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의 심장, 퇴계 이황: 사단칠정 논변과 경(敬) 수양, 성학십도 해설 (Toegye Yi Hwang)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강(江)과 경(敬)


아버지의 꿈과 막내아들

1501년(연산군 7년) 조선(朝鮮)의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계리(溫溪里, 이황이 태어난 곳) 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이황(李滉, 자는 경호景浩) 였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이식(李埴) 이었고, 어머니는 춘천 박씨(박씨, 현부인으로 유명함) 였다. 

이식이 마흔 살에 진사시에 합격하던 해, 어머니 박씨는 공자(孔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고, 이 꿈을 기려 대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 불렀다. 

그러나 기쁨은 길지 않았다. 

이황이 태어난 지 불과 일곱 달 만에 아버지 이식은 세상을 떠났다 .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춘천 박씨는 아버지가 없는 환경에서도 어린 이황과 그의 형제들을 현명하게 훈도했다. 

특히 형 이해(李瀣, 온계溫溪) 는 훗날 이황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학자였다.


이황 표준영정


소년 이황은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 안동부사를 지낸 인물) 로부터 『논어(論語)』 를 배웠다.

14세경부터는 혼자 독서에 심취했는데, 특히 도잠(陶潛, 중국 진나라 시인) 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사람됨을 흠모했다. 

이 시기는 조선 사회에서 성리학(性理學) 이 국가의 도덕 지상주의(道德至上主義)를 구현하기 위한 핵심 사상으로 자리 잡는 과정이었으며, 학자들은 요순시대(堯舜時代)와 같은 완전한 도덕적 인격체가 되기 위한 치열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20세를 전후하여 이황은 『주역(周易)』  공부에 지나치게 몰두한 탓에 건강을 크게 해쳤고, 이후 평생토록 병약한 사람(다병多病) 이 되었다.


(18세, 온계리 토계 근처의 서당)

이해(李瀣): "황아, 『주역』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은 좋으나, 자네 몰골이 말이 아니네. 얼굴에 핏기가 없고 기침이 잦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학문이 사람을 상하게 하겠어." 

이황: (기침하며) "형님. 이(理)와 기(氣)의 오묘한 조화를 어찌 하루아침에 알 수 있겠습니까. 모든 존재가 이와 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 않습니까?  몸의 기(氣)가 허한 것은 잠시일 뿐, 이(理)의 순수함을 깨닫는다면 자연히 보전될 것입니다." 

이해: "이가 형이상자(形而上者)로서 원리라면, 기는 형이하자(形而下者)로서 그릇과 같다네 . 그 그릇(몸)이 깨지면 어찌 담을 이(理)가 남아있겠는가! 주자(朱熹)께서도 '천하에 이 없는 기가 없고 기 없는 이가 없다' 고 하셨지만, 자네는 너무 이(理)만 좇아 기(氣)를 소홀히 하는 듯하네."


청년 유학자와 두 번의 상처

어머니 박씨의 간절한 소원 에 따라, 이황은 관직에 나아가는 길을 택했다. 

1527년(중종 22년), 27세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1528년 성균관(成均館, 국립대학)에 들어가 소과인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

1528년, 28세의 이황에게 첫 번째 큰 슬픔이 찾아왔다. 

초취(初娶) 김해 허씨(허씨 부인) 가 둘째 아들을 낳은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1528년, 아내의 장례 후

이황은 상처(喪妻)의 아픔 속에서도 사위(壻)로서의 도리를 잊지 않고, 홀로 된 장모를 극진히 모시며 처가집의 대소사를 끝까지 챙겼다. 

그러나 두 어린 자녀를 돌보며 학문에 전념하기란 무리가 따랐다. 

당장 후처를 들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관습에 따라 첩(妾) 을 한 명 들였다. 

이 첩은 살림을 잘 꾸리고 어린 두 아들을 친어머니처럼 정성껏 돌보았기에, 이황은 훗날 자녀들에게 생모와 계모를 차별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1530년, 이황은 30세가 되던 해 재취(再娶) 안동 권씨(권씨 부인) 를 맞이했다. 

