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경계를 본 남자 - 스리니바사 라마누잔 연대기 (1887-1920)
가난과 신념의 경계에서 피어난 재능
1897년, 쿰바코남 (Kumbakonam,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의 역사적인 도시)
어둠이 짙게 깔린 남인도(South India)의 외딴 브라만 (Brahman, 힌두교 카스트 중 최고 계급) 가정.
아홉 살 난 소년, 스리니바사 라마누잔 (Srinivasa Ramanujan, 1887년 12월 22일 에로데 출생)은 기름 램프 아래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의 집안은 가난했고, 어린 시절은 질병과 가난 그 자체였다.
그의 위로 태어난 세 명의 동생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라마누잔! 아직도 수학인가?” 어머니 코말라타말 (Komala Tamal, 독실한 힌두교 신자)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아들이 수학에 대한 남다른 천재성을 보이는 것은 자랑스러웠지만, 그 재능이 밥벌이가 되지 못하는 현실에 불안해했다.
“어머니, 이 숫자들이 저에게 말을 걸어요. 세상의 모든 진리가 이 안에 있어요.”
라마누잔은 대답했다.
그의 손에는 조지 슈브리지 카 (George Shoobridge Carr)의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의 기초 결과에 대한 개요》라는 두꺼운 책이 들려 있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정식 교육 없이 독학으로 수학을 공부하며 수많은 정리를 독립적으로 발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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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니바사 라마누잔 아이양가르 |
당시 인도는 영국령 인도 (British Colonial India) 시대였으며, 라마누잔과 같은 브라만 계층은 강한 종교적 신념과 전통적인 생활 양식을 고수했다.
그에게 수학적 영감을 주는 것은 나마칼 (Namakkal, 타밀나두 주에 위치한 도시)의 여신 나마기리 (Goddess of Namakkal, 라마누잔 가족의 수호신)였다.
그는 자신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나마기리가 꿈속에서 준 수학적 통찰력"이라고 믿었다.
이는 서구 합리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우화로 치부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라마누잔은 쿰바코남 대학교 (Kumbakonam University, 남인도의 케임브리지 대학이라 불림)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으나, 수학 외의 모든 과목에서 낙제하는 과실을 저질러 결국 중퇴하고 만다.
수학에 대한 "과도한 몰두(excessive preoccupation)"가 다른 과목을 소홀히 한 이유였다.
대학 학위가 없었기 때문에, 가난한 집안에서 생계를 책임질 직업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1909년, 마드라스 (Madras, 현재의 첸나이)
라마누잔은 10세의 어린 소녀, 자나키 암말 (Janaki Ammal, 1900년 출생)과 결혼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감에 시달렸지만, 수학 외의 다른 일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노트를 들고 도움을 청하러 다녔다.
인도인 고위직과 영국인 관리들, 마드라스 (Madras, 인도 남동부의 주요 도시) 교육기관의 교수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라마누잔의 비범한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독창적이지만 당시의 수학적 틀과는 너무나 다른 결과들의 가치를 판단하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R. 라마찬드라 라오 (R. Ramachandra Rao, 라마누잔의 후원자 중 한 명)라는 신사가 그의 독창적인 작업을 인정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자네의 노트는 놀랍네. 하지만 난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판단할 수가 없네. 자네는 일류 연구 수학자들과 접촉해야 해.” 라마찬드라 라오는 말했다.
라마누잔은 1913년, 당시 유명한 영국 수학자였던 H. F. 베이커 (H. F. Baker)와 W. E. 홉슨 (W. E. Hobson)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그의 노트에는 증명 없이 결과만 나열된 복잡한 정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혁신적이고 낯선 방식 때문에 그의 재능은 경시되고 있었다.
하디와의 조우, 무한의 문을 열다
1913년 1월 16일, 케임브리지 (Cambridge, 영국 유수의 대학교 도시)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G.H. Hardy,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천재 수학자)는 인도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것은 23세의 인도 사무원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의 것이었다.
편지에는 증명 없는 수많은 복잡한 수학 정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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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
하디는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다.
그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 "터무니없는 주장(outrageous claims)"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연수의 합 1+2+3+4+⋯이 무한대로 발산하는 것이 상식인데, 라마누잔은 이 값이 -1/12이 된다고 직관적으로 계산해냈다.
이것을 라마누잔 합 (Ramanujan summation)이라고 부른다.
