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폭발 사건 1970: 다이너마이트로 처리하려던 공무원의 비극
해변에 좌초된 거대한 악취 (The Uninvited Guest)
퍼시픽 시티를 덮친 역겨운 불청객
1970년 11월 초, 오리건주 플로렌스(Florence, 오리건 해안가의 작은 도시) 주민들은 바닷바람이 아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독한 악취에 시달려야 했다.
태평양의 격렬한 파도에 밀려 플로렌스 인근 ‘사우스 제티 비치(South Jetty Beach, 시우슬로(Siuslaw)강 남쪽 방파제 부근)’에 좌초된 거대한 생명체 때문이었다.
바로 길이 약 13.7미터(45피트)에 달하고 무게가 8톤(16,000파운드)을 넘는 향유고래(Sperm Whale)의 사체였으나, 일부 회고 기사에서는 회색고래(Gray Whale)로도 전한다(논쟁).
북태평양의 조류를 따라 떠밀려온 이 고래는 이미 숨을 거둔 지 오래였고, 따스한 해안가의 햇볕 아래 내부에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부패(Decomposition)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거대한 몸통은 내부의 가스로 인해 마치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으며, 그 악취는 해변가 주택 수십 채를 며칠 만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다.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할 책임을 진 것은 오리건 주 고속도로국(OSHD, Oregon State Highway Division, 당시 해변 관리 담당 부서)이었다.
OSHD는 주로 도로를 닦고 다리를 건설하는 부서였지, 거대한 해양 포유류의 시체를 처리하는 전문가 집단은 아니었다.
그들의 관료적 조직망은 '고래 시체 처리'라는 전례 없는 비상사태 앞에서 마비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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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피에치/레지스터 가드 |
엔지니어 조지 손턴의 등장
이 전대미문의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실무 책임자는 주 고속도로국의 엔지니어 조지 손턴(George Thornton, 당시 30대 중반의 유능한 교통국 엔지니어)이었다.
그는 과거 미 해군 복무 시절 폭파 전문가(Demolition Expert)로 활약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손턴에게 있어, 이 문제는 단순히 크기가 큰 처리 대상일 뿐, 해결 불가능한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의 머릿속은 수많은 딜레마로 가득 찼다.
매립(Burial)을 하기에는 고래의 거대한 지방층이 지하수를 오염시킬 위험이 있었고, 워낙 무거운 탓에 해변의 모래를 깊이 파야 했으며, 파도가 심할 경우 시체가 다시 해변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게다가 불도저를 동원한 매립 작업은 예산 낭비였다.
견인(Towing)또한 문제가있었다.
당시 파도는 거셌고, 시체를 견인하다가 중간에 찢어지거나 표류하여 다른 해변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손턴은 상부의 "빨리, 저렴하게, 완벽하게 해결하라"는 압박과 매일같이 쏟아지는 지역 의원들과 주민들의 전화에 시달렸다.
그는 결국 자신의 해군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극적이고 효율적인 해결책을 선택했다.
바로 다이너마이트였다.
"자연은 잔인하지만 효율적이다. 거대한 시체를 작은 조각으로 만들면, 바닷속 청소부들(게, 물고기, 바닷새)이 나머지를 처리할 것이다. 이 폭발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자연의 순환을 가속화하는 공학적 촉매제다. 예산은 절약되고, 해변은 깨끗해질 것이다. 완벽하다."
다이너마이트 20 상자와 불길한 예감 (The Flawed Calculation)
폭파 전문가의 경고와 무시된 조언
손턴은 주 정부 창고에 보관 중이던 20 상자 분량의 다이너마이트, 총 약 반(半) 쇼트톤(≈1,000lb, 약 450kg)를 확보했다.
그의 계산은 단순했다.
폭발 충격으로 고래를 "모래 알갱이"처럼 작게 부수어 파도가 쓸어가게 하는 것.