이 결혼에는 슬픈 배경이 있었다. 

권씨 부인의 친정은 사화(士禍, 선비들의 화)의 참혹함을 겪었다. 

그녀의 조부는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 때 폐비 윤씨(廢妃 尹氏)에게 사약을 가져간 죄로 유배 후 교살(絞殺)당했고, 부친 권질(權質)  역시 기묘사화(己卯士禍) 후 무고(誣告)로 예안 땅에 유배되어 있었다. 

권씨 부인은 이러한 참극을 어린 나이에 겪은 충격으로 정신질환(이상 정세)을 앓고 있었다.

유배 중이던 권질은 이황의 사람됨을 눈여겨보고는 그를 불러 병약하고 정신이 혼미한 자신의 딸을 부탁했다.


권질: "경호(景浩) 공의 사람됨은 익히 알고 있네. 이 몹쓸 세상에서 내 딸을 맡아줄 이는 공밖에 없소. 죄인의 딸이라, 그리고 몸도 온전치 못하니 아무도 색시로 데려가려 하지 않는다네. 부디 죄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게나." 

이황: (심사숙고 끝에) "예, 고맙습니다.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께 승낙을 받고 예를 갖추어 혼례를 올리도록 하겠으니 마음 놓으시고 기력을 잘 보존하십시오."


이황은 권씨 부인을 맞이한 후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그녀를 이해하고 아끼며 임지(任地 근무하는곳)가 어디든 동행하며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권씨 부인의 행동은 가끔 예상 밖이었다.


1530년대, 종가宗家에서의 제사 날

일가친척들이 모인 종가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상이 차려졌다. 

권씨 부인: (느닷없이) "이 배가... 너무 먹고 싶구나." (차려진 제사 음식인 배를 집어먹으며, 떨어진 배를 치마 속에 숨겼다.) 

일가친척들은 경악했고, 이황의 큰형수(형 이해의 아내)가 권씨 부인을 엄하게 질책했다. 

이황: (태연하게 웃으며) "형수님, 죄송합니다. 제 아내가 철이 없어 예절에 벗어난 행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상께서는 철부지를 귀엽게 여기실망정 손자며느리의 행동에 노여워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 

(형수에게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는 제가 잘 가르치겠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황의 따뜻한 이해와 너그러움에 형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형수: "동서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야. 서방님 같이 좋은 분을 만났으니."


또 한 번은 이황이 상가(喪家)에 조문(弔問)을 가려 할 때, 해어진 흰색 도포(道袍)를 부인에게 꿰매 달라고 부탁했다. 

권씨 부인: (큰 빨간 헝겊으로 도포를 큼지막하게 기워왔다.) 상가에 도착하자 예학(禮學)에 밝은 지인이 흰 도포에 빨간 헝겻 조각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했지만, 이황은 아무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이황은 이처럼 부족함이 있는 권씨 부인을 끝까지 아끼고 존중했다.


이러한 이황의 태도(차별 없는 인애) 는 당시 엄격했던 유교 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일화였다. 

그는 첩에게서 난 아들 이적(李寂) 을 호적에 올리고, 후손들이 적서(嫡庶) 차별을 받지 않도록 족보에 구별을 두지 못하게 했다. 

또한 자녀들에게도 생모와 계모를 차별하지 말 것을 가르쳤다.


1546년(명종 원년), 결혼한 지 16년 만에 권씨 부인은 난산(難産)으로 사망했고, 태어난 아이도 며칠 후 죽었다. 

이후 이황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계모의 무덤 곁에 시묘살이를 하였고, 이황 역시 건너편에 암자를 짓고 1년여를 기거했다.


사림파와 을사사화

1534년 문과에 급제한 이황은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시작으로 관계(官界)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 시기는 조선 중기로, 사화(士禍)가 반복되면서 사대부와 권력자들이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치열하게 대립하던 때였다.


