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스파이 vs 샤넬 N°5의 향기: 코코 샤넬의 검은색 철학과 71세의 드라마틱한 컴백 (Coco Chanel)


코코 샤넬: 결핍의 검은색 (Black by Want)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 1883년 출생)은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미워했다. 

'보뇌르'(Bonheur)는 프랑스어로 '행복'이라는 뜻이었으나,

 그녀의 인생에서 행복은 언제나 비웃음처럼 굴었다. 

그녀는 평생을 이 위선적인 중간 이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웠다.


1895년, 그녀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녀와 자매들을 오바진(Aubazine) 수도원 고아원 문 앞에 두고 

"돌아오겠다"는 거짓말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녀는 그 문이 닫히는 소리를, 평생의 가장 확실한 기억으로 간직했다.


"오바진 수도원 회랑 | Cloister of Abbaye d’Aubazine"
CC BY 3.0 (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수도원의 삶은 엄격한 규칙과 회색 빛깔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것이 회색이었고, 그녀가 입는 옷 또한 회색이었다. 

밋밋하고, 거칠고, 몸의 곡선을 모두 지워버리는 옷. 

가브리엘은 그 회색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이 회색 벽 속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지독한 결핍의 냄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녀의 모든 반항심과 야망은 이 회색 유니폼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그 단순하고 단조로운 디자인 속에서 실용성의 가치를 배웠지만, 동시에 존재감을 갈망했다.


가브리엘은 고아원에서 바느질을 배웠다. 능숙했고, 빨랐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단순히 옷감을 꿰매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수도원 복도를 걸으며, 벽과 바닥의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디자인을 눈에 담았다. 

(수도원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철제 난간은 후일 샤넬 디자인의 영감이 되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진정한 힘은 복잡함이 아닌, 덜어냄 속에 있다.


오바진 수도원과 어린 가브리엘 샤넬  Aubazine Abbey and young Gabrielle Chanel
공공 도메인 (Public Domain)

열여덟 살이 되자 그녀는 수도원을 벗어나 물랭(Moulins)의 세탁소 겸 바느질 가게에서 일했다. 

밤에는 근처 카바레(Cabaret)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특별하지 않았고, 노래 실력도 평범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대에 설 때마다 규칙적인 생활과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녀가 자주 불렀던 노래는 'Ko Ko Ri Ko'와 'Qui qu'a vu Coco dans l'Trocadéro?'라는 곡들이었다. 

관객들은 그녀에게 '코코(Coco)'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녀는 그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았다. 

코코는 프랑스어로 '어린애'나 '애인'을 뜻하는 귀여운 별명이었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그리고 누구의 귀여운 애인도 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이름은 오래된 가브리엘의 슬픔과 빈곤을 지워주는 위장막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코코'는 그녀가 만들어낸 첫 번째 브랜드였다.


“코코 샤넬 초상 (1920년대) - Portrait of Coco Chanel (1920s)"
퍼블릭 도메인

그녀의 무대 의상은 다른 무희들의 화려한 레이스와 깃털과는 달랐다. 

그녀는 남자들이 입는 것처럼 단순한 줄무늬 티셔츠에 스커트를 매치했다. 

'왜 여자들은 움직이기 불편하고 숨쉬기 힘든 옷을 입어야 하는가?'

그녀의 몸은 자유로웠고, 그 자유로움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코르셋을 부수는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1905년 무렵, 그녀는 에티엔 발산(Étienne Balsan, 부유한 상속인이자 기병대 장교)을 만났다. 

그는 그녀의 첫 번째 후원자이자 사교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가브리엘은 그의 루아유(Royallieu) 저택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에티엔 발산 초상 (승마 복장)”
Public Domain

발산은 그녀에게 풍요로움을 주었지만, 권태도 함께 주었다. 

발산의 세계는 사냥과 말, 그리고 게으름이었다. 

