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무제에게 "무공덕"을 선언하다: 보리달마, 9년 침묵으로 선종을 개창한 왕자 (Bodhidharma)


 보리달마 서사: 9년의 침묵, 동아시아 선종을 개창하다


바람의 길, 인도에서 중국으로

1. 마하라자 왕자의 출가

역사 속 보리달마의 생애는 안개와 같다.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강력하게 전해지는 전승(傳承)은 그가 고대 인도 남부의 팔라바 왕국(Pallava, 6세기경)의 마하라자(Mahārāja, 대왕) 셋째 아들이었다는 이야기다.


권력과 부귀를 누릴 운명이었지만, 달마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세상의 화려함을 거부했다. 

그는 스무 살 무렵, 당대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반야다라(般若多羅, Prajñātāra)를 만났다. 

스승의 가르침을 들은 달마는 깨달음의 불꽃을 보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出家)의 길을 택했다.


"달마야, 너의 깨달음은 훌륭하다. 하지만 너는 인도를 떠나야 한다." 

스승이 열반(涅槃)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달마가 물었다. 

"동쪽으로 가거라. 그곳에 너를 기다리는 큰 그릇이 있다. 내가 떠난 지 60년 후에 가서 법(法)을 전하라."


반야다라는 달마에게 법(法)의 상징인 가사(袈裟)를 전했다. 

달마는 스승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약 60년 동안 인도에 머물며 수행했다. 

그는 오직 '동쪽의 큰 그릇'을 찾는 사명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2. 험난한 해상 여정

서기 520년경 (논쟁), 달마는 마침내 인도 남부 항구에서 거대한 상선에 몸을 실었다. 

그는 이제 막 40대 후반, 혹은 60대 초반 (논쟁)의 나이였다. 

그의 여정은 고난 그 자체였다. 

배는 거친 파도를 뚫고 동남아시아의 섬들을 거쳤다. 

험난한 바닷길은 무려 3년에 걸쳐 이어졌다.


배를 탄 상인들은 달마를 이상하게 여겼다. 

화려한 승복을 입지 않고, 삭발한 머리에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은 당시 인도에서 보던 승려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선실에 앉아 묵묵히 명상(冥想)을 했고, 입을 여는 법이 거의 없었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한 상인이 물었다. 

"내가 갈 곳은, 나의 법이 필요한 곳이다." 달마가 짧게 답했다.


마침내 배는 중국 남조(南朝)의 최대 항구였던 광저우(廣州)에 도착했다. 

520년, 혹은 526년(논쟁)이었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로, 남쪽에는 불교를 숭상하는 양(梁)나라가 자리하고 있었다.


3. 남조 불교의 화려한 공덕

당시 중국 남조의 불교는 눈부시게 화려했다. 

황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공덕(功德)을 쌓는 행위가 신앙의 핵심이었다. 

절(寺刹)을 짓고, 불상(佛像)을 만들고, 경전(經典)을 필사하는 것이 곧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양나라의 황제 양 무제(梁武帝, 464~549)는 이 공덕 불교의 정점에 서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불자천자(佛子天子, 불법을 수호하는 황제)'라 칭하며, 수많은 사찰과 탑을 세웠다.


양 무제 초상(후대 모사본)

광저우에 도착한 달마의 명성은 곧바로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인도에서 온 위대한 스님'이라는 소식은 황제를 흥분시켰다. 

황제는 자신이 쌓은 공덕을 자랑하고, 이 새로운 인도인 승려에게 인가(印可)를 받으려 했다.


"당장 그 서축(西竺, 서쪽 인도) 스님을 궁궐로 불러오너라! 내가 그에게 중국 불법의 위대함을 보여주리라!"


달마는 황제의 부름에 응해 양나라의 수도 건강(建康, 현재의 난징)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만날 '큰 그릇'이 황제이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이 거대한 군주와의 만남이 자신이 전할 법의 시작점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양 무제와의 문답: 가치 없음의 선언

4. 황제와 나그네의 대면

양나라 황궁의 장엄한 대전(大殿). 

