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 발키리 작전: 어느 독일 장교의 마지막 기도
깃발 아래의 환멸: 슈타우펜베르크의 결단
1. 프로이센 명예와 나치의 그림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1907~1944, 독일 육군 장교·1944년 7월 대령 승진)는 1943년 튀니지 전선에서 중상을 입고 베를린(Berlin)으로 돌아왔다.
그는 왼쪽 눈, 오른손 전체, 왼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육체적 상실만큼이나 그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정신적 환멸(Desillusionierung)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프로이센(Preußen) 군인 가문의 전통을 따르는, 명예와 조국에 대한 충성을 목숨처럼 여긴 사람이었다.
초기에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나치 독일의 총통)가 혼란스러운 독일을 재건할 지도자라 믿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나치(Nationalsozialismus) 정권의 광기가 전 유럽을 피로 물들이자, 그의 신념은 무너졌다.
"총통은 군인의 명예가 아닌, 범죄(Verbrechen)를 명령하고 있네. 우리는 더 이상 조국을 지키는 방패가 아니야." 그는 병문안을 온 동료에게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군복(Uniform)을 입은 채 나치 정권에 맞서는 반(反)히틀러 저항 세력에 가담했다.
이 저항 세력은 육군 고위 장교, 외교관, 학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히틀러를 제거하고, 연합군과 협상하여 독일의 명예를 보존하는 과도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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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기마 사진(17기병연대 시절) |
2. 발키리 계획: 반역의 청사진
저항 세력이 쿠데타(Putsch)의 도구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발키리 작전(Operation Walküre)이었다.
공식적으로 이 계획은 '국가 내부 비상사태(폭동, 폭격 등) 발생 시 예비군을 동원하여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 계획'이었다.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Friedrich Olbricht, 예비군 사령관이자 작전의 핵심 설계자) 장군은 이 발키리 계획의 서류를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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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 초상 |
암살(Eliminierung): 히틀러 암살 직후.
명령 하달: 암살 직후, 예비군 사령부에서 '발키리 작전 발동' 명령을 하달한다.
진압: 예비군(Ersatztruppen)이 SS(친위대)를 포함한 나치 핵심 세력을 '폭동 주모자'로 규정하고 체포한다.
권력 장악: 루트비히 베크(Ludwig Beck, 전 참모총장)를 수반으로 하는 새 정부를 수립한다.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가장 중요한 임무는 슈타우펜베르크에게 돌아갔다.
1944년 6월, 그는 예비군 사령부 참모장으로 발령받았다.
이 직책 덕분에 그는 총통 회의에 직접 참석하여 발키리 계획을 보고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자네의 손에 독일의 운명이 달려 있네.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없을 걸세."
헤닝 폰 트레스코프(Henning von Tresckow, 초기 저항 운동의 주요 인물) 소장이 그에게 말했다.
3. 세 손가락의 고뇌: 폭탄 조립
슈타우펜베르크에게는 히틀러뿐만 아니라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 SS 총수)와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 공군 사령관)을 모두 제거하여 나치 정권의 심장을 동시에 마비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7월 11일과 7월 15일, 슈타우펜베르크는 늑대 소굴(Wolfsschanze, 히틀러의 동프로이센 군사 본부) 회의에 참석했지만, 히믈러가 불참했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작전 실행을 포기해야 했다.
베를린의 동료들은 초조함에 떨었다.
"클라우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이 광기를 멈춰야 해. 다음번엔 히틀러 단독이라도 상관없다네. 무조건 실행하게!"
올브리히트 장군이 강력하게 주문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쇠약해진 몸으로 두 개의 영국제 플라스틱 폭약을 준비했다.
폭약에는 펜치로 핀을 뽑으면 10분 후에 터지는 화학 시한 뇌관이 부착되어 있었다.
세 손가락으로 이 섬세한 작업을 해내야 하는 것은 그에게 극도의 고통과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불완전함과 싸우며, 조국을 구하려는 마지막 결심을 굳혔다.
늑대 소굴의 운명적인 10분 (1944년 7월 20일)
4. 운명의 아침과 장소의 변화
1944년 7월 20일 새벽.
슈타우펜베르크는 보좌관 베르너 폰 헤프텐(Werner von Haeften, 슈타우펜베르크의 보좌관) 중위와 함께 베를린을 떠나 늑대 소굴로 향했다.
그들은 오늘이 독일 역사를 바꿀 날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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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폰 헤프텐(슈타우펜베르크 보좌관) 사진 |
오전 10시 30분, 늑대 소굴에 도착한 슈타우펜베르크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회의는 평소처럼 지하의 콘크리트 벙커(Bunker)가 아닌, 무더위와 환기 문제로 지상의 목조 회의실(Holzbaracke)에서 열린다는 것이었다.
빌헬름 카이텔(Wilhelm Keitel, 국방군 최고 사령부 참모장) 원수가 그에게 통보했다.
