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의 정원 (1970년대, 평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의 공식 명칭).
평양시 보통강구역 (보통강구역, 김정일의 관저가 위치했던 지역).
서슬 퍼런 비밀과 사치가 공존하는 '15호 관저' (김정일 관저)의 깊숙한 곳, 리일남 (이한영의 본명)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로열 패밀리' (왕족이나 귀족처럼 특권을 누리는 집단)의 일원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970년대 초, 리일남의 어린 사촌 동생 김정남 (김정일의 장남, 당시 4-5세)은 관저의 실질적인 '대장 동지' (김정남을 깍듯이 부르던 호칭)였다.
리일남은 김정남보다 11살이나 많았지만, 김정남은 리일남을 보자마자 "일남이 왔네"라고 반말을 했고, 리일남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김정남을 깍듯이 '대장 동지'로 호칭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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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일남, 훗날 이한영 |
이곳의 특권은 상상을 초월했다.
김정남의 생일 선물 구매단은 매년 일본, 홍콩, 독일 등지를 돌며 총 100만 달러어치 (당시 엄청난 금액)의 선물을 사 왔고, 이 장난감을 보관하는 방은 300평 규모에 달했다.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비서, 리일남의 이모부)은 어린 김정남을 위해 대원수 제복까지 맞춰줄 정도로 아들을 애지중지했다.
하지만 이 호화로운 삶은 '창살 없는 감옥' (리일남이 후에 평한 북한 생활)이었다.
김정일은 유부녀였던 영화배우 성혜림 (리일남의 이모, 김정남의 생모)과 동거를 시작했고, 아들 김정남의 존재를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김일성 (북한의 초대 지도자)에게조차 비밀로 부쳐야 했다.
김정일은 자신의 불안한 입지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이 가족의 비운의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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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의 가계도 |
리일남은 이모 성혜림 (신경성 질환과 불안으로 고통받음)과 어머니 성혜랑 (성혜림의 언니, 작가)에게서 남조선 (대한민국)의 소설과 영화를 접하며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그는 이병주의 소설 <망향>을 읽고 밤잠을 설쳤고, 주석궁 (김일성이 거처하는 곳) 깊숙한 곳에서 남조선 TV 연속극 <세 자매>의 주제가까지 기억했다.
특히 김정남은 코미디언 이주일 (남한의 유명 코미디언)과 구봉서 (남한의 유명 코미디언)를 너무 좋아해 여덟 살 때 이주일을 데려오라고 떼를 썼다는 일화는, 이들 로열 패밀리가 누린 극단적인 정보 특권과 동시에 그들이 가진 욕망의 일면을 보여준다.
리일남의 마음속에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한번 가보는 것'이라는 꿈이 자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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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씨의 이모 성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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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패밀리에서 망명자까지
1976년, 리일남은 모스크바 외국어대학 (모스크바 외국어대학, 소련 유학) 어문학부 유학생 1기로 선발되어 러시아로 떠났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첫 번째 창살 없는 감옥 탈출의 기회였다.
[모스크바, 1978년]
리일남은 레닌 대로 바빌로바 가 (바빌로바 가, 북한 소유 아파트가 있던 곳)의 북한 아파트에서 성혜림, 성혜랑 등과 생활했다.
그는 이곳에서 유럽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북한의 돈줄 역할을 하던 공관원들 (해외 파견 북한 외교관/요원)을 통해 뇌물 (5천~1만 달러)과 사치품 (벤츠 450)을 받으며 귀공자 생활을 이어갔다.
1982년, 이종 사촌 김정남의 교육 문제 (김정일의 아들 교육 문제)로 고민하던 김정일은 결국 김정남을 스위스 제네바 (스위스의 도시) 국제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김정일은 리일남에게도 제네바에서 어학 연수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제네바, 1982년 가을]
리일남은 제네바 교외 클로 벨몽의 아파트 (스위스 제네바 외곽의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리일남은 서방 사회의 자유를 만끽하며, 자신이 '생존경쟁'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 얼마나 치열한 곳으로 왔는지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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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스위스 유학시절 |
1982년 9월 28일, 리일남은 운명적인 전화를 걸었다.
