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안 된다, Nunca Más" 포드 팔콘이 훔쳐간 3만 개의 이름: 아르헨티나 군정재판의 날 (The Trial of the Juntas)

 

부에노스아이레스, 1985년의 목요일: 국가가 훔친 이름들을 찾아서


[1976년, 긴 밤의 시작]


9년 전, 1976년 3월 24일. 

아르헨티나는 군부 쿠데타로 시작된 긴 밤을 맞았다. 

군부는 이 폭력적 장악을 ‘국가 재편 과정(El Proceso)’이라 불렀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와 '사회 부패'를 척결하는 구원자라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곧, 조금이라도 정권에 반하는 모든 시민을 ‘불량 부품’으로 정의하고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살생부가 되었다.


[법정 앞, 긴장과 침묵]


1985년 늦은 겨울, 부에노스아이레스. 

법정 시계가 아홉 번을 알릴 때, 

엘사 로드리게스는 목에 두른 흰 스카프를 다듬었다. (가상·복합 피해자 증언 기반 인물).


하얀 천 위에 수놓인 수많은 이름들. 

남편 라울과 딸 마리아,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등록되지 못한 손주의 이름 없는 자리까지. 

이 스카프는 그녀의 족보이자, 기소장이자, 마지막 신앙이었다. 법정 계단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스트라세라!” 누군가 외치자, 뒤이어 군정 재판의 수석 검사인 

줄리오 세사르 스트라세라(Julio César Strassera)의 이름이 메아리쳤다. 

군중은 곧바로 “누카 마스!”를 따라 외쳤다. (Nunca Más, '다시는 안 된다'-국가 폭력 단절 슬로건)


"『Nunca Más』 표지 | ‘Nunca Más’ (Never Again) report cover"
위키미디어 공용

바람은 묘했다. 

여름의 습기와 겨울의 한기가 섞인 냄새. 

먼 바다의 소금기와 오래된 서류 캐비닛에서 나는 종이와 철 냄새가 한데 뒤섞여 밀려들었다.


엘사는 주머니에서 접힌 사진을 꺼냈다. 

흑백 인화지 중앙에서 딸 마리아가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1977년 5월, 

포드 팔콘(Ford Falcon, 납치·이송에 널리 쓰인 승용차)이 골목에 들어선 순간 이후로, 

엘사의 시간에서 강제로 잘려 나간 조각이었다.


"녹색 포드 팔콘, 국가테러의 아이콘 | Green Ford Falcon associated with kidnappings"
위키미디어 공용


[납치의 밤: 소거의 기술과 낙인]


그날 밤을 엘사는 지금도 생생하게 '듣는다'. 

급정거 소리. 문이 열리는 금속음. 그리고 어둠을 담은 듯한 검은 자루.


복면을 쓴 남자 셋이 “문 열어!” 하고 내지르며 들이닥쳤다. 

사다리처럼 생긴 플라스틱 케이블 타이가 순식간에 족쇄가 되었다. 

작은아들이 비명을 지르자, 한 남자가 티셔츠로 아이의 입을 막았다.


엘사는 마리아의 손목이 뒤로 꺾이는 각도를 보았다. 

인체가 저런 방식으로 접힐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집안의 책들이 바닥에 흩어졌고, 마리아가 대학 노조 활동 때문에 최근 감시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그때, 대학 강의 노트 ‘라틴아메리카 사회사’라고 쓰인 파일이 군화 밑에서 부서졌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죄명'이자 '불량 부품'이라는 낙인이었다.


팔콘의 뒷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주행. 이웃들은 커튼 뒤에서 숨죽였다. 골목은 다시 텅 비었다. 

이 모든 행위는 '이웃의 안전'을 지키는 방식인 동시에, 증언을 제거하는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을 엘사는 수년 뒤에야 깨달았다.


[재판의 얼굴: '나는'을 회수하라]


재판정 문이 열렸다. 

피고석에 앉은 이들은 군복 차림이 아니었다. 정장 차림의 노인들처럼 보였다.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Jorge Rafael Videla, 1976–81 군사정권 수반),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사라(Emilio Eduardo Massera, 해군 총사령·군정 핵심)…. 이름만으로도 무게가 내려앉는 남자들.


