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미사일 위기: 13일간의 핵전쟁
냉전의 그림자, 그리고 운명의 발견 (1962년 10월 초)
1962년, 전 세계는 두 거인, 미국(USA)과 소련(USSR)의 냉전 체제라는 얼음장 같은 대결 구도 아래 놓여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충돌(자유 민주주의 vs. 공산주의)은 단순한 정치 싸움을 넘어,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핵무기 경쟁으로 치달았다.
특히 당시 핵전력의 불균형은 심각했는데, 미국이 소련보다 핵탄두 보유 비율이 대략 9 대 1로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추정)
미국은 소련의 접경 지역인 터키(튀르키예)와 이탈리아에 중거리 미사일인 주피터 미사일(Jupiter missiles)을 배치함으로써 소련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크렘린(Kremlin, 소련 최고 통치 기관).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는 서방의 핵무기 포위에 깊은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전략적 계산은 단순하면서도 위험했다.
"미국은 우리나라를 군사 기지로 포위하고 핵무기로 위협하면서, 이제 자신들을 겨눈 적의 미사일을 대면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 자신이 하던 처방을 그들에게 조금 줬을 뿐입니다."
흐루쇼프의 목표는 이 전력 불균형을 해소하고(비록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더라도)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핵탄두 수를 2~3배 늘리는 것이었다.
그 타격 지점은 미국 본토에서 불과 90마일(약 145km) 떨어진 섬나라, 쿠바(Cuba)였다.
![]() |
| 피델 카스트로 혁명 직후 초상 |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쿠바 혁명 지도자)가 1959년 친미 정권을 전복하고 사회주의 노선을 취한 이래 미국의 끊임없는 적대 정책에 시달렸다.
특히 1961년 피그스만 침공 작전(Bay of Pigs)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카스트로 암살을 계속 시도했다.
카스트로는 혁명을 제거하려는 미국의 몰두가 계속되는 한, 10월 위기(쿠바 미사일 위기)는 피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미국의 대쿠바 적대 정책이 미사일 위기의 근본적 배경이었다.
쿠바는 자신의 체제 유지를 위해 소련의 핵우산이 절실했고, 소련은 쿠바에 중거리 탄도미사일(MRBM, 사거리 2,000km)인 R-12 드비나 (R-12 Dvina)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 |
| R-12(SS-4) 중거리 탄도미사일 실물 |
워싱턴, 백악관(White House, 미국 대통령 집무실).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당시 미국 대통령)는 젊고 국제 경험이 일천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10월 14일, 미국의 고공정찰기 U-2기가 쿠바 상공을 정찰하다가 충격적인 사진을 찍어왔다.
사진 속에는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 핵미사일 기지가 건설 중인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핵전쟁의 위기가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케네디 행정부는 인지하게 되었다.
![]() |
| 쿠바 산크리스토발 인근 소련 MRBM 설치 정황 U-2 항공사진 |
케네디 대통령은 즉각 ExComm(Executive Committee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를 소집했다.
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그의 동생이자 법무장관인 로버트 F. 케네디(Robert F. Kennedy, RFK)는 당시 상황을 두고 "나 개인의 인생뿐만 아니라 미국인과 소련인, 더 나아가 전 세계인의 삶의 걸려 있었다"고 기록했다.
해상차단과 군부 강경파의 폭주
1. 핵전쟁 확률 99%의 도마 위
ExComm의 회의는 냉정함과 광기 사이를 오갔다.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지자마자 6개 대안을 검토했다.
소련과 쿠바에 대한 경고, 미사일 기지 폭격, 쿠바 침공, 그리고 해상 봉쇄 등.
![]() |
| 백악관 ExComm 회의 전경 |
강경파의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미 공군 참모총장)는 과감한 선제공격(surgical strike)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르메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쿄 대공습을 주도했던 인물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년 개봉)에서 신랄하게 풍자된 전쟁광 '터짓슨'의 모델이 되었다.
![]() |
| 커티스 르메이 |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당시 국방장관)는 르메이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섰다.
