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D. 록펠러: 석유 시대의 신탁왕과 냉혹한 설계자
아버지의 거짓말, 어머니의 통장 (The Farm Boy and the Baptist Faith)
카리스마 넘치는 사기꾼 아버지와 엄격한 신앙의 어머니
1839년, 뉴욕주 리치포드(Richford, 뉴욕 중부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는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는 극과 극의 가르침 속에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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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D. 록펠러 초상(1895, Eastman Johnson 유화 사진복제) University of Chicago Library(원화는 Eastman Johnson) 퍼블릭 도메인“Rockefeller, John D. — Portrait (Eastman Johnson)” photoarchive.lib.uchicago.edu |
그의 아버지 윌리엄 '빌' 록펠러(William 'Bill' Rockefeller, 약장수이자 사기꾼)는 거대한 체구와 화려한 언변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식물성 의사'라 칭하며 약을 팔러 전국을 떠돌았는데, 사실은 부동산 사기, 밀주 거래 등을 일삼는 전형적인 사기꾼(Charlatan)이었다.
빌은 아들들에게도 끊임없이 돈의 '거래 기술'과 '냉혹함'을 가르쳤다.
열두 살의 존은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 사탕을 사서 친구들에게 되팔아 작은 이윤을 남겼다.
존이 뿌듯해하자, 빌은 코웃음 쳤다.
"존, 가장 중요한 것은 약점을 숨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네 말을 믿게 하고, 네가 파는 것에 의존하게 만들어라. 세상은 호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죄가 아니다."
반면, 그의 어머니 일라이자 데이비슨(Eliza Davison, 독실한 침례교 신자)은 정직, 근면, 그리고 절약을 삶의 신조로 삼았다.
빌이 집에 없을 때마다 그녀는 홀로 여섯 아이를 키웠고, 존에게는 엄격한 절제의 미덕을 가르쳤다.
존은 어려서부터 수입과 지출을 꼼꼼히 기록하는 작은 장부(Ledger)를 항상 지니고 다녔으며, 7세 때 칠면조를 키워 번 돈을 낯선 이에게 1달러 50센트에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등 타고난 사업가적 기질을 보였다.
존 D. 록펠러의 내면은 이 두 가지 극단적인 DNA, 즉 아버지의 냉혹한 거래 정신과 어머니의 계산적이고 근면한 절약 정신이 충돌하며 형성된 것이다.
이 충돌은 훗날 그의 사업 방식과 기부 철학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첫 직장과 99년의 계획
16세가 되던 1855년, 록펠러는 오하이오주의 주요 상업 중심지인 클리블랜드(Cleveland)로 이주했다.
그는 마침내 첫 정식 직장인 '휴잇 앤 터틀(Hewitt & Tuttle)'이라는 곡물 중개 회사에 장부계원(Bookkeeper)으로 취직했다.
그의 업무 시작일인 9월 26일은 평생 그에게 기념일처럼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그는 이 날을 'A Day'라고 불렀다.
그의 성실함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는 아침 6시에 출근하여 밤늦게까지 일했고, 회사의 모든 회계 장부를 외우다시피 했다.
록펠러는 이 시절부터 '모든 것은 조직되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사장은 그의 봉급을 깎으려 했고 록펠러는 즉시 사직했다.
그는 나중에 회고했다.
"나는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나의 시간은 나의 사업 자산이다."
그는 그 해, 친구인 모리스 클락(Maurice Clark)에게 2000달러를 빌려 클락 & 록펠러(Clark & Rockefeller)라는 곡물 무역 회사를 차렸다.
그의 나이 고작 20세였다.
그는 이 사업에서 '단 한 번도 투기에 참여하지 않고, 오직 수요와 공급에 따른 합리적인 거래만 할 것'이라는 원칙을 세웠다.
혼돈 속에서 질서를 보다 (The Oil Rush and Standard Oil)
'검은 황금' 시대의 도래
1859년, 펜실베이니아주 타이터스빌(Titusville)에서 에드윈 드레이크 대령이 유정을 뚫어 석유(Petroleum)를 발견했다.
이는 미국 전역을 뒤흔드는 '오일 러시(Oil Rush)'를 촉발했다.
수많은 광부와 투기꾼들이 석유를 캐기 위해 몰려들었고, 현장은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혼돈(Chaos) 그 자체였다.
석유 가격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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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트홀에서 1865년 하루 800배럴을 분출한 유정과 목제 탱크·마차” Library of Congress · No known restrictions The Library of Congress |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추(Drilling)'에만 열광했지만, 록펠러는 달랐다.
