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인도 분할, 다섯 목소리: 래드클리프 선과 피난 열차의 여름 (The Partition of India)

 

1947년 8월, 인도(British India, 영국 식민지)는 독립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이 아닌 비극의 서막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배 종식과 동시에,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교도 중심의 파키스탄(East Pakistan, 현재의 방글라데시 포함)으로 분할되는 운명을 맞았다. 

(※분할은 펀자브(Punjab)와 벵골(Bengal) 두 지역의 분할이 핵심이었고, 동(東)벵골은 East Pakistan이 되었다가 1971년 방글라데시로 독립)

영국인 관료 시릴 래드클리프(Cyril Radcliffe, 영국의 법률가, 인도 분할의 경계선인 래드클리프 선을 그었다)가 단 5주 만에 그은 래드클리프 선은 수천 년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찢어놓는 칼날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다섯 명의 운명이 교차하는 1947년 여름의 펀자브(Punjab, 인도와 파키스탄에 걸쳐 있는 지역)를 배경으로 한다.


시릴 래드클리프의 초상 | Portrait of Sir Cyril Radcliffe
CC BY 3.0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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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열차의 기관사 (시크교도, 다모다르의 시점)

펀자브의 철도 기관사 다모다르 싱(Damodar Singh,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시크교도 기관사)은 수십 년간 묵묵히 기차를 몰아왔다. 

그의 기차는 한때 풍요로운 펀자브 평야를 가로지르며 곡식과 사람들을 실어 날랐지만, 

독립이 다가오면서부터 그 역할이 바뀌었다. 

이제 그의 열차는 '피난 열차'로 불렸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죽음의 행렬이었다.

(1947년 하반기 펀자브 철도에서 ‘고스트 트레인(학살된 피난민)을 실은 열차’ 사례가 다수 보고됨)

다모다르는 중립을 지키려 애썼다. 

그의 동생은 파키스탄으로 갈 무슬림 여성과 결혼했다. 

가족 안에서도 이미 분할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폭력에 가담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임무만을 수행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8월 14일, 그의 열차가 파키스탄령으로 향하는 작은 역에 멈춰 섰을 때, 폭도들이 들이닥쳤다.

 (인도 독립은 8월 15일, 파키스탄 독립은 8월 14일 자정 전후로 기념되며, 경계선의 공식 공표는 8월 17일-국경선 공표 전에도 지역별 실효 지배와 폭력은 확산)

그들은 열차에 탄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약탈했다. 

다모다르는 분노와 무력감에 휩싸였다.

다음날, 그는 다시 기차에 올랐다. 

이번에는 파키스탄으로 가는 무슬림 피난 열차였다. 

열차에는 수많은 무슬림 난민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파티마 칸(Fatima Khan, 실화를 바탕으로 한 무슬림 산부인과 의사)의 환자도 있었다. 

열차가 국경 부근의 낡은 철교를 지날 무렵, 시크교도 무장 단체가 검문소를 막고 있었다. 

그들은 열차를 멈춰 세우려 했다. 

다모다르는 폭력으로 얼룩진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쇠약해진 몸으로 기관실의 핸들을 끝까지 붙잡고, 기차의 속도를 최고치로 올렸다. 

기차는 총탄 세례를 뚫고 검문소를 돌파했다. 

다모다르는 자신이 목숨을 건 대가로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구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양측 민병대·폭도에 의한 열차 습격은 힌두·무슬림·시크 민간인 모두에게 발생)


"분할기 난민 열차 | Overcrowded refugee train during Partition"
Public Domain (Photo Division, Govt. of India/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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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만실의 전쟁 (무슬림 산부인과 의사, 파티마의 시점)

라호르(Lahore, 파키스탄 펀자브 주의 도시)의 병원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는 파티마 칸(실화를 바탕으로 한 무슬림 산부인과 의사)에게 병원은 성역이었다. 

종교와 민족을 가리지 않고, 모든 생명은 그녀의 손에서 안전하게 태어났다. 

힌두교, 시크교, 무슬림 산모들은 그녀를 믿고 따랐다. 

특히, 그녀는 시크교도 기관사 다모다르의 동생 부부와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1947년 8월, 병원은 더 이상 성역이 아니었다. 

독립이 선언된 후, 라호르에는 종파 간의 폭력이 난무했다.

(라호르·아무리차르 등 대도시에서 1947년 8~9월 대규모 폭력·방화·추방 사태 발생)


"아무리차르 참혹의 흔적 | Aftermath in Amritsar, Sept 1947"
Public Domain(잡지 수록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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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밤, 병원 인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파티마는 분만실에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와중에 밖에서는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에 절망했다. 