"군사평의회 재판: 피고들의 법정 입장 | Trial of the Juntas defendants entering courtroom"
Telam 제공(공용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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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는 속으로 되뇌었다. ‘사람의 얼굴이 면책이 될 수는 없다.’


마침내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훗날 교과서의 문장이 될 말이 이 오전의 공기를 가르며 흘렀다. 

“존경하는 재판장님들, Nunca Más.”


엘사는 그 짧은 문장에 담긴 분노와 절망, 그리고 수많은 문서철의 무게를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구체적인 몸이 필요했다. 

마리아의 살과 뼈, 라울의 체온, 이름 없는 아이의 물성(物性). 

국가가 언어를 탈취해 간 시대에, 그녀가 되찾고 싶은 건 문장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오전 증언 첫 순서는 배가 불러온 채 끌려가 패트롤카 안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한 여성이었다. 

'체포 → 지하 → 가명 → 번호 배정 → 눈가리개 → 방치 → 이동.' 

그녀의 간결한 서술이 곧 잔혹함 그 자체였다.


엘사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에스마(ESMA, 해군기술학교)라는 약어가 법정 공기를 지배했다. (대표적 비밀 구금·고문 시설) 

지하의 '카푸차'(Capucha, ESMA의 눈가리개·격리실 별칭) 방.


"ESMA 기억의 장소 전경 | ESMA Memory Site, former clandestine detention center"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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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대에 선 여성은 목소리를 낮췄다. 

“지하에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오직 숫자만 있었습니다.” 

그녀는 눈가리개를 한 채 벽에 기댔을 때의 숨 막히는 침묵을 묘사했다. 

천장이 너무 낮아 앉을 수도, 일어설 수도 없었다. 

그녀의 번호는 47이었다. 

곁에서는 희미한 고함 소리만 들려왔다.


'수브마리노'(Submarino, 물고문 기법), 전기 고문. 

전극은 손목이나 귀, 성기에 닿았고, 고문관은 피해자를 '불량 부품'이라 불렀다. 

ESMA, 올림포, 라 페를라 등 약 300곳의 비밀 구금·고문 시설. 

엘사는 주머니 속 묵주를 움켜쥐었다. 

오늘은 법정이 신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정오의 광장: 거짓 족보를 걷어내다]


정오, 휴정 시간. 

엘사는 복도 끝 창가로 걸었다. 

유리창 너머로 플라사 데 마요(Plaza de Mayo,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광장)가 흰 점들로 반짝였다.


목요일 정오마다 광장을 도는 5월 광장 어머니회(Madres de Plaza de Mayo, 실종자 어머니 인권 단체). 

그 가운데는 아수세나 비야플로르(Azucena Villaflor, 어머니회 창립 멤버·1977년 납치·살해)의 얼굴이 있었다. 

국가가 어머니를 납치했던 것이다.


"비야플로르 추모 표식 | Ashes/monument to Azucena Villaflor"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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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는 복도 끝에서 오래된 친구 노라를 만났다. 

서로의 스카프를 만져본 뒤, 노라는 낮게 속삭였다. 

“내 손주의 사진을 입양 가정에서 봤다는 소문이 돌았어. 군인 가정이라고 했지. 혹시, 혹시 말이야… 네 손주가 살아 있다면?”


엘사는 노라의 손을 꼭 쥐었다. 

어머니의 어머니들-5월 광장 할머니회(Abuelas de Plaza de Mayo, 강탈된 신생아·손주 찾기 단체)-는 실종 임신부들의 아이를 찾기 위해 국립 유전자 은행(BNDG, Banco Nacional de Datos Genéticos)을 만들었다.


엘사는 말했다. 

“과학이 신의 자리를 대신할 순 없지. 하지만 우리가 만든 유전자 은행은 언젠가 그들의 거짓 족보를 걷어내는 것은 도울 수 있을 거야. 우리가 광장을 걷는 이유도, 언젠가 그 아이들이 '이름을 되찾았다'는 뉴스를 듣기 위함이니까.” 