스위스 주재 한국대사관 (한국 공관)이었다.
리일남 (가명 김영철): "나는 북한 외교관이다. 북한 여권 세 개를 가지고 있는데, 미국 여행을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
그는 귀순 의사를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고 '미국 여행'을 구실로 삼았지만, 한국 대사관 (당시 노신영 안기부장)은 긴급히 '몽블랑' (이한영 망명 작전의 암호명) 작전을 발동했다.
리일남은 스위스 당국을 통한 귀순을 극력 반대했고, 발각 시 '무시무시한 보복' (북한의 보복)을 우려했다.
몽블랑 작전은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서독, 필리핀, 대만 등 6개국을 거쳐 진행되는 007 작전 (첩보 영화처럼 긴박한 비밀 작전)과 같았다.
1982년 10월 1일, 리일남은 김포공항 (대한민국의 옛 국제공항)에 도착하며 남한 땅을 밟았다.
안내자: "어떻게 한국 광고판의 사람들을 아느냐?"
리일남: "남조선 텔레비전을 봐서 안다.".
그는 북한 최고 권력층의 사생활과 비밀을 아는 '로열 패밀리'였지만, 서울 도착 전까지는 자신의 신분을 완전히 숨겼기 때문에 정부조차 그가 김정일의 처조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방종과 생존의 14년
대한민국에 정착한 리일남은 '이한영' (韓永, 한국에서 영원히 살라는 의미로 안기부가 지어준 이름)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는 특별보상금 1억 원 (1983년 당시 큰 금액)을 받고 안기부 (국가안전기획부, 당시 정보기관) 조사에서 금수산 의사당 (김일성이 거처하던 주석궁), 호위사령부 (김일성, 김정일을 경호하던 부대)의 구조, 김일성 부자가 먹는 특수 물품 등 최고위급 기밀 정보를 털어놓았다.
[대한민국, 1983년~1995년]
이한영은 핀란드 이민자 자녀로 위장하여 한양대학교 (한양대학교, 서울 소재 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그는 남한 사회에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돈 쓸 때뿐이었다' (이한영의 저서에 기록된 심정)고 토로할 만큼 외로움과 고립감에 시달렸다.
그는 집을 담보로 융자를 받아 학과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데 탕진하기도 했고, 이는 안기부 담당관과의 갈등을 낳았다.
안기부 담당관: "네 돈 네 맘대로 쓰는 건 좋다만, 네가 북한 귀순자라는 신분을 잊지 말라!".
이한영: "내 돈 내가 쓰는데 왜 참견입니까? 이 사회에서 저를 살아있게 하는 건 이 돈뿐입니다!".
이러한 방탕한 생활 (돈을 물쓰듯 쓰고 자살 소동까지 벌임)은 그가 비판받을 부분이었다.
그는 자유를 '방종' (절제 없는 행동)으로 착각했고, 결국 1984년 자살 소동 (수면제 복용)까지 벌였다.
안기부는 그를 진정한 보호 대상보다는 '골치 아픈 존재'로 여겼으며, 1985년 얼굴 성형 수술 (신분 노출 우려로 성형)을 시키고 거처를 옮기게 했다.
1987년, 그는 KBS (한국방송공사) 국제국 러시아어 방송 PD (방송 제작 담당자)로 취직하여 서울올림픽 (1988년) 통역으로 활동했다.
1988년, 모델 출신 김종은 (이한영의 아내)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으나, 1990년 그는 '큰돈을 벌어야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KBS를 그만두고 주택 건설업 (인터커넥션)을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그는 1993년 횡령 혐의로 옥살이 (수감 생활)를 하는 등 사업에 실패하며, 경제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한영: "평양의 궁전 생활에는 부족한 게 없었지만,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여기서는 작은 주연이라도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경제적 궁핍에 몰린 이한영은 1995년, 자신이 가진 '정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모스크바와의 국제전화, 1995년 10월]
그는 월간조선 (남한의 월간 잡지) 우종창 기자에게 자신이 기억하는 모스크바 이모 성혜림의 거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13년 만에 모자 간의 극적인 통화가 성사되었다.
