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전(金詮)이다.
연산군(燕山君, 조선 10대 국왕)의 치세,
나는 그저 한낱 미천한 승지(承旨,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 소속 정3품 관직)에 불과했다.
역사는 그를 폭군이라 기록하지만,
내게 연산군은 그저 피를 뒤집어쓴 채 홀로 광기 어린 춤을 추던 한 마리 미친 학(學)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파멸의 징조를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이야기를 남긴다.
1494년, 성종(成宗, 조선 9대 국왕)이 세상을 떠나고 스무 살의 연산군 이융(李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즉위는 평화로웠지만, 궁궐의 공기는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음산했다.
나는 어명 출납을 위해 승정원에 있을 때마다 그 불안한 기운을 느꼈다.
왕의 얼굴에는 늘 깊은 수심이 드리워 있었다.
백성들은 새 왕의 등극을 기뻐했지만, 나는 알았다.
그의 내면에 감춰진 거대한 어둠이 언젠가 폭발할 것임을.
그의 어머니는 폐비 윤씨(廢妃 尹氏)였다.
윤씨는 1479년에 폐출되고 1482년에 사사되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들은 바가 없었다.
그저 어릴 적부터 자신을 키워준 정현왕후(貞顯王后, 성종의 두 번째 계비)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하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를 향한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상실감은 그의 마음 한켠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그는 종종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신하들이 그의 행실을 간언할 때마다 그의 눈빛은 뱀처럼 차가워졌다.
불안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사초(史草, 역사 기록을 위한 자료)를 담당하는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세조(世祖, 조선 7대 국왕)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다는 것이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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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오사화의 빌미가 된 김종직(점필재) 초상” Wikimedia Commons, PD-old. 위키미디어 공용 |
훈구 세력인 유자광(柳子光)은 이를 역모로 몰아 사림(士林) 세력을 대거 숙청했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훈구와 사림의 권력 투쟁이었지만,
내 눈에는 연산군 내면의 어둠이 외부로 표출된 첫 번째 폭발처럼 보였다.
사초를 핑계로 비판 세력들을 제거하며
왕권 강화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그의 숨겨진 욕망이 드러난 것이었다.
이때부터 임금은 사관과 사초의 권위를 노골적으로 경계하고 적대시하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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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일기』 첫머리(국사 원전) Wikimedia Commons(파일:Daily record…01.jpg 등), CC/공공누리 표기. 위키미디어 공용 |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무오사화는 연산군의 광기를 더욱 증폭시켰다.
그는 이제 거침없이 폭정을 시작했다.
1504년, 드디어 갑자사화(甲子士禍)가 터졌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트라우마가 이 사건을 통해 현실로 다가왔다.
“어머니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 한 마디가 연산군을 완전히 미치게 했다.
윤씨가 폐비될 당시, 왕실 어른들은 사건의 전말을 숨겼다.
하지만 연산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던 간신 임사홍(任士洪, 성종의 후궁 엄귀인의 인척)은 그에게 폐비의 사연이 담긴 피 묻은 적삼을 보여주었다(전승).
그 적삼은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듯,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억눌려 있던 분노와 슬픔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피 묻은 적삼 일화는 야사의 빛깔이 짙어, 실록과 전언을 가려 읽어야 한다(전승).
연산군의 복수는 잔인하고 처절했다.
그는 어머니의 폐위에 가담했던 모든 이들을 찾아내 처벌했다.
성종의 후궁인 엄 숙의(嚴淑儀)와 정 숙의(鄭淑儀)는
연산군의 명으로 가혹한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고,
아들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도 귀양을 간 뒤 사사(賜死)되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욕보이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죽은 자에게까지 칼을 겨눈 부관참시는 왕권 공포정치가 극점에 달했음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걷잡을 수 없는 폭군으로 변모했다.
그는 성균관(成均館, 조선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의 기능을 훼손하고
연회와 향락의 공간으로 전용하였으며,
원각사(圓覺寺, 현재 탑골공원 자리) 일대 또한 본래의 용도를 벗어난 연회 공간으로 자주 쓰였다.
| “원각사 10층석탑(현 탑골공원)” Wikimedia Commons, CC BY-SA. 위키미디어 공용 |
전국 팔도에서 미모의 여인들을 색출하여 궁궐로 끌어들였고,
이들은 흥청(興淸)이라 불리며 그의 향락에 이용되었다
(어원: ‘흥청망청’의 유래로 보기도 하나 이견 있음).
나는 매일 밤 꿈속에서 피 냄새를 맡았다.
그의 주변을 맴도는 수많은 원혼들이 나의 잠자리를 덮쳤다.
연산군은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
왕의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의 집을 허물었고, 백성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폭정은 심지어 한글(훈민정음)에까지 미쳤다.
백성들이 벽보에 한글로 왕을 비방하는 글을 올리자,
연산군은 언문(훈민정음) 사용을 강력히 탄압·금지하고 검열을 대폭 강화하였다.
백성을 가르치는 글이 오히려 왕을 욕보이는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격분했다.
나는 이 사건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가 되어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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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생 사진 1890, 평양·윌리엄 J. 홀 촬영, PD 위키미디어 공용 |
그의 사생활 역시 문란했다.