폭도들은 병원까지 들이닥쳐 힌두교와 시크교 산모들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파티마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 눈에는 종교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만 보일 뿐입니다.” 

그녀는 간호사들과 함께 산모들을 병원 지하실로 옮겼다. 

그중에는 크리슈나 라지(Krishna Raj, 실화를 바탕으로 한 힌두교 소상인)의 부인도 있었다. 

크리슈나의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간신히 병원에 도착한 상태였다. 

파티마는 지하실에서 아이를 낳는 크리슈나의 아내를 도왔다.

며칠 후, 폭력이 잠잠해지자 파티마는 환자들을 무사히 퇴원시켰다. 

그녀는 무슬림이었지만, 병원의 동료들은 그녀를 숨겨주었다. 

그녀는 이슬람교 폭도들에게 납치된 시크교도 기관사 다모다르의 동생 부부를 구출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종파를 넘은 상호 보호·은신 사례가 구술사·회고록에 다수 전함)

그녀는 결국 병원을 떠나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피난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탄 열차는 다모다르가 몰던 마지막 열차였다. 

그녀는 기차 안에서 다모다르가 폭도들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의사의 윤리가 종파 폭력을 이겨낸 기적으로 기억되었다.


"라호르 폭동 지역 시찰 | Mountbatten couple visiting riot-affected Lahore, July 1947"
Public Domain (Photo Division, Govt. of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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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과 가족의 저울 (힌두교 소상인, 크리슈나의 시점)

델리(Delhi, 현재 인도의 수도)의 작은 시장에서 소규모 상점을 운영하는 크리슈나 라지(실화를 바탕으로 한 힌두교 소상인)에게 돈은 삶의 전부였다. 

그는 평생을 아껴 모은 돈으로 가게를 꾸렸고, 가족들을 부양했다. 

하지만 독립이 다가오면서 그의 가게와 가족의 안위는 위협받았다. 

무슬림들은 파키스탄으로, 힌두교와 시크교도들은 인도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서, 

크리슈나의 가족도 인도로 떠나야 했다. 

(대이동은 ‘동서 펀자브’와 ‘벵골’ 중심으로 양방향 발생. 힌두/시크는 인도, 무슬림은 파키스탄으로 이동이 일반적 양상)

그는 가게를 처분해야 했지만, 그의 가게는 수십 년간 일궈온 그의 모든 것이었다.

무슬림들은 그의 가게를 헐값에 팔라고 협박했고, 그는 망설였다. 

고민 끝에 크리슈나는 가족의 목숨을 선택했다. 

그는 전 재산을 버리고, 만삭인 아내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은 험난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폭력에 시달렸다. 

그는 아내를 데리고 라호르의 병원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무슬림 산부인과 의사 파티마 칸의 도움을 받았다. 

크리슈나는 파티마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종교와 종파를 초월한 인간적인 감동이었다.

며칠 후, 크리슈나는 가족과 함께 인도로 향하는 피난 열차에 올랐다. 

그들이 탄 열차는 시크교도 기관사 다모다르가 몰던 마지막 열차였다.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 크리슈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평생 일궈온 가게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의 가게는 그가 쌓아온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그의 옆에는 그의 가족이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돈을 쫓지 않았다. 

그는 오직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살았다. 

그의 이야기는 재산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지킨 한 인간의 용기를 보여준다.


"식수 줄 선 난민들 | Refugees in Delhi waiting for water"
Public Domain (Photo Division, Govt. of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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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라인의 행정 (영국 관리 수습, 로버트의 시점)

영국의 젊은 공무원 로버트 햄튼(Robert Hampton, 실존 인물인 래드클리프 위원회 실무자를 모티브로 한 인물)은 1947년 7월, 인도로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래드클리프 경(Sir Cyril Radcliffe)을 도와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을 획정하는 것이었다. 

로버트는 처음에는 이 임무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거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래드클리프 경은 단 5주 만에 국경을 획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버트는 경악했다. 

수천 년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땅을 단 5주 만에 갈라놓으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로버트는 래드클리프 경에게 항의했다. 

“경, 이건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충분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래드클리프 경은 영국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로버트, 우리는 이 일을 끝내야만 한다. 이미 결정된 일이다.” 

로버트는 무거운 마음으로 지도를 펼쳤다. 

그는 래드클리프 경과 함께 수십만 명의 운명을 결정할 선을 그었다. 

그는 마을과 마을, 논과 밭을 가로지르는 선을 그었다. 

그의 손은 떨렸고, 그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가득했다. 