(3차 통화)
이한영: "혹시 그러면 정남이 이모세요?" (성혜림의 조카임을 밝힘).
모스크바 (성혜랑): (잠시 정적 후) "목소리가 아닌데?".
이한영: "조카 목소리 알아요? 나 조카에요.".
모스크바 (성혜랑): "생년월일이 얼마입니까?".
이한영: "60년 4월 2일...".
성혜랑: (낮은 목소리로) "나야... 나야...".
이한영: "엄마! 엄마 맞어?" (흐느낌).
성혜랑: "맞어... 맞어.".
성혜랑: "너 목소리가 왜 이렇게 다르니? 너 어떻게 됐니? 어디 있니?".
이한영: "엄마, 오빠 이름 뭐야?"
성혜랑: "성... 성일기 (리일남의 외삼촌)."
이한영: "엄마 나 일남이야. 엄마 맞구나!".
이 통화에서 성혜랑은 김정일의 세 번째 부인 고용희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의 생모)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성혜랑은 고용희를 "방치코" (방망이처럼 생긴 코라는 평안도/함경도 방언의 비하적 표현)라고 불렀는데, 이는 김정일의 본처인 성혜림 일가가 고용희의 등장으로 겪은 괄시와 질투, 그리고 권력 투쟁의 인간적 갈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혜랑: "방치코. 그 여자 때문에 네 이모 병 나지 않았니? (김정일이) 지금 방치코하고 산단 말이야. 아이 가득 낳고.".
성혜랑은 김정일이 리일남이 남한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죽은 걸로 알고 있다'고 전했으며, 곧 성혜랑 자신이 '제3세계로 탈출할 계획' (성혜랑의 망명 계획)을 은유적으로 아들에게 알렸다.
이한영은 1996년 6월, 이 통화 내용을 포함하여 김정일의 사치 생활, 기쁨조 (김정일의 유흥 조직), 김정남의 후계자 문제 등 김일성 일가 (북한 최고 권력층)의 내밀한 사생활을 폭로한 책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이한영의 수기)을 출간했다.
이 책은 북한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이었고, 김정일은 관저 명칭 (15호 관저) 같은 기밀이 새어나간 것에 분노했다.
이한영은 NIS의 만류 (정보 노출 방지)를 무시하고 책을 출간하며 신변 안전을 스스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김정일 생일 전날 밤의 총성
1997년 초, 한반도의 정치적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1997년 2월 12일,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 (주체사상 창시자, 북한 최고위급 망명자)이 망명을 요청하며 북한은 한국 측에 대한 '보복' (테러 위협)을 공언하고 있었다.
이한영은 이 보복의 첫 번째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한영 (아내 김종은에게): "나는 언제 총에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 북한이 보복을 하면 첫 대상은 내가 될지도 모른다고...".
이때, 북한 사회문화부 (대남 공작을 총괄하는 기관) 소속의 전문 테러 요원들 (최순호/왕문성, 윤동철 등으로 구성된 특수 공작조)이 남파 (남한으로 내려옴)되어 이한영을 제거하기 위한 치밀한 공작을 시작했다.
[1997년 2월, 분당]
범인들은 조직적이고 치밀했지만, 남한 사회의 일상에 익숙지 않은 '서투른'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심부름센터 (사설 정보업체)를 이용하여 이한영의 주소지 (대학 선배 김장현의 아파트)를 알아냈는데, 이 과정에서 30만 원 이상 송금 시 실명 확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몰라 40만 원을 한 번에 입금하거나, 주민등록번호 확인 과정에서 가명을 사용하는 등, 일상적인 남한 금융 시스템에 익숙지 않은 헛점을 보였다.
