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그분의 그림자
소인(小人)은 허 서방님(서방님, 남편을 높여 부르는 말)의
아내 되는 안동 김씨로 전해지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저희 서방님을 명의(名醫)라 부르고, 그분이 엮으신 의서(醫書)를 칭송하오나,
소인에게는 그저 평생을 함께한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평생 그림자처럼 서방님의 곁을 지키며, 그분의 기나긴 고뇌와 방황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
이 글은 서방님을 향한 소인의 연모와,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한을 담은 고백이옵니다.
이 작은 글이 부디 후세에 서방님의 인간적인 모습과,
서방님을 온전히 기억하고자 하는 소인의 간절한 염원을 전할 수 있기를 바라옵니다.
![]() |
| 허준 초상 추정 | Putative portrait of Heo Jun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 위키미디어 공용 |
소인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역적에 연루되어 파직되시어, 저희 집안은 한순간에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되었나이다.
관아의 추격을 피해 떠돌던 저희 가족은 경기도 양천현(楊川縣, 지금의 서울 강서구 일대)의 한 작은 마을에 숨어 지내게 되었지요.
그곳에서 소인은 허 서방님(許浚, 1539~1615, 조선 중기의 명의)을 처음으로 뵈었사옵니다.
그분은 양반의 아드님이셨으나, 어머니가 양반 가문 출신인 영광 김씨의 측실(側室, 첩)이었기에
서자(庶子)라는 굴레에 갇혀 계셨습니다.
허 서방님께서는 뼈대 있는 무관 가문의 자제였으나,
신분적 한계로 인해 세상의 눈을 피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사옵니다.
처음 서방님을 뵈었을 때, 그분의 눈빛은 짙은 그늘에 드리워져 있었사옵니다.
세상의 비난과 멸시를 홀로 견디는 고독한 분이셨지요.
하오나 그 눈빛 속에는 맑은 강물처럼 깨끗한 열정이 숨어 있었나이다.
서방님은 허름한 옷차림의 백성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그들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소인은 서방님께로부터 소인의 처지와 비슷한 아픔을 보았고, 저희는 서서히 서로에게 이끌렸나이다.
서방님의 아버님인 허곤(許琨)으로 전하는 경상우수사는 명망 있는 분이셨으나,
서방님께 가해지는 신분적 차별은 그분께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상처는 때때로 그분을 무모하게 만들었고, 소인은 그런 그분을 지켜보는 것이 늘 불안했사옵니다.
그러나 저희의 사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소인은 역적의 딸이었고, 서방님은 서자이셨습니다.
양가의 반대는 거셌습니다.
서방님의 집안에서는 서자인 것도 모자라 역적의 딸을 며느리로 삼을 수는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지요.
소인의 부모님께서도 서방님께서 서얼이라는 이유로 탐탁지 않아 하셨사옵니다.
저희는 세상의 모든 벽과 싸워야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서로를 놓지 않았습니다.
서방님은 소인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사옵니다.
"당신이 나를 믿어준다면, 나는 세상의 모든 병을 고치는 의원이 될 것이오. 당신과 함께라면."
그분의 진심 어린 고백에 소인은 모든 것을 걸고 그분과 혼례를 올렸사옵니다.
비록 초라한 혼례였지만, 저희는 서로에게 세상의 전부였지요.
소인의 부모님과 관련된 사건으로 서방님께서는 더욱 의술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셨습니다.
역적으로 몰린 사람들을 치료하며 백성의 고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한양으로 올라가 내의원(內醫院, 조선시대 왕실의 의료를 담당하던 기관)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셨습니다.
1571년(선조 4년),
서른둘 남짓의 나이로 그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의관이 되셨지요.
서얼 출신으로서 내의원에 들어가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으나,
그분의 뛰어난 의술은 결국 왕실의 인정을 받았사옵니다.
그러나 내의원 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양반 출신 의관들의 견제와 멸시, 그리고 서얼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항상 그분을 따라다녔지요.
![]() |
| "창덕궁 내의원 일원 | Site related to Naeuiwon in Changdeokgung" CC BY-SA (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특히 선조(宣祖, 조선의 14대 임금)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분을 향한 시기와 질투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선조께서는 서방님을 총애하시며 파격적인 승진을 시키셨는데,
이는 양반 출신 관료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그들은 서방님께서 은총을 믿고 교만하다며 비난했고,
서방님의 서얼 출신을 들먹이며 끊임없이 흔들었지요.
소인은 멀리서나마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사옵니다.
그분의 성공은 축복인 동시에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나이다.
![]() |
| "조선 선조 어진 | Portrait of King Seonjo"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서방님께서는 선조의 왕명으로 의서 편찬 작업에 참여하게 되십니다.
당시 조선은 백성을 위한 변변한 의서가 없었고,
선조께서는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서 편찬을 명하신 것이었지요.
이는 서방님의 평생의 꿈이었나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지면서 의서 편찬은 중단되고,
서방님은 선조와 함께 험난한 피난길에 오르게 되셨습니다.
