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8월, 사우스다코타주 데드우드.
소란스러운 살롱(술집) 안, 짙은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 건장한 체격의 사내(와일드 빌 히콕)가 포커 테이블에 앉아있다.
장소는 Nuttall & Mann’s Saloon No.10.
그가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등을 보인 채 앉아있는 모습을 누군가 조용히 응시한다.
긴 은발과 콧수염, 날카로운 눈매는 한때 전설이라 불렸던 총잡이의 흔적이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색 에이스와 검은색 8이 들려있다.
패를 보던 그가 문득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등 뒤에서 총성이 울렸다.
짧고 굵은 총성. 피가 튀고, 와일드 빌은 앞으로 고꾸라진다.
그의 손에 쥐여있던 카드 패가 바닥에 떨어져 흩어진다.
검은색 에이스 두 장과 8 두 장. (‘데드맨스 핸드’라 불리는 조합, 다섯 번째 카드는 전승이 엇갈린다.)
술집은 잠시 정적이었다가 곧 고함과 발소리로 가득 찼다.
가까운 테이블 사람들이 의자를 걷어차고 일어섰고, 누군가는 “의사!”를 외쳤다.
그러나 곧 모두가 안다.
총탄은 급소를 관통했다.
한 시대의 이름이 여기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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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일드 빌 히콕 초상 | Portrait of Wild Bill Hickok Public Domain(Wikimedia/PD Old) 위키미디어 공용 |
1840년대, 미국 일리노이주 트로이 그로브(라살 카운티의 작은 농촌).
풋풋한 얼굴의 소년 제임스 버틀러 히콕(와일드 빌의 본명)은 평화로운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히콕(엄격한 감리교 신자)은 노예제 폐지론자였고,
집은 ‘지하철도(탈주 노예 은신·지원망)’의 은신처였다고 전해진다.
밤이 깊어질수록 마차바퀴 소리가 멈추고, 창문에 불빛이 세 번 두드려질 때가 있었다.
어머니는 빵과 물을 내왔고, 아버지는 헛간을 열었다.
어린 제임스는 땀과 흙먼지, 두려움으로 떨리는 손을 보며 배웠다.
도움이 필요할 때 말보다 행동이 빨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엔 말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분명히 온다는 것.
그는 거칠게 자랐다.
마을 어귀에서 남부 옹호자들이 던지는 위협과 욕설을 들었고,
가끔은 창문 아래서 발소리가 멈추는 밤도 있었다.
집이 불탔다는 전승도 있으나 확증 사료는 엇갈린다.
다만 가족이 위험에 노출됐고, 소년이 “폭력이 먼저 오는 날”을 체감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총에 대한 호기심과 경계심이 동시에 자라난다.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 제임스는 불안과 모험심을 품고 서부로 떠난다.
가족의 만류를 뒤로하고 캔자스 준주로 향한다.
그곳은 ‘블리딩 캔자스’ 친노예·반노예 세력이 충돌하던 국면이었다.
그는 반노예 무장단체 편에 섰고, 말달리기와 사격, 추적을 배웠다.
이 무렵 윌리엄 프레더릭 코디(후일 버펄로 빌)를 알게 된다.
둘은 때로 길을 함께 했고, 때로는 각자의 일거리를 좇았다.
훗날 대중은 이 우정을 신화처럼 부풀렸지만, 둘의 공동행적과 친밀도는 전승에 과장이 섞인 부분이 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코디가 사교적이고 장사를 잘하는 인물이었고,
제임스가 위험을 먼저 맡으려는 성향이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기질은 그들을 몇 번이고 같은 테이블에 앉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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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팔로 빌 코디 초상 | Portrait of Buffalo Bill Cody" CC0(국립초상화미술관/스미스소니언, NPG) 위키미디어 공용 |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제임스는 북군에 합류해 정찰병·스카우트로 활약한다.
그는 밤길을 읽었고, 발자국의 깊이로 대열의 규모를 가늠했다.
‘Wild Bill’이라는 별칭의 유래는 설이 분분하지만,
전장에서의 침착함과 정확한 사격 덕에 별명은 자연스럽게 고착됐다.
군복을 입고도 그는 민간 보안·가이드 업무를 병행했고, 지역의 지형과 도적떼 습성에 밝았다.