1545년 명종(明宗) 즉위년에 을사사화(乙巳士禍) 가 발생하여 이황은 한때 탄핵을 받아 파직되기도 했으나 복직되었다. (을사사화는 윤원형 등의 외척 세력이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으로, 이 시기 정치는 문정왕후와 외척 윤원형에 의해 좌지우지되었고 불교가 진흥되는 등 유학이 위축되었다).

이황은 이러한 혼란한 조정에 뜻을 두기보다는 학문과 강학에 집중하고자 했다. 

호(號) 퇴계(退溪) 는 '시내 위로 물러나 머무르다'는 뜻의 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로 , 그의 정치적 태도를 대변한다.


주리철학의 정립과 인간적 고뇌

1547년(명종 2년), 이황은 안동대도호부사 등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 토계(兎溪, 토계는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이며, 이황이 퇴계로 개명한 토계兎溪는 물러날 퇴退 자를 써서 호로 삼았다)  인근에 양진암(養眞庵) 을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 

이때 비로소 『주자전서(朱子全書)』 를 얻어 탐독하며 주자학(朱子學)을 심화시켰고 , ‘동방의 주자’, ‘이부자(李夫子)’ 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1548년, 단양군수 시절)

1548년 1월, 이황은 충청도 단양군수(丹陽郡守) 로 부임했다. 

여기서 그는 짧지만 강렬한 인연을 만난다. 기녀 두향(杜香) 이었다.


기생 두향과의 만남

두향은 단양 관아에 소속된 기녀였지만, 이황의 고매한 인품과 학문에 반했다. 

단양군수로 부임한 47세의 노학자 이황과 젊은 기녀 두향 사이의 애틋한 감정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알려진 이야기였다.


(단양 관아, 퇴계가 부임한 직후)

두향: (매화 한 가지를 꺾어 들고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서며) "군수님, 춘군(春君)께서 오셨으니, 이 가지를 올립니다. 맑은 기운이 가득하니, 군수님의 학문과 닮았습니다." 

이황: (두향의 맑은 눈빛을 보며) "매화는 꽃 중의 군자(君子)요. 그대는 꽃을 귀히 여길 줄 아는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두향: "두향이라 합니다. 군수님께서 머무시는 동안, 매화가 외롭지 않도록 돌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깊은 정을 나누기 시작할 무렵,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그의 형 이해(李瀣) 가 충청도 관찰사(觀察使)로 발령받은 것이다. 

형제가 같은 도(道)에서 관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피제(相避制, 친족 간 동일 지역 관직 임명 금지) 라는 규정 때문에, 이황은 곧바로 경상도 풍기군수(豊基郡守) 로 옮겨야 했다.


이황: (두향에게) "내가 이곳을 떠나야 한다. 하늘이 준 인연이건만, 관직의 길이 우리를 허락하지 않는구나. 부디 몸을 잘 보전하고, 매화가 필 때마다 나를 기억해다오." 

두향: (눈물을 삼키며) "군수님. 제가 비록 천한 몸이나, 군수님에 대한 마음만은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평생 이 마음을 지켜 살겠습니다."

이황은 단양을 떠났고, 두향은 이후 이황에 대한 절개(節槪)를 지키며 재가(再嫁)하지 않았다.


사액 서원의 모범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이황은 학문적 성과를 정치적으로 실현했다. 

그는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 백운동서원을 세운 인물) 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지원했고, 임금 명종(明宗)의 친필 사액(賜額, 임금이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림)을 받아 소수서원(紹修書院) 으로 개명했다. 

이 사건은 사액 서원(국가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은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으며 , 사림파(士林派)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황은 퇴청 후에도 향약(鄕約)과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장려하고 보급하는 한편, 문하생들을 교육하여 성리학자들을 양성했다.


신분 초월한 제자

이황의 인간적인 면모는 제자 교육에서도 드러났다. 

안동에 머물던 시절, 그는 자신의 강학 내용을 몰래 엿듣던 대장장이 배순(裵純) 을 발견했다.