샤넬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 

'돈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다. 나는 이 저택의 그림자 속에 숨어 사는 애인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반항은 옷에서 시작되었다. 

발산의 저택은 여성들이 장식적인 옷을 입고 그림처럼 앉아있는 곳이었다. 

샤넬은 매일 아침 발산의 옷장에서 승마용 바지와 줄무늬 니트 스웨터를 꺼내 입었다. 

당시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 바지를 입지 않았다. 

그녀는 편안하게 말을 탔고, 그 모습은 저택의 다른 여성들에게는 파격적인 스캔들 그 자체였다. 

그녀는 이 옷들이 자신에게 움직일 자유를 준다는 것을 알았다.


가브리엘은 곧 발산의 친구들을 위해 모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거대하고 화려한 깃털 모자를 비웃었다. 

그녀의 모자는 작고, 단순하며, 깃털 대신 단정한 리본이나 꽃 한 송이만 달렸다. 

그녀의 모자는 '스타일'이었지, '장식'이 아니었다. 

발산의 도움으로 그녀는 1908년 파리 캄봉가(Rue Cambon) 21번지에 

작은 모자 작업실 '샤넬 모드'(Chanel Modes)를 열었다.


모자 가게를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삶에 결정적인 인물인 아르튀르 '보이' 카펠(Arthur 'Boy' Capel, 영국의 부유한 사업가이자 발산의 친구)이 등장했다. 

그는 발산과는 달랐다. 

발산이 그녀에게 안락함을 주었다면, 카펠은 그녀에게 야망을 주었다.


“젊은 시절의 보이 카펠 초상 (옆모습)” / “Young Boy Capel portrait (profile view)”


카펠은 샤넬의 사업적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는 샤넬의 디자인을 칭찬하는 대신, 그녀의 사업 모델에 대해 논했다. 

'이 남자는 나를 장식품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내가 가진 것을 보았다.'

샤넬은 카펠에게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그녀의 정신적 동반자이자, 인생의 가장 큰 사랑이었다.


카펠은 샤넬의 독립을 위해 파리의 캄봉가 31번지에 정식 부티크를 열 수 있는 초기 자본을 제공했다. 

이는 샤넬에게 있어 단순한 재정 지원을 넘어섰다. 

그것은 경제적 독립을 향한 첫걸음이었고, 그녀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910년, 샤넬은 공식적으로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녀는 모자뿐만 아니라 단순한 저지(Jersey) 소재의 여성복을 팔기 시작했다. 

당시 저지 소재는 속옷이나 남성 작업복에만 쓰이던 저렴한 재료였다. 

샤넬은 이 소재를 이용해 여성들이 입고 움직일 수 있는 편안한 드레스를 만들었다. 

이것이 샤넬 스타일의 근원이었다.


“샤넬 저지 캐주얼 복장 1917” /  “Chanel jersey casual wear 1917”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1913년, 샤넬은 카펠의 지원 아래 휴양지 도빌(Deauville)에 두 번째 부티크를 열었다. 

도빌은 부유한 사교계 여성들이 찾는 곳이었고, 샤넬에게는 자유로운 스타일을 실험하기 완벽한 무대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남성복의 요소를 더욱 과감하게 가져왔다.


1913년 도빌에 있는 자신의 부티크 앞에 선 가브리엘 샤넬
© 컬렉션 Deauvilloise, 도빌(프랑스)

줄무늬 마린 티셔츠, 트위드 재킷의 원형이 되는 옷, 그리고 무엇보다 단발머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샤넬을 따라 코르셋을 버리고 머리를 잘랐다. 

이것은 패션의 혁명이자, 여성 해방 운동의 시각적 선언이었다.


“마리니에르 셔츠를 입은 코코 샤넬 Coco Chanel wearing a marinière shirt”
퍼블릭 도메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샤넬의 사업은 오히려 번창했다. 

부유층 여성들은 복잡하고 불편한 옷 대신, 

전쟁으로 인해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문에 샤넬의 실용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을 찾았다.


