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톨라 호메이니와 1979 이란 혁명: ‘파키흐의 통치’(벨라야테 파키)·미대사관 인질사태·이란-이라크 전쟁 핵심 정리 (Ruhollah Khomeini)


 혁명의 불꽃, 신정의 그림자: 아야톨라 호메이니, 한 남자가 바꾼 이란의 운명


망명객의 귀환, 테헤란의 하늘을 뒤덮은 환호와 불안

1979년 2월 1일, 15년간의 지독한 망명 생활을 끝낸 루홀라 호메이니를 태운 비행기가 테헤란 상공에 들어섰다. 

창밖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80년 가까운 세월의 풍파를 응축한 듯 독수리처럼 날카로웠다. 

그것은 빼앗겼던 왕국을 되찾은 군주의 시선이었다. 

옆자리의 아들 아흐마드 역시 무거운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 아래, 공항과 그 주변은 인간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군중이 15년 만에 돌아온 이슬람의 지도자를 맞이하기 위해 운집해 있었다.


마침내 비행기 문이 열리고 호메이니가 모습을 드러내자, 군중은 거의 종교적인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맘이 오셨다! 우리의 구원자가 오셨다!"는 외침이 테헤란의 하늘을 뒤덮었다. 

부패와 사치의 화신이었던 팔레비 국왕은 이미 보름 전 국민의 거센 저항에 밀려 이집트로 망명한 뒤였다. 

이란 국민은 호메이니가 아수라장이 된 조국을 재건하고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79년 귀국한 호메이니

그러나 그 희망의 파도 속, 미묘한 불협화음이 감돌았다. 

광적으로 환호하는 인파의 경계를 따라 굳은 표정으로 도열한 혁명수비대원들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고, 군중 속에 섞인 일부 세속주의 지식인들은 서로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이 거대한 환호가 자신들이 꿈꿨던 민주주의가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을 불러올 서곡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이란의 운명을 뒤바꾼 한 남자의 귀환은, 거대한 환호와 함께 다가올 신정 독재와 피의 숙청이라는 짙은 그림자를 동반하고 있었다.


반역자의 탄생

1.1. 피로 물든 유년 시절과 학자의 길

그의 본명은 '세예드 루홀라 모스타파비 무사비 호메이니'였다. 

'사도 무함마드의 후예이자 호메인 출신인 무사비 가문의 모스타파의 아들인 루홀라'. 이름 자체가 그의 혈통과 출신, 운명을 예고하는 하나의 서사였다.


그의 유년 시절은 피의 기억으로 시작되었다. 

그가 갓난아기였을 때, 호메인 마을의 작은 정의는 폭력 앞에 무너졌다. 

지방 지주의 비리를 고발했던 아버지 모스타파가 대낮에 피살당한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린 루홀라의 잠재의식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부패한 권력에 맞선 정의로운 분노, 그리고 그 대가로 찾아온 비극적 죽음. 

이 기억은 훗날 그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철 같은 신념을 갖게 된 원형이었을 것이다. 

정의는 오직 투쟁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는 냉혹한 세계관이 그의 내면에 새겨졌다.


집안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이슬람 율법을 배우며 자란 그는, 시아파의 종교 중심지인 이란의 쿰과 이라크의 성지 나자프에서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며 율법학자로 성장했다. 

1929년, 그는 하디제 사가피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둔 가장이 되었다. 

훗날 냉혹한 혁명 지도자의 모습 이면에 있던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의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 그는 쿰에서 이슬람 율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조용한 학자의 삶을 살았다. 

그의 문하생 중에는 훗날 그의 뒤를 이을 알리 하메네이도 있었다.


이란의 초대 라흐바르이자 독재자 호메이니


1.2. 백색혁명, 샤(Shah)와의 첫 번째 충돌

조용한 학자였던 호메이니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는 팔레비 2세 국왕이 추진한 '백색혁명'이었다. 

이는 이란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급진적인 서구화, 세속화 개혁이었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토지개혁을 통해 막강한 경제적 기반이었던 사원의 토지를 축소하는 정책은 이슬람 보수 세력의 격렬한 분노를 샀다. 