그는 시추 현장의 무질서와 낭비를 경멸했다.
"시추는 도박이다. 석유는 넘쳐흐르지만, 그걸 정제하고 운반하는 시스템이 없다면 그저 쓸모없는 진흙일 뿐이다. 나는 불안정한 공급(Isfet)을 다루지 않는다. 나는 필요한 질서(Ma'at)를 만들 것이다. 석유를 캐는 사람은 바보요, 정제하는 사람이 왕이 될 것이다."
록펠러는 1863년, 화학자 새뮤얼 앤드루스(Samuel Andrews), 동업자 모리스 클락과 함께 Andrews, Clark & Co.(일명 ‘엑셀시어 워크스’)에 투자하며 클리블랜드에서 석유 정제 산업에 발을 들였다.
스탠더드 오일, 태어나다 (1870)
록펠러는 정유 산업의 비효율성을 해소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와 효율성에 집착했다.
그는 정유 공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부산물(By-product)까지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예: 아스팔트, 파라핀 왁스, 윤활유 등).
1870년, 록펠러는 투자자들과 함께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Standard Oil Company, 오일 산업의 표준을 만들겠다는 의미)를 설립했다.
이 회사의 이름처럼, 그의 목표는 '표준'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또한 스탠더드 오일을 여러 계열사 위에 단일 지배로 묶는 ‘트러스트’ 구조는 1882년에 공식화되었다.
록펠러의 인생에서 그의 냉철한 사업 방식에 유일하게 따뜻한 균형을 제공한 인물은 그의 아내 로라 스펠만(Laura Spelman, 독실한 신앙과 지성을 갖춘 교육자)이었다.
로라는 록펠러의 도덕적 나침반 역할을 했다.
로라는 남편의 사업적 성공을 지지했지만, 그의 '신탁' 경영 방식을 항상 경계했다.
로라는 록펠러에게 "당신의 장부에 기록된 돈은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존."이라고 자주 말했다.
록펠러는 사업과 신앙을 철저히 분리했다.
그는 수요일과 일요일 밤에는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했지만, 월요일 아침에는 가장 냉혹한 사업가로 돌아왔다.
이 이중생활은 록펠러의 평생의 특징이자 논란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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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록펠러 예배당 University of Chicago Photographic Archive photoarchive.lib.uchicago.edu |
신탁왕의 클리블랜드 학살 (The Octopus)
수평 통합과 클리블랜드 학살 (The Cleveland Massacre)
록펠러의 통치 방식은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고 질서를 세우는 것이었다.
1870년대 초, 클리블랜드에는 26개의 정유소가 난립해 있었다.
록펠러는 이 무질서한 경쟁이 가격 하락을 유발하고 모두를 파멸로 이끈다고 믿었다.
그는 수평 통합(Horizontal Integration)을 시작했다.
핵심은 철도 회사와의 비밀 계약이었다.
1872년, 록펠러는 정유·철도 담합 구상체인 ‘사우스 인프루브먼트 컴퍼니’(South Improvement Company, 철도사들과의 운임 담합·리베이트 체계를 설계한 비밀 카르텔)를 앞세워, 당시 석유 물류의 대동맥이던 철도 3대 거인 Pennsylvania Railroad(PRR; 필라델피아–피츠버그 축의 동서 간선), Erie Railroad(오대호 연안·클리블랜드–뉴욕 항만 연결), New York Central(뉴욕–버펄로–시카고로 이어지는 주간 간선)과 ‘리베이트+드로백’(경쟁사 운임 일부 환급 포함) 비밀 운임 계약을 추진했다.
이 합의는 여론 폭발로 1872년 3월 무산됐지만, 그 사이 록펠러는 클리블랜드 정유소 인수 드라이브를 가속했다.
이 계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스탠더드 오일은 할인된 운임으로 석유를 운송한다.
철도 회사는 경쟁사들이 지불한 운임의 일부(리베이트)를 스탠더드 오일에게 돌려준다. (‘드로백’이라 불린 경쟁사 운임 환급이 특히 치명적이었다.)
이 계약은 경쟁 정유소들에게는 파멸을 의미했다.
그들은 스탠더드 오일보다 세 배나 비싼 운임을 지불해야 했고, 경쟁 자체가 불가능했다.
록펠러는 이 공포를 이용하여 클리블랜드의 정유소들을 헐값에 매수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클리블랜드 학살(Cleveland Massacre)'이라 불린다.
