비되는,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만의 특별한 사회 현상이었다.


할리우드는 한동안 테러, 폭발, 납치 소재 영화 상영을 자제하거나 장면을 삭제했다. 

예를 들어, 영화 《스파이더맨》(2002) 초기 예고편에 있던 쌍둥이 빌딩 사이에 거미줄을 치는 장면이 삭제되고, 본편에서는 주인공이 성조기에 매달려 끝나는 애국주의적 엔딩이 추가되었다. 

음악계에서도 브루스 스프링스틴 (Bruce Springsteen)의 《The Rising》(2002)처럼 위로와 치유를 담거나, 토비 키스 (Toby Keith)의 《Courtesy of the Red, White and Blue》(2002)처럼 복수와 애국심을 강조하는 곡들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16.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음모론의 불씨

9.11 테러의 충격과 정부의 불투명한 정보 공개,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이득 때문에 이 사건은 음모론 (Conspiracy Theories)의 온상이 되었다. 

음모론은 인지부조화 현상 속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정황들을 구체적인 사례로 입증하려는 방식을 취하며 대중적 설득력을 얻었다.


음모론은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1. LIHOP (Let It Happen On Purpose, 방관설): 정부가 테러 정보를 사전에 알았음에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일부러 무시하거나 방관했다는 주장.

2. MIHOP (Made It Happen On Purpose, 자작극설): 정부 핵심 인사들이 테러를 계획하고 알카에다와 협조했다는 주장.


핵심적인 음모론과 반론.

• 제7 세계무역센터 (7WTC) 붕괴 논란: 비행기가 직접 충돌하지 않은 47층 건물이 오후에 무너진 이유.

    ◦ 반론: 공식적으로는 북쪽 타워 붕괴 시 튀어나온 잔해로 인한 구조적 손상과 내부 화재의 복합적인 여파로 붕괴된 것이다.

• 철골 용융 논란: 제트 연료의 연소 온도 (900℃)는 철골의 녹는점 (1,400℃)보다 낮기 때문에 건물이 무너질 수 없었다는 주장.

    ◦ 반론: 이 주장은 말 자체는 사실이나 논리 전개는 잘못되었다. 철강은 녹지 않아도 높은 열기에 의해 충분히 약화될 수 있으며, 충돌 시 내화 코팅이 벗겨진 상태에서 건물 상층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붕괴된 것이다.

• 펜타곤 충돌 잔해 논란: 보잉 757기 파편이 없거나, 블랙박스가 회수되지 않았다는 주장.

    ◦ 반론: 비행기 파편은 발견되었으며, 충돌 직후 40시간 동안 화재가 지속되었기에 세계무역센터와 마찬가지로 잔해를 찾기 어려웠을 뿐이다. UA93편의 블랙박스 (FDR/CVR)는 평지 추락 후 화재가 금방 진압되어 회수에 성공했고 민간에 공개되었다. 펜타곤 충돌 사고의 블랙박스 중 비행 기록 녹화기는 복구에 성공했다.


이러한 음모론은 정부가 제한된 정보만을 공개하고, 청문회에서 정보 당국의 허술함이 낱낱이 밝혀지면서 미 정부의 반박 자료가 대중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악순환 속에서 더욱 힘을 얻었다. 

이는 국가 권력에 대한 불신이 낳은 결과였다.


역사가 남긴 교훈: 놈 촘스키와 톰 클랜시의 메시지

9.11 테러는 미국의 역사에서 탈냉전 시대의 종식을 알리고 신냉전 시대로 넘어가는 핵심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은 미국이 외부에 대한 개입을 줄이려던 분위기를 반전시켜, 10여 년간의 전쟁과 개입 정책으로 이끌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결정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시스템의 경직성은 곧 재앙이다. CIA와 FBI를 비롯한 정보 당국 간의 고질적인 정보 공유 거부와 알력싸움은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본토에서 자유롭게 음모를 실행할 수 있도록 방치하는 치명적인 과실이었다. 기관 간의 불신과 권한 다툼은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둘째, 공포는 정의를 왜곡시킨다. 테러 직후의 분노와 공포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애국법과 같은 감시 권한 강화를 지지하게 했으며, 무슬림 및 아랍계에 대한 혐오 범죄와 인종적 편견을 확산시켰다. 정치적 이득을 위해 테러의 명분을 조작하여 이라크 전쟁을 강행한 것은 복수가 야기하는 또 다른 증오의 악순환을 보여주었다. 놈 촘스키 (Noam Chomsky)는 빈 라덴과 알카에다가 미국의 협력과 지원을 통해 성장한 단체라는 점을 비판하며, 이슬람 극단주의 확산에 미국의 외교 정책이 미친 영향을 지적했다.

셋째, 자유는 영원히 공짜가 아니다.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의 승객들처럼 절망적인 순간에도 영웅적인 저항을 통해 더 큰 국가적 피해를 막아낸 희생은, 공동체와 자유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 때로는 개인이 치러야 하는 피와 희생 위에 세워진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마무리 교훈]

9.11 테러는 마치 정교하게 작동하던 시계의 핵심 톱니바퀴가 갑자기 파손된 사건과 같았다. 

시계 자체는 견고했지만, 예측 불가능한 외부 충격과 내부 톱니바퀴 (정보 당국) 사이의 협력 부재라는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과실이 맞물려, 시계의 심장 (WTC)을 멈추게 만들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진정한 안보란 외부에 대한 막강한 무력이 아니라, 내부의 투명한 소통과 윤리적 책임, 그리고 시스템의 유연성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2001년 그날의 비극은 "절대로 잊지 말라 (Never Forget)"는 구호와 함께, 우리가 폭력에 맞서는 과정에서 자유와 인간성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성찰해야 함을 경고하고 있다.


이 글은 9/11 위원회 보고서, NIST 등 공신력 있는 기록을 토대로 사실을 우선하며, 서사의 몰입을 위해 일부 장면·대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해석이 갈리는 대목은 (논쟁), 전해 내려오는 증언은 (전승)으로 표기합니다.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와 유가족을 존중하며, 선정적 묘사는 지양합니다. 

오류 제보는 댓글로 남겨 주세요.


9/11 grew from Afghan-war networks into al-Qaeda’s anti-US campaign. 

Despite warnings, CIA–FBI silos and weak aviation security let four hijacked jets strike: AA11/WTC1 08:46, UA175/WTC2 09:03, AA77/Pentagon 09:37; passengers on UA93 revolted; it crashed in PA 10:03. WTC2 fell 09:59, WTC1 10:28; WTC7 collapsed 17:20. 

2,977 victims died; thousands later suffered illness. 

Aftermath: AUMF, PATRIOT Act, TSA/DHS, wars in Afghanistan & Iraq. 

9/11 Commission and NIST cite impact+fire; lessons: share intel, harden systems, safeguard lib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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