소인은 가족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나면서, 그분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아픔을 견뎌야 했사옵니다.
전쟁 속에서 서방님은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며 더욱 절실함을 느끼셨습니다.
그분께서 배우신 의술이 왕실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으신 것이지요.
임진왜란 후, 서방님께서는 다시 내의원으로 복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큰 시련이었지요.
1608년, 선조의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선조께서 승하하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에는 어의가 왕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관례였사옵니다.
선조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 서방님은 유배형에 처해지셨고,
소인은 그분과 함께 유배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드라마와는 달리, 이 유배 기간은 약 1년 남짓으로 전해지나,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사랑하는 서방님과 함께하는 유배 생활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저희에게는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사옵니다.
그분은 유배지에서도 의서 편찬에 매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어린 시절의 아픔과 열정을 동시에 떠올리며 백성을 위한 의서,
『동의보감』(東醫寶鑑) 집필에 몰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백성을 위한 의서만을 생각하며 밤낮없이 글을 쓰셨습니다.
소인은 그런 그분의 곁에서 약초를 다듬고, 그분의 손을 잡아드리며 묵묵히 그분을 지지했습니다.
저희는 가난했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며 견뎌냈지요.
서방님의 열정은 결국 결실을 맺었습니다.
1610년(광해군 2년),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온 서방님께서는 『동의보감』을 완성하여 광해군께 바치셨습니다.
이 책은 조선의 의학을 집대성한 역작으로 평가받았고,
백성들의 질병 치료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나이다.
![]() |
| 『동의보감』 | Dongui Bogam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동의보감』의 완성 소식을 들으신 광해군(光海君, 조선의 15대 임금)께서는
서방님을 감싸며 그분의 능력을 인정해주셨습니다.
광해군께서는 서방님에게 높은 품계의 예우와 중용을 내리셨지만,
이는 중인 출신에게는 파격적인 대우였기에 양반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께서는 서방님을 끝까지 지키셨고,
서방님은 다시 내의원으로 복귀하여 왕실의 건강을 책임지는 명의로서의 삶을 살게 되셨습니다.
서방님께서는 1615년(광해군 7)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의 마지막은 평화로웠습니다.
평생을 바쳐 완성하신 『동의보감』과, 그분을 사랑하고 지지해준 소인의 손을 잡고 눈을 감으셨지요.
소인은 그분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그분의 삶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귀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서방님의 죽음 이후에도 그분의 삶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었사옵니다.
선조실록에는 "양평군(陽平君) 허준은 위인이 어리석고 미련하였는데 은총을 믿고 교만했다"는 혹평이 기록되어 있지요.
이는 서방님의 서얼 출신과 왕의 총애에 대한 양반들의 시기가 반영된 평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인은 그분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사옵니다.
그분은 단지 의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살아가신 분이었으며,
그분의 삶은 늘 백성들을 향해 있었사옵니다.
서방님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렸습니다.
어떤 이는 그분을 천재적인 명의로 칭송했고, 어떤 이는 권력에 기생한 기회주의자로 폄하했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분의 진정한 가치는 재조명되었사옵니다.
『동의보감』은 단순히 의서를 넘어,
조선의 의학을 집대성하고 동양 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며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지요.
![]() |
| "침술 시술 장면 | A Korean acupuncturist at work" CC BY 4.0 (Wellcome Collection). 위키미디어 공용 |
소인은 허준이라는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진 존재였지만,
그분을 통해 소인의 삶 또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사옵니다.
그분은 소인에게 사랑을 알려주셨고, 소인은 그분께 묵묵히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어드렸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는 것은 그분의 의술 때문이지만,
소인은 그분의 그림자가 되어 그분을 사랑했던 한 여인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옵니다.
이 글을 통해 세상은 서방님의 위대함뿐만 아니라,
그분을 완성시킨 한 여인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해주기를 바라옵니다.
허준, 그분은 그림자를 넘어 영원으로 남은 소인의 유일한 사랑이었나이다.
![]() |
| "허준박물관 외관 | Heojun Museum exterior" CC BY-SA (업로더 자작/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서방님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그분의 삶은 재조명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했지요.
서방님과 소인의 사랑 이야기는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그분의 의술은 현대 한의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사옵니다.
그분의 삶은 성공과 좌절, 사랑과 희생이 교차하는 한 편의 영화와 같았나이다.
그리고 소인은 그 영화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분과 함께한 한 여인이었습니다.
허준, 그분은 그림자를 넘어 영원으로 남은 소인의 유일한 사랑이었사옵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연구를 바탕으로 서술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심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배우자 본관, 부친 관직, 유배지와 기간, 품계·예우 등은 기록과 전승이 상이해
본문에는 단정 대신 관용표현으로 최소 보강하였습니다.
『동의보감』(1610)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사실 제보·보완을 환영하며, 확인 즉시 반영하겠습니다.
.jpg)


.jpg)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