당시 현장에는 폭약이 과도하다는 외부 폭파 전문가의 경고가 있었다는 회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고래의 지방층(Blubber)의 밀도와 탄성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손턴이 해군 시절 연락했던 한 폭파 전문가는 "고래 시체는 일반적인 바위나 금속이 아니다. 부풀어 오른 내부 가스와 지방층이 충격파를 흡수할 것이다. 20 상자는 터뜨리기에 너무 적거나, 분해하기엔 너무 많다. 차라리 시체를 절단하는 편이 낫다"고 경고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시간과 예산에 쫓기던 손턴은 그 조언을 관료주의의 지연 전술로 치부하고 무시했다.
그는 고래 시체의 반대편, 즉 바다 쪽 밑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여 폭발이 바다로 향하도록 유도했다.
미디어 서커스: 폴 린맨 기자
1970년 11월 12일, 역사적인 '처리' 작업이 예정된 날, 해변은 예상치 못한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수백 명의 구경꾼들이 현장을 찾았고, 지역 및 주 전역의 언론사 기자들까지 몰려들었다.
이들은 공무원들이 거대한 고래를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린다는 기괴한 광경을 절대 놓칠 수 없었다.
특히 포틀랜드 KATU-TV의 현장 기자 폴 린맨(Paul Linnman, 훗날 이 사건으로 컬트적인 명성을 얻은 기자)은 그의 카메라맨 더그 브라질(Doug Brazil)와 함께 가장 좋은 위치를 선점했다.
"고래 처리 작업은 오늘날 플로렌스에서 가장 큰 엔터테인먼트가 되었습니다. 구경꾼들은 마치 불꽃놀이를 기대하는 듯 흥분 상태입니다. 조지 손턴 엔지니어는 이 작업이 완벽하게 안전하고 깨끗한 처리 방식이라고 장담하고 있지만, 제 카메라맨은 고래의 크기를 보며 다이너마이트가 충분할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손턴은 안전거리를 최소 800미터로 설정하고 깃발을 꽂았지만, 호기심 많은 주민들은 그보다 훨씬 가까운 해변 언덕 위에서 작업을 관람했다.
그중 한 명인 월터 우멘호퍼(Walter Umenhofer, 인근 거주자)는 자랑스러운 자신의 새하얀 신차 올즈모빌 88(Oldsmobile 88, 당시 고가였던 대형 세단)을 주차장에 세워두고 작업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검은 지방의 비 (The Blubber Rain)
대폭발과 관료주의의 비극
오후 늦게,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할 무렵, 조지 손턴은 마침내 기폭 장치를 작동했다.
카운트다운 5, 4, 3, 2, 1...
엄청난 굉음이 플로렌스 해안을 뒤흔들었다.
폭발과 함께 모래와 물보라, 그리고 고래 시체의 잔해가 수백 미터 상공으로 버섯구름처럼 치솟았다. 충격파는 모래를 짓누르고 바다를 흔들었지만, 고래의 지방층이 다이너마이트의 에너지를 의도치 않게 흡수해버렸다.
손턴이 기대했던 '작은 조각들' 대신, 폭발은 고래의 복부를 거대한 압력으로 갈라놓았고, 냉동 트럭만 한 고래 지방 덩어리들, 내장, 그리고 썩은 살점들이 포탄처럼 무작위로 발사되었다.
잠시 후, 중력에 의해 그 끔찍한 파편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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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regon Historical Society 16mm 4K Doug Brazil footage stills KATU |
린맨 기자의 보도 :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 지금 무언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지옥의 비가 내리는 것 같습니다! 거대한 조각들이... 오, 신이시여! 거대한 고래 지방 덩어리입니다! 관중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작은 조각으로 분해될 것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이것은 고래 파편(Whale Shrapnel)입니다!"
린맨의 카메라맨은 필름이 멈출 때까지 이 믿을 수 없는 장면을 기록했다.
가장 큰 희생자는 안전지대를 이탈하여 주차해 두었던 월터 우멘호퍼(Walter Umenhofer)의 올즈모빌 88이었다.
폭발로 날아간 50센티미터 크기의 고래 지방 덩어리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차 지붕을 얇은 캔처럼 찌그러뜨리고 차량 내부를 더러운 기름과 피로 뒤덮었다.