목조 회의실은 벙커와 달리 창문과 벽이 폭압을 바깥으로 분산시켜 치명성이 오히려 낮아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실행을 결심했다.
5. 피 묻은 손과 폭탄 조립
회의 시작 직전, 슈타우펜베르크는 헤프텐과 함께 회의실 옆 방으로 향했다.
폭탄 조립은 예상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한 손의 세 손가락만으로 뇌관의 핀을 뽑고 폭약에 삽입하는 과정은 느리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첫 번째 폭탄의 핀을 뽑아 시한장치를 작동시켰다.
10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그가 두 번째 폭탄을 조립하려 할 때, 문이 열리고 경고가 들려왔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회의 시작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분노와 좌절감에 몸을 떨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그는 두 번째 폭탄을 조립하지 못한 채, 단 하나의 폭탄만 서류 가방에 담고 회의실로 들어섰다.
이것이 작전 실패의 치명적인 씨앗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6. 테이블 다리의 운명
오후 12시 37분.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가 앉아 있는 거대한 떡갈나무 테이블(Oak Table) 옆에 섰다.
회의실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방을 히틀러의 발치, 테이블의 두꺼운 다리 바로 옆에 놓았다.
이 위치는 폭발력이 히틀러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도록 계산된 지점이었다.
"총통 각하, 잠시 베를린으로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슈타우펜베르크가 회의실을 나간 직후, 회의는 이어졌다.
바로 이때, 운명을 뒤바꾼 사건이 발생했다.
히틀러 옆에 서 있던 하인츠 브란트(Heinz Brandt) 대령이 지도에 접근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의 발이 테이블 아래의 가방에 걸렸다.
짜증이 난 브란트 대령은 무심코 가방을 집어 들어 두꺼운 떡갈나무 테이블 다리의 반대편,
즉 히틀러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 놓았다.
브란트는 이 사소한 행동으로 히틀러를 구원했다.
7. 폭발, 그리고 오판
오후 12시 42분.
거대한 폭발음이 늑대 소굴을 뒤흔들었다.
목조 건물의 지붕이 날아가고 벽이 무너져 내렸다.
검은 연기와 파편이 하늘로 솟구쳤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멀리서 폭발을 목격하고 확신했다.
"성공이다! 총통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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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소굴 회의실 폭발 직후 내부(피해 사진) German History in Documents & Images(GHDI)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
그와 헤프텐은 혼란에 빠진 경비병들을 속이며 늑대 소굴을 빠져나와 베를린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그들의 임무는 베를린의 동료들과 합류하여 발키리 작전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암살 작전은 치명적인 요인들에 의해 실패했다.
단 하나의 폭탄: 폭발력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테이블 다리: 브란트 대령이 가방을 테이블 다리 반대편으로 옮기면서, 두꺼운 나무 다리가 방패(Schutzschild) 역할을 해 폭발 에너지를 흡수하고 히틀러를 보호했다.
목조 건물과 창문: 목조 건물이라 충격파가 증폭될 것 같았으나, 역설적으로 폭발 에너지가 무너진 벽과 열린 창문을 통해 외부로 빠르게 분산되었다.
히틀러는 비록 고막 파열과 심각한 타박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졌다.
그의 운명론(Schicksalhaftigkeit)은 더욱 굳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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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만·괴링 등이 잔해를 시찰하는 장면(늑대소굴) |
베를린, 쿠데타의 5시간
8. 발키리의 지연과 베를린의 혼란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동안, 벤들러 블록(Bendlerblock, 육군 본부)에서는 혼란이 이어졌다.
올브리히트 장군과 베크 장군은 늑대 소굴과의 통신이 끊어지자 초조해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전화를 걸어 "총통이 죽었다"고 알렸지만, 공식적인 확인이 불가능했다.
프리드리히 프롬(Friedrich Fromm, 예비군 사령관이자 작전의 최고 지휘관) 장군은 주동자들과 한배를 탔지만, 히틀러 생존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발키리 작전의 발동을 주저했다.
"프롬 장군, 당장 서류에 서명하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작전을 시작해야 합니다!"
올브리히트가 프롬을 압박했다.
프롬은 명확한 히틀러 사망의 증거 없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올브리히트는 결국 프롬을 연금(軟禁)시키고 오후 3시 40분에 발키리 작전을 독자적으로 발동했다.
이미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간을 놓친 뒤였다.
9. 벤들러 블록의 오판
오후 4시 30분,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는 벤들러 블록에서 직접 지휘를 시작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즉시 군부대에 명령을 내려 SS 본부, 정부 청사,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게 했다.
베를린과 파리(Paris), 빈(Wien) 등 주요 도시의 쿠데타 부대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시계는 나치의 편이었다.
프롬 장군이 늑대 소굴로 전화를 걸어 카이텔 원수와 통화하면서 히틀러 생존 소식을 확인했다.