(안동, 도산서당 인근)

이황: "배순아. 자네가 매번 이곳을 찾아 나의 강연을 몰래 듣는 것을 알고 있다. 어찌하여 떳떳이 들어와 배우지 않는 것이냐?" 

배순: (고개를 숙이며) "소인(小人)은 천한 장인(匠人)이라, 감히 선비들이 배우는 곳에 발을 들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황: "학문은 귀천이 없다. 내가 강연한 내용을 말해보라. 하나라도 틀림이 없으면 나의 제자로 삼으리라."


도산서원 전경

배순은 이황의 강연 내용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대답했다. 

이황은 그의 학문적 열정에 감복하여 신분을 뛰어넘어 배순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배순은 이후 열심히 학문에 정진했으며, 이황이 사망하자 3년 상(三年喪)을 치르고, 손수 이황의 철상(鐵像)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일화를 남겼다.


재산 논란: 결핍 의식과 축재

한편, 이황의 청렴함과 소박한 삶의 모습(도산서당의 단칸방 구조 등) 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대 지방 유지 중 꽤나 잘 사는 축에 속했다는 논란이 있다. 

그는 367명의 노비(노비 문서를 남김)를 소유했고, 전답 규모도 3,000두락에 가까웠다 (일반 부유한 지방 지주의 평균은 노비 100여 명, 전답 300~500두락). (논쟁)

일부 학자들은 그가 평생 넉넉지 않다고 여겼던 ‘결핍’ 의식이 오히려 재산 증식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 분석하기도 한다. 

그는 청렴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가문 유지와 학문 연구를 위한 경제적 기반을 적극적으로 마련했던 지주(地主) 이기도 했다.


이황: "나는 늘 넉넉지 않다. 가뭄이나 흉년이 들 때면 어찌 이 많은 식솔을 보전할까 염려스럽다 ." (겉옷 한 벌을 사양하면서도, 재산 관리에 철저했던 이중적 면모는 후대에 비판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


이기이원론과 사단칠정 논쟁

1560년(명종 15년), 이황은 고향 토계동(兎溪洞)에 도산서당(陶山書堂) 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으로 고쳤다. 

그는 이곳에서 7년간 독서, 수양, 저술에 전념하며 많은 문하생들을 지도했다. 

도산서당은 방, 마루, 부엌이 모두 단칸으로, 그의 소박함과 최소한의 공간에서 학문을 이루고자 하는 철학이 담겨 있었다 .

이 시기, 명종(明宗)은 끊임없이 이황을 조정으로 부르려 했다. 

이황이 계속 거절하자, 명종은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 그 경치를 그려오게 하고, 그것을 통해 이황을 흠모했으며, 신하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 어진 이를 불렀으나 오지 않음을 탄식함)’ 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철학적 심화: 이기이원론

이황은 유가사상의 원천인 주자학(朱子學)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성리학으로 대성시킨 동양철학의 태두였다. 

그의 사상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을 전제한다. 

그는 우주 만물이 이(理)와 기(氣)라는 두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이(理)는 순선무악(純善無惡) 한 절대적 가치이고, 기(氣)는 가선가악(可善可惡) 한 상대적 가치라고 규정했다.


조선 유학사 최대의 논쟁: 사단칠정론

이러한 이기이원론을 심성(心性) 문제에 적용하면서, 그는 당대 최고의 청년 학자였던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 과 8년에 걸친 (1559년~1566년)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 사칠 논변) 을 벌였다.

기대승은 1558년 10월 과거에 급제한 직후, 32세의 열혈청년으로 58세의 대유학자였던 이황을 찾아가 논쟁을 시작했다.


(1559년, 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황: "선비들 사이에서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전해 들었습니다. 나의 생각에도 스스로 전에 한 말이 온당하지 못함을 병통으로 여겼습니다마는, 그대의 논박을 듣고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

이황은 정지운(鄭之雲)이 주장했던 "사단은 이에서 생기고 칠정은 기에서 생긴다"는 구절을 "사단은 이의 발함이요. 칠정은 기의 발함이다"라고 고쳤는데, 여기에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기대승의 주장: 사단(四端,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마음씨)과 칠정(七情, 희로애락애오구喜怒哀樂愛惡懼의 감정)은 모두 정(情, 감정)이며, 이(理)와 기(氣)는 본래 혼재되어 분리할 수 없다 . 하늘의 달(理)과 물에 비친 달(理+氣)처럼, 사단과 칠정은 이(理)가 기질에 떨어진 뒤의 일로, 마치 물에 비친 달빛과 흡사하다.


