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법의 제국’과 보스턴 학살 변호, 그리고 선동방지법까지 (John Adams)


 존 애덤스(John Adams): 법의 제국과 고집스러운 사실들


브레인트리(Braintree, 애덤스의 고향)의 젊은 변호사, 그리고 양심의 무게

1765년, 존 애덤스(John Adams,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훗날 제2대 대통령)는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Massachusetts Bay Colony, 당시 영국령 식민지)의 브레인트리(Braintree)에서 젊은 변호사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는 1735년 10월 30일에 태어났으며,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를 졸업하고 1758년 23세의 나이에 변호사가 된 수재였다. 

당시 식민지 사회는 영국 본토의 인지세법(Stamp Act)과 같은 강압적인 정책으로 인해 들끓고 있었고, 존 애덤스는 이 법에 대한 반대 투쟁에 참여하며 정치 무대에 발을 들였다. 

그는 식민지 저항 진영에 서 있었지만, 급진파(샘 애덤스·서너 편)보다는 한 박자 신중한 노선을 택한 변호사였다.

그는 "정부의 헌법이 자유에서 변질되면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자유는 한번 잃게 되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믿으며 법치주의(Rule of Law)를 숭배했다.


존 애덤스


1770년 3월 5일 밤, 보스턴(Boston, 당시 식민지 저항의 중심지)에서 발생한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은 존 애덤스의 인생과 미국의 법치주의를 영원히 정의하는 사건이 되었다. 

영국군 제29연대 소속 병사들이 군중에게 발포하여 비무장 민간인 5명이 사망했다. 

분노한 시민들과 정치 선동가들은 이를 잔혹한 '학살'로 규정하며, 관련 군인들의 즉각적인 처벌을 요구했다. 

대중의 감정은 끓어올랐고, 선동가들은 영국군 장교들을 가장 악랄한 모습으로 묘사한 왜곡된 이미지와 선택적인 증언을 유포하며, 사실이 무엇이든 그들을 '압제자'로 낙인찍었다.


보스턴 학살 사건


이 격정적인 시기에, 영국군 장교 토머스 프레스톤(Thomas Preston) 대위와 사병 8명이 기소되었으나, 누구도 이들의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이때, 존 애덤스가 나섰다.

그의 아내 애비게일 애덤스(Abigail Adams, 존 애덤스의 현명한 반려자)는 브레인트리의 집에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깊은 충격에 빠졌다.


존 애덤스는 법정 앞에서, 폭동을 일으키려는 군중과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동료들의 시선 속에서, 그의 경력과 평판을 걸고 있었다. 

그는 배심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는 지금 자유와 재산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고 있지만, 만약 우리가 '법을 훼손한다면'(cut up the law), 나머지 모든 것은 거의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법의 규칙은 그것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에 관계없이 보편적으로 알려져야 합니다."

그는 식민지 대중이 영국군에 분노해 있더라도, ‘법은 그 순간의 정치와는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이란 고집스러운 것입니다(Facts are stubborn things). 우리의 소망이 어떠하든, 우리의 성향이 어떠하든, 우리의 열정이 얼마나 들어갔든, 그것들은 사실과 증거를 뒤집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애덤스는 법치(Rule of Law)의 핵심은 '공정하고 냉철하게 적용되는 규칙'에 있으며, 군인들이 실제로 위험에 처했는지 여부보다, 총격을 가할 만한 '위험에 처했다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믿었다면, 이는 정당방위(self-defense)로 간주되거나 최소한 변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려움은 대부분의 정부가 설립되는 기초가 된다"는 그의 정치적 격언처럼, 당시 보스턴을 지배했던 두려움과 분노를 법의 이성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기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8명의 피고 중 6명이 무죄를 선고받았고, 군중에게 직접 발포한 2명은 경감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가벼운 처벌(엄지손가락에 낙인)을 받았다.


이 판결은 보스턴을 폭동으로 몰아넣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미국 혁명의 특징이 되었다. 

미국 혁명은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과 달리, '법의 제국(an Empire of Laws)'을 옹호하는 혁명으로 기억되었다. 