성직자들에게 여성 참정권은 신이 정한 가부장적 질서를 위협하는 것이었고, 토지 개혁은 자신들의 경제적 생명줄을 끊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란 사회는 이미 들끓고 있었다. 

민족주의 성향의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 샤는 노골적인 친미·친서방 노선을 걸었고,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동원한 잔혹한 독재 통치로 국민적 반감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메이니는 샤 정권을 향해 불을 뿜었다. 

그는 대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젊은이들이여, 이슬람의 성자이며 종교전문가인 척하면서 모슬렘을 크게 부패시키고 있는 자들의 머리에서 터번을 찢어 던져버릴 의무를 갖고 있다!" 

그의 불같은 웅변은 대중의 저항에 기름을 부었다. 

그의 비판은 단순히 샤 정권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세속주의를 추구했던 모사데크에 대해서도 "만일 그가 정권을 계속 잡았다면 그는 이슬람에 큰 타격을 주었을 것"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확고한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을 명확히 드러냈다.


서구화 시절의 이란

망명지에서 온 목소리

2.1. 튀르키예에서 이라크로, 그리고 파리로

샤 정권에 대한 그의 거침없는 비판은 결국 15년에 걸친 긴 망명 생활로 이어졌다. 

1964년 11월, 국외로 강제 추방된 그는 튀르키예를 거쳐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 나자프로 향했다. 

그곳에서 13년간 머물며 그는 멈추지 않고 반(反)샤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라크의 정치 지형이 변하면서 그의 입지는 다시 위태로워졌다.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의 실권을 장악하자, 이라크 정부는 시아파 지도자인 그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결국 반왕조 활동을 중단하든지, 아니면 이라크를 떠나라는 압박을 받게 된 그는 주저 없이 프랑스행을 택했다.


1978년 10월, 그는 파리 교외의 작은 마을 노플로샤토에 정착했다. 

망명 생활의 고난은 계속되었다. 

1977년에는 장남 모스타파가 이라크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는데,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샤 정권에 의한 암살설이 파다하게 퍼지며 그의 투쟁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


2.2. '신의 한 수'가 된 망명과 카세트테이프 혁명

역사는 종종 기묘한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그를 침묵시키기 위한 파리 망명은 역설적으로 호메이니에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전까지 중동의 유명인사에 불과했던 그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프랑스의 반체제 지식인들과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핍박받는 민족 지도자'라는 이미지로 포장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세계적인 정치 스타로 떠올랐다.


더 큰 아이러니는 그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 철천지원수였던 팔레비 샤였다는 점이다. 

프랑스 정부가 소란을 일으키는 그를 암살하려 했을 때, 샤는 그를 순교자로 만들 경우 이란 내 저항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을 우려해 이를 막았다.

파리에서 그의 목소리는 그가 혐오했던 서구의 기술을 통해 새로운 날개를 달았다. 

그의 설교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되어 이란의 암시장을 통해 비밀리에 퍼져나갔다. 

크기가 작아 숨기기 쉬웠던 테이프는 국경을 넘어 이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테이프를 튼 작은 가게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의 목소리에 숨죽였고, 그의 메시지는 팔레비 왕조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른바 '카세트테이프 혁명'이었다.


혁명의 격노

3.1. 왕조의 몰락과 이슬람 공화국의 수립

1979년 1월, 국민적 저항에 밀려 샤가 이란을 떠나자 혁명은 급물살을 탔다. 

2월 1일 호메이니가 귀국하자, 샤가 마지막으로 임명한 총리 샤푸르 바흐티아르가 이끄는 정부군과 호메이니 측의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혼란 속에서 결국 정부군은 호메이니에게 항복했고, 2500년 페르시아 군주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그는 곧바로 이슬람 공화국 수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98%라는 압도적인 찬성률이 나왔지만, 그 과정에서 부정선거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1979년 12월, 새로운 헌법이 공포되며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공식 출범했다.


