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연대기: 가야의 후손, 황산벌 승리, 항당 전쟁, 경주의 유산 (Kim Yu-sin)


A.D. 532년, 금관가야(金官加耶, 현 김해 지역).

빗줄기가 쏟아지는 산성 아래로 신라군(新羅軍)의 칼날이 번뜩였다.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 사료에 따라 ‘구해(仇亥)’로도 표기)은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항복을 택했고, 그의 핏줄은 신라의 변방으로 흩어졌다.

왕족으로서의 긍지는 무너졌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신라의 변방 귀족이라는 이름뿐이었다.

그러나 그 핏속에는 잃어버린 왕국을 되찾고, 나아가 더 큰 세상을 꿈꾸는 뜨거운 불씨가 남아 있었다.

이 불씨는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金庾信)에게로 이어질 운명이었다.


"김유신 영정(후대 전승본) | Portrait of General Kim Yu-sin (later reproduction)"
Public Domain(위키미디어 업로드, 원본 영정 전승작)
위키미디어 공용

A.D. 595년, 신라 만노군(萬弩郡, 현 충청북도 진천).

이곳은 신라의 서쪽 변경으로, 백제와의 국경이 맞닿아 늘 전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김유신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서현(金舒玄, 신라의 장군, 가야 왕족 후예)은 변방의 태수(太守)였고, 

어머니 만명부인(萬明夫人, 신라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은 신라의 진골(眞骨) 귀족 출신이었다.

김유신의 유년기는 불안정했다.

가야계라는 태생적 한계와 신라 왕실의 복잡한 정체성 속에서 그의 가족은 늘 위태로웠다.

특히 아버지 김서현이 만명부인과 혼인하는 과정 자체가 스캔들이었다.

만명부인의 아버지인 숙흘종(肅訖宗)은 가야계 후손과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두 사람은 도망치듯 야합하여 김유신을 낳았다. 

(이 ‘도피혼’ 색채는 야사적 요소가 강하며, 

핵심은 ‘가야계–왕족’ 경계 혼인이 정치·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이 배경 때문에 김유신은 성장 과정에서부터 신라 주류 귀족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멸시를 견뎌내야 했다.

이는 그에게 훗날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심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남악서원 김유신 초상 | Kim Yu-sin portrait at Namak Seowon (later depiction)"
Public Domain(한국 고전文헌 도록 이미지)
위키미디어

어릴 적 김유신은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말이 없고 조숙했다.

그는 활쏘기와 말 타기를 즐겼으며, 특히 병법에 관심이 많았다.

소년 김유신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할아버지인 김무력(金武力) 장군이 가야를 멸망시키고 

신라의 장군이 되어 세운 공적에 대해 들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역사였지만, 동시에 잃어버린 고국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이야기였다.

그는 그 복잡함을 피하지 않았다. 

신라인의 충성과 가야인의 자긍을 함께 품은 채, ‘경계의 사람’으로 자신을 단련했다.


김유신이 15세가 되던 해, 그는 신라의 인재 양성소인 화랑(花郞)이 되었다.

'용화향도(龍華香徒)'라는 자신의 무리를 이끌게 된 그는 엄격한 규율과 수련으로 명성을 쌓았다.

이때 그에게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전수한 전설적인 인물, 

원광법사(圓光法師, 신라의 고승)와의 만남이 있었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김유신은 이 다섯 가지 계율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젊은 날의 일탈과 회복, 규율과 자기절제는 여기서 완성된다.


"화랑상(교육용 조형) | Hwarang statue (modern educational sculpture)"
CC BY-SA 3.0(Wikimedia)
위키미디어 공용

그러나 혈기왕성한 젊은 화랑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한때 김유신은 천관녀(天官女, 신라의 기생)라는 아름다운 여성에게 깊이 빠져 무예 수련을 게을리했다.

매일 밤 그녀의 집을 드나들며 시간을 허비했고, 그의 명성은 땅에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김유신이 애마(愛馬)에 몸을 실었다.

말은 습관적으로 천관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술에서 깬 김유신은 자신이 나약함에 굴복했음을 깨닫고 분노했다.

그는 칼을 뽑아 단숨에 말의 목을 베어버렸다.

"네 이놈, 감히 나의 뜻을 거스르는가!"

이 일화는 그의 냉혹하리만치 단호한 의지, 

즉 개인적인 정념조차 대의를 위해 끊어낼 수 있는 성정을 보여준다. [전승]

이 사건 이후 그는 다시 수련에 매진했고, 사람들은 그를 두려움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실록성 자료에선 상징담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므로 이 대목은 ‘자기 통제’의 은유로 읽는 편이 안전하다.)


"김유신 장군상(남산) | Statue of Kim Yu-sin (Namsan, Seoul)"
CC BY-SA 2.0 KR(Wikimedia)
위키미디어

역사서에는 김유신이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 능력을 얻었다는 기록이 많다.