우멘호퍼는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우멘호퍼’ 사례는 현지 신문·방송 회고 기사에서 널리 확인된다.)
관료주의의 최악의 변명
폭발 직후, 해변은 이전보다 훨씬 더 참혹한 상태가 되었다.
고래 시체는 여전히 거대한 잔해로 남아 있었고, 그 주변 1킬로미터 이내에는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는 지방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손턴의 계획은 명백하게 재앙적인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OSHD는 여기서 또 다른 역사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조지 손턴을 대신해 공식 입장을 발표한 고위 공무원들은 '책임 회피'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OSHD의 공식 성명 :
"우리는 폭발의 목적, 즉 해변에 있던 고래를 제거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고래는 더 이상 해변에 없습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폭발물의 양이 너무 많았다는 점뿐입니다. 우리는 잔해 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도저를 동원할 것입니다. 이 폭발은 실패가 아니라, 향후 공공 안전을 위한 중요한 실험이었습니다."
이 '폭발은 성공했으나, 너무 성공했다'는 식의 기괴한 변명은 대중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관료주의의 무능함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격상시켰다.
손턴 엔지니어는 이 일로 인해 공직 경력에 깊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전설이 된 오리건의 실패 (The Enduring Blunder)
이 '고래 폭발 사건'은 현대 사회의 '탁상공론 행정'과 '자연에 대한 오만'을 비판하는 교과서적인 사례로 남았다.
가장 큰 비판은 전문성의 결여에 집중되었다.
폭발 전문가와 해양 생물학자(Marine Biologists) 등 해당 분야의 전문가 대신, 도로 전문가인 엔지니어 한 명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고래의 시체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부패 가스가 가득 찬 생물학적 폭탄이라는 점을 완전히 간과했다.
이는 곧 공공 안전 문제를 유머러스한 재앙으로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전적으로 폴 린맨 기자의 현장 보고서 덕분이었다.
그의 보고서는 코믹하고도 당황스러운 현장 상황을 완벽하게 포착했고, 1990년대 중반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자 이 영상은 '가장 멍청한 공공 사업 프로젝트'의 예시로 밈(Meme)처럼 전파되며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후 오리건 주는 좌초 고래 처리에 폭약 사용을 사실상 배제하고 매립·견인 등으로 지침을 정비했으며, 플로렌스에는 ‘Exploding Whale Memorial Park’가 조성되어 사건의 교훈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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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ploding Whale Memorial Park 표지석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
영원히 회자되는 블랙 코미디
조지 손턴은 훗날 이 사건을 유머로 승화시켰다.
그는 은퇴 후 인터뷰에서 자신이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만큼 거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말했다.
"모든 사람이 실수를 합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른 실수는 엄청난 굉음과 하늘에서 내리는 고래 지방을 동반했고, 전 세계 언론이 생중계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손턴은 그날의 폭발이 최소한 한 가지는 달성했다고 농담했다.
해변에 있던 고래 시체는 없어졌고, 단지 수천 개의 작은 조각으로 해변 전체에 퍼졌을 뿐이라고.
오리건 주 플로렌스의 해변은 이제 깨끗하고 평화롭지만, 모래사장을 걷는 사람들은 가끔 파도에 밀려오는 작은 고래 뼈 조각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1970년 11월, 인간의 오만한 공학적 해법이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조용히 증언하는 블랙 코미디의 기념비로 남아있다.
본 글은 신뢰 가능한 보도·회고 자료(오리건 백과사전, KATU-TV 보도·대본 아카이브, 현지 신문 회고 기사, 사건 전문 사이트 등)를 바탕으로 지명·인명·수치 등 필수 교정을 최소 범위에서 반영했습니다.
(논쟁) 표기는 출처 간 서술 차이를 뜻합니다.
오류 제보·사료 추천 환영합니다.
참고(발췌): Oregon Encyclopedia(Florence Whale Explosion), KATU 보도/해설·전사본, TheExplodingWhale.com(증거·연표), Register-Guard 회고 기사, Visit The Oregon Coast/Exploding Whale Memorial Park 안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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