또한, 이한영의 이전 거처 전화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전화국 직원이나 잡지사 기자 (우먼센스 기자)를 사칭하는 등, 조직적인 추적을 가했다.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서울경찰청 소속 경관 (정보과 경찰관)과 교정직 공무원 (구치소 수형번호를 아는 사람)이 전산 조회를 통해 이한영의 정보를 북한 측 고정 간첩 (남한에 장기간 숨어 활동하는 간첩)에게 유출하는 사건 (국가 과실)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이한영의 정확한 행적이 노출되었고, 이는 후일 국가 배상 판결 (국가 배상 책임 인정)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1997년 2월 15일 토요일 밤.
이날은 김정일의 생일 (2월 16일) 하루 전날이었다.
범행 시점 자체가 '김정일 생일을 맞아서 보내는 충성 표시의 선물' (북한 공작 기관의 충성심 발로)로 해석되었다.
이한영 (36세)은 발렌타인 데이 (2월 14일) 특수로 초콜릿 가게 (서울 강남 백화점에서 운영한 임시 매장) 장사가 잘 된 덕분에 기분이 좋았고, 동서와 평양냉면 (고향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는 아내와 딸에게 줄 초콜릿 꽃바구니를 들고 임시 거처인 분당 시범단지 현대아파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418동으로 돌아왔다.
[21시 52분경, 아파트 14층 복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바바리코트를 입은 두 명의 괴한 (최순호, 윤동철)이 대기하고 있었다.
괴한 (추정): "가서 이야기나 잠시 하자. 함께 이북으로 가야겠어.".
이한영은 순간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는 공작원들이 들고 있는 권총 (벨기에제 베이비 브라우닝 권총, 크기가 작아 암살용으로 선호됨)을 북한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간첩임을 확신했다.
격렬한 실랑이가 5분가량 이어졌다.
이는 공작원들이 처음부터 암살보다는 납치 또는 유인 (이한영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북한으로 데려가는 것)을 시도했다는 강력한 증거다.
하지만 이한영의 완강한 저항과 아파트 주민 (박 모 씨, 남 모 씨)의 목격 시도 때문에 계획이 틀어졌다.
괴한 중 한 명이 권총에 소음기 (맥주병 따는 소리 수준의 발포음)를 장착하고 이한영을 향해 총 두 발을 발사했다.
한 발은 왼쪽 이마에 관통상을 입혔다.
이한영은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필사적으로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이한영 (희미한 목소리로): "간...첩! 간...첩!".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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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2월 16일 동아일보 조간 1면 |
비운의 운명과 후대의 평가
이한영은 분당차병원 (경기도 성남시 소재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으나, 뇌에 박힌 총알 (25구경 실탄)이 뇌관 기능 (심폐 기능을 조절)을 마비시켜 뇌사 상태에 빠졌다.
그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10일을 버틴 후, 1997년 2월 25일 밤 9시 3분, 향년 36세로 사망했다.(추정)
범인들 (최순호 등)은 범행 직후 아파트 외곽 (경부고속도로 판교IC 인접)에 대기시킨 대포 차량 (강원도 번호판 쏘나타)을 타고 남해안을 거쳐 공작 잠수함 (북한 공작용 잠수함)과 접선하여 북한으로 귀환, '공화국 영웅' (북한의 최고 칭호) 칭호를 받았다.
이 사건은 남파 간첩 (남한에 파견된 북한 간첩)에 의한 한국 최초의 탈북자 (북한 이탈 주민) 살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한영 암살 사건은 당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곧바로 영화 <의형제> (2010년 개봉, 송강호/강동원 주연)의 모티브 (실화 기반)가 되는 등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후대의 평가와 논란]
1. 국가 책임론: 이한영의 유족 (아내 김종은)은 2002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국가가 보호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2008년 대법원은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으나 (9,699만 원 배상), 이한영이 안기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언론 인터뷰 및 TV 출연 (이주일의 투나잇쇼 등)을 통해 스스로 신분을 노출한 책임 (자신의 과실)도 있다며 국가 책임을 60%로 제한했다.