(1559년 8월, 고봉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 중)

기대승: "그런데 지금 하늘의 달은 달이라 하고 물에 비친 달은 물이라 한다면 어찌 그 말에 편벽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략) 더구나 이른바 사단ㆍ칠정이란 것은 바로 이(理)가 기질에 떨어진 뒤의 일로서 마치 물에 비친 달빛과 흡사한데, 칠정은 그 빛에 밝고 어두움이 있는 것이나, 사단은 특별히 밝은 것입니다. 칠정에 밝고 어둠이 있는 것은 진실로 물의 청탁 때문이고 (기), 절도에 맞지 않는 사단은 빛은 비록 밝지만, 물결의 움직임이 있는 것을 면하지 못한 것(기)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런 도리를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이황의 재반론: 이황은 이(理)가 발(發)하는 순수한 사단(四端)과, 기(氣)가 발하여 선악이 섞일 수 있는 칠정(七情)을 구분하여, 이발이주기(理發而主氣) (이(理)가 발하고 기(氣)가 이를 따른다)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논쟁의 가치: 오늘날 지식인의 귀감

이 논쟁은 8년 동안 격렬하게 이어졌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나이나 경력,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순수하게 학문적인 내용만으로 토론을 이어갔다. 

이황은 26세나 연하의 후배에게도 극존칭의 서두로 편지를 시작했으며, 서로에게 권면하고 질정하며 학문을 절차탁마(切磋琢磨, 학문이나 인격을 갈고닦음)하는 태도를 보였다.


후대 학자들은 이들의 논쟁 태도를 "오늘을 살아가는 지식인, 학자, 정치 가, 언론인, 논객들에게 정말 귀감이 된다" 고 평가했다.


다른 학자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

한편, 이황은 당대의 거유였던 남명 조식(曺植, 1501-1572) 에 대해서는 박한 평가를 내렸다. 

이황은 조식이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하며, 높고 뻗뻗한 선비는 중도(中道)를 구하기 어렵다 고 비판했다.

이황은 또한 같은 사림파의 스승이었던 김종직(金宗直) 에 대해서도 "학문에 몸담은 사람이 아니라 화려한 사장을 즐기는 문장 잘하는 선비였을 뿐" 이라는 인색한 평을 남겼다. 

이황에게는 주리론(主理論) 에 기반한 도덕적 원리의 탐구와 실천(경敬 사상)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조식이나 김종직처럼 행동이나 문장력에 치우친 학자들을 비판한 것이다.


인간적 냉정함

이황이 학문적 원리(理)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인간적인 도리를 소홀히 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1548년 이황의 둘째 아들이 요절한 후, 그는 며느리가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자 재가를 허용하고 남의 눈을 피해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당시 엄격한 유교 사회에서 파격적인 인애(仁愛)에 기반한 결정이었다 ).

그러나 훗날 그의 손자 내외가 한성부(서울)에 살 때, 그의 증손자가 고열로 위독하여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황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결국 증손자는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전승)

이러한 일화는 이황이 원칙과 수양을 중시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가까운 가족에게 인간적인 온정이나 현실적인 도움을 베풀지 못한 과실로 해석되기도 한다.


군주의 스승, 경(敬)의 완성

1567년(명종 22년), 명종이 갑자기 죽고 선조(宣祖) 가 1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68세의 노대가(老大家) 이황은 선왕(명종)의 행장을 짓는 직책을 맡았고, 신병 때문에 귀향을 원했으나 선조의 간곡한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시 한양으로 향했다.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

이황은 조정에 머물며 어린 선조가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우국충정에서  두 가지 핵심 저술을 바쳤다.