"미국에서는 법이 왕이다"라는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의 유명한 선언처럼, 혁명가들조차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법적 권리를 훼손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존 애덤스는 이 재판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공화국은 "인간의 제국이 아닌, 법의 제국"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확고히 다졌다.


헌법의 설계, 가족의 희생, 그리고 전염병의 그림자

보스턴 학살 사건 이후 존 애덤스는 독립을 향한 혁명의 물결에 깊숙이 뛰어들었다. 

그는 법률가로서의 지성과 통찰력을 발휘하여 독립 후 신생국가가 갖춰야 할 정부 형태를 설계하는 데 몰두했다. 

1776년 대륙회의에 있으면서 여러 식민지가 새 헌법을 어떻게 짜야 하는지 물어오자 『정부에 대한 고찰(Thoughts on Government)』을 썼고, 매사추세츠 주헌법 초안에는 1779년에 본격 참여했다.


그의 정치 철학은 "행복이 정부의 목적이고(happiness is the end of government), 동의가 수단이며(consent the means), 인민의 주권(sovereignty of the people)이 기초"라는 원칙에 기반했다.

그는 정치를 "사회적 행복의 과학(the divine science of politicks is the science of social happiness)"이라고 정의하며, 사회의 축복은 오직 정부의 헌법 구조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애덤스는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의 "어떤 정부 형태이든 바보들이나 다투게 하라, 가장 잘 운영되는 정부가 최고이다"라는 말은 "가장 잘못된 주장(Nothing can be more fallacious than this)"이라고 반박하며, 인간의 역사와 본성상 어떤 정부 형태는 다른 형태보다 잘 운영되도록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즉, 정부의 구조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한 최고의 정부 형태는 공화정(Republic)이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이 한곳에 집중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단원제 의회(Single Assembly)는 "개인의 악덕, 어리석음, 나약함(vices, follies and frailties of an individual)"에 취약하여 성급하고 터무니없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애덤스는 권력 분립(Separation of Powers)이 필수적이며, 특히 입법부 자체를 복합적(more complex)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하원 (Representative Assembly): 인민의 "축소된 정확한 초상화(in miniature, an exact portrait of the people at large)"가 되어 그들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추론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2. 상원 (Council): 이는 하원과 행정부라는 "두 극단적인 가지 사이의 중재자(a mediator between the two extreme branches)"로서 기능해야 하며, 입법부에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판단(independent exercise of its judgment)을 행사할 수 있어야 했다.

3. 사법부 (Judiciary): 법관(Judges)들은 "법에 대한 학식과 경험"을 갖추어야 하며, "모범적인 도덕성, 뛰어난 인내심, 평온함, 냉정함, 집중력"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법부가 다른 두 권력을 견제할 수 있도록, 그들의 직위는 "선행을 지속하는 동안(during good behaviour)" 유지되는 종신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모든 선출직에 연례 선거(annual elections)가 필요함을 강조하며, "연례 선거가 끝나는 곳에서 노예 제도가 시작된다(Where annual elections end, there slavery begins)"는 불멸의 경구를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 사상은 훗날 매사추세츠주 헌법과 미합중국 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벙커 힐 전투와 애비게일의 공포

1775년 6월, 애덤스가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대륙회의가 열린 곳)에서 헌법적 논의에 몰두할 때, 그의 고향 근처에서는 독립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6월 17일, 벙커 힐 전투(Battle of Bunker Hill)가 발발했고, 애비게일은 브레인트리에서 이 모든 것을 직접 목격했다.

애비게일은 존에게 보낸 편지(1775년 6월 18~20일)에서 그날의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여보, 어쩌면 이 결정적인 날(The Decisive Day)이 아메리카의 운명이 달린 날일지도 모릅니다. 터질 듯한 제 심장이 펜으로나마 터져 나와야 할 것 같아요. 우리의 소중한 친구 조셉 워렌(Dr. Warren, 의사이자 지도자) 박사가 더 이상 없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어요. '교수대에서 치욕스럽게 죽는 것보다 전장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더군요. 우리에게는 큰 손실입니다"