록펠러의 변명 : "나는 그들이 파멸하는 것을 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구원했다. 무질서한 난립 속에서 파산하는 것보다, 내가 제시한 합리적인 가격에 회사를 팔고 스탠더드 오일의 주식을 받는 것이 그들에게 더 이득이었다."
단 6주 만에 클리블랜드의 26개 정유소 중 22개가 록펠러의 손에 넘어갔다.
1880년 무렵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정유 능력의 약 90%를 통제했다(1890년경에도 80%대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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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D. 록펠러 초상(사로니, 1880경 사진) Wikimedia Commons(원본 출처 LOC) / 퍼블릭 도메인 “John D. Rockefeller by Sarony, 1880” 위키미디어 공용 |
석유의 문어(Octopus)와 아이 다 타벨
록펠러는 단순한 독점을 넘어,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Standard Oil Trust)라는 새로운 법적 구조를 창안했다.
이는 수많은 자회사 주식을 하나의 신탁(Trust)에 위임하여, 록펠러와 소수의 이사들이 전체 기업을 단일하게 통제하는 방식이었다.
이 시스템을 통해 록펠러는 미국의 모든 석유 산업을 손바닥 안에 넣고 '석유 왕(Oil King)'이 되었다. (18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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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 주권(주식증서) 이미지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Standard Oil Trust Stock Certificate” 위키미디어 공용 |
그러나 그의 절대적인 권력은 대중과 언론의 분노를 샀다.
그를 비판하는 언론인들, 즉 '머크레이커(Muckraker, 진흙을 파헤치는 사람, 탐사 보도 기자)'들이 등장했다.
가장 치명적인 비판은 여성 탐사보도 기자 아이 다 타벨(Ida M. Tarbell)로부터 나왔다.
타벨의 아버지 프랭클린 타벨은 펜실베니아의 소규모 정유·배럴 사업자였다.
1902년부터 그녀는 '매클루어스 매거진(McClure's Magazine)에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The History of the Standard Oil Company)"를 연재했다.
타벨은 록펠러의 냉혹하고 비도덕적인 사업 관행을 낱낱이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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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클루어스 매거진 표지(1904) — 타벨의 ‘스탠더드 오일’ 연재” McClure’s 1904 cover, Ida Tarbell, Standard Oil series explorepahistory.com |
"스탠더드 오일은 '문어(Octopus)'다.
그것은 온 나라를 검은 촉수로 휘감고, 정직한 기업가들의 목을 조른다.
록펠러는 교회의 벤치에서는 천사지만, 사업의 장부에서는 냉혹한 독재자이다.
그는 법을 어기지 않았을지 모르나, 도덕을 파괴했다."
이 연재는 대중을 격분시켰고, 록펠러의 대중적 이미지는 천재적인 사업가에서 국민의 공적(Public Enemy)으로 추락했다.
이 사건은 록펠러의 명성과 스탠더드 오일의 몰락을 가속화한 결정적인 스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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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Standard Oil Octopus”(Puck, 1904) · 풍자만화 원본 석판화 미 의회도서관(LOC) Prints & Photographs 퍼블릭 도메인(미국 연방 컬렉션·1904 제작) The Library of Congress |
몰락과 과실: 셔먼법의 칼날
대중의 분노는 결국 정부의 개입을 초래했다.
미국 의회는 독점을 금지하는 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을 통과시켰다.
수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1911년 미국 대법원은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가 독점금지법을 위반했다는 판결을 내리고, 이를 34개의 독립된 회사로 분할할 것을 명령했다.
분할로 탄생·강화된 주요 회사: Standard Oil of New Jersey(훗날 Exxon), Standard Oil of New York(훗날 Mobil), Standard Oil of California(훗날 Chevron), Standard Oil of Indiana(Amoco) 등.
경영적과실과비판
록펠러의 가장 큰 과실은 지나친 통제와 독선이었다.
그는 효율성을 위해 모든 것을 중앙집권화했지만, 이는 결국 혁신과 경쟁을 질식시켰다.
그의 독점은 소비자들에게는 저렴하고 안정적인 석유를 공급했을지 모르지만, 미국의 자본주의 정신인 자유 경쟁의 기회를 박탈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그의 사업 성공은 개인의 천재성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느슨한 법망과 철도 카르텔이라는 불공정한 시스템에 깊이 의존하고 있었다.
재탄생: 세계 최고의 자선가 (The Second Act)
'버는 것'에서 '주는 것'으로의 전환
스탠더드 오일이 해체된 1911년, 록펠러는 72세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해체는 그를 더욱 부자로 만들었다.
