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평가: 철혈재상의 리얼폴리틱, 독일 통일 3전쟁과 사회보험의 탄생 (Otto von Bismarck)


오토 폰 비스마르크: 철과 피의 그림자 (Otto von Bismarck: The Shadow of Iron and Blood)


황량한 고향과 방탕한 청년 (1815–1862)

1. 혼돈 속에서 태어나다: 쇤하우젠의 모순

1815년 4월 1일,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 쇤하우젠(Schönhausen, 비스마르크의 고향)의 황량한 영지에서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가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5세기부터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에 거주했던 지방 호족, 융커(Junker, 프로이센의 토지 귀족) 계층이었다.

오토의 아버지는 칼 빌헬름 페르디난트 폰 비스마르크(Karl Wilhelm Ferdinand von Bismarck)로, 가정적이었지만 우유부단한 성품을 지녔고, 명목상의 예비역 장교 지위만 가진 흔한 지주에 불과했다.

반면 어머니 빌헬미네 루이스 멘켄(Wilhelmine Luise Mencken)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부르주아(Bourgeois, 상공업 계층) 지식인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의 외가 집안은 법학 교수와 대사를 역임한 명망 있는 가문이었으며, 어머니는 심지어 훗날의 황제 빌헬름 1세(Wilhelm I)와도 소꿉친구였다.


이러한 이질적인 배경 (봉건 귀족과 지식인 부르주아)으로 인해 부부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화려하고 강단 있었으나 가정에는 무심했고, 아버지는 아내에게 눌려 지냈다. 

어린 오토는 이러한 가족적 모순 속에서 일찍이 기숙학교로 보내졌고, 명절에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어린 오토는 학교보다는 언어와 고전에 심취하여, 훗날 그가 보여줄 독일 제일의 저술가로서의 문학적 자질과 외교관으로서의 뛰어난 언어 능력(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의 기반을 다졌다.


7세 때의 비스마르크


2. 괴팅겐의 방탕아: 스캔들과 결투

17세가 된 비스마르크는 아버지의 희망을 거부하고 괴팅겐 대학교(Göttingen Universität, 당시 하노버 왕국에 위치)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의 대학 생활은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캠퍼스의 낭만 대신, 그는 술, 총, 그리고 주먹으로 매일을 채웠다. 

그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총 25번의 결투(Duell) 를 벌여 악명이 높았고, 한번은 친구들이 자신을 빼놓고 파티를 열자 잠긴 문을 총으로 쏴서 열고 파티에 참가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방탕한 청년은 각종 도박과 사치에 눈이 멀어 빚더미에 앉았고, 결국 괴팅겐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베를린 대학교(Berlin Universität)로 편입해야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비스마르크는 관료의 길을 택했으나, 규칙적인 관료 생활은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과 맞지 않았다. 

그는 관료직을 "식료품점 주인이 자기 일을 껄끄러이 생각하는 것처럼 싫어했다"고 자신의 미국인 친구 존 모틀리(John Lothrop Motley, 대학 동창이자 미국 외교관)에게 편지로 털어놓았다.

관료 생활 중에도 그의 스캔들은 끊이지 않았다. 

아헨(Aachen)에서 근무할 당시, 그는 빚을 지고 몇 주 동안 무단으로 결근했으며, 심지어 17세의 영국 귀족 처녀 꽁무니를 쫓아 스위스까지 넉 달 동안이나 무단 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결국 관료직을 짤렸다. 

이러한 일탈들은 그가 얼마나 관료제 사회에 염증을 느꼈는지 보여준다.


비스마르크 초상 1871년

3. 농장주 비스마르크와 신앙적 전환

벼랑 끝에 몰린 비스마르크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포메른 지방의 큐르츠(Külz) 영지에서 농장 경영에 몰두했다. 

그는 대학 시절 배운 지식을 이용해 당시 최신 기술로 만든 비료를 도입하고 사탕수수 재배와 공장까지 만들면서 수완 좋게 경영에 성공했고, 대학 시절 진 도박 빚을 모두 청산했다. 

그는 농부들과 격의 없이 사투리로 대화했을 정도로 농업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 무렵, 비스마르크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준 여인이 등장한다. 