황금과 비단으로 휘감긴 양 무제가 옥좌에 앉아 달마를 내려다보았다. 

황제의 주변에는 화려한 법복을 입은 고승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달마의 행색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양 무제는 달마에게 자신이 쌓은 공덕(功德)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짐은 즉위 이래 수많은 절을 세웠고, 수십만 권의 경전을 필사했으며, 수많은 승려를 구제했소. 짐이 이룩한 이 모든 공덕은 얼마나 되겠소?" 

양 무제는 달마가 자신을 칭송할 것이라 확신했다.


달마는 황제의 화려한 옷차림과 오만함 속에서, 그가 '깨달음' 대신 '보상'을 갈망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달마는 굳게 다문 입술을 열었다.


"전혀 공덕이 없습니다 (無功德)."


정적이 흘렀다. 

궁궐의 고승들마저 경악하여 숨을 삼켰다.


"무... 무엇이라고? '전혀 없다'니!" 양 무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짐이 이룬 모든 선행(善行)과 보시는 공덕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오?"


"공덕은 세간(世間)의 보상이나 대가로 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청정(淸淨)한 지혜이며, 본체는 공(空)하여 집착할 수 없습니다. 황제 폐하의 선행은 단지 복덕(福德)에 불과하며, 그것은 그림자와 같아 집착하면 할수록 멀어집니다."


양 무제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지성인으로서의 체면 때문에 참았다. 

그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5. 진리의 충돌: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스러운 진리(聖諦, 거룩한 깨달음)의 으뜸가는 뜻은 무엇이오?" 양 무제가 물었다.


황제는 달마가 화려하고 복잡한 불교 교리(敎理)를 설파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달마의 대답은 너무나 단순하고도 충격적이었다.


"텅 비고 신령스러워서, 아무것도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廓然無聖)."


궁궐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황제가 기대한 것은 존경과 칭송, 그리고 화려한 교리의 향연이었다. 

달마가 제시한 것은 '나'도 '부처'도 '공덕'도 모두 실체가 없다는 무(無)의 선언이었다.


양 무제는 달마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공덕을 인정하지 않는 달마를 오만하고 무지한 이방인으로 치부했다.


"그렇다면, 지금 짐 앞에 서 있는 그대는 대체 누구란 말이오!" 황제가 소리쳤다.


달마는 고요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이 황제의 '큰 그릇'이 아님을 확인했다.


"나도 알지 못합니다 (不識)."


이것은 '나'라는 존재조차 실체가 없음을 깨달은 자의 완벽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양 무제에게는 오직 모욕(侮辱)일 뿐이었다.


달마와 양 무제의 대면(무공덕·곽연무성)

6. 갈대 강하: 남조를 떠나다

더 이상 건강(建康)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달마의 가르침은 화려한 공덕을 추구하는 남조의 불교 분위기와 극렬하게 충돌했다. 

황제는 그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고, 고승들은 달마의 오만함을 비난했다.


달마는 홀로 양쯔강(揚子江, 장강) 강변에 섰다. 

그때, 그를 추격하던 양 무제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달마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강변에서 말라버린 갈대(葦葉) 한 줄기를 뽑아 강물 위에 던졌다. 

그리고는 그 갈대 위에 올라서서 유유히 강을 건너갔다. 

이 극적인 이야기는 '갈대 강하(葦葉渡江)'라는 전승으로 남아, 달마의 신비로운 힘을 상징하게 되었다.


리가오푸(李堯夫) 〈갈대 위를 건너는 달마〉

달마는 그렇게 북위(北魏) 땅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이 전할 법이 화려한 치장이 아닌, 고독한 수행 속에서 꽃피울 것임을 예감했다.


소림사의 침묵: 9년 면벽의 전설

7. 숭산 소림사의 적막

달마가 북위(北魏)의 수도 뤄양(洛陽)을 거쳐 마침내 도착한 곳은 숭산(嵩山)이었다. 

그곳에는 495년 인도 승려 발타(跋陀)에 의해 창건된 소림사(少林寺)가 있었다.