전쟁은 그를 유명하게 했지만, 동시에 피로하게도 만들었다. 총이 필요 없는 날은 드물었다.
1865년, 미주리주 스프링필드.
와일드 빌은 포커 게임 중 옛 친구 데이비스 투트와 돈 문제로 시비가 붙는다.
투트는 와일드 빌의 시계를 집어 들고 광장으로 나갔다.
빚과 모욕, 체면이 얽힌 문제였다.
히콕은 장총이 아닌 콜트 리볼버를 점검하고 광장으로 걸어 들어간다.
정오 무렵, 사람들은 건물 처마 밑에 줄지어 섰다.
거리는 약 75m.
먼저 방아쇠를 당긴 쪽은 투트였다는 증언이 있고, 거의 동시에 히콕의 탄이 날아갔다는 증언도 있다.
결과는 히콕의 단발 명중.
법정은 정당방위 취지로 그를 풀어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대중에겐 ‘한낮의 결투’를 상징하는 장면이 되었고,
히콕 본인에게는 잠 못 이루는 밤의 출발점이 되었다.
(시계가 ‘어머니의 유품’이었다는 설은 기록마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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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프링필드 공공광장 표석 | Marker at Springfield Public Square" Public Domain(HMDB) HMDB |
와일드 빌은 명성을 얻은 뒤 캔자스주 헤이즈(1869)와 애빌린(1871)에서 보안관/마셜로 일한다.
소몰이 시즌이면 도시가 요동쳤다.
술집, 도박장, 권투장, 칼부림.
히콕은 먼저 경고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체포하거나 필요시 발포했다.
그 방식은 강경했고, 도시의 질서는 단기간에 잡혔다.
그러나 애빌린에서의 비극이 그를 무너뜨린다.
도심에서 총을 든 Phil Coe를 제압한 직후, 어둠 속에서 접근하던 인물을 적으로 오인해 발포했다.

"필 코 초상 | Portrait of Phil Coe"
Public Domain(Wikimedia/PD Old)
위키미디어 공용
쓰러진 이는 동료, 부보안관 Mike Williams.
그날 이후 히콕은 술을 찾았고, 총구 대신 잔을 오래 잡았다.
동료의 이름을 부르다 말고 멈추는 밤이 많아졌다.
그에게 보안관 배지는 더 이상 자부심만이 아니었다.
책임의 무게가 손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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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즈 시의 오버랜드 마차 출발 | Overland Stage leaving Hays City" Public Domain(Boston Public Library via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총잡이, 보안관으로서의 삶은 스캔들로 얼룩져 있었다.
여러 여성과 염문이 돌았고,
특히 칼라미티 제인(Calamity Jane)과의 관계는 한 세대 내내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제인 자신이 회고에서 관계를 강조했지만, 확증 사료는 부족하다.
와일드 빌은 늦은 나이에 연극배우·서커스 흥행사 아그네스 레이크(Agnes Lake)와 결혼했다.
1876년 3월 5일, 신시내티.
그는 결혼 후에도 떠돌았다.
순회공연, 경호, 도박. 도시를 옮길 때마다 “이제는 조용히 살겠다”라고 했지만,
그는 늘 소란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명성은 그를 자유롭게도 했고, 가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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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라미티 제인 전신 초상 | Calamity Jane, full-length portrait with rifle" Public Domain(Wikimedia/PD Old) 위키미디어 공용 |
결혼 후에도 방황을 멈추지 못한 와일드 빌은 마지막 희망을 찾아 사우스다코타주 데드우드로 향한다.
데드우드는 금광 발견 이후 순식간에 인파가 몰린 곳이었다.
연방의 사법체계가 완전히 닿지 못했고, 광산 규칙과 사설 조정이 법을 대신했다.
히콕은 도박판에서 빠르게 돈을 벌었다가도 곧 잃었다.
악수와 농담 사이, 사람들은 그를 레전드 취급했지만, 그는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시력 저하를 호소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는 가능하면 등을 벽에 대고 앉는 습관을 지켰지만, 그날만은 빈자리가 없었다.
친한 이가 “내가 벽 쪽을 맡겠다”고 했고, 히콕은 굳이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오래 지켜온 원칙이 딱 하루 꺾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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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드우드 1876년 전경 | Deadwood in 1876 panorama" Public Domain(NARA via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1876년 8월 2일, 살롱의 낮술이 기분 좋게 돌 무렵.