새 헌법의 심장에는 그의 독창적이자 급진적인 통치 철학인 '벨러야테 파키(Velâyat-e Faqih)', 즉 '율법학자의 통치'가 자리 잡았다. 

이는 전통적인 시아파의 '후견' 개념을 국가와 사회 전체를 통치하는 '절대적 후견'으로 급진적으로 확장한 것이었다. 

모든 시아파 율법학자들이 동의하는 보편적 교리가 아닌, 호메이니 개인의 강력한 정치 이론이 국가의 근간이 된 것이다. 

이 사상에 따라, 그는 스스로 종신 최고지도자(라흐바르)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비서이자 최측근이었던 아볼하산 바니사드르를 초대 대통령으로 내세워 권력의 정점을 완성했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 초대 대통령 바니사드르

3.2. 동지에서 적으로: 피의 숙청

외부의 적을 몰아낸 혁명은 곧 내부의 동지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권력을 장악한 호메이니는 자신과 노선을 달리하는 모든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공산주의자, 세속주의자, 온건 이슬람주의자들은 순식간에 '혁명의 적'으로 규정되었다.


혁명 재판소는 팔레비 정권의 고위 관리 600명 이상을 약식 재판으로 총살했다. 

과거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이자 당대의 대(大)아야톨라였던 샤리아트마다리마저 종교 지도자의 정치 개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가택 연금시키는 배신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여성들의 저항은 더욱 참혹하게 짓밟혔다. 

히잡 착용 의무화에 반대하는 여성 시위대를 향해 '창녀', '제국주의 추종자'라는 폭언을 퍼부으며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샤에 맞서 함께 거리에서 싸웠던 바로 그 여성들이 이제는 새로운 정권의 적이 된 비극적 아이러니였다. 

초대 대통령 바니사드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지나친 반미 정책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호메이니는 그를 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여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결국 바니사드르는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혁명의 동지들은 그렇게 적으로 변해갔다.


강요당하는 히잡착용

3.3. "미국은 거대한 사탄이다": 세계를 적으로 돌리다

호메이니의 외교 노선은 극단적인 고립주의였다. 

1979년 11월, 그의 추종 세력인 이슬람 학생들이 주이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미국 외교관들을 인질로 잡은 사건은 그의 반미 노선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444일간 이어진 인질 사태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적은 미국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유럽 국가들, 이스라엘,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거의 모든 주요 국가를 적으로 돌렸다. 

반제국주의와 시아파 이념 수출이라는 명분 아래, 이란은 스스로 세계의 외톨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이러한 외교적 고립은 훗날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이 전 세계적인 지원을 받는 이라크를 상대로 고독한 싸움을 벌이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테헤란에 위치한 주이란 미국 대사관을 넘어가는 이란 학생들

최고지도자의 통치

4.1. 철권 통치와 인권 탄압

호메이니가 이끈 이슬람 공화국은 팔레비 왕조보다 더한 독재와 인권 탄압으로 이란 사회를 수십 년 후퇴시켰다. 

1979–83년 ‘문화대혁명’으로 대학이 대대적으로 폐쇄·정비되며 좌파·세속 교수진이 축출되었다.

1981년 이후 MEK(인민무자헤딘)과 투데당(공산당) 조직이 반정권으로 규정돼 대대적 체포·처형·망명이 이어졌다.

팔레비가 수천 명을 감옥에 넣었다면, 호메이니는 수십만 명을 투옥하고 죽였다.