맥나마라와 로버트 케네디(RFK)는 군부가 주장하는 전면적인 군사행동이 불러올 참화를 두려워했다.
당시 미국 정보 당국은 쿠바 내 소련군 병력과 핵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으나,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소련은 이미 현장 지휘관이 사용할 수 있는 9개의 전술핵무기를 쿠바에 배치해 둔 상태였다.(위기당시 100개 이상 배치될 예정이었다.)
(르메이) "대통령 각하, 저희 공군의 정밀 타격이면 미사일 기지들은 잿더미가 될 것입니다! 주저할 시간이 없습니다. 소련은 눈을 깜빡일 것입니다!"
(맥나마라) "장군, 당신은 지금 핵전쟁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침공했다면, 핵전쟁이 터질 가능성이 99%입니다! 소련이 쿠바에 이미 배치한 전술핵의 규모를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르메이 장군을 포함한 호전적인 인물들의 준동을 막아야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군사적 해법 대신 외교적 선택의 여지를 남기는 해상 차단(Maritime Quarantine) 조치를 선택했다.
이는 전쟁 상태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봉쇄' 대신 '차단(Quarantin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해상 봉쇄에 해당했다.
이는 공습에 비해 상대적 위험을 최소화하고, 확전을 피하며, 결정권을 흐루쇼프에게 넘기는 효과가 있었다.
![]() |
| 쿠바 해상 봉쇄 |
2. 위기의 공표와 군사력의 과시 (10월 22일)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이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며, 쿠바에 대한 해상 격리 명령을 공식 발표했다.
미국은 핵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존 F. 케네디) "우리는 이 공격용 무기들이 쿠바에 배치되는 것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을 것입니다. 서방 측 어느 국가든지 쿠바로부터의 미사일 공격은 미국에 대한 소련의 공격으로 간주하여 대량 보복 조치를 시행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했다.
전략공군사령부(SAC)는 전략폭격기를 15분 이내 비상출격대기 태세로 전환했고, B-52 중(heavy) 폭격기는 24시간 비행 대기에 들어갔다. (DEFCON 2)
미 해군은 항공모함 8척을 포함한 46여 척 이상의 함대를 동원하여 쿠바를 완전히 포위했다.
이 해상 차단 작전은 단순한 경제적 압박을 넘어, 소련 최고 정치 지도자인 흐루쇼프에게 직접 심리적 압박을 주어 미국의 강력한 재래식 전쟁 수행 의지를 표명하는 수단이었다.
![]() |
| 케네디 대통령 TV연설 |
3. 용어의 탄생: '핫라인'의 기원
이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양국 지도자들은 상대방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신속한 수단이 부재하다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이 위기를 겪은 후, 오해로 인한 우발적인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미-소 양국 간에 비상용 직통 통신선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외교에서 소통 창구를 뜻하는 대명사가 된 '핫라인(hot line)'의 기원이다.
이 단어는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대중화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중 문화 속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 핫라인은 전화기였던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현실에서의 핫라인은 말이 잘못 해석될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텍스트로만 의사소통을 주고받는 텔레타이프(Teletype)였다.
'핫라인=전화기'라는 공식은 1964년 개봉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관계자들이 전화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대중들에게 심어진 인식이었다.
![]() |
| NSA 국립 암호 박물관 에 전시된 핫라인의 동독 T63-SU12 텔레프린터 |
핵전쟁 일보 직전의 24시간 (10월 27일)
1. 치킨 게임의 절정
10월 24일, 미국의 해상 차단선이 쿠바로부터 50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발효되자, 핵미사일을 싣고 접근하던 소련의 화물선들이 선수를 돌리면서 위기가 진정되는 듯했다.
미국이 단호하게 대응하자 소련이 무릎을 꿇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양측 모두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타협과 양보의 과정이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이 상황은 서로 물러서지 않고 극한의 위험을 감수하며 상대방의 굴복을 유도하는 '치킨 게임(Chicken Game)'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하지만 10월 27일 토요일,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 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순간으로 평가받는다.