그 믿음이 엘사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오후의 진실: 바다를 믿지 않으려는 이유]


오후가 깊어갈수록, 숫자가 법정으로 들어왔다. 

실종자 9천? 1만2천? 3만? 통계의 변증법이 시작되면, 현실은 종종 품위 있게 축소된다. 

엘사는 말했다. 

“한 명이면 충분히 크다.”


그러나 기록이 필요했다. 

코나다프(CONADEP, 국가실종 진상조사위원회)의 보고서, 「누카 마스」. 실종 신고 누락. 공포로 인한 침묵.


그리고 '소거의 기술'—'죽음의 비행'(Vuelos de la muerte). 

약물로 의식을 잃게 한 뒤, 바다를 '증거 인멸 처리장'으로 쓰는 방식. 

항공 병력의 일부는 그것을 “절차”라고 불렀다고 했다.


"단거리 수송기 쇼트 스카이밴 PA-51 | Short Skyvan PA-51 linked to death flights"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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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는 그 단어를 입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다. 

그 단어를 인정하는 순간, 부활은커녕 유해조차 찾을 수 없는 절망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은 땅 위에서 걷지만, 국가는 그녀들의 아이들을 하늘에서 바다로 지워버렸다. 

엘사는 스스로에게 '마리아는 육지에 있다. 반드시.'라고 되뇌었다. 

그 부정(否定)이야말로 그녀가 광장에 나올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 

(후일, 한 해군 장교가 1990년대 법정과 언론 앞에서 그 밤의 문 열림을 증언한다. 진실은 대개 너무 늦게 도착한다.)


검사의 책상 위엔 또 다른 파일이 있었다. 

1978년 월드컵 사진. (1978 FIFA World Cup, 군정의 정상성 선전 무대) 

경기장의 파도, 국가의 합창. 

한편 도시 반대편 ESMA 지하에서는 신문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축구의 함성은 지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독재의 가장 교활한 재능은 정상성의 연출이다.


"1978 월드컵 개막식의 모누멘탈 | Estadio Monumental during 1978 World Cup"
PD-AR-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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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변론과 봉인: 끝이 아닌 시작]


증언대에 선 전 해군 하사, 가명 “다니엘”. 

그는 마치 공장의 작업 공정을 설명하듯 말했다. 

“우리는 명단을 받았고,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곳으로 갔습니다. 차량은 포드 팔콘이었고….”


엘사는 그의 어조에서 면책을 위한 수동태를 들었다. 

그는 주어를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명령을 받았고' '절차를 따랐고' '인도를 했고'. 

그는 ‘나는’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엘사는 속으로 외쳤다. 

“당신의 ‘나는’을 회수하라.” 

개인의 1인칭이 바로 책임의 첫 단추이기 때문이다.


해가 기울 무렵, 변호인의 반론은 늘 그렇듯 '법리의 향수'를 풍겼다. 

“당시의 상황은 준(準)내전… 공공질서의 회복을 위한 긴급조치….” 

엘사는 눈을 감았다. 

'공공질서'라는 말이 골목길에서 포드 팔콘으로 변속되는 과정을 그녀는 직접 보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어떤 단어들은 범죄의 무기고(武器庫)에 진열된다.


마침내 검사의 최후변론. 

스트라세라는 철제 난간을 가볍게 쥐었다. 

목소리는 건조했고, 그 건조함이야말로 국가의 범죄를 건조하게 입증하려는 노력이었다. 

“우리는 복수하려 하지 않습니다. 처벌은 국가의 책무이자, 법의 존엄을 회복하는 최소한입니다.”


"검사 스트라세라 초상 | Prosecutor Julio C. Strassera portrait"
CC BY 2.0(Flickr 경유·공용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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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용서는 누구의 권리인가. 

유해가 없는 어머니에게 용서를 요구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조바심일 뿐이었다. 

그녀는 기억과 법을 믿었다. 

기억이 법정에 들어올 때, 법은 비로소 사람의 얼굴을 가진다.


저녁, 선고. 

피고들 중 상당수가 유죄를 선고받았다. 