34개로 분리된 회사(Exxon, Mobil, Chevron 등)의 주식 가치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그는 명목상 경영에서 물러난 상태였지만, 여전히 세계 최대의 부자였다.
이때부터 록펠러는 그의 아내 로라와 아들 존 D. 록펠러 주니어(John D. Rockefeller Jr.)의 영향, 그리고 핵심 조언자 프레더릭 게이츠(Frederick Gates, 침례교 목사이자 자선 사업가)의 설득으로 자선 사업(Philanthropy)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게이츠는 록펠러에게 말했다.
"신은 당신에게 엄청난 부를 주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이 부를 관리하고 분배하는 청지기(Steward)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돈을 버는 것만큼 돈을 쓰는 것도 중요합니다."
록펠러는 사업에 적용했던 냉철한 효율성과 조직력을 자선 사업에 그대로 적용했다.
록펠러는 자선 사업에 조직력을 적용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웠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여 당시 20세기 최고의 대학 중 하나로 육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90년 시카고대 설립 헌장을 지원했고, 1892년 개교 이후에도 대규모 기금을 지속 출연했다.
또한 록펠러 의학 연구소(Rockefeller Institute for Medical Research)를 설립하여 질병 퇴치와 의학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인류 건강 증진에 이바지했다.
연구소는 1901년 설립, 훗날 ‘록펠러 대학교’로 개명.
나아가 1913년에 설립된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은 과학 연구, 공중 보건, 교육 및 예술 분야를 지원하며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대규모 자선 조직으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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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록펠러 의학연구소 병원 실험실(1910s) Wikimedia Commons(원본 DPLA) / 퍼블릭 도메인 “Laboratory at the Hospital of the Rockefeller Institute for Medical Research” 위키미디어 공용 |
영광과 독선의 이중 초상
97세까지 장수하며 록펠러는 말년에 그의 부정적 이미지를 상당 부분 희석시킬 수 있었다.
그의 말년의 취미는 골프와 사람들에게 10센트짜리 다임(Dime) 동전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가 검소함을 잃지 않았다는 상징처럼 대중에게 비춰졌다.
그러나 그의 명성에는 언제나 두 개의 그림자가 교차했다.
여전히 비판적인 역사가들은 그를 미국의 '강도 남작(Robber Baron)' 중 한 명으로 분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록펠러가 통일한 석유 산업이 장기적으로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부패의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한다.
그의 거대한 자선 행위조차도, 결국 불공정한 방법으로 모은 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미지 세탁의 일환이었다는 냉혹한 비판에 직면했다.
반면, 긍정적인 평가는 그를 '현대 경영의 설계자'로 추앙한다.
록펠러는 석유 공급의 안정화와 저가격화를 이루어 일반 대중의 생활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였으며, 무엇보다 그의 자선 재단을 통해 의료 및 고등 교육 분야에 혁명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돈을 버는 방식만큼이나 돈을 쓰는 방식까지도 현대적으로 조직화한 '이중 혁신가'였다.
그의 생애는 미국 자본주의의 영광과 독선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이중 초상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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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드우드 숲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록펠러 가족과 친구들 Rockefeller Archive Center REsource · RAC 라이선스 “Rockefellers National Parks photo essay 1924” REsource |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빛
존 D. 록펠러는 1937년, 플로리다주 오몬드 비치(Ormond Beach)에서 사망했다.
그의 삶은 아버지의 냉혹한 가르침으로 시작하여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으로 마무리된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였다.
그가 세운 거대한 석유 제국은 해체되었지만, 그 제국이 낳은 자녀 회사들(현대의 주요 에너지 기업들)과 그가 남긴 자선 재단의 빛(Foundation's Light)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를 비추고 있다.
록펠러의 이야기는 극단적인 자본주의가 낳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빛과 가장 깊은 그림자를 동시에 보여주는, 꺼지지 않는 석유 램프의 불빛과 같다.
그는 한 손에 독점의 칼날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선의 빵을 나누어 준 이 시대의 복잡한 왕이었다.
본 글은 사료·주류 연구를 기본으로 필요한 범위의 각색을 더한 역사 서사입니다.
(논쟁)/(전승) 표기는 사실·해석 구분을 위한 표기입니다.
핵심 참고: Ida M. Tarbell, The History of the Standard Oil Company; Ron Chernow, Titan: The Life of John D. Rockefeller, Sr.; Allan Nevins, Study in Power; 미국 대법원 1911년 판결문; University of Chicago/ Rockefeller University/ Rockefeller Foundation 연감·연보.
오류 제보·사료 추천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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