사건 1: U-2 격추의 과실과 통제 상실
쿠바 상공에서 정찰 중이던 미군 U-2기 1대가 소련군 대공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어 조종사가 사망했다.
이 사건은 쿠바에 있는 소련군 지휘관이 상부의 허가 없이 독단적으로 발포한 것으로, 상황이 중앙 통제를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맥나마라) "대통령 각하, 그들이 우리 정찰기를 격추했습니다! 이것은 선전포고와 다름없습니다. 즉각적인 보복 공격을 명령해야 합니다!"
(케네디) "진정하십시오, 장관. 우리는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군사적 충돌이 외교적 해결의 문을 완전히 닫게 해서는 안 됩니다." (케네디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는 합리적 추론을 했기 때문에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 |
| 루돌프 앤더슨 소령. 쿠바 상공에서 격추되어 전사 |
게다가 같은 날, 북극 지역에서 통상 정찰 비행을 하던 또 다른 U-2기가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으로 진입했다.
만약 이 기체가 핵무장 폭격기로 오인되어 격추되었다면, 전쟁은 알래스카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한국 전쟁 베테랑 조종사 찰스 몰츠비(Charles Maultsby, U-2기 조종사)가 필사적인 활강 비행 끝에 무사히 귀환했다.
이는 개인의 노력과 행운이 핵전쟁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건 2: 심해 속 핵전쟁의 문턱 (B-59 잠수함 사건)
쿠바 해역에서는 더욱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다.
핵탄두(15 kiloton)를 장착한 어뢰로 무장한 소련의 폭스트롯급 잠수함 B-59를 포함한 4척이 미군 구축함과 대치하고 있었다.
미 해군은 소련 잠수함이 핵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소량의 폭약(폭뢰) 3~4발을 투하하여 잠수함을 부상시키려 했다.
모스크바는 이 사실을 잠수함에 통보하지 않았고, 통신 장비 고장으로 수면 위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던 B-59의 사비츠키 함장(Savitsky, B-59 함장)은 이미 미국과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사비츠키 함장은 핵 어뢰 조립 및 발사를 명령했지만, 아르키포프(Arkhipov, 어뢰통제장교)의 설득으로 핵 어뢰는 발사되지 않았다.
당시 소련 잠수함의 핵 어뢰 발사 규정은 3명의 고위 장교 동의가 필요했는데, 사비츠키와 정치 장교 2명 중 1명은 찬성했지만 아르키포프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는 핵전쟁 직전, 'Two-Man Rule(두 장교 규칙)'의 통제 시스템과 아르키포프의 이성적인 판단이 인류를 구원한 행운의 순간이었다.
![]() |
| 카리브해에서 부상한 소련 B-59 폭스트롯급 잠수함 |
2. 비밀 외교와 지도자의 고뇌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케네디와 흐루쇼프 모두 핵전쟁만은 피해야 한다는 '핵전쟁 불용'이라는 마지노선을 공유하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강경파 르메이의 폭주를 맥나마라 국방장관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저지할 수 있었다.
결국 로버트 케네디(RFK)가 비밀 협상 채널을 맡았다.
그는 아나톨리 F. 도브리닌(Anatoly F. Dobrynin, 소련 주재 미국 대사)을 만났다.
(로버트 케네디) "서기장께 우리의 결의를 전달하십시오. 우리는 핵무장을 한 쿠바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타협을 원합니다."
(도브리닌) "타협이라니요? 서기장께서는 터키에 배치된 미국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를 요구하십니다. 이 위협이 존재하는 한, 쿠바만의 철수는 불가능합니다."
로버트 케네디는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쿠바 미사일 철수 대 터키 주피터 미사일 철수'의 비밀 거래(Secret Deal)를 제안했다.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터키와 이탈리아에 배치된 주피터 미사일을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만, 이 약속은 절대 공개해서는 안 되는 구두 합의여야 했다.