1915년에는 프랑스 남부의 호화 리조트 비아리츠(Biarritz)에 

대형 꾸뛰르 하우스(Haute Couture House, 고급 맞춤복 전문점)를 열었다. 

이곳에서 샤넬은 300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하며 진정한 패션 사업가로 거듭났다. 

그녀는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어냈다.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애인도 아니다. 나는 나의 사업을 소유한 코코 샤넬이다.'


"코코 샤넬, 비아리츠에서 — Coco Chanel at Biarritz"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 Gallica-BnF)

코코 샤넬은 카펠과의 관계가 자신이 가진 전부라고 믿었으나, 

카펠은 1918년 신분 상승을 위해 귀족 가문 여성과 결혼했다. 

샤넬은 분노했지만, 그의 결혼을 인정했다. 

그녀는 그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1919년 코코 샤넬 풍자 삽화” / “Sem caricature of Coco Chanel, 1919”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하지만 1919년 12월, 카펠은 자동차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 소식은 샤넬의 인생을 완전히 멈추게 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듯했다. 

카펠은 그녀의 사랑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야망을 지지해 준 유일한 닻이었다.


이 극심한 상실감 속에서 샤넬은 자신의 고독을 영원한 브랜드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상실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고 카펠의 기억을 불멸로 만들기 위해 더욱더 일에 매진했다.


이 상실 직후, 그녀는 자신의 가장 혁명적인 업적인 샤넬 N°5 향수 개발에 착수했다. 

그녀는 러시아의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에게 

"여성의 향기가 나는 향수"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당시 꽃 한 종류의 향만 사용하던 전통 향수와 달리, 

샤넬 N°5는 80여 가지의 재료를 혼합한 추상적인 향이었으며, 

알데하이드를 사용하여 이전에는 맡아보지 못했던 깨끗하고 신선한 인공적인 느낌을 주었다.


샤넬 최초의 향수 N°5 출시

그녀는 여러 샘플 중 다섯 번째를 선택했다. 

숫자 '5'는 그녀에게 행운의 숫자였으며, 그녀가 미신적으로 집착했던 숫자이기도 했다. 

병 디자인 또한 당시 유행하던 크리스털 세공 병이 아닌, 

가장 단순하고 투명한 사각형 병을 선택했다. (디자인 철학)


"여성들이 이제는 꽃처럼 보일 필요가 없다." 

그녀는 N°5를 통해 여성의 해방을 향기로 선언했다. 

이 단순하고 혁명적인 향수는 1921년 출시되자마자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코코 샤넬을 진정한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920년대, 샤넬은 자신의 패션 제국을 확장하며 유럽의 왕족 및 귀족들과 사귀었다. 

보이 카펠의 상실감은 그녀를 더욱 차갑고 독립적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후원자이자 애인을 갈망하게 했다. 

그녀는 러시아 출신의 망명 귀족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Grand Duke Dmitri Pavlovich,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일원)을 만났다.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 초상 | Portrait of Grand Duke Dmitri Pavlovich"
Public Domain (Imperial-era photo,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드미트리는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었으나, 유럽 사교계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샤넬에게 러시아 문화와 동방의 화려함을 접하게 해주었다. 

드미트리와의 관계는 샤넬 N°5의 초기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샤넬은 러시아 농부들이 입던 튜닉(Tunic) 형태의 의상을 자신의 디자인에 도입하고, 

드미트리에게서 영감을 받아 화려하지만 가짜인 인조 보석, 

특히 진주 목걸이를 여러 겹으로 착용하는 스타일을 유행시켰다.


'진정한 가치는 물질에 있지 않다. 내가 스타일을 만들면, 싸구려 모조품도 진짜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녀의 '가짜 보석' 착용은 귀족들이 가진 물질적 특권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이었으며, 

동시에 보통 여성들도 사치스러운 스타일을 누릴 수 있게 한 패션의 민주화였다.