17세가 되던 해, 그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방도를 구하기 위해 

홀로 중악(中嶽, 팔공산으로 비정되는 견해가 많음) 석굴에 들어갔다.

며칠 밤낮으로 기도를 올리자, 홀연히 산신(山神)이 나타나 그에게 비범한 검술을 전수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25세 때는 다시 인내산(忍耐山) 골짜기에서 수련 중 한 노인에게 신검(神劍)을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후대에 김유신이 단순한 인간이 아닌, 

하늘이 내린 영웅임을 부각하기 위해 첨가된 요소로 해석된다. [전승]

현실의 김유신은 초월적 기적 대신, 정보를 모으고 군제를 다듬고, 

연합과 동맹이라는 ‘정치적 기술’을 무기로 삼았다.


김유신의 인생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김춘추(金春秋, 훗날의 태종 무열왕)이다.

두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보기 드문 정치적 동반자 관계였다.

김춘추는 진골 출신이었지만 성골(聖骨) 중심의 신라 왕위 계승 구도에서 밀려나 있던 상황이었고, 

김유신은 가야계라는 태생적 한계로 권력의 핵심에서 비껴나 있었다.

두 아웃사이더는 서로의 필요를 절감했다.

이들의 관계는 혈연으로 얽히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김유신은 자신의 두 여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보내는 정략적인 수를 두었다.

첫째 동생인 보희(寶姬)는 꿈에서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서라벌(신라의 수도)을 뒤덮는 태몽을 꾸었다.

김유신은 이 꿈을 김춘추에게 팔아넘기며 인연을 맺으려 했으나 보희가 거절하자, 

둘째 동생인 문희(文姬)를 대신 김춘추에게 시집보냈다.

문희는 훗날 무열왕비가 되고, 그 사이에서 삼국통일의 마지막 주역인 문무왕(文武王)이 태어난다. [전승]

이 사건은 김유신의 냉철한 정치 감각과 권력욕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는 개인의 감정이나 혈육의 정보다 가야계 후손이 신라의 왕실과 혈연으로 엮여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로 인해 후대 역사가들, 특히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김유신을 "교활한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냉정함이 없었다면 과연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이 가능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반론도 존재한다.

즉, 그는 도덕·정서가 아니라 ‘국가 이익’과 ‘생존’을 좌표로 결단하는 유형의 지도자였다.


"태종 무열왕 영정(후대 상상화) | Later portrait of King Taejong Muyeol"
(Encyves/전통문화포털) 참조.
디지털 인문학

김유신이 정치적 기반을 다지던 시기, 한반도의 정세는 백제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백제의 명군(名君) 의자왕(義慈王, 백제의 제31대 왕)은 즉위 초 신라를 맹렬히 압박했다.

특히 백제의 용장 윤충(允忠, 백제의 장군)은 신라의 서쪽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켰고,

642년(선덕여왕 11년)에는 대야성(大耶城, 현 합천)이 함락되는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대야성 성주(城主)였던 김품석(金品釋)은 

김유신의 조카이자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古陀炤)의 남편이었다.

즉, 김유신의 매제와 조카딸이 백제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김유신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통곡하며,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내 백제를 멸하지 않고서는 다시는 갑옷을 벗지 않겠다!"

이 사건은 김유신 개인에게는 뼈아픈 상실이었지만, 

공적으로는 그가 백제 정벌이라는 대업에 목숨을 걸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군사 개혁(정예화·보급 정비·지휘 체계 일원화)가 본격화된다.


대야성 함락 이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으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직접 갔으나 오히려 억류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김유신은 신라군을 이끌고 고구려 국경 근처로 진군하며 

무력 시위를 벌여 김춘추를 구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신라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도 악화되어 사방이 막힌 형국이었다.

이때 김춘추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해상 세력인 당나라와의 연합을 추진했다.

648년, 김춘추가 당나라로 건너가 나당동맹을 성사시켰고, 

이 과정에서 신라 내부의 군사력을 책임질 인물로 김유신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그는 명실상부한 신라 최고의 무장(武將)으로 자리매김했다.

동맹의 본질은 ‘대가’를 수반한다. 

그는 이후 그 대가(당의 간섭)를 견디고 되돌려야 했다.


"계백 장군 표준영정(후대 상상화) | Standard portrait of General Gyebaek"
전통문화포털.
kculture.or.kr

나당동맹이 결실을 맺어 660년, 당나라의 대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명이 백제를 침공했다.

이 대규모 전쟁의 서막은 황산벌(黃山伐, 현 충청남도 논산 부근)에서 올랐다.

백제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계백(階伯, 백제의 장군)은 

오천 결사대(決死隊)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막아섰다.