그는 신앙심이 깊었던 친구의 아내 마리 폰 타텐(Marie von Thadden)을 만났다. 

마리는 당시 무신론에 가까웠던 이신론(理神論)적 입장을 취하던 비스마르크에게 신앙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고, 그녀의 중개로 친구였던 요하나 폰 푸트카머(Johanna von Puttkamer)를 소개받았다.

마리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비스마르크는 요하나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펼쳤고, 마침내 1847년, 만혼(萬婚) 취급받던 33세의 나이에 요하나와 결혼했다. 

비스마르크는 결혼 전에 루터교(개신교)로 개종했는데, 이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프로이센 귀족 사회에 완벽히 편입하는 동시에, 그의 격렬한 정치 활동에 안정적인 버팀목이 되어줄 평생의 반려자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1857년, 비스마르크의 아내 요하나 폰 푸트카머.

4. 프랑크푸르트의 오만: 프로이센의 위신 투쟁

1847년 정계에 입문한 비스마르크는 1848년 3월 혁명(Märzrevolution,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봉기)이 터지자 극우 왕당파(왕의 권력을 지지하는 보수파)의 입장에서 혁명 진압을 주장했다. 

그는 "국왕이 이런 나약한 태도를 보인다면 차라리 퇴위해야 한다!"고 극언하며 자신의 영지 농민 40명을 무장시켜 베를린으로 진격하려 했을 정도로 강경한 반동주의자였다.

혁명 실패 후, 비스마르크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눈에 띄어 1851년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Frankfurt Bundestag, 독일 연방의회)의 프로이센 대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독일권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Austria,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Preußen, 북독일의 개신교 군주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 집중하며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했다.

이때 벌어진 유명한 일화가 '위신 투쟁(Prestige Struggle)' 이다. 

당시 연방 회의장에서는 의장국인 오스트리아 대표만이 회의 석상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관습이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대표에게 정중하게 불을 청하며 말했다. 

"각하, 프로이센 대표는 회의 석상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오스트리아 대표는 관습을 언급하며 당황했지만, 비스마르크는 개의치 않고 불을 붙여 당당하게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는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프로이센이 더 이상 오스트리아의 아래에 있지 않다는 정치적 선언과 같았다. 

결국 바이에른 왕국(Bayern) 대표를 비롯한 다른 독일 국가 대표들까지 흡연에 동참했으며, 심지어 비흡연자들까지 '조국을 위해 희생'하며 담배를 피우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일화는 비스마르크가 보여준 강력한 국가적 자부심(staatliche Egoismus)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그는 1859년 러시아 제국(Russland) 주재 공사, 1862년 프랑스(Frankreich) 주재 공사로 활동하며 국제 정세와 각국의 이익을 분석하는 외교적 역량을 쌓았다. 

그는 특히 러시아 차르(Tsar)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와 친분을 맺어 양면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외교적 관점과 대러 친선의 중요성을 확립했다.


철혈 연설과 세 번의 전쟁 (1862–1871)

5. 군제 개혁과 수상의 등장: 시대의 부름

1861년, 빌헬름 1세(Wilhelm I)가 프로이센 국왕으로 즉위했다. 

국왕은 군비를 확대하고 징병제 기간을 연장하는 군제 개혁을 추진했으나, 자유주의(Liberalismus) 세력이 다수였던 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축소하고자 예산 승인을 거부하며 맞섰다. 

당시 독일 지역의 민중은 1848년 혁명에서 명확히 드러났듯이 하나의 통합된 국가를 열망하고 있었지만, 국왕은 민중이 주도하는 통일은 거부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국왕과 의회 사이의 이 헌법 투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국왕은 왕위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으며, 국방부 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Albrecht von Roon)은 이 위기를 돌파할 인물로 비스마르크를 천거했다.

1862년 9월 23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수상(Kanzler, 칸츨러) 겸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6. "철과 피": 비스마르크의 강철 선언

수상 취임 직후인 1862년 9월 30일, 비스마르크는 의회 예산 심의위원회에 서서 독일 역사를 통째로 뒤흔들 ‘철혈 연설(Eiserne Kanzler Rede)’ 을 했다.