"코코 샤넬과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 Coco Chanel with Grand Duke Dmitri Pavlovich"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 Gallica-BnF)

드미트리 이후, 샤넬은 영국 최고의 부호인 웨스트민스터 공작(Duke of Westminster, 당대 가장 부유한 영국 귀족)과 10년 가까이 관계를 유지했다. 

공작은 그녀를 영국 상류층 사회의 중심으로 이끌었고, 

샤넬에게 트위드(Tweed) 재킷의 원형이 되는 옷감과 스코틀랜드식 캐주얼을 접하게 했다. 

공작의 낚시복과 사냥복에서 영감을 얻은 샤넬은 이 거친 트위드 소재를 여성복에 도입하여, 

샤넬 스타일의 핵심인 '활동성과 우아함의 결합'을 완성했다.


1926년, 코코 샤넬은 패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발명품 중 하나인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 L.B.D)'를 세상에 내놓았다. 

당시 검은색은 주로 상복으로 사용되던 색이었으며, 

밝고 화려한 색이 지배하던 패션계에서는 금기에 가까웠다.


샤넬은 VOGUE 잡지에 검은색 저지 드레스를 발표하며, 이 단순한 디자인을 '여성의 유니폼'으로 선언했다. 

검은색은 모든 것을 지운다. 

오직 스타일과 착용자의 본질만 남긴다. 

그녀에게 검은색은 고독, 냉정함, 그리고 궁극적인 우아함을 상징했다. 

이는 그녀가 오바진 수도원의 회색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야망의 색깔이자, 

보이 카펠을 잃은 후 스스로에게 부여한 강인함의 색깔이었다.


“코코 샤넬과 모델들의 단체 사진 Coco Chanel and models group photo”
공공 도메인

L.B.D.는 순식간에 클래식이 되었다. 

이 옷은 부유한 여성도, 중산층 여성도 입을 수 있었다. 

액세서리나 입는 사람에 따라 포멀하게도, 캐주얼하게도 연출이 가능했다. 

샤넬은 이 옷을 통해 "사치는 돈이 아닌, 취향에서 온다"는 그녀의 철학을 완성했다. 

그녀는 이 작은 검은 드레스를 통해 전통적인 계급 구분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1930년대 대공황과 함께 샤넬의 사업은 잠시 주춤했지만,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녀는 대부분의 부티크 문을 닫았다. 

하지만 파리 캄봉가 31번지의 아파트는 그대로 유지했고, 그곳은 곧 나치 고위 장교들의 사교장이 되었다.


샤넬의 인생 최대의 논란(논쟁)은 이때 발생했다. 

그녀는 나치 정보기관의 스파이인 한스 귄터 폰 딘클라게(Hans Günther von Dincklage, 게슈타포 요원이자 샤넬의 전쟁 중 연인)와 관계를 맺으며 파리의 최고급 호텔 리츠(Ritz)에 거주했다.


가장 충격적인 폭로는 그녀가 나치 스파이로 활동했으며,

 '모델후트 작전'(Operation Modellhut, 모델 모자 작전)이라는 비밀 임무를 맡았다는 것이다. 

샤넬은 연합군 고위 인사와 친분이 있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에게 접근하여 

독일과 영국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려 했다고 (전승) 알려져 있다. 

샤넬은 후일 이 모든 활동이 "개인적인 평화 사절 활동"이었다고 주장했으나, 

그 배경에는 유대인 파트너가 소유했던 샤넬 향수 회사의 지분을 되찾으려는 

개인적인 이해관계도 얽혀 있었다.


1945년, 31 rue Cambon에 있는 부티크 앞에 줄을 서서 N°5 향수를 구매하는 미군 병사들

그녀는 전쟁 기간 동안 파리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나치 점령 하에서 고통받던 수많은 프랑스인들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샤넬은 평생 자신의 생존 본능에 충실했고,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그 본능은 가장 어두운 방향으로 표출되었다. 