카이텔은 분노에 차서 프롬에게 반역자들을 즉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프롬은 순식간에 배신(Verrat)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슈타우펜베르크와 올브리히트를 체포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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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프롬 초상화 |
"네놈들은 반역자다! 당장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라!" 프롬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슈타우펜베르크와 동료들은 프롬의 부하들과 총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벤들러 블록은 내부 분열로 인해 쿠데타 본부에서 체포 현장으로 변했다.
10. 총통의 목소리와 작전의 종말
7월 21일 새벽, 독일 전역의 라디오에서 히틀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떨리긴 했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총통의 목소리였다.
"독일 국민 여러분! 나는 경미한 부상을 입었을 뿐, 이 비겁하고 무능한 소수 장교들의 암살 시도로부터 운명적으로 살아남았다!"
이 방송은 발키리 작전에 참여했던 모든 부대에 종말(Ende)을 고했다.
히틀러 생존이라는 명확한 사실 앞에서, 대부분의 군 지휘관들은 명령을 철회하고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슈타우펜베르크가 총통을 제거하고 군인들의 명예를 지키려 했던 5시간의 드라마는 이렇게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피의 숙청과 도덕적 유산
11. 즉결 처형과 마지막 외침
프롬 장군은 7월 20일 밤 11시경, 슈타우펜베르크, 올브리히트, 헤프텐, 그리고 베크(자살 시도 실패 후 부상)를 체포했다.
프롬은 자신의 반역 가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신속하게 주동자들을 숙청하려 했다.
프롬은 심야에 벤들러 블록 마당에서 즉결 군법 회의를 열고,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베크 장군은 체포 직전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프롬의 부하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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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베크(전 참모총장) 초상 |
새벽 12시 15분.
슈타우펜베르크와 동료들은 벤들러 블록 마당에서 총살을 당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총성이 울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신성한 독일이여, 영원하라!(Es lebe das heilige Deutschland!)"
히틀러는 자신을 배신한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허락하지 않았다.
프롬은 이후 체포되어 1945년에 처형되었다.
12. 히틀러의 잔혹한 보복과 붉은 재판소
7.20 발키리 작전은 히틀러의 편집증(Paranoia)을 극단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이 사건 이후 군대를 믿지 못했고, SS와 게슈타포(Gestapo, 비밀경찰)에 대한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히틀러의 보복은 잔혹했다.
수천 명의 저항 세력 관련자들과 그들의 친척들까지 체포되었다.
주동자들은 악명 높은 '인민 재판소(Volksgerichtshof)'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관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나치 인민 재판소 소장)는 피고인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사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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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재판소(Volksgerichtshof) 내부—프라이슬러·라이네케·라우츠 |
이들은 전통적인 총살형이 아닌, 고통스러운 교수형(Erhängen)으로 처형당했으며, 처형 과정은 필름에 기록되어 히틀러에게 상영되었다.
7.20 발키리 작전은 나치 정권의 피의 숙청(Blutige Säuberung)을 낳았고, 전쟁의 비이성적인 결말을 가속화했다.
13. 후대의 재평가: 독일 양심의 상징
7.20 발키리 작전은 군사적으로는 실패한 쿠데타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남긴 도덕적 유산(Moralische Leistung)은 엄청났다.
전후(Nachkriegszeit), 슈타우펜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은 '나치에 저항한 독일 양심의 상징'으로 재평가되었다.
그들의 희생은 독일이 나치즘(Nazismus)이라는 괴물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지 않았으며, 군복을 입은 채 반역을 감행한 영웅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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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20일 벤들러블록 안뜰에 있는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 독일 연방국방부(BMVg) 공식 사이트 Bundesministerium der Verteidigung |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영화, 드라마(예: 발키리, 2008) 등의 소재가 되어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인간 양심의 의무'가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라는 영원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들이 벤들러 블록 마당에서 남긴 마지막 외침은 비극적인 실패를 넘어, 자유와 정의를 갈망했던 독일의 목소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본 글은 주류 연구/공식 도록/1차·2차 사료를 우선으로 서사를 구성했습니다.
확인 가능한 사실을 중심으로 하되, 불확실·가설적 요소는 본문 안에서 [논쟁]/[전승]/[추정]으로 즉시 표기했습니다.
인물 내면·대화 등 극적 장면은 최소 창작으로 사실 흐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사용했습니다.
연대·지명·혈연 등 이견이 큰 대목은 보수적으로 기술하고 대표 견해를 병기했습니다.
오탈자·사실 오류 제보와 추가 사료 추천을 환영합니다.
Claus von Stauffenberg, maimed in 1943, joined the German resistance and adapted Operation Valkyrie to seize power after killing Hitler.
On 20 July 1944 at the Wolf’s Lair he set one timed bomb; a moved briefcase and the wooden hut vented the blast, and Hitler survived.
The Berlin coup stalled and collapsed; Stauffenberg was shot at Bendlerblock, others hanged by the People’s Court.
A military failure, the plot left a lasting moral le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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