“헌법에는 의회에 대한 해산권을 12번까지 규정하고 있지만 이는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중략) 법에는 거부권의 행사 횟수를 제한하고 있지는 않으나, 몇몇 의원분들께서는 상비군 무용론을 통과시키려 하십니다. 헌법이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명예롭기까지 한 것입니다. (중략) 비록 군비가 우리의 빈약한 몸에 너무 큰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이로운 한,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지려는 정열을 가졌으며, 또 감히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비스마르크는 연설의 핵심을 이어갔다. 

"독일이 착안해야 할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군비인 것입니다. 빈 조약 이래 우리의 국경은 정상적인 국가에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더 이상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1848년과 1849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당면한 문제들은 오직 철과 피(Eisen und Blut), 곧 병기(兵器)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스마르크에게 건배 - 철권재상 비스마르크의 다음 생일을 맞아 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 연설로 그는 '철혈 재상'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이상적인 가치 추구나 헌법의 진보성이 아니라, 국가 생존을 위한 경제력과 군사력이었다. 

1848년 혁명의 실패(이상주의의 좌절)를 경험한 비스마르크에게 통일(시대정신)은 현실정치(Realpolitik)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는 의회의 예산 불승인에도 불구하고 긴급권을 발동하여, 관료와 군대를 장악하고 조세 징수를 강행했다. 

이로 인해 의회의 예산권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자유주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처럼 비스마르크는 합법성이 결여된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독일 통일 이후에도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7. 세 번의 전쟁, 그리고 외교적 곡예

비스마르크의 외교는 "전쟁은 외교의 강압적 수단일 뿐"이라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의 관점을 따랐으며, 그의 통일 목표인 소독일주의(Kleindeutschland,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를 달성하기 위해 전쟁은 불가피했다.


첫 번째 불꽃: 프로이센-덴마크 전쟁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가 독일 연방 소속이었던 슐레스비히 공국을 덴마크에 편입하려 하자,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연합하여 덴마크를 공격했다. 

이는 독일 민족주의를 이용해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나중에 오스트리아와 충돌할 새로운 빌미를 만드는 교활한 전략이었다. 

이 전쟁의 공로로 비스마르크는 국왕 빌헬름 1세로부터 백작 칭호를 받았다.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두 번째 불꽃: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66년, 형제 전쟁) 소독일주의(Kleindeutschland)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Österreich)와의 전쟁이 숙명적이었다.

비스마르크는 개전에 앞서 철저한 외교적 고립 작전을 펼쳤다. 

그는 러시아 제국(Russland)과는 친선 관계를 이용해 중립을 확보했고, 이탈리아 왕국(Italien)에게는 오스트리아령 베네치아(Venezia) 합병을 조건으로 공수동맹을 맺었다. 

프랑스(Frankreich)의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에게는 모호한 약속을 하여 중립을 지키도록 유도했다.

프로이센은 몰트케(Helmuth von Moltke, 참모총장)의 지휘 아래 7주 만에 압도적으로 승리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비스마르크는 군부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을 점령하거나 영토를 할양받는 등 굴욕적인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격렬히 반대했다. 

불필요한 굴욕은 유럽 열강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며, 오스트리아를 미래의 동맹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세상을 다 정복했다고 믿지 않고 우리의 요구를 과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노력에 걸맞은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

격노한 빌헬름 1세(Wilhelm I)는 "이 신 사과를 깨물고 수치스러운 평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분노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사퇴를 불사하겠다는 위협까지 하며 결국 황제의 뜻을 꺾었다.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배제시키는 프라하 조약(Praguer Frieden) 이 체결되었고, 프로이센 중심의 북독일 연방(Norddeutscher Bund) 이 결성되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세 번째 불꽃: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년, 보불전쟁) 남부 독일 국가들을 통합하고 프랑스(Frankreich)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기 위한 마지막 전쟁이었다.

1870년, 스페인(Spanien)의 왕위 계승 문제로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왕족인 레오폴트 공이 왕위 후보에서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국왕 빌헬름 1세는 이를 수락했지만, 이 내용을 담은 전보(Telegrame)를 받은 비스마르크는 교묘하게 편집하여 프랑스 대사의 오만함에 국왕이 격분한 것처럼 뉘앙스를 바꾸어 언론에 내보냈다.