이 거래는 외교적 해법의 핵심이었고, 흐루쇼프가 체면을 유지하며 미사일을 철수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 |
| 수소폭탄 위에 앉아 팔씨름을 하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존 F. 케네디 |
타협과 은폐, 그리고 후대의 교훈
1. 위기의 종결 (10월 28일)
10월 28일 일요일 아침, 세계는 숨을 죽였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바 미사일 기지 철수를 발표하며 한발 물러났다.
소련의 미사일은 유엔의 검증 하에 해체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미국은 11월 20일 쿠바에 대한 해상 차단 명령을 해제했다.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소 양국의 타협과 양보를 통해, 그리고 두 지도자의 이성적 자제 덕분에 평화적으로 종결되었다.
![]() |
| 니키타 흐루쇼프 1962년 초상 |
2. JFK의 대대적인 은폐 공작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 과정에는 심각한 정치적 과실과 도덕적 비판을 받아야 할 부분이 존재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 위기를 해결한 핵심인 '터키 미사일 교환' 비밀 거래를 25년 이상 은폐하기로 결심했다.
정치적 명성을 위한 거짓말과 조작
케네디가 이 거래를 은폐한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 명성을 보호하고, 터키가 가입한 나토(NATO) 동맹의 미국 지도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전직 대통령들(아이젠하워, 트루먼, 후버)에게 전화하여 터키 미사일 철수 요구를 "거부했다"고 거짓 보고했다.
특히 소련 대사 도브리닌이 구두 합의를 서면으로 확인하려 하자, 케네디는 서한을 돌려주며 "그러한 편지의 출현은 미래의 나의 정치 경력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문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외교적 해법을 제시한 인물에 대한 비방
더욱 비판받아야 할 점은, 케네디 행정부가 외교적 해결을 처음 촉구했던 유엔 대사 애들레이 스티븐슨(Adlai Stevenson, 유엔 대사)을 희생양으로 삼아 비방했다는 것이다.
케네디의 측근들은 언론 기사를 통해 스티븐슨이 미사일 교환을 원했으며, 이는 '뮌헨 회담'과 같은 유화책이라고 비난하며 그를 '유약하다(soft)'고 묘사했다.
이 기사는 미사일 위기가 '케네디가 소련과의 핵 치킨 게임에서 단호하게 승리한' 결과이며, 흐루쇼프가 '눈을 깜빡인' 단독 승리 서사를 확립했다.
이는 대중과 역사학계에 오랫동안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고, 진실은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밝혀졌다.
로버트 케네디가 위기에 대해 기록한 책 《13일(Thirteen Days)》 (사후 출판됨)에서도 터키 미사일 거래에 대한 구절들은 편집되어 생략되었다.
이러한 은폐와 조작은 최고 지도부가 국가의 안전과 직결된 중요한 외교적 타협을 국민과 동맹에게 숨겼으며, 심지어 이성적인 판단을 했던 내부 인사를 정치적으로 공격했다는 점에서 강하게 비판받아 마땅하다.
위기 시 리더의 역할은 강경파와 온건파의 의견을 균형 있게 조율하는 것이 중요함에도, 케네디는 국내 정치적 이익(벼랑 끝 외교 승리)을 위해 진실을 희생했다.
3. 후대의 평가와 교훈
쿠바 미사일 위기는 냉전 시대 핵전쟁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사건으로 철저히 연구되어 왔다.
이 사건이 핵 재앙으로 번지지 않은 것은 지도자들의 신중한 외교적 판단뿐만 아니라, 우연적인 행운이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평가이다.
흔히 위기 해결책으로 '비타협적 단호함'이 거론되지만, 실제 해법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타협과 양보였다.
흐루쇼프는 "우리는 그들 자신이 하던 처방을 그들에게 조금 줬을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미국의 터키 미사일 배치에 대한 소련의 위협 인식을 드러냈다.
