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1937년, 런던의 명망 높은 그로스브너 하우스(Grosvenor House)에서 시작된다.
흰 가운을 입은 신사 숙녀들, 화려한 보석을 치렁거린 귀부인들, 그리고 펜과 노트로 무장한 기자들이 빼곡하게 객석을 채웠다.
무대 위에는 검은 머리칼을 뒤로 길게 땋아 내리고, 뻣뻣한 모피 조끼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굳게 다문 입술과 날카로운 눈빛은 정적인 공간을 압도했다.
그가 바로 위대한 자연주의자, 그레이 아울(Grey Owl, 와샤퀀아신·Wa-Sha-Quon-Asin/번역 이견: ‘회색 올빼미’ 혹은 ‘밤에 걷는 자’), 아치볼드 스탠스펠드 벨라니(Archibald Stansfeld Belaney)의 가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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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 아울의 정면 초상, 1936” / “Portrait of Grey Owl, 1936” Wikimedia Commons, 캐나다 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커먼즈 |
"나는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아파치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허구: 실제 본명은 아치볼드 S. 벨라니, 부모는 영국인 조지 벨라니·키티 콕스)
그의 낮은 목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나의 부족은 어머니에게서 자연의 지혜를 배웠고, 그 지혜를 여러분과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의 연설은 폭발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그레이 아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지금, 한때 자신이 도망치려 했던 세상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모피 사냥꾼으로 살던 캐나다의 추운 겨울,
그리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소년 시절의 기억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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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스브너 하우스 외관” / “Facade of Grosvenor House, London” CC BY-SA 4.0 위키미디어 커먼즈 |
1888년, 영국 헤이스팅스(Hastings)의 한적한 마을.
아치볼드 스탠스펠드 벨라니(그레이 아울의 본명)는 외할머니와 두 명의 고모 밑에서 자랐다.
아치(Archie, 아치볼드의 애칭)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혼자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인디언 전사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학교 수업을 빼먹고, 인디언 관련 서적을 읽거나 숲속을 뛰어다니며 활쏘기 연습을 했다.
고모는 그런 그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저 아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치의 외로움은 편지 한 통에서 비롯되었다.
아버지(조지 벨라니, George Belaney)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떠나버렸다.
아버지는 아치에게 캐나다에서 사냥꾼으로 살고 있다며 편지를 보냈고,
아치는 그 편지를 보물처럼 간직했다.
실제 부친의 행적은 오래지 않아 끊겼고(초기 사망 기록), 아치는 오랫동안 그 환상을 붙들었다.
1906년, 17세가 된 아치는 마침내 캐나다로 떠났다.
배는 그를 멀고도 낯선 땅, 캐나다 북부의 숲으로 실어 날랐다.
그곳에서 그는 모피 사냥꾼(Trapper, 야생동물을 잡아 모피를 얻는 사람)이 되어 혹독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는 숲과 강, 그리고 동물들에게 둘러싸여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얻기로 결심했다.
그는 오지브웨이(Ojibwe) 공동체와 교류하며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흡수했다.
그는 자신을 와샤퀀아신(Wa-Sha-Quon-Asin)이라 칭하며,
자신이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아파치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인디언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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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스케시우 호수의 붉은 석양” / “Sunset glow on Waskesiu Lake” CC BY-SA 4.0 위키미디어 커먼즈 |
와샤퀀아신은 캐나다 북부의 거친 숲속에서 여러 여자를 만났다.
그중 앙젤 에그우나(Angele Egwuna, 오지브웨이/아니시나베)와의 결혼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그에게 진정한 인디언의 지혜와 자연을 존경하는 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와샤퀀아신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아치 벨라니'라는 백인 남자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고,
그는 자신의 위선적인 삶에 괴로워했다.
그의 삶은 또 다른 만남으로 인해 크게 변화했다.
그는 오지브웨이 여성 아나하레오(Anahareo, 본명 거트루드 버나드)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아나하레오는 야생동물을 함부로 죽이는 그의 모습을 비난했다.
"당신은 자연의 파괴자가 되고 있어요. 당신이 존경하는 인디언 전사는 그런 사람이 아닐 거예요."