이는 탈북 최고위층 인사 보호에 대한 국가의 미흡한 대응과,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 사이의 책임 소재를 묻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2. 가족의 운명: 이한영 암살 사건은 이 가족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이한영의 사촌동생 김정남 (김정일의 장남)은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후 해외를 전전하며 (마카오 등) 생활비를 지원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한영은 생전 김정남이 "장남이자 장손이니 죽이기야 하겠니"라고 생각했으나, 김정남 역시 이한영의 사망 20년 만인 2017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이복동생 김정은 (현 북한 지도자)의 지시로 VX 신경작용제 (화학 무기)에 의해 암살당했다.
3. 이한영의 자기 성찰: 이한영은 남한에서의 삶을 돌아보며,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소의 수입만 있으면 얼마든지 주연일 수 있다' (자유로운 삶의 가치)고 평가했다.
그는 평양에서는 김정일과 김정남만을 위한 '조연'이었지만, 남한에서는 자신의 삶의 주체는 '나 자신'임을 깨달았다.
다만 그는 이 자유를 '방종' (과도한 음주가무, 사업 실패)으로 착각했던 것을 반성하며, 결국 그의 죽음은 자유를 찾아 나섰으나, 그 자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정치적 보복에 노출된 개인의 비극적인 사례로 남았다.
자유의 무게
1997년 2월 25일.
경기도 광주시 (이한영의 유해가 묻힌 곳)의 한 공원묘지에 '이한영'이라는 이름의 망명자는 조용히 묻혔다.
그의 삶은 북한 최고 권력층의 특권 뒤에 숨겨진 인간적 고뇌, 그리고 남한 사회의 자유와 자본주의가 개인에게 던지는 냉혹한 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가 갈망했던 '자유'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북한에서 경험했던 '단역'의 삶을 벗어나,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고자 하는 '주연'의 꿈이었다.
그러나 그가 깨달았듯이, 진정한 자유는 '어느 정도의 절제와 질서 안에서 지켜' (이한영의 후기에서 언급된 성찰)지는 것이었으나, 그는 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의 과실은 개인적인 영역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정치적인 보복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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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촬영된 김정일의 가족사진 |
이한영의 비극은 우리에게 단순한 테러의 역사를 넘어선 질문을 던진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절제와 국가의 책임 아래 어렵게 지켜지는 것이다.
이한영은 국가 기밀을 폭로함으로써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라는 업적을 남겼지만, 그 결과로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그의 아내 김종은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며 법정 투쟁을 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방어망을 넘어, 망명자가 인간적인 삶과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사회와 국가가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임을 깨닫게 한다.
그의 죽음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북한 정권의 폭력적인 대남 테러 유형 (요인 암살, 해외 동포 위협 등)과, 동시에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서 겪는 정착의 어려움, 고독, 그리고 근원적인 외로움 (남한 사회에서 돈만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던 감정)이라는 인간적인 숙제를 남겼다.
이한영은 '단역들의 집단'인 북한을 떠나 '무수한 주연들이 살아가는 사회' (자유 민주주의 사회)로 왔지만, 그의 생은 결국 북한의 그림자와 남한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막을 내렸다.
그의 이야기는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그 자유를 수호해야 할 우리 사회에게, 자유의 무게와 인류애의 중요성을 잊지 말라는 묵직한 교훈을 전하고 있다.
본 글은 신뢰 가능한 보도·법원 판결문·회고·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몰입을 위해 일부 장면·대사·심리를 서사적으로 각색했습니다.
확정 근거가 있는 정보는 [사실], 정황·보도 의존은 [추정], 증언·회고 중심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사안은 [논쟁]으로 표기합니다.
사실 오류 제보가 있을 경우 검토 후 정정합니다.
Based on testimonies, court rulings, and contemporaneous reports, the piece traces Lee Han-young’s path from privileged insider in Pyongyang to defector in Seoul, his turbulent years under a new identity, and his 1997 assassination widely attributed to North Korean agents.
It highlights the “Mont Blanc” defection, legal findings on partial state liability, and enduring questions of responsibility, freedom, and ex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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