그녀의 성공을 지탱했던 냉정함이, 이 시기에는 도덕적 과실이 된 것이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샤넬은 즉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그녀의 석방 배경에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당시 영국 수상)의 개입이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썰)

처칠은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웨스트민스터 공작과도 관계가 깊었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과 코코 샤넬 — Winston Churchill with Coco Chanel"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 Gallica-BnF)

그러나 프랑스 대중과 패션계는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파리지앵들은 그녀를 '나치의 창녀'라고 비난했다. (논쟁) 

샤넬은 자신이 만들어낸 우아함의 왕국에서 가장 추악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샤넬은 이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스위스 로잔(Lausanne)으로 망명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10년 이상 고독한 은둔 생활을 보냈다. 

그녀는 파리를 떠났지만, 패션계에 대한 증오심은 커져갔다. 

'내가 떠난 파리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 보라.'


그녀가 없는 동안, 크리스티앙 디올(Christian Dior)이 '뉴 룩(New Look)'을 발표하며 패션계를 장악했다. 

뉴 룩은 풍성한 치마와 잘록한 허리, 패드 어깨를 특징으로 했으며, 

샤넬이 그토록 해방시키려 했던 코르셋과 비실용적인 여성성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였다. 

샤넬은 디올의 디자인을 "여성들을 다시 의자로 돌려보내는 것"이라며 맹렬히 비판했다.


스위스 로잔에서의 고독한 망명 생활은 10년이 넘게 이어졌다. 

샤넬은 매일 아침 파리에서 오는 패션 잡지들을 꼼꼼히 살폈다. 

'저들은 모두 가짜다. 여성들을 다시 드레스 속에 가두려 한다. 파리는 나 없이는 길을 잃었다.' 

그녀의 증오심은 그녀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1954년, 샤넬은 71세의 나이로 파리에 복귀를 선언했다. 

이 결정은 당시 패션계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전쟁 중의 나치 협력 스캔들(논쟁)로 인해 프랑스 언론과 대중은 그녀에게 냉소적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과거의 유령일 뿐이라고 조롱했다.


샤넬은 이 조롱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녀는 컴백 쇼에서 '샤넬 슈트(Chanel Suit)'의 정수를 선보였다. 

트위드 소재의 짧은 재킷, 몸에 편안하게 맞는 스커트, 그리고 체인 벨트와 금속 단추. 

이 슈트는 당시 유행하던 디올의 '뉴 룩'의 풍성함과 과장된 여성미에 대한 명확한 반박이었다.


1962년 파리에서 유명한 트위드 슈트와 투톤 슈즈를 입고 2.55달러 핸드백을 들고 있는 로미 슈나이더

프랑스 언론은 그녀의 쇼에 대해 "끔찍한 실패"라고 평가절하했다. 

그들은 그녀의 스타일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샤넬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파리가 아닌, 미국과 영국 여성들이 이 옷을 원한다는 사실을.


샤넬의 복귀 컬렉션은 프랑스에서는 실패했지만, 미국 시장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의 신흥 중산층 여성들은 샤넬 슈트의 실용성과 편안함, 그리고 은근한 고급스러움에 열광했다.


샤넬 슈트의 성공은 단순한 패션 트렌드가 아니었다. 

그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여성들의 사회 진출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여성들이 직장 생활을 하고, 비행기를 타고, 스스로 운전할 때, 

무거운 모자나 코르셋이 필요 없는 샤넬의 디자인은 해방의 유니폼이었다.


특히, 재킷 안쪽에 금속 체인을 넣어 재킷의 무게를 잡아주어 움직일 때 옷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 

그녀의 아이디어는 실용성을 궁극적으로 추구한 샤넬의 천재성이었다. 

그녀는 "여성들은 움직여야 한다"는 자신의 평생의 신념을 이 슈트에 완벽하게 구현했다.