"젊은 시절 셰익스피어와 바이런 시에 심취했던 문학청년의 실력"이 국가를 전쟁으로 몰고 가는 구실을 만든 것이다. 

독일 여론은 격분했고, 프랑스는 이를 치욕으로 받아들여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다. 

전쟁의 결과, 몰트케가 이끄는 독일 연합군은 세단(Sedan)에서 나폴레옹 3세를 사로잡으며 대승을 거두었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는 당시 파리 시민들이 프랑스의 승리를 철석같이 믿었다가 충격에 빠졌던 현실을 전했다.


나폴레옹 3세가 비스마르크와 함께 세단을 떠나다

제국의 관리자, 보수와 진보 사이 (1871–1888)

8. 독일 제국의 탄생과 외교적 그물망

1871년 1월 18일, 프랑스의 자존심이 서린 베르사유 궁전(Versailles)의 '거울의 방(Galerie des Glaces)'에서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의 탄생이 선포되었고, 빌헬름 1세가 황제(Kaiser)로 즉위했다.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초대 수상(Reichskanzler)이 되었고, 중부 유럽의 강대국이 수립됨에 따라 유럽의 국제 외교 체제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를 비스마르크 체제(Bismarck System)라 부른다.


빌헬름 1세를 독일 황제로 선포 (독일 제국 선포)

통일 이후 프랑스로부터 알자스-로렌(Elsaß-Lothringen 행정구역)을 할양받은 것은 비스마르크 본인이 반대했음에도 군부의 의견에 밀려 추진된 과실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이 결정이 프랑스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적개심과 복수심을 안겨주어, 독일은 평생 동안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하는 외교적 숙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고 유럽 대륙의 평화와 현상 유지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프랑스의 고립을 위해 여러 동맹과 협약의 그물을 쳤는데, 이를 차륜 동맹(Hub-Spoke Alliance)이라 불렀다.


1873년,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을 묶는 3제 동맹(Dreikaiserbund)을 성립시켰고, 1882년에는 프랑스의 튀니지 확보에 불만을 품은 이탈리아 왕국(Italien)을 끌어들여 삼국 동맹(Dreibund) 을 형성했다. 

그의 목적은 프랑스가 유럽의 어떤 강대국과도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철저히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체제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는 지속적인 갈등의 불씨가 있었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汎Slavism)를 내세워 남동유럽(발칸반도)으로 진출하려 했고, 이는 같은 지역의 남슬라브인들을 지배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정치적 이해관계상 필연적인 충돌을 낳았다.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유럽 열강들이 견제에 나섰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피하고자 1878년 베를린 회의(Berliner Kongress)를 주재하며 '공정한 중재자(Honest Broker)'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중재를 통해 발칸반도의 불안정성을 조절하고 유럽의 힘의 균형(Mächtegleichgewicht)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독일이 자신들의 편을 들지 않고 중립적 위치를 고수한 것에 큰 배신감을 느꼈고, 이로 인해 3제 동맹은 깨지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훗날 이 복잡한 발칸반도 문제를 언급하며,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 이 결국 유럽 전체를 집어삼킬 전쟁의 불씨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베를린 의회, 1878년

9. 두 개의 내부 전쟁: 종교와 노동

독일 제국의 내부 통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 비스마르크는 두 개의 내부 전쟁을 선포했다.


첫 번째 전쟁: 문화 투쟁 (Kulturkampf, 1871-1878) 

비스마르크는 독일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던 로마 가톨릭 교회(Römisch-katholische Kirche)가 새로 탄생한 제국에 완전히 충성한다고 믿지 않았다. 

특히 가톨릭 신자들은 국왕(프로이센 황제)과 교황(Papst) 모두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들을 "프로이센 사회의 이방인"으로 여겼다.

그는 교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문화 투쟁' 에 돌입했다. 

1873년 '오월법(Maigesetze)'을 제정하여 성직자 임명과 종교 교육을 국가가 통제하도록 했고, 1875년에는 민사혼(民事婚 종교적 의식 없이 정부 기관의 공무원이 집행하는 법적으로 인정된 결혼)을 의무화했다.