그녀는 전투 당시 찰스타운(Charlestown, 보스턴 인근 도시)이 잿더미가 되었다고 전하며, "끊임없는 대포 소리는 너무나 괴로워서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이 공포는 어린 아들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훗날 제6대 대통령)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는 훗날(1846년) 조셉 스터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제 눈으로 그 불길(fires of Charlestown)을 보았고, 벙커 힐 전투에서 영국 여왕의 천둥 소리를 들었으며, 아버님의 친구였던 워렌 박사의 죽음에 대한 어머니의 눈물과 저의 눈물을 섞었습니다"

애비게일은 전쟁으로 인해 "평온하고 조용한 밤"이 사라졌으며, 이 모든 것을 '한 드럼통의 한 방울(a Drop in the Bucket)'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고통을 견디는 사람들의 정신력을 높이 평가했다.


미국의 독립전쟁


천연두와의 사투: 어둠 속을 걷는 역병

전쟁의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천연두(Smallpox)였다. 

존 애덤스는 천연두가 "영국군, 캐나다인, 인디언을 합친 것보다 10배나 더 무서운 것"이며, 적의 칼에 한 명이 죽을 때 질병으로 인해 열 명이 죽었다고 탄식했다. 

전쟁은 외과적 부상을 남겼지만, 역병은 군대 전체의 사기를 꺾고 조직을 무너뜨렸다.


1776년 7월, 애비게일은 어린 네 자녀(존 퀸시, 나비, 찰스, 토미)의 안전을 위해 위험천만한 인두법(Inoculation, 천연두 예방접종)을 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인두법은 대중의 반대가 심했고, 질병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조심스럽게 시행되었으나, 병사들이 비밀리에 접종하고 종이 화폐(paper currency)를 통해 전염병이 확산되자 그녀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애비게일은 편지에서 자신의 결정을 존에게 알렸다.

"저는 당신의 뜻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회복만이 당신에게 그만한 기쁨을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안전(safety)이란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보스턴의 숙모 집으로 가서 격리 생활을 했다. 

그들은 침구, 심지어 소까지 끌고 와 임시 살림을 차렸고, 총 17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함께 생활했다.


애비게일 애덤스


인두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막내 찰스(Charles)와 토미(Tommy)는 접종 후에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애비게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비(Nabby)는 처음 접종 후 증상이 미미하여 애비게일이 다시 접종을 요청했고, 두 번째 접종 후 500개가 넘는 수두가 돋아났다. 

그녀는 "이 불확실한 일(doubtful Buisness)은 우리를 훨씬 더 오래 붙잡아 둘 것이기에 매우 불쾌합니다" 

그녀는 이 역병을 구약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어둠 속을 걷는 역병(Tis a pestilence that walketh in Darkness)"이라고 표현했다.


존 애덤스는 필라델피아에서 공화국 헌법을 설계하는 동시에, 멀리 떨어진 가족의 생사를 걱정하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이러한 불확실성, 의혹, 불안 상태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가치 있고, 현명한 친구(애비게일)와 내 모든 자녀들에 대해 염려하고 있습니다... 수천 명의 생명과 수백만 명의 자유가 우리 가족의 건강만큼이나 유예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내와 네 아이의 안전보다 "1,000 기니(Guineas, 고액의 화폐)"도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하며,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이처럼 미국의 독립이라는 위대한 업적 뒤에는, '미신과 독단주의'가 아닌 과학적 처방(인두법)을 통해 가족의 생명을 지키려 했던 애덤스 가문의 숭고한 생활적 희생이 숨어 있었다.


권력의 딜레마, 스캔들, 그리고 법치주의의 과실

1789년, 존 애덤스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초대 대통령) 행정부의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부통령 임기 동안 그는 권력 분립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공화정을 이끌 준비를 했다. 

1797년, 그는 치열한 선거 끝에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공사 중이던 백악관(White House)에 최초로 입주한 대통령이 되었다.


백악관 공식 초상화 존 애덤스


그러나 당시 제도에 따라 득표수 2위였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훗날 제3대 대통령)이 그의 부통령이 되었는데, 이는 비극적인 정치적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애덤스는 연방주의자(Federalist)로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통해 상공업과 금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지지 기반은 동북부 해안의 자본가와 채권자들이었다. 