그는 자신의 숙모인 월산대군(덕종의 아들) 부인 박씨(月山大君夫人 朴氏)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의심을 받았고, 이는 궁궐 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전승/논쟁).
폭정과 향락에 취한 연산군은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의 사욕을 채웠고,
그의 행위는 왕실의 권위와 도덕성을 무너뜨렸다.
어둠이 짙어지면 새벽이 오는 법.
연산군의 폭정은 결국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
1506년 9월,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 뜻있는 신하들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켰다.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하고 연산군을 폐위시킨 뒤,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晋城大君)을 왕으로 추대했다.
새로운 왕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연산군은 하루아침에 왕에서 폐위된 평민으로 전락했다.
이 반정의 주역들은 훗날 ‘연산군일기’ 편찬에도 깊이 관여했으니,
그 기록을 읽을 때에는 그들의 이해관계를 떠올려야 한다(논쟁).
나는 반정 소식을 듣고 허탈함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다.
그를 비판하면서도 그를 지켜보아야 했던 나의 괴로운 시간들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반정에 참여하지도, 방관하지도 않았던, 그저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쓸린 작은 존재였다.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江華島) 교동(喬桐)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폐위된 아들 황(皇)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고통에 시달렸다.
폐세자의 사사는 반정 직후 후환 제거의 논리로 정당화되었으나,
그 또한 새 권력의 피비린내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병을 얻었고, 결국 유배 두 달 남짓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최후는 너무나도 쓸쓸했다.
한때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왕의 마지막은 초라한 섬에서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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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교동도의 읍성·마을 전경(유배지 상징)” Wikimedia Commons, CC BY-SA. 위키미디어 공용 |
연산군은 폭군으로 기록되었지만, 그의 비극적인 삶은 후대에 많은 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어머니를 잃은 트라우마와 그로 인한 광기 어린 폭정은 수많은 이야기의 영감을 주었다.
영화 ‘왕의 남자’나 ‘간신’ 등은 연산군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성격적 결함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후대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주류 역사학에서는 그를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의 사화를 일으키고 지나친 향락으로 국정을 파탄 낸 폭군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연산군일기’가 반정 세력에 의해 편찬되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논쟁).
하지만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이 일으킨 폭정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연산군을 한 개인의 시각에서 비판하며 이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
그는 타고난 폭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불운한 가정사와 비극적인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내면의 상처를 입은 한 인간이었다.
그의 광기는 단순한 악행이 아니라, 억눌린 슬픔과 분노가 곪아 터진 결과였다.
그는 주변에 조언을 해줄 현명한 신하가 없었고, 간신들의 달콤한 속삭임에 취해 파멸의 길을 걸었다.
그의 이야기는 한 인간의 불행이 어떻게 한 나라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교훈으로 남았다.
그의 무덤은 왕의 무덤인 ‘능(陵)’이 아닌 ‘묘(墓)’로 불린다.
이는 왕위 박탈의 최종적 법적·의례적 결과였다.
그의 마지막은, 한때 왕이었던 그가 더 이상 존엄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함을 의미했다.
그의 묘비명에는 그의 비극적인 삶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 꽃처럼, 그는 피의 회환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남긴 상흔은 조선 땅에 오래도록 남아,
후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교훈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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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 묘(‘능’이 아닌 ‘묘’)” Wikimedia Commons, CC BY-SA. 위키미디어 공용 |
나는 연산군의 마지막을 지켜본 뒤, 한동안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새로운 왕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상처 입은 나라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나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연산군의 피 묻은 적삼과 그의 광기 어린 눈빛,
그리고 그가 죽인 수많은 이들의 원혼들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의 비극적인 삶을 기록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도록, 한 개인의 불행이 국가의 재앙이 되지 않도록.
시간이 흘러, 나는 늙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나의 기록은 남았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지기 마련이지만,
나는 그 안에서 한때 왕이었던 연산군이라는 한 인간의 비극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의 광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그의 파멸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 모든 질문은 후대 사람들에게 던지는 나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연산군이라는 비운의 군주는, 결국 자신을 둘러싼 어둠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파멸시킨 한 마리 가련한 새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마치며, 그의 마지막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강화도 교동의 쓸쓸한 바닷바람 속에서, 홀로 죽어간 왕의 마지막 모습.
그가 죽는 순간, 그의 눈에는 어떤 회한이 담겨 있었을까.
나는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승정원 승지 김전의 시각으로 이 글을 적었다.
당대에 직접 보거나 들은 일을 바탕으로 하되,
훗날의 사료와 야사, 각기 다른 편찬자의 기록을 참조해 빈틈을 메웠다.
이 기록은 연대기 강의가 아니라, 내가 목격한 장면들을 재구성한 서사다.
확실치 않은 일화는 (전승), 의견이 갈리는 해석은 (논쟁), 말의 유래는 (어원)으로 표시했다.
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신뢰할 만한 사료를 우선했고, 야사는 참고로만 삼았다.
혹여 사실과 다른 부분이 밝혀지면, 나는 후학을 위해 이를 고쳐 적겠다.
한 사람의 불행이 나라의 재앙이 되지 않도록,
내가 남긴 글이 경계(警戒)의 기록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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