계백은 출전 전 가족을 모두 죽이고 전쟁에 나선 비장함을 보였다.

영화적인 각색을 더한다면, 황산벌은 단순히 무력의 충돌이 아니라 두 영웅의 숙명적인 대결로 묘사될 수 있다.

김유신은 백전노장이었지만, 계백의 결사대는 예상외로 거세게 저항했다.

신라군은 네 번의 전투에서 연달아 패퇴하며 사기가 떨어졌다.

이때 김유신의 조카인 관창(寬昌, 화랑 출신)이 어린 나이에 적진으로 돌격했다가 사로잡혔다.

계백은 어린 소년의 용맹함에 감동하여 그를 살려 돌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다시 적진으로 뛰어들었고, 결국 계백에게 목숨을 잃었다. [전승]

관창의 목이 신라 진영으로 돌아오자, 

김유신은 조카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이용했다.

"어린 조카도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웠거늘, 너희들은 무엇을 망설이는가!"

이 장면은 김유신의 냉정함과 비정함, 

그리고 승리를 위해서는 개인의 희생을 서슴지 않는 그의 리더십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신라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백제군을 대파했고, 계백은 전사했다.

황산벌 전투의 승리는 백제 멸망의 서곡이었다.

사비성이 무너지며 의자왕이 항복했고, 신라는 대외·대내의 새 균형을 준비해야 했다.


"공산성 성곽 | Gongsanseong Fortress, Buyeo"
CC BY-SA 3.0 (Zawol)
위키미디어 공용

황산벌 전투 후,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 현 부여)을 함락시켰다.

의자왕은 항복했고, 백제는 멸망했다.

김유신은 개선장군이 되어 금의환향했지만, 그의 눈은 이미 북쪽의 고구려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 멸망 과정에서 김유신에게도 과실이 없지 않았다.

그는 백제 부흥군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으며,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의 관계도 순탄치 않았다.

소정방이 오만하게 굴자 김유신이 그를 베려 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승]

이는 김유신이 당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신라의 주도권을 지키려 했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외교적인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과 독단성을 드러낸다.

또한 백제 멸망 후 발생한 대규모 학살과 약탈에 대한 도의적 책임에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다.

승리라는 대의 아래 자행된 이러한 행위들은 훗날 백제 유민들의 뿌리 깊은 한을 낳았고, 

이는 부흥운동으로 이어져 통일 과정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김유신은 전략가로서 유능했지만, 패자에 대한 관용과 통치자로서의 포용력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대목이 그를 ‘영웅’이자 ‘정복자’로 양분되게 만든 핵심이다.


"고구려·신라·백제 전쟁 개념도 | Diagram: Goguryeo–Silla–Baekje conflicts"
CC BY-SA 4.0(Wikimedia)
위키미디어

백제 멸망(660년) 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은 한반도의 마지막 남은 거인, 고구려를 향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淵蓋蘇文) 사후 내부 분열을 겪고 있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김유신은 이제 노쇠한 몸을 이끌고 다시 전장으로 향해야 했다.

668년(문무왕 8년), 그는 신라군 총사령관으로서 당나라의 이적(李勣)이 이끄는 대군과 합류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포위했다.

장기간의 공성전 끝에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김유신의 평생의 염원이었던 삼국통일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승리의 뒷맛은 썼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뿐만 아니라 

신라마저 자신들의 속국으로 삼으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백제 땅에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고구려 땅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으며, 

신라의 수도 서라벌(徐羅伐, 신라의 수도)에는 계림도독부(雞林都督府)를 두어 

신라 왕을 계림주 도독으로 격하시키려 했다. (명목·실효의 간극은 있었으나, 당의 구상은 분명했다.)


김유신은 이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병상에 누워서도 문무왕(文武王, 신라 제30대 왕, 김춘추의 아들)에게 당나라의 야욕을 경계하고 

그들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때부터 신라는 위험한 외교적 도박을 시작한다.

겉으로는 당나라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백제 부흥군 세력과 연합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했다.

김유신은 이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항당(抗唐) 전선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김유신의 정치적 수완이 빛을 발했다.

그는 과거의 적이었던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같은 민족'으로 포용하기보다는, 

'당나라에 대항하는 동맹군'으로 활용하는 실리적인 노선을 택했다.

이는 후대의 '민족 통일'이라는 미화된 평가와는 달리, 

당시의 통일 전쟁이 철저히 신라 중심의 생존 경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통일은 ‘감정의 통합’이 아니라 ‘세력의 봉합’이었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었다.


김유성의 공적이 커질수록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세력도 늘어났다.

신라 내부의 진골 귀족들은 가야계 후손인 김유신이 권력을 독차지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들은 김유신의 사생활을 물고 늘어졌다.