반면 제퍼슨은 철저한 반연방주의자/공화파(Republican)의 지도자로서 지방정부의 권한을 중시하고, 최소한의 군대, 농업 진흥,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이들의 이념적 대립은 미국에 정당 시스템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XYZ 스캔들과 유사전쟁 (Quasi-War)

애덤스 정권은 취임 초부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외교적 긴장이라는 시련을 겪었다. 

프랑스는 미국이 영국과 제이 조약(Jay Treaty)을 맺자, 1778년의 미불 동맹 조약을 폐기한 것으로 간주하고 외교적인 보복을 가했다.


1797년, 애덤스는 관계 개선을 위해 프랑스에 특사 3명을 보냈다. 

하지만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Talleyrand)이 보낸 세 명의 협상 대표(암호명 X, Y, Z)는 1778년 동맹 조약 폐기를 조건으로 거액의 뇌물과 차관을 요구했다. 

이 XYZ 사건이 대중에게 폭로되자 미국 전역은 프랑스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다.


XYZ사건을 풍자한 영국삽화. 프랑스남성에게 약탈당하는 미국(여성)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을 비롯한 친영반불 성향의 연방주의자들은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주장했고, 애덤스는 1798년에 ‘해군성(Department of the Navy)’을 신설해 기존에 운용되던 해군을 크게 확충하고, 프랑스와의 유사전쟁에 대비했다.


선동방지법(Sedition Acts)

프랑스에 대한 전쟁 공포와 국내 정치적 불안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존 애덤스는 자신의 정치 경력에 지울 수 없는 오점(과실)을 남기는 법안에 서명했다. 

바로 외국인법(Alien Acts)과 선동방지법(Sedition Acts)이다.


이 법들은 프랑스 세력에 협조적인 외국인들을 처벌하고 간첩 행위를 막는다는 구실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선동방지법의 실질적인 목적은 연방정부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선동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었으나, 그 정의가 애매모호하여 결국 연방정부를 비방하거나 중상하는 공화파 언론인들의 입과 귀를 막는 비민주적인 도구로 악용되었다. 

수십 명의 언론인이 이 법에 따라 기소되었다.


제퍼슨을 포함한 공화파 세력은 이 법에 강력히 반발했다. 

이 법은 애덤스 자신이 주장했던 법치주의, 즉 모든 이에게 공정하게 적용되는 '법의 제국'의 원칙을 스스로 훼손한 행위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존 애덤스가 남긴 명언과도 정면으로 충돌했다.

"권력은 부패하기 때문에, 지위의 중요도가 높아짐에 따라 도덕적 권위와 도덕적 특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도 높아지게 된다" 

대통령이라는 지위가 높아질수록 그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기준과 법치에 대한 엄격한 준수가 절실했지만, 그는 공포(Fear)와 당파적 이해관계에 굴복하여 법의 정의를 왜곡했던 것이다.


결국 애덤스는 연방파 동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의 유사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1800년 몰트퐁텐 조약(Treaty of Mortefontaine 적대행위중단)을 체결했고, 이로 인해 연방파 내부의 지지를 잃었다. 


1800년 9월 30일 빅터-장 아담이 모르트퐁텐 조약에 서명


그는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하고, 정적인 제퍼슨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제퍼슨은 자신의 승리를 '1800년 혁명'이라고 부르며 연방파 시대의 종식을 선언했다. 

애덤스는 제퍼슨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고 워싱턴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치적 앙금을 남겼다.


하지만 퇴임 직전, 애덤스는 연방파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수를 두었다. 

그는 연방파의 기둥이었던 존 마셜(John Marshall)을 연방 대법원장(Chief Justice)에 임명했다. 

마셜은 훗날 사법 심사(Judicial Review)의 권한을 확립하여 (마베리 대 매디슨 판결, 1803년), 행정부와 입법부를 견제하는 사법부의 위상을 확립함으로써, 애덤스가 평생을 바쳤던 삼권 분립(Separation of Powers)의 토대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원한 맞수의 화해, 인간의 생각은 해방되어야 한다

존 애덤스는 연임 실패 후 고향 브레인트리로 돌아가 25년 동안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만년에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애덤스와 제퍼슨은 서로를 향한 정치적 공격과 반목으로 오랫동안 외면하며 지냈지만, 1812년 1월 1일, 존 애덤스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애덤스는 제퍼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자네와 나는 서로를 이해시킬 때까지 죽어서는 안 되네".