그러나 이 강경 정책은 가톨릭 신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고, 이들은 가톨릭 중앙당(Zentrumspartei) 을 중심으로 뭉쳐 의회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중앙당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실리주의적 판단 아래, 1878년부터 새 교황 레오 13세와 타협을 시작하여 1887년에 대부분의 반(反)가톨릭 법안을 철회했다.


두 번째 전쟁: 사회주의와 복지 국가의 탄생 

비스마르크가 다음으로 겨냥한 것은 혁명적 노선을 지지하는 노동자 세력과 그들의 정당(독일 사회민주당, SPD)이었다. 19세기 산업화(Industrialisierung)가 진행되면서 노동자들은 질병, 폐질, 실업, 은퇴 등의 위험에 대해 아무런 보호 조치가 없는 상태였고, 이는 사회주의 세력 확산의 주요 배경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노동자 계층을 향해 '채찍'과 '당근' 이라는 이중 정책을 사용했다.


[채찍] 1878년 사회주의자 진압법(Sozialistengesetz) 을 제정하여 사회주의 활동을 억압했다.

[당근] 그러나 그는 경찰력에 의한 탄압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인식했고, 노동자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이들을 위계적인 국가 체제 내에 통합시키고자 국가 주도의 사회보험제도(Sozialversicherung)를 도입했다. 

독일은 선진국인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늦게 산업화를 시작했음에도, 세계 최초로 이 제도를 도입했다.


1883년 노동자 질병 보험법, 1884년 산업재해 보험법(산재 보험), 그리고 1889년 노동자 노령 및 폐질 보험법이 차례로 통과되었다. 

이 세 가지 사회보험법은 국가가 노동자 복지를 위한 국가 정책을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사회 문제의 해결은 더 이상 개인의 자선 수단에 의존할 수 없으며, 오직 국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독일에서 이러한 국가 주도형 복지 정책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봉건적 체제와 가부장적 국가주의(국가 권력이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의무라는 전통)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달리 독일에서는 사회적 위험에 대한 개인의 책임보다는 국가의 책임이 강조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통해 노동자 계층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고, 동시에 이들의 정치적 권리 확대를 제한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동자들에 대한 강경 탄압과 회유 정책을 동시에 쓰는 전략을 현대에 와서 '당근과 채찍(Zuckerbrot und Peitsche)' 이라 부른다.


한편, 비스마르크는 정치와 법률 제정 과정의 추잡함을 빗댄 유명한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소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아서, 보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말은 19세기 후반 열악했던 소시지 공장의 비위생적인 상태를 비유한 것으로, 정치나 법률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추악한' 뒷면을 비판할 때 현대에까지 인용된다. 

비록 이 말이 비스마르크에 의해 직접 언급되었다는 주장은 후대(1930년대)에 나왔지만, 이는 그의 현실 정치(Realpolitik)에 대한 냉소적인 통찰 을 잘 보여준다.


10. 사생활의 그림자: 눈물과 스캔들

강철 같은 철혈 재상의 이미지와 달리, 비스마르크는 사적으로는 매우 감수성이 풍부하고 눈물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만성적인 신경쇠약과 과식증에 시달렸으며, 말년에는 이로 인한 소화기 문제로 고생했다.

그의 감정적 기복은 정치적, 개인적 갈등에서 자주 표출되었다. 

그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후 빌헬름 1세(Wilhelm I)가 오스트리아에 굴욕을 주려 하자, 격노한 황제에게 울면서 사표 제출 을 위협하여 뜻을 관철시켰다. 

심지어 아들이 결혼하는 문제에 반대할 때도 울면서 자살하겠다고 위협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외교적 수완 뒤에는 개인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는 47세 때 러시아 대사로 근무하면서 25세의 러시아 대사 부인과 불륜을 저질렀는데, 아내와 러시아 대사가 이 스캔들을 대인배처럼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큰 골칫거리가 되었을 것이라 전해진다.


그는 또한 개를 매우 좋아했다. 

특히 그레이트 데인 종인 술탄이라는 개를 키웠는데, 때로는 협상 테이블 오른편에 개를 놓고 상대방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한번은 상대방 외교관이 흥분해서 주먹을 휘두르자 술탄이 비스마르크를 공격하는 줄 알고 그 외교관에게 덤비려 한 일화도 있다.