1.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1568년 8월) : 17세의 어린 임금에게 가르치는 제왕의 길이었다. 특히 성학(聖學, 유학) 을 독실히 하고, 군주 스스로 도덕과 학술을 밝혀 인심을 바르게 하며, 마음을 살피고 삼가는 경(敬) 의 자세를 강조했다.


이황: "폐하, 백성의 지도자가 된 분의 한 마음은 온갖 징조가 연유하는 곳이고,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온갖 욕심이 잡다하게 나타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해 방종이 따른다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에 해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 위기가 오고 말 것입니다 . 그러니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삼가는 애틋한 마음가짐으로 날마다 생활하셔야 합니다 ."

선조: (소를 읽고 감명 받아) "경의 도덕이야말로 고인들에 비교하더라도 짝할 자가 적다. 이 6개 조항은 참으로 천고의 격언(千古의 格言)이요 당금(當今)의 급무(急務) 이다. 내 비록 하찮은 인품이지만 어찌 가슴에 지니지 않을 수 있겠는가 ."


2. 『성학십도(聖學十圖)』 (1568년 12월) : 군왕의 학문 요체를 10개의 도표와 해설로 설명한 필생의 역작이다 . 이황은 이 책을 통해 성리학이 국가 이념임을 명확히 밝혔고 , 군주가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사물의 변화를 주의 깊게 살피고, 경(敬)을 내면화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황은 노환 때문에 귀향을 거듭 간청하며, 1569년 3월 마침내 선조의 허락을 받고 서울을 떠났다. 

이때 선조에게 고봉 기대승을 통유(通儒, 학문이 통달한 선비) 로 추천했다. 

이황은 비록 고봉과 치열하게 논쟁했지만, 학문적 능력만큼은 그가 당대 최고임을 인정했기에, 영남 제자들을 제쳐두고 호남의 고봉을 천거하는 대유학자의 면모를 보였다.


(1569년 3월, 한강東湖에서의 이별)

퇴계를 전송하러 온 고봉 기대승이 이별의 시(詩)를 바쳤다.


고봉 기대승: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는 한강수야 떠나시는 우리 선생 네가 좀 말려다오 강변에서 닻줄 끌고 이리저리 배회할 제 떠나심에 애 간장 가득 찬 이 시름을 어이하리 .

이황: (고봉에게 화답하며 매화 시 8수를 건네준다) 배 위에 앉아 있는 인물들 참으로 명류(名流)이니 돌아가고픈 마음 하루 종일토록 매어있네 이 한강수 떠다가 벼룻물로 써서 끝없는 작별 시름 베껴 보려네.


이황필적 - 퇴도선생유첩


최후의 순간과 유언

이황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학문에 전념했으나, 1570년 11월 종가의 시제(時祭) 때 무리를 하여 병세가 악화되었다.

1570년 음력 12월 8일(양력 1571년 1월 13일) 아침, 그는 임종 직전까지도 평소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말했으며, 침상(寢床)을 정돈하게 한 후, 부축을 받아 단정히 앉은 자세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역책易簀). 

향년 70세였다 .

선조는 3일간 정사(政事)를 폐하고 조회를 하지 않으며 그를 애도했다. 

사후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문순(文純) 이 내려졌다.


이황은 생전에 묘소(墓所)를 화려하게 꾸미지 말고 작은 비석 하나만 세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에 따라 묘소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도산으로 물러나 만년을 숨어 산 진성이씨의 묘)'라는 10자 비문만 새겨진 작은 비석이 세워졌다.


퇴계의 유언과 고봉의 비문

이황은 유언에서 특별히 언급했다.

이황: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다만 조그만 돌을 쓰되... 이런 일을 만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한다면, 예컨대 기고봉(奇高峯) 같은 사람에게 부탁한다면 이는 필시 사실에도 없는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세상의 웃음을 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황의 우려대로 비문 제작에 문제가 생기자 결국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짓고 썼다.