여성 인권 말살: 여성에 대한 억압은 체제 유지의 핵심 기제였다. 샤의 서구화 정책(unveiling)을 상징적으로 뒤집는 '재베일화(re-veiling)'는 여성의 몸을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제1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팔레비 시절 판사였던 시린 에바디(훗날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혁명 이후 여자는 법관이 될 수 없다는 논리에 따라 비서로 강등당했다. 특히 처녀 정치범에 대한 처형은 반인륜 범죄의 극치였다. 이슬람 율법상 처녀를 죽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을 악용해, 처형 전날 밤 혁명수비대원과 강제로 결혼시켜 강간한 뒤 '이제 처녀가 아니므로 처형할 수 있다'는 끔찍한 꼼수를 부렸다. 만화 『페르세폴리스』는 이 참혹한 국가적 성폭력을 생생하게 고발한다.(논쟁)

정치범 탄압: 그의 정권은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성을 보였다.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인권연맹은 당시 이란 당국이 사형수의 피를 뽑아 부상당한 군인에게 수혈하고 있으며, 일부 정치범은 피를 완전히 짜내는 방식으로 처형당하고 있다고 폭로했다.(논쟁)

소년병 징집: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바시즈'라는 민병대에 소년들을 징집하여 목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천국의 열쇠'를 걸어주고 인간 지뢰 제거에 투입하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


4.2. 전쟁의 광기와 상처

1980년 9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며 8년간의 지옥 같은 전쟁이 시작되었다. 

샤트 알 아랍 수로를 둘러싼 영토 분쟁과,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수출을 막으려는 후세인의 야욕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군사 경험이 전무했던 사담 후세인은 혁명의 혼란으로 이란군이 와해되었을 것이라 오판했다. 

그러나 그의 침공은 호메이니 정권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외부의 적에 맞서 내부 결속을 다지는 역설적인 선물이 되었다.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침략을 '신이 내린 축복'이라 부르며, 전시 상황을 명분으로 국내의 모든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고 정권을 공고히 했다. 

전쟁은 8년간 이어졌지만 양측 모두 엄청난 인명과 경제적 손실만 입은 채 아무런 승리 없이 끝났다.

이 허무한 결과에 호메이니는 깊은 실의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이라크 전쟁 말기 MEK의 ‘포르-에 자베단(영원한 빛)’ 작전 이후, 1988년 교도소 내 집단 심문과 대규모 처형이 단기간에 집중됐다. (논쟁)


4.3. 광신과 실용 사이: 독재자의 모순된 얼굴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자였던 그에게는 의외의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면모도 존재했다.

성전환 수술 허용: 그는 동성애를 사형에 처할 중죄로 다스렸지만, 성 정체성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서는 성전환 수술을 국비로 허용하고 법제화했다. 이는 인권 존중이라기보다는, 성전환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라도 '동성애를 박멸'하려는 이성애규범성의 발로라는 비판적 해석이 지배적이다.

문화유산 보존: 탈레반이나 ISIS가 이교도의 유적을 무참히 파괴했던 것과 달리, 그는 조로아스터교 시절의 고대 페르시아 유적이나 수니파 왕조의 문화재를 파괴하지 않았다. 이슬람 근본주의자였지만, 이란인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강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란-콘트라 사건: '거대한 사탄'이라 비난했던 미국과 비밀리에 무기 거래를 한 '이란-콘트라 사건'은 그의 실용주의적, 혹은 마키아벨리즘적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흑역사다.


4.4. 개인적 일화: 인간 호메이니

철권 독재자의 가면 뒤에는 의외의 인간적인 모습도 있었다.

금욕적 생활: 그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글을 쓰는 등, 평생을 금욕적이고 성실한 생활 태도로 일관했다.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 이탈리아의 유명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는 그의 입체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팔라치의 도발적인 질문에 냉철하게 응수하면서도, '차도르'(이슬람 전통의복) 문제에 대해서는 격분했다. 그러나 인터뷰 말미에 팔라치가 "이 시시하고 고리타분한 걸레조각을 지금 당장 벗어버리겠습니다"라며 차도르를 벗어던지자, 격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다음 날 인터뷰가 재개되었을 때, 그는 그녀의 당돌함에 씨익 웃더니 이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계산된 미소 뒤에 터져 나온 웃음은 그의 복합적인 내면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의 아들 아흐마드는 "아버지를 웃게 만든 건 기자가 처음이오"라고 말할 정도였다.

살만 루시디 사태: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가 출간되었을 때, 그는 처음에 "세상에는 별의별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이슬람권의 반발이 거세지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자, 작가와 출판 관계자 모두를 죽이라는 '파트와(종교적 사형 선고)'를 내리는 냉혹하고 계산적인 모습을 보였다.