Otto von Bismarck 와 그의 개 Tyras II und Rebecca  프리드리히스루, 1891년 7월 6일

그는 전쟁을 겪으며 인간적인 고통을 느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이는 비스마르크가 전쟁을 외교의 도구로만 여겼을 뿐,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전쟁광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사이다.


권좌의 몰락과 파멸의 예언 (1888–1898)

11. 황제의 이별, 세대 간의 충돌

1888년 3월, 비스마르크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이자 군주였던 빌헬름 1세 황제가 91세의 고령으로 사망했다.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독선적인 정책에 시달리면서도 결국 그를 신뢰했으며, "비스마르크 아래에서 황제 노릇 하기 참 힘들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노황제의 죽음에 큰 상심에 빠졌다.

황위는 자유주의 성향의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에게 계승되었으나, 그는 후두암으로 인해 99일 만에 단명했다.


곧이어 1888년, 빌헬름 2세(Wilhelm II) 가 2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젊고 혈기 왕성하며 자신감이 넘쳤던 황제는 비스마르크의 낡고 보수적인 정치와 독단적인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두 사람의 충돌은 세대 차이와 정책 방향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1. 외교 정책 충돌: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현상 유지와 프랑스 고립에 집중했으나, 빌헬름 2세는 독일의 세계적인 위상 강화를 목표로 하는 '신항로 정책(Neue Kurs)'을 추진하려 했다.

2. 사회 정책 충돌: 빌헬름 2세는 사회민주당과의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우호적인 사회 정책을 구상했으나, 비스마르크는 여전히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강경 탄압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황제는 비스마르크에게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대화를 하는지 일일이 문서로 보고하라는 모욕적인 명령을 내리며 그를 견제했다. 

28년 동안이나 비스마르크의 독선적인 내각 하에서 시달리던 대중들과 관료들, 특히 외무성의 고위 관료들은 비스마르크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


1890년 3월 18일, 결국 빌헬름 2세는 독일 제국 초대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전격 해임했다. 

1862년에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임명된 지 근 30년 만에, '황제의 영원한 수상'으로서의 그의 정치 경력은 막을 내렸다.


12. 선장을 버리다: 문화적 유산과 파국 예언

비스마르크의 갑작스러운 사임은 독일 내부의 정치적 변화는 물론, 유럽 전체의 미래를 뒤흔드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은 영국의 풍자 만화가 존 테니얼(John Tenniel,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화가)이 그린 'Dropping the Pilot(선장을 버리다)' 이라는 만화로 상징된다. 

거대한 선박(독일 제국)의 키를 놓아주고 퇴장하는 노련한 선장(비스마르크)과 그를 내려다보는 젊은 황제(빌헬름 2세)의 모습은, 위대한 지도자의 퇴장과 그 후계자의 오만함 을 보여주는 역사적 아이콘이 되었다.


테니얼 풍자만화 「Dropping the Pilot」(1890)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후, 그의 외교 정책은 곧바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양면 전쟁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맺은 재보장 조약(Rückversicherungsvertrag) 갱신을 거부했다. 

이는 러시아가 곧바로 프랑스 공화국과 동맹(러불동맹)을 맺어, 독일을 양쪽에서 압박하는 구도(포위망) 를 초래했다.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의 독단적이고 위험한 외교 행보(영국을 향한 군함 건조 경쟁 등)를 보며 독일의 미래를 예언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죽고 20년 후 예나 전투가 있었다.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죽고 20년 후에도 큰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비스마르크가 사망한 1898년 이후 불과 16년 뒤인 1914년, 유럽은 발칸반도의 '저주받을 바보짓'에 불이 붙어 제1차 세계 대전(Erster Weltkrieg)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비스마르크는 1898년 7월 30일 프리드리히스루(Friedrichsruh, 함부르크 근교)에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을 해임한 빌헬름 2세에게 충성심을 보이고 싶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며, 묘비에 "여기 빌헬름 1세(Wilhelm I)의 충직한 신하가 묻혀 있다"라고 새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비스마르크의 석관. 오른쪽은 아내의 석관

13. 후대의 평가와 비판

비스마르크는 수백 년간 분열되어 있던 독일권의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독일 통일(Reichsgründung)을 이룩한 주역이자 명품 정치가로 재조명된다. 