엘사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선고는 시작일 뿐이었다. 

이 나라는 잠시 후 ‘최종 처리법’·‘복종법’(Punto Final/Obediencia Debida, 1986–87 제정된 면책성 법률)을 만들어 범죄를 봉인하려 할 것이고, 

다시 시민들이 그 봉인을 깨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재판이 문을 닫자, 밖에서 또 다른 문이 열렸다. 

광장으로 가는 길. 흰 스카프들이 별빛처럼 움직였다.


"마요 광장 바닥의 흰 스카프 표식 | Mothers of Plaza de Mayo white scarf marker"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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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현재형 동사]


광장에 도착해 원을 그리며 걷기 시작했을 때, 엘사는 모든 가능성들을 동시에 애도했다. 

ESMA의 어딘가에서, 차고에서, 혹은 바다 위에서 사라진 마리아의 마지막 흔적. 

애도는 진실을 향한 현재형 동사다. 

어머니들은 말 대신 발걸음으로 동사를 만들었다. 

걷는다, 반복한다, 잊지 않는다.


"어머니들의 행진 배너 | Mothers of Plaza de Mayo banners"
위키미디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창밖, 낡은 녹색 포드 팔콘 한 대가 주차돼 있었다. 

범죄의 도구가 시간이 지나 도시 풍경의 일부가 되는 순간, 그것이야말로 망각의 첫 장면이다. 

엘사는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 쪽지에 썼다. 

“차대 번호를 기록하라.” 

기록은 개인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작은 박물관이다.


밤이 완전히 내렸다. 

엘사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역사는 선고로 끝나지 않는다. 역사란 우리가 내일도 광장을 돌 때 붙잡고 가는 것.”


그녀는 불을 끄기 전, 흰 스카프를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었다. 

그 천은 낮 동안 외친 구호보다 더 무겁게 방 안에 걸려 있었다. 

‘기억·진실·정의’(Memoria, Verdad y Justicia, 민주화 이후 국가 인권 어젠다 표어).


"바릴로체 중앙광장의 흰 스카프 | White scarf marker in Bariloche"
CC BY 2.0 (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다음 목요일, 그녀는 다시 광장으로 갈 것이다. 

광장을 도는 원은, 국가가 더 이상 사람을 지울 수 없는 새로운 경계선을 도시의 지도에 그려나간다.


수십 년간의 목요일이 쌓여 만든 소리. 

침묵을 걷어내는 시민의 소리. 

범죄에는 공범이 있었고, 침묵에도 공범이 있었다. 

그러나 기억에는 공범이 없다. 

각자가 자기 몫을 들고 광장에 나오는 것, 그게 전부다.


꿈속에서 그녀는 바다를 본다. 

그 바다는 더 이상 증거 인멸의 장소가 아니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면, 파도가 응답한다. 

국가는 이름을 지웠지만, 어머니들은 부름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나라가 다시 인간이 되는 첫 번째 방법이라는 사실을, 

엘사는 오늘 하루 동안 다시 배웠다.


이 글은 공개 사료와 신뢰 가능한 2차 자료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주요 참고: CONADEP 보고서 Nunca Más(1984), 1985년 ‘군정재판’ 기록과 검찰 최후변론,

 ESMA Museo Sitio de Memoria 전시·자료, 5월광장 어머니회·할머니회 공개 증언, 

Horacio Verbitsky El vuelo, Marguerite Feitlowitz A Lexicon of Terror 등. 

일부 세부는 증언·기록 간 차이가 있어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류 제보를 환영합니다.


Buenos Aires, 1985: Elsa Rodríguez—a composite victim—clutches a white scarf as prosecutor Julio César Strassera opens the Trial of the Juntas: “Nunca más.” Testimony charts disappearances—Ford Falcons, ESMA’s capucha/submarino, death flights over the Río de la Plata—against the staged normality of the 1978 World Cup. 
Mothers and Grandmothers of Plaza de Mayo turn grief into evidence; CONADEP’s Nunca Más records it. 
Verdicts, then amnesties, later voided (2003–05).
 Memory, truth, justice end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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