고봉은 비문에서 자신이 퇴계의 유언을 지키지 못한 이유를 밝혔으며, 묘비에는 이황이 생전에 원했던 간결한 묘호와 함께 고봉이 지은 행적이 새겨지게 되었다. (퇴계의 유언은 그가 평생 경계했던, 제자들의 지나친 찬양을 경계하려 한 것인데, 역설적으로 그가 가장 신뢰하는 학자인 고봉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되었다.)


이황의 묘비 탁본


사랑하는 기생의 죽음

한편, 단양을 떠난 후 재가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던 기생 두향(杜香) 은 이황의 부음(訃音)을 듣고 큰 슬픔에 잠겼다. 

그녀는 충주 강선대(忠州 江仙臺)에서 충주호(忠州湖)로 몸을 던져 투신(投身) 했다. (전승)

그녀는 이황과의 인연을 귀하게 여겼고, 이황의 죽음과 함께 삶을 마감함으로써, 조선 시대 유학자의 사생활 속에서 일어난 비극적이지만 순결한 사랑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이황의 후손들은 매년 두향의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제사를 지낸다).


후대 평가 및 문화적 영향

이황은 조선 성리학에서 이이(李珥, 율곡)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중추적 학자가 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훗날 동인(東人)과 남인(南人) 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황의 학문, 특히 그의 경(敬) 사상과 주리철학 (퇴계학)은 조선 중기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큰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일본군이 약탈해 간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등이 일본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퇴계학은 에도(江戶)시대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 초기에 정착하여 유교를 관학(官學)으로 삼는 데 영향을 주었으며, 나아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원동력 이 되었다고 분석된다. 

이는 존왕(尊王)과 대의(大義), 애국(愛國), 우국(憂國) 정신을 고양시키는 유학이었다. 

일본의 주자학 이해는 퇴계를 통해 실현되었으며, 기몬학파(崎門學派)와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 를 형성했다.

퇴계학은 동아시아를 넘어 미국 워싱턴대에서 『성학십도』가 영역되는 등 서방 세계에도 활발히 알려졌다. 

중국 개화기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 는 『성학십도』를 복각하고 찬시(贊詩)를 쓰며 이황을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 라고 호칭하며 성인(聖人)으로 찬사했다. 

이는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라는 평가를 받게 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68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이황의 초상이 1,000원 권 지폐의 첫 주인공으로 도안된 이래, 오늘날까지 그의 얼굴이 실려 있다. 

그의 철학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실천적인 삶과 괴리된 이론에 새로운 자극을 주며, 특히 교육열이 높은 한국 사회에서 그의 교육관과 공부론이 주목받을 잠재력이 있다.


이 글은 사료 기반에 서사적 재구성을 더했습니다. 

대화체·심리 묘사는 문학적 장치이며, 사실로 단정되지 않습니다.

사실관계가 특히 논쟁적인 지점: 출생 연도(1501/1502설), 노비·전답 규모 수치, 두향(杜香) 관련 일화, 일부 가정 내 일화(적서·상가 도포 일화 등), 일본 성리학·에도막부·메이지와의 “직접적 인과” 서술. 해당 부분은 전승·해석 차가 큽니다.

용어 정리: 사액서원·소수서원, 「무진육조소」·『성학십도』, 사단칠정 논변(이황–기대승) 등은 핵심 사료로, 해석은 학파·연구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학설 소개 시 균형을 지향했으나, 주리론/이기이원론 요약에서 단순화가 있습니다. 

정밀 학술 용례는 원전·주석서를 병행해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Yi Hwang (Toegye, 1501–1570) rose from Andong to become Joseon’s leading Neo-Confucian. 

Frail yet relentless, he passed exams, served briefly, then withdrew to teach at Dosan Seowon. 

His Four-Seven debate with Gi Dae-seung refined a dualism of li and qi. 

Summoned by young King Seonjo, he offered the Six-Article Memorial and Ten Diagrams, centering rule on disciplined reverence (gyeong). 

Beyond legend and the paradox of wealth and austerity, he died in 1570; his legacy shaped Korean thought and Tokugawa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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