소림사는 달마가 도착했을 당시, 외진 산속에 있는 고요한 사찰에 불과했다. 

달마는 소림사에 들어가지 않고, 사찰 뒤편의 오유봉(五乳峰) 기슭에 있는 동굴로 향했다.


그는 동굴 입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벽을 마주하고 명상(冥想)을 시작했다.


9년. 아홉 해 동안의 침묵이었다.


달마는 벽을 향해 앉아 일체의 말을 섞지 않았다. 

그는 '내가 벽을 보는 것인지, 벽이 나를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명상에 잠겼다. 

이 '면벽구년(面壁九年)'의 전설은 선종(禪宗)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동굴 벽에는 달마의 그림자가 스며들어 마치 벽화처럼 새겨졌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김홍도 화첩 면벽구년

8. 무술과 건강법의 논쟁

소림사와 달마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소림 무술(少林武術)이다. 

전승에 따르면, 달마가 소림사 승려들의 허약한 체력을 염려해 두 권의 경전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髓經)》을 남겨 그들의 심신을 단련하게 했고, 이것이 소림 무술의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후대의 논쟁(論爭)이다.


역사적 관점: 무술 관련 문헌은 달마 사후 한참 뒤인 명나라 때에야 등장한다. 달마가 무술을 직접 창시했다는 기록은 없다.


종교적 관점: 달마의 핵심 가르침은 '마음의 본성을 직시하는 것(直指人心)'이었다. 

싸움을 위한 기술보다는, 긴 면벽 수행을 견디기 위한 요가(Yoga)나 호흡법 같은 건강 증진 운동을 가르쳤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달마는 9년 동안, 말이나 글이 아닌 행동(行動)으로 선(禪)을 보여주었다. 

그의 침묵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글에 의존하지 않는다)'라는 선종의 핵심을 구현하는 가장 강력한 가르침이었다.


9. 혜가: 끊어진 팔의 구도

9년 동안 달마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감화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혜가(慧可, 487~593, 후일 중국 선종 제2조). 본명은 신광(神光)이었다. 

그는 이미 훌륭한 학자였고 지성인이었지만, 달마의 침묵 속에서 진정한 깨달음을 발견하려 했다.


혜가는 달마가 있는 동굴 앞에서 밤낮으로 무릎을 꿇고 서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폭설이 내렸다. 

눈이 허벅지까지 쌓였지만,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달마가 짧게 입을 열었다. 

"너는 무엇을 구하러 왔느냐?" 

"저는 스님의 법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자비(慈悲)를 베풀어 마음의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혜가가 간절하게 청했다. 

"최고의 깨달음은 오랜 고행과 인내 없이는 얻을 수 없다. 너는 왜 이렇게 헛된 고집을 부리느냐." 

달마가 꾸짖었다.


달마는 여전히 침묵했고, 혜가는 절망했다. 

그때, 혜가는 허리에 찬 칼을 꺼내 자신의 왼쪽 팔을 단숨에 베어 달마 앞에 바쳤다.


'단비(斷臂) 구법(求法, 팔을 끊어 법을 구하다)'이라는 이 충격적인 전승은 선종에서 깨달음을 향한 극한의 의지를 상징한다.


설증 혜가(慧可)가 팔을 베다—설충(雪舟等楊) 〈혜가단비도〉

달마는 비로소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네가 진정으로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스님, 제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혜가가 피를 흘리며 말했다.


달마가 말했다. 

"그 불안한 마음을 나에게 가져오라. 내가 편안하게 해 주겠다." 

혜가는 사색에 잠겼다. 

아무리 찾아도 '불안한 마음'의 실체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됐다.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吾已爲汝安竟)."


이 문답을 통해 혜가는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 

'불안한 마음'은 실체가 없어 잡을 수 없으며, 잡을 수 없으니 본래부터 '마음은 편안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달마는 혜가를 자신의 법을 이을 제자로 인정하고 가사를 전했다.