축구 금지령 실패: 그는 축구를 '악의 산물'로 여겨 금지하려 했다. 그러나 축구광이었던 국민들은 물론 측근들까지 "축구를 탄압하면 다시 팔라비 2세를 데려올 것"이라며 격렬하게 반발하자, 결국 자신의 뜻을 접어야 했다. 이는 그의 절대 권력에도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전승)


황혼과 끝나지 않은 유산

5.1. 죽음과 계승

1989년 6월 3일, 루홀라 호메이니는 86세의 나이로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천만 명에 달하는 추모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는 등 혼돈 그 자체였다. 

그의 사후에도 이란 사회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의 사후, 이란의 최고지도자 자리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그의 제자 알리 하메네이가 승계했다. 

하메네이는 단순히 칭호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호메이니가 설계한 절대 권력 시스템 그 자체를 상속받았다. 

이란 헌법에 따라 최고지도자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는 물론 군 통수권까지 장악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호메이니의 유산은 한 사람의 후계자가 아닌, 견고한 신정 독재 체제로 이어졌다.


5.2. 빛과 그림자: 호메이니의 유산

루홀라 호메이니는 현대 이란과 이슬람 세계에 지울 수 없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남겼다.

긍정적 평가: 이란 신정체제 지지자들에게 그는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이란의 자존심을 지키고, 부패한 왕정을 무너뜨린 '국부'이자 영적인 지도자 '이맘'으로 추앙받는다. 테헤란의 신공항 이름이 '이맘 호메이니 국제공항'인 것은 그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정적 평가: 그러나 비판자들에게 그는 팔레비 왕조보다 더한 독재와 인권 탄압으로 이란 사회를 수십 년 후퇴시키고, 이슬람 근본주의 광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켜 이슬람 세계 전체를 보수화시킨 장본인이다. 특히 해외로 망명한 이란인들은 그를 원수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란의 영혼을 둘러싼 투쟁은 호메이니가 그토록 절대적인 용어로 정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의 혈통 안에서 가장 극명하게 계속되고 있다. 

손자 중 한 명인 하산 호메이니는 체제 내 개혁을 추구하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반면, 또 다른 손자 후사인 호메이니는 할아버지가 세운 신정 체제의 완전한 세속적 전복을 외친다. 

이 분열이야말로, 그들이 할아버지라 부르는 한 남자가 남긴 해결되지 않은 유산을 완벽하게 요약한다.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한 남자의 신념과 카리스마가 한 국가의 운명을,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을 어떻게 뒤흔들 수 있는지 그의 삶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패한 왕정을 무너뜨리겠다는 선한 의지로 시작된 혁명은 어떻게 그보다 더한 괴물을 낳았는가? 종교가 정치와 결합했을 때, 그 순수한 신념은 얼마나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는가? 호메이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역사의 오랜 교훈과, 그 권력을 견제할 민주적 장치가 왜 중요한지를 그의 삶은 피로써 증명하고 있다. 

혁명의 불꽃이 남긴 신정의 그림자 속에서, 이란의 운명은 여전히 그가 남긴 유산과 싸우고 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기관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내면 묘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확인이 엇갈리는 사안은 (논쟁), 전해 내려오는 일화는 (전승)으로 표기했으며, 최초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한 번만 한영 병기했습니다. 

본문은 평가보다 사실·맥락을 우선해 배열했습니다.


Ruhollah Khomeini rose from cleric to revolutionary leader. 

From exile he spread sermons via cassettes, returned in 1979, toppled the Shah and built the Islamic Republic under velayat-e faqih. 

He crushed rivals, oversaw the 444-day U.S. embassy crisis and an eight-year war with Iraq, amid grave rights abuses (incl. disputed 1988 mass executions). 

Pragmatic turns—sex-reassignment fatwa, Iran-Contra—coexisted with zeal. 

He died in 1989; his theocracy endures, divisively.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