그는 주어진 과제(통일)에 필요한 정책을 정확히 파악하고 최상의 해결책을 사용했으며, 냉철한 현실정치(Realpolitik)의 길을 걸었다.

무엇보다 세계 최초로 국가 주도의 사회보험제도 (노동자 질병 보험법, 산업재해 보험법, 노령 및 폐질 보험법)를 도입하여 현대 복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또한 그는 식민지 확보에 회의적이었고, 국내의 사회 기반과 과학 기술 강화에 집중하여 이후 독일이 두 번의 패전 이후에도 부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스마르크에 대한 비판적 시각 역시 명확하다.

1. 민주주의 발전 저해: 그는 여론의 공감대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고, 오로지 순수한 국가 이성(staatliche Egoismus)에 따라 움직였다. 그의 독점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는 독일의 정치 문화를 낙후시켰으며,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가 국민들에게 "정치 교육을 전혀 못 받은" 상태를 물려주었다고 비판했다.

2. 외교 체제의 취약성: 비스마르크 체제는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는 지속 불가능한 곡예 외교였으므로, 그의 실각 후 파탄이 날 수밖에 없었다.

3. 군국주의적 문화: 비스마르크의 강성 행보가 뿌려놓은 군국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 문화는 결국 빌헬름 2세의 독단과 나치즘(Nazism)의 범죄를 용인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심각한 비판도 제기된다. 즉,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뿌린 씨가 자라나는 시간을 제공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강자의 책임과 시민의 자율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드라마틱한 생애는 지도자의 능력과 국가의 운명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그는 통일이라는 위대한 목적을 위해 철과 피라는 비합법적 수단까지 사용했지만, 통일 후에는 오히려 가장 노련한 평화의 관리자가 되어 유럽의 전쟁을 억제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이는 "악법과 훌륭한 관리들을 가지고서는 지속적인 통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최고의 법이 있더라도 무능한 관리가 함께한다면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그의 냉철한 인식의 반영이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독일을 현대적인 복지 국가의 시초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의 독단은 시민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억압했습니다. 

그는 국민들을 보호했지만, 정치에 참여하는 주체로 성장시키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한 개인의 천재적인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체제는 그 인물이 사라지거나(퇴임) 무능한 후계자(빌헬름 2세)가 등장할 때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가치는 위대한 한 명의 지도자가 아닌, 깨어있는 다수의 시민에게서 나옵니다. 

비스마르크는 통일이라는 단기적 효율성을 달성했지만, 그가 남긴 권위주의적 문화는 장기적으로는 독일을 파국의 길로 이끄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던져줍니다.

바보는 경험을 통해 배우고, 현명한 사람은 남의 경험을 통해 배운다.

우리는 비스마르크의 천재성을 인정하되, 그의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과실까지도 역사적 거울로 삼아 배워야 합니다. 

국가의 안전과 번영은 오직 힘(철과 피)으로만 유지될 수 없으며, 모든 시민이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비판하고 참여할 수 있는 건강하고 자율적인 정치적 토대 위에서 비로소 지속 가능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 글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 장문 서사입니다. 

1차 사료와 통설을 중심으로 하되 일부 해석·평가가 포함됩니다.

연표·지명·직함 표기는 독일어 원어 병기 원칙을 따랐으나 통용 표기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관계 수정 제안과 보완 자료 환영합니다. 

인용 시 출처 표기를 권장합니다.

폭력·전쟁 서술이 포함되어 독자 주의가 필요합니다.


Otto von Bismarck’s life traces a realist who forged German unity through three wars, then tried to preserve peace with a dense web of alliances. 

From riotous youth and estate management to the 'blood and iron' speech, he bent parliament, engineered wins over Denmark, Austria, and France, and created the empire at Versailles. 

As chancellor he built pioneering social insurance yet fought Kulturkampf and crushed socialists. 

Dismissed by Wilhelm II, he foresaw Balkan sparks igniting a wider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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