게임 이론의 대가 토머스 셸링(Thomas Schelling, 노벨상 수상자)은 이 위기를 분석하며 "때로는 타협이 전면적인 승리를 추구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위기관리의 실패를 교훈 삼아, 미-소는 1963년 6월 핫라인을 설치했다.
이는 지도부 사이에 비밀스럽고 신뢰할 수 있으며 안정적인 통신 채널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한, 위기 시에는 통상적인 군사 행동(예: 미국의 U-2기 정찰 비행이나 탄도미사일 실험 발사 등)이 상대방에게 우발적인 오해를 불러일으켜 핵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으므로, 세부 사항에 대한 통제가 중요함을 깨달았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현대의 핵 위기(예: 북핵 문제)나 강대국 간의 전략적 경쟁(예: 미-중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지도자들은 위기를 제로섬 게임으로 보지 않고, 상대방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가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케네디가 흐루쇼프의 체면을 살려주었듯이, 섬세한 위기 관리는 필요하다.
흐루쇼프는 1962년 11월 케네디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번에는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데 성공했지만 다음에는 단단히 묶인 매듭을 안전하게 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새롭고 위대한 노력을 할 차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풀고자 하는 매듭은 거의 한계에 다다를 만큼 단단히 묶여 있습니다."
-----------------------------------------------------------------------------------------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인간의 오만과 오판이 전 인류를 파멸로 이끌 수 있음을 보여준 극적인 사례입니다.
이 비극적인 충돌을 막은 것은 "단호함"이 아니라 "타협" 이었으며, 최고 지도자의 합리적인 추론과 상대의 입장에 서보는 공감적 리더십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적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자아성찰의 중요성: 핵무기를 가진 적대국 간의 관계는 '공포의 균형(MAD)'을 가져온다는 낙관적 추론과 달리, 끊임없는 군비 경쟁과 우발적 핵전쟁의 위험성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지도자는 상대의 도발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자국의 행동(예: 타국에 미사일 배치)이 상대에게 어떤 위협으로 다가오는지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2. 통제의 실패가 곧 재앙: 핵 위기 상황에서는 컴퓨터 오작동이나 인간의 조작 실수로 인한 허위 경보나, 현장 지휘관의 독단적인 판단(U-2 격추, B-59 사건)이 대규모 확전의 도화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시스템적 안정성과 함께, 위기 시 현장 부대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줍니다.
3. 정치적 이익보다 인류의 생존: 케네디 대통령이 터키 미사일 철수 거래를 은폐하고 외교적 해법을 주장한 인사를 비방했던 행위는, 단기적인 정치적 승리를 위해 장기적인 신뢰 구축과 역사적 진실을 희생시키는 지도자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전면적인 승리를 추구하는 것보다 타협을 택하는 용기와 인류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는 도덕적 결단에서 나옵니다.
결론적으로, 핵 시대의 위기관리란 상대를 압도하는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호 파멸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신뢰와 소통을 확보하고(핫라인), 상대를 굴욕적으로 패배시키지 않으면서(체면 유지),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는(게임 이론) 고도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학술 연구·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일부 장면·대사·심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불확실한 전언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지점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합니다.
인물·지명·용어는 최초 1회 한영 병기하며, 수치·연표는 최신 연구에 따라 소폭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확인된 사실 오류 제보 시 신속히 정정합니다.
In October 1962, U.S. U-2 photos exposed Soviet MRBMs in Cuba, triggering 13 tense days.
Kennedy rejected airstrikes, imposed a naval “quarantine,” and raised SAC to DEFCON 2.
On Oct 27, a U-2 was downed and sub B-59 nearly fired a nuclear torpedo until Arkhipov refused.
A secret deal removed Cuban missiles and later Jupiters in Turkey, plus a U.S. no-invasion pledge.
The crisis ended Oct 28 and led to the 1963 hotline.
.jpg)


%20%EC%A4%91%EA%B1%B0%EB%A6%AC%20%ED%83%84%EB%8F%84%EB%AF%B8%EC%82%AC%EC%9D%BC%20%EC%8B%A4%EB%AC%BC.jpg)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