아나하레오의 말은 와샤퀀아신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듣고 사냥꾼의 삶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이로 인해 그는 모피 사냥꾼으로서의 정체성 대신 환경보호론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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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하레오의 흑백 초상” / “Portrait of Anahareo”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URAA 관련 설명 포함) 위키미디어 커먼즈 |
와샤퀀아신은 아나하레오와 함께 비버를 보호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들은 비버 두 마리 ‘Rawhide’와 ‘Jelly Roll’을 입양하여 키웠고,
이 경험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와샤퀀아신은 비버 가족의 지혜와 유대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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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 아울이 비버에게 간식을 주는 모습” / “Grey Owl feeding a beaver a jelly roll” Library and Archives Canada, CC BY 2.0 위키미디어 커먼즈 |
그는 비버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쓰기 시작했고, 그 책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대표작 《Pilgrims of the Wild》(영국 1934/북미 1935)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첫 단행본은 《The Men of the Last Frontier》(1931)였고, 뒤이어 《The Adventures of Sajo and Her Beaver People》(1935), 《Tales of an Empty Cabin》(1936) 등이 이어졌다.
이제 와샤퀀아신은 '그레이 아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캐나다 연방 국립공원 관리국(Dominion Parks Service)의 보호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멸종 위기에 처한 비버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그의 기반은 프린스앨버트 국립공원 아자완 호 인근의 ‘비버 로지(Beaver Lodge)’였다.
그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그는 순식간에 캐나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37년, 그레이 아울은 강연 투어를 위해 영국 런던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인디언 전사의 모습으로 고향 땅을 밟았다.
런던의 화려한 거리와 수많은 인파는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왕실 사람들과 만나고, 유명 인사들과 어울렸다.
그의 연설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캐나다의 자연을 대표하는 인물로 인정받았다.
이 투어는 버킹엄궁 특명 강연(royal command performance)으로 절정을 이뤘고, 누적 관객은 수십만에 달했다는 회고가 남아 있다(전승).
그러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혹여나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까 두려워했다.
런던에서 재혼하여 살고 있는 아버지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그는 유명해질수록 '아치 벨라니'라는 이름의 그림자에 더 깊숙이 갇히는 기분을 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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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스팅스 생가의 블루 플라크” / “Blue plaque at Grey Owl’s birthplace, Hastings” Geograph → CC BY-SA 2.0 위키미디어 커먼즈 |
1938년 4월 13일, 그레이 아울은 서스캐처원 주 프린스앨버트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향년 49세).
그의 사망 소식은 캐나다 전역을 슬픔에 잠기게 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언론을 통해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그레이 아울의 진짜 정체가 영국 출신의 백인 아치볼드 벨라니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의 과거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언론에 제보하면서, 그의 위선적인 삶은 세상에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소식은 캐나다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일부 언론과 대중의 반발은 거셌고, 그의 명예는 크게 추락했다(논쟁: ‘책이 전면 철수됐다’ 식의 단정은 과장될 소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존경했던 위대한 자연주의자가 사실은 자신들을 기만했던 사기꾼이라는 사실에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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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 아울 일가의 묘소” / “Graves of Grey Owl, Anahareo and Shirley Dawn” CC BY 3.0 위키미디어 커먼즈 |
그레이 아울의 죽음 이후, 그의 파트너였던 아나하레오와 그의 옛 동료들이 모여 그의 삶을 회고했다.
그들은 그레이 아울의 행동이 단순히 사기였는지, 아니면 그 안에 진심이 있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아나하레오는 그의 진심을 믿었다.
"그가 비록 백인이었을지라도, 그는 정말로 인디언의 영혼을 갈망했어요. 그는 자연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어요."
그러나 그의 과거를 아는 다른 인물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인디언 정체성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 명성을 얻었어. 그가 사랑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영웅의 모습이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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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두막 앞의 그레이 아울과 아나하레오” / “Grey Owl with Anahareo at the cabin” Glenbow 아카이브 이미지(Commons 수록) 위키미디어 커먼즈 |
그레이 아울의 이야기는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정체성 논란은 캐나다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그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한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은 무엇인가? 진실이 위대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오늘날, 그레이 아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일부는 그를 희대의 사기꾼으로 비난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그의 환경 보호 메시지만큼은 진실이었다고 평가한다.
그의 이야기는 1999년 리처드 아텐버러(Richard Attenborough) 감독에 의해 영화 《그레이 아울(Grey Owl)》로 제작되어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이 만들어낸 '그레이 아울'이라는 그림자 속에서 살았지만, 그의 삶은 위선과 진심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의 위선적인 삶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끝나지 않은 전설로 남아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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