1964년 10월 25일, 샤넬 모델들에 둘러싸인 이탈리아 여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정장과 투톤 펌프스를 착용한 모습
© 필립 가르니에 / 엘르

재기에 성공한 후에도 샤넬은 여전히 고독했다.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아이도 낳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연인들, 뮤즈들, 그리고 비즈니스 파트너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깊은 내면의 결핍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녀는 파리 캄봉가 31번지 위층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파트는 호화로웠지만, 침실은 없었다. 

그녀는 리츠 호텔에 방을 잡고 잠을 잤다. 

집은 일하는 곳이지, 쉬는 곳이 아니다. 

그녀에게 캄봉가 31번지는 그녀의 제국이었고, 그녀는 그곳에서 완벽하게 통제된 삶을 살았다.


말년의 샤넬은 더욱더 완고하고 까다로운 성격이 되었다. 

그녀는 젊은 모델들을 향해 "저런 천박한 옷은 당장 벗어라!"라고 고함을 쳤으며, 

자신의 아틀리에(Atelier, 작업실)에서 모든 것을 직접 통제했다. 

그녀는 자신의 고독과 완벽주의를 패션 제국에 그대로 투영했다.


1971년 1월 10일 일요일 저녁. 

샤넬은 리츠 호텔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87세였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하녀에게 "보라, 나는 이렇게 혼자 죽는다"였다고 (전승) 전해진다. 

평생을 수많은 사람과 스캔들에 둘러싸였던 그녀였지만, 

결국 고아원에서 느꼈던 그 고독과 함께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죽음 후, 샤넬 하우스는 잠시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유산, 즉 L.B.D., 샤넬 슈트, N°5 향수, 퀼팅 백, 

그리고 검은색과 흰색의 조합은 이미 클래식이 되어 있었다.


마이크 드 둘멘의 가브리엘 샤넬, 1957
1955년, 가브리엘 샤넬은 골드 체인이 달린 유명한 퀼팅 핸드백을 제작

코코 샤넬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기억되지만, 

후대의 평가는 냉정함과 찬사가 뒤섞여 있다.


그녀의 가장 큰 공로는 여성들을 코르셋과 불편함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그녀는 여성복에 남성복의 실용성을 가져와 현대 여성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었다. 

샤넬은 패션을 권력이자 도구로 사용했으며, 이는 20세기 여성의 자립심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샤넬 전시회 실루엣 이미지” / "Coco Chanel exhibition silhouette"
CC BY-SA 3.0  위키미디어 공용

하지만 그녀의 나치 협력 스캔들(논쟁)은 영원히 그녀의 이름 뒤에 그림자로 남았다. 

샤넬은 평생 자신의 출신 성분과 가난을 부끄러워했고,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한 맹목적인 생존 본능이 때로는 도덕적인 선을 넘어서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녀의 인간적인 가장 큰 과실로 지적된다.


결국 코코 샤넬은 '가브리엘'이라는 가난한 고아를 죽이고, 

'코코'라는 냉정하고 야망 가득한 브랜드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패션을 통해 결핍을 극복하고, 고독을 힘으로 바꾼 여성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녀가 만들어낸 모든 단순하고 실용적인 디자인 아래에는, 

오바진 수도원의 회색 벽에 갇히지 않으려 했던 한 여성의 처절하고 고독한 싸움이 영원히 새겨져 있다.


이 글은 전기·전시 도록·언론자료 등 신뢰 가능한 2차 사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전쟁기 활동·비밀 교섭 등 일부 사안은 연구자 견해가 갈려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Born in 1883 and raised in an orphanage, Coco Chanel turned scarcity into a radical aesthetic: clean lines, jersey dresses, the little black dress, the Chanel suit, and No. 5. Backed by Boy Capel, she built an independent brand, then faced enduring controversy over a wartime liaison with a Nazi agent and battles over perfume rights. 
Exiled to Switzerland, she returned in 1954 with the tweed suit. 
Chanel freed women from corsets; her legacy blends liberation with moral ambigu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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