묽은 햇빛과 담배연기가 섞인 공기 속에서, 누군가가 뒤로 다가왔다.
잭 맥콜(Jack Mc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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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 맥콜 초상 | Portrait of Jack McCall" CC BY-SA 3.0(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그는 총을 빼 들었고, 한 발을 쐈다.
히콕은 앞으로 쓰러졌고, 카드가 흩어졌다.
곧바로 현지에서 심리가 열렸다.
데드우드의 초기 공동체에서 쓰이던 광부법정 유사 절차였다.
맥콜은 “복수”를 주장했고, 배심은 그를 일시 석방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방 관할로 사건이 넘어갔고, 재기소 끝에 유죄가 확정되었다.
1877년 3월 1일, 사형이 집행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서부 법집행의 미숙함과, 점차 정비되는 연방 사법의 대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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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룬 넘버 10 추정 위치 | Probable area of Saloon No. 10" CC BY-SA 3.0(Wikimedia) 위키미디어 공용 |
와일드 빌의 죽음 이후, 그의 삶은 여러 소설·영화·무대에서 각색되었다.
‘데드맨스 핸드’는 흑 A×2, 흑 8×2로 널리 통용되지만,
마지막 한 장에 대해서는 누구도 같은 답을 내놓지 않는다.
어떤 자료는 다이아몬드 잭, 어떤 자료는 “확인 불가”라고 적었다.
사람들은 그 불확실성을 오히려 전설의 증거처럼 받아들인다.
전설은 빈칸을 남길 때 더 오래간다.
그러나 기록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해야 한다.
그의 비극적 오발로 숨진 이는 Mike Williams였고, 그 직전 대치 상대는 Phil Coe였다.
이 기본 사실이 흔들리면, 이후의 평가는 모두 미끄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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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드맨스 핸드(AA–88) | Dead Man’s Hand (aces and eights)" CC BY-SA 3.0(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또 하나, Rock Creek Station(1861, 일명 McCanles 사건)에 대한 책임과 전개는
연구자마다 해석이 다르다.
일부는 히콕의 정당방위를, 일부는 과도한 폭력을 본다.
당시 증언과 신문, 후대 회고가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론을 단정하기보다, 논쟁이 존재함을 함께 기록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가 정의로운 보안관이었는가, 폭력적 무법자였는가라는 이분법은 결국 양쪽 다를 놓친다.
그는 질서를 세우려 총을 든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 타협도, 실수도, 비극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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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일드 빌 묘역 기념비 | Wild Bill’s Monument at Mount Moriah" Public Domain(LOC/Grabill via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말년의 그는 빛과 그림자가 섞인 사람으로 남는다.
도시는 그에게 박수를 보냈고, 가끔은 야유도 보냈다.
그는 늘 자리를 정리하고 떠났다.
다음 도시, 다음 도박판, 다음 경비 계약.
때로는 결투의 승자로, 때로는 재판정의 피고로. 칭송과 비난은 같은 속도로 달려왔다.
사람들은 그에게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묻지만, 그는 대답을 길게 하지 않았다.
“그때그때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와일드 빌의 유령은 여전히 서부의 황량한 대지를 떠돈다고들 한다.
그러나 남는 것은 유령이 아니다.
질문이다.
법과 무법 사이, 질서와 폭력 사이에서 개인은 무엇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가.
방아쇠인가, 설득인가.
그는 둘 다 사용했고, 둘 다의 대가를 치렀다.
영웅담만으로도, 악당 기록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인물.
그래서 서부사는 여전히 그를 꺼낸다.
학생들에게는 사건의 연대를, 작가들에게는 인물의 균열을, 독자들에게는 시대의 선택을 보여준다.
데드우드의 살롱 바닥에 흩어진 네 장의 카드는 오늘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운명은 습관 하나가 꺾이는 날에 온다.
그날, 그는 등을 벽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서부의 한 장면이 완성됐다.
본 글은 미국 로컬/주립 아카이브 및 권위 자료(예: Library of Congress, Kansas Historical Society, South Dakota State Archives, National Park Service, 동시대 신문 기사 등)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일부 사건·연대·인물관계는 사료·연구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오류 제보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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