가장 유명한 논란은 그의 여동생들과의 근친혼 의혹이다.

공식적으로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김춘추와 결혼했지만, 

당시 신라 상류층의 복잡한 혼인 관습과 얽혀 여러 소문이 파다했다.

또한 그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서슴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의 딸들을 왕실과 혼인시켜 외척 세력을 형성하려 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근친 의혹은 확증 사료가 빈약하며, 혼맥의 전략적 활용은 당시 상층의 보편적 관행과 겹친다.)

또 다른 논란은 그의 잔혹성이었다.

전쟁 중 그가 보여준 무자비함, 예를 들어 항복한 백제군 포로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기록 등은 

그의 영웅적인 이미지 뒤에 가려진 냉혹한 면모를 드러낸다.

후대의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통일의 영웅'이 아닌 '정복 전쟁의 학살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소문과 논란은 김유신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선인이 아닌, 

명암이 뚜렷한 입체적인 인물임을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될 수 있다.


김유신은 비록 노령으로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횟수는 줄었지만, 

그의 전략과 지휘 아래 신라군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했다.

특히 675년의 매소성 전투(현 경기도 연천 부근)는 나당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전투였다.

신라군은 20만 명에 달하는 당나라 대군을 격파하고 막대한 양의 전리품과 군마를 노획했다.

 (병력 수치는 과장 가능성이 있으나 ‘결정적 승리’라는 평가에는 이견이 적다.)

이 승리로 당나라는 한반도 지배 야욕을 사실상 포기하게 되었고, 

676년(문무왕 16년), 신라는 마침내 한반도에서 당나라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삼국통일(대동강 이남)을 완성했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은 673년, 78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향년 표기는 계산 방식에 따라 다르게 표기되기도 한다.)

그는 생전에 이미 최고 관등인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올랐으며, 

사후에는 신라 왕실로부터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이는 신라 역사상 신하로서 왕의 칭호를 받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로, 

그의 공적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경주 김유신 장군 묘 | Tomb of General Kim Yushin, Gyeongju"
CC BY-SA 3.0 (Tristan Surtel)
위키미디어

김유신은 죽어서도 신라의 수호신으로 추앙받았다.

그의 묘는 경주에 있으며, 신라인들은 그를 기리는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후대에 김유신은 '민족의 영웅', '통일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의 역사 교육에서 그는 용맹하고 지혜로운 장군, 신라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의 이름은 무예와 충절의 상징이 되었고, 수많은 설화와 무용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그의 공과(功過)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가 가야계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동족인 백제를 무자비하게 멸망시켰고, 

통일 과정에서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한반도 북부를 상실하게 한 책임이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의 냉혈한적인 성격과 권력욕은 인간적인 영웅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반대로, ‘외교와 군사’의 복합전으로 생존을 확립한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다는 평도 공존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지역 기억과 의례, 물질문화 속에서도 갈라진다. 

경상도 일대의 제향과 사우는 그를 흥무(興武)의 상징으로 기리고, 

교과서와 군(軍) 리더십 담론은 ‘연합-분할-결정전-사후 통치’로 요약되는 그의 전쟁 알고리즘을 긍정한다. 

반면 일부 연구는 대동강 이북 상실, 

강제 이주와 전후 처벌의 엄혹함을 들어 “정복의 통일”이라는 냉혹한 이름을 붙인다. 

드라마·소설·게임은 이 두 얼굴을 번갈아 강조하며, 

김유신을 영웅담의 결말이 아니라 논쟁의 출발점으로 되돌려 놓는다. 

결국 평전의 언어로도, 민속의 언어로도 단정되지 않는 인물.

그 다층성이 오늘의 독자에게 남겨진 진짜 유산이다.


경주(慶州, 신라의 수도)의 그의 무덤은 오늘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과연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는가, 아니면 권력을 탐한 냉혈한이었는가? 정답은 중요하지 않다.

김유신이라는 이름 자체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치열했고, 영광스러웠으며, 

동시에 가장 논쟁적인 시대의 상징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 글은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기본 사료와 표준 연구를 대조해 썼습니다. 

일부 장면·수치·전승은 사료 간 차이로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보이면 알려주세요. 

확인 즉시 반영하겠습니다. 


Kim Yushin (595–673), Gaya-descended Silla general, rose from border-born outsider and Hwarang disciple of Won’gwang’s “Five Precepts” to kingmaker and warlord. 
He forged alliance with Kim Chun-chu, vowed revenge after Daeya Fortress fell, sealed the Silla–Tang pact, and beat Baekje at Hwangsanbeol (with Gwan-chang’s martyrdom, tradition) before aiding Goguryeo’s fall. 
He then pushed the anti-Tang war to secure southern unification. 
Hailed as Heungmu Daewang, he’s praised as realist strategist yet faulted for ruthless conquest.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