이후 두 사람은 사망할 때까지 14년 동안 편지를 교환하며, 정치, 철학, 문학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깊은 토론을 이어갔다. 

제퍼슨은 여전히 애덤스의 시대를 '개혁의 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미 연방(US Federal Union)에 대한 애정만은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의 서신은 현대 미국 정치사상의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는 평생에 걸쳐 다음과 같은 신념을 실천했다.

"나는 내 아들에게 수학과 철학을 공부할 자유를 부여하기 위해, 정치와 전쟁을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건국의 아버지 세대가 전쟁과 헌법 제정이라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다음 세대가 평화 속에서 지성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1826년 7월 4일. 

미국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지 정확히 50주년이 되는 날. 

90세의 노인이 된 존 애덤스는 눈을 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음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토머스 제퍼슨은 아직 살아있는데(Thomas Jefferson still survives)..."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위대한 정적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이미 그보다 몇 시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두 위대한 창업자는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날, 같은 날에 함께 혁명의 무대에서 내려왔다.


후대의 평가와 문화적 영향

존 애덤스는 법치주의의 수호자이자, 공화정 정부 구조(양원제, 권력 분립)의 가장 중요한 설계자로 평가받는다. 

특히 보스턴 학살 사건에서의 변호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미국 사법 시스템의 근간을 세운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백악관에 입주한 최초의 대통령이었으며, 아들 존 퀸시 애덤스를 제6대 대통령으로 배출함으로써 미국 최초의 부자(父子)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 중 선동방지법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한 권력 남용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가장 큰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는 그가 주장했던 '법의 제국'과 '도덕적 권위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현실 정치의 불안정 앞에서는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교훈이 되었다.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의 정치적 대립(중앙집권 vs. 지방분권)은 연방파와 공화파라는 최초의 정당 시스템을 탄생시키며, 현대 미국 정치의 영원한 긴장 관계와 이념적 기틀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자유로운 생각의 해방

존 애덤스의 생애는 위대한 이상과 인간적 결함이 공존하는 복잡한 서사시입니다. 

그는 왕이 아닌 법(Law is King)이 통치하는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지만, 정작 자신이 권좌에 올랐을 때는 공포와 당파적 압력에 굴복하여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가장 강력한 유산은 법적 구조나 정치적 성과를 넘어선, 인간 정신의 해방에 대한 외침이었습니다.

애덤스는 독단과 미신이 난무하던 시대에 맞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줘라(Let the human mind loose). 그래야만 하며 그렇게 될 것이다. 미신이나 독단주의는 사고를 제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법의 규칙이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그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인간의 마음이 자유롭고 이성적이지 않다면 결국 독재로 흐르게 된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애덤스와 제퍼슨이 죽음을 앞두고 화해할 수 있었던 이유도, 결국 서로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상대방의 자유로운 생각을 존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법의 제국은 단지 제도나 규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대립 속에서도 상대의 지성과 도덕성을 신뢰하고 인정하는 '해방된 생각'의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되는 영원한 과제임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편지·공문서·당대 신문·회고록)를 토대로 존 애덤스(John Adams)의 생애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보스턴 학살 변호, 『정부에 대한 고찰』, 대통령 시기의 외교·치안법(선동방지법) 문제 등 역사적으로 논쟁이 있는 대목은 당대의 정치 상황과 사료의 시각 차이가 있음을 전제로 읽어야 합니다. 

일부 장면·대사는 극적 이해를 돕기 위한 각색이므로, 학술 인용 시에는 원사료를 다시 대조해 주세요.


This article narrates the life of John Adams, the American lawyer and second president, highlighting his defense of British soldiers after the Boston Massacre, his theory of an empire of laws, his role in shaping republican government and separation of powers, his family’s sacrifices during war and smallpox, his missteps with the Alien and Sedition Acts, and his late reconciliation with Thomas Jefferson. 

It shows how his quest for lawful liberty met fear and faction, yet trusted reasoned deb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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