그는 자신이 그린 선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그은 지도에는 펀자브의 철길과 델리의 시장, 그리고 라호르의 병원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8월 17일, 래드클리프 선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로버트는 신문에서 자신이 그린 선이 발표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거대한 비극의 공범이 되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는 인도 분할의 비극을 기록하며 평생을 속죄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이야기는 제국주의의 무책임함과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을 증언한다.


"1947년 인도 분할 지도 | Map of the Partition of India, 1947"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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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의 기록 (사진가, 아미르의 시점)

델리에서 활동하는 무슬림 사진가 아미르 나스리(Amir Nasri, 실존 사진가들의 기록을 모티브로 한 인물)에게 사진은 진실을 기록하는 도구였다. 

그는 독립을 앞두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만, 독립 이후 펼쳐진 현실은 그의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피로 물든 거리를 걸었다. 

그의 렌즈에는 학살당한 시신들, 약탈당한 집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담겼다.

그는 무슬림이었지만, 힌두교와 시크교도들의 고통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와 민족을 초월한 인간의 고통을 기록했다. 

그의 사진은 참혹했지만, 동시에 진실을 담고 있었다. 

그의 카메라 렌즈에는 시크교도 기관사 다모다르의 피 묻은 기차, 무슬림 산부인과 의사 파티마 칸의 폐허가 된 병원, 그리고 힌두교 소상인 크리슈나 라지의 무너진 가게가 담겼다.

아미르는 자신의 사진들을 정리하며 고민했다. 

그의 사진은 너무나 참혹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진실을 알리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검열과 진실 사이에서 갈등했다. 

결국 그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사진들을 출간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사진집은 세상에 충격을 안겼다. 

사람들은 그의 사진을 통해 인도 분할의 비극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사진집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국경에 세워진 파키스탄 국경 표지판이 담겨 있었다. 

그 표지판에는 ‘이곳은 이제 파키스탄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 표지판을 찍는 아미르의 모습이 마지막 프레임에 담겼다. 

그의 눈에는 희망과 절망, 그리고 진실을 담으려는 의지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인도로 향하는비무슬림 난민 행렬.
Public Domain (Photo Division, Govt. of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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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심장, 하나의 강

인도 분할은 수백만 명의 희생을 낳았다. 

(난민 규모는 약 1,000만~1,500만 명, 사망자는 20만~200만 명 등 추정치가 크게 엇갈림)

종교와 민족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 폭력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다. 

다모다르의 희생, 파티마의 신념, 크리슈나의 용기, 로버트의 죄책감, 그리고 아미르의 기록은 인도 분할이 남긴 깊은 상처를 보여주는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후대의 평가는 분분하다. 

일부는 독립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할이 가져온 엄청난 희생과 비극에 주목한다. 

특히, 영국인들이 급조한 경계선과 무책임한 분할 과정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또한, 분할 이후에도 카슈미르(Kashmir,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토 분쟁을 벌이는 지역)를 둘러싼 갈등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분할의 비극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는 비극을 상징한다. 

종교와 민족, 그리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발생하는 비극. 

우리는 분할의 역사를 잊지 않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모다르의 피로 물든 철길, 파티마의 지하실에서 울려 퍼진 아기의 울음소리, 크리슈나의 무너진 가게, 로버트의 죄책감으로 얼룩진 지도, 그리고 아미르의 카메라에 담긴 참혹한 진실은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분할 관련 주요 장면 콜라주 | Partition of India collage (reference)"
CC BY-S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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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뢰할 수 있는 사료·연구(분할위원회 기록, 회고록, 구술사, 언론 보도 등)를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다만 개별 인물·장면은 실화 모티프를 결합한 창작이 포함되어 있어, 

특정 인물·장소·날짜의 일치 여부는 상징적 구성임을 밝혀 둡니다.

독립·경계선 공표(파키스탄 8/14, 인도 8/15, 래드클리프 라인 8/17), 

희생 규모(추정 폭) 등은 사료에 따라 수치가 다르기에 본문에 (설명)으로 병기했습니다.

사실 오류나 더 나은 사료 제보를 환영합니다. 

확인 즉시 반영하겠습니다.


In summer 1947, British India’s independence becomes tragedy as the hastily drawn Radcliffe Line splits Punjab. 
Five voices cross: Damodar, a Sikh engineer who rams a blockade to save a refugee train; Fatima, a Muslim obstetrician shielding mothers in a Lahore basement; Krishna, a Hindu shopkeeper who abandons his life to protect family; Robert, a British aide haunted by the map he helped draw; and Amir, a photographer whose brutal images bear witness to Partition’s lasting w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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