신발 한 짝의 전언과 후대의 평가

10. 독살설과 신발 한 짝의 귀환

혜가에게 법을 전한 후, 달마의 생애 말기는 다시 한번 비극적인 전승으로 뒤덮인다. 

전승에 따르면, 달마는 자신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시 중국 불교계의 질투와 시기로 인해 여섯 차례나 독살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달마는 소림사 근처에서 열반(涅槃 번뇌를 해탈한 최고의 경지. 죽음에 당도한 때)에 들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독살설(毒殺說)'이라는 썰과 함께 역사에 기록되었다.


달마가 열반에 든 지 3년 후 (전승), 북위의 사신 송운(宋雲)은 서쪽 지방을 여행하던 중 파미르 고원(Pamir, 중앙아시아)에서 달마를 만났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송운이 놀라서 물었다. 

달마는 홀로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신발 한 짝(一隻履, 일척리)만 들려 있었다. 

"나는 서쪽으로 돌아가는 길이오. 그대는 돌아가서 이 사실을 왕에게 말하지 마시오." 

달마가 답하고는 사라졌다.


송운은 수도로 돌아와 황제에게 이 이야기를 보고했다. 

황제는 믿지 않았지만, 송운이 하도 간절하게 말하여 달마의 무덤을 파보도록 명령했다.


무덤 속에는 달마의 시신 대신, 그가 신고 있던 신발 한 짝만이 남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발 한 짝의 전언(履呈, 이정)'이라는 전승이다. 

달마가 죽지 않고 서천(西天, 인도)으로 돌아갔다는 이 전설은, 달마가 '생사(生死)를 초월한 성인'이었음을 강조하는 선종의 신화가 되었다.


11. 선종의 개창과 유산

보리달마는 중국 불교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가 주장한 선(禪)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불립문자 (不立文字): 깨달음은 글이나 경전으로 세울 수 없다.

교외별전 (敎外別傳):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전 밖에 따로 전해진다.

직지인심 (直指人心):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본성(本性)을 직접 가리켜 본다.

견성성불 (見性成佛): 본성을 보면 곧 부처가 된다.


달마 이전의 중국 불교는 경전의 연구와 번역에 치중한 교종(敎宗) 중심이었다. 

달마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명상과 실천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파헤치는 수행을 강조했다.


이러한 선종(禪宗)의 가르침은 이후 중국에서 크게 융성하여, 6조 혜능(慧能)에 이르러 꽃을 피웠고, 다시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어 동아시아 문화와 사상의 근간을 이루었다.


보리달마는 양 무제와의 대화에서 "나도 알지 못합니다"라고 답하며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감추었지만, 그의 침묵과 갈대 강하, 9년 면벽, 그리고 신발 한 짝이라는 드라마틱한 행동들은 '선(禪)'이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통해 동아시아에 영원한 족적을 남겼다.


본 글은 주류 연구/공식 도록/1차·2차 사료를 우선으로 서사를 구성했습니다. 

확인 가능한 사실을 중심으로 하되, 불확실·가설적 요소는 본문 안에서 [논쟁]/[전승]/[추정]으로 즉시 표기했습니다. 

인물 내면·대화 등 극적 장면은 최소 창작으로 사실 흐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사용했습니다. 

연대·지명·혈연 등 이견이 큰 대목은 보수적으로 기술하고 대표 견해를 병기했습니다. 

특히 보리달마 관련 서사는 신화적 전승이 많으므로, 사실·전승의 구분 표기에 대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오탈자·사실 오류 제보와 추가 사료 추천을 환영합니다.


Bodhidharma’s origins are obscure; later lore casts him a Pallava prince taught by Prajñātāra. 

Around 520/526 (debated) he reached China, met Emperor Wu, declaring “no merit” and “no holiness,” then left—legend says crossing a reed. 

At Shaolin he “faced a wall” nine years; ties to Yijinjing/Xisui and Shaolin kung fu are contested. 

The Huike arm-cutting tale frames his transmission. 

Myths of poison and a shoe-filled tomb persist; Chan’s core ideals spread across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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