상식적인 덧셈으로는 불가능하며, 복소해석학의 해석적 확장 (analytic continuation)이라는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하디는 즉시 이 정리들이 '가장 뛰어난 수학 천재만이 쓸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특히, 이 중 일부는 오래된 난제인 리만 가설 (Riemann Hypothesis, 수학의 미해결 난제 중 하나)에 사용되는 리만 제타 함수 (Riemann zeta function)와 연관성이 있음을 알아챘다.
하디는 동료이자 공동 연구자인 존 이든저 리틀우드 (John Edensor Littlewood, 하디의 절친한 친구이자 수학자)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했다.
“리틀우드, 이 남자가 미쳤거나, 아니면 뉴턴, 가우스와 동급의 천재일세!”
하디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증명 없는 정리들의 깊이와 아름다움은 정말 놀랍네.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발견을 했을까?” 리틀우드가 맞장구쳤다.
하디는 곧바로 라마누잔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University of Cambridge)으로 초청하기로 결정했다.
초청을 받은 라마누잔에게는 종교적, 문화적 갈등이 큰 장애물이었다.
브라만 계급은 바다를 건너는 것 (Crossing the Sea, 해외여행)을 불결함으로 여겼으며, 이는 종교적 신념에 크게 위배되는 일이었다.
이때, 라마누잔의 어머니의 꿈에 나마기리 여신이 나타나 "라마누잔의 목표를 가로막지 말라"고 명했다는 황당무계한 일련의 사건이 발생했다.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던 가족에게 이 신의 계시 (Divine Inspiration)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전승)
“어머니, 나마기리 여신께서 제가 영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라마누잔이 말했다.
“가거라, 아들아. 하지만 너의 신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낯선 땅에서 우리의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어머니는 눈물을 훔쳤다.
1914년, 라마누잔은 어린 아내 (Janaki Ammal, 당시 겨우 10대 초반)를 인도에 남겨둔 채 영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지적 성취와 고독한 투쟁
1914년~1918년,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 (Trinity College, Cambridge)
라마누잔은 하디 (Hardy)와 리틀우드 (Littlewood)의 멘토링 아래 연구에 몰두했다.
하디는 라마누잔의 직관과 통찰 (intuition)에 놀라면서도, 서양 수학계가 요구하는 엄격한 증명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라마누잔은 종종 대학 학부생 수준의 증명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그가 가난 때문에 종이를 아끼기 위해 결과를 직관적으로만 적는 습관과 정식 교육의 부재 때문이었다.
“라마누잔, 자네의 공식들은 경이롭네. 하지만 수학은 증명 없이는 건물의 초석을 놓지 않는 것과 같네. 신의 계시라도 증명은 인간의 몫이지.” 하디가 말했다.
그들의 공동 연구는 정수론 (Number Theory) 분야에 혁신적인 기여를 했으며, 라마누잔은 수많은 독창적인 공식을 발견했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삶은 라마누잔에게 고통이었다.
라마누잔은 독실한 힌두교 신자로서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힌두교 전통에 익숙했던 그에게 영국에서의 생활 양식은 적응하기 매우 어려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1차 세계 대전 (World War I, 1914-1918)이 발발하면서, 물자가 부족해졌고, 이는 라마누잔이 신념에 따른 적절한 식사를 조달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오늘도 감자로 버텨야 한단 말인가. 인도의 따뜻한 햇살과 어머니의 카레가 그립군.”
그는 중얼거렸다.
이로 인해 그는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폐결핵 (Tuberculosis)으로 쓰러졌다.
하디와 리틀우드가 있었지만, 인도 식민지 시절 (British Colonial India)의 인도인에 대한 차별과 고국, 가족과의 이별로 인한 외로움은 그를 괴롭혔다.
그는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1918년 겨울, 라마누잔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극에 달했다.
그는 영국 런던 (London)의 한 기차역 (Station, 구체적인 역은 불명)에서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철로에 뛰어드는 자살 시도를 했다. (논쟁)
이는 문화적 차이, 종교적 신념 고수 문제, 심각한 건강 악화, 그리고 그로 인한 절망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기차는 급정거했고, 라마누잔은 크게 다쳤지만 목숨을 건졌다.
그는 체포될 위기에 처했지만, 하디 (Hardy)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총동원하여 라마누잔을 감옥에서 빼내고 요양원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다.
이 사건은 당시 학계에 충격을 주었으며, 후대에 와서도 (1968년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가 언급했을 때) 고인 모독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민감한 주제였다.
라마누잔이 요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하디가 병문안을 왔다.
“타고 온 택시의 번호는 1729였어. 딱히 특징도 없는 평범한 숫자이지.” 하디는 무심히 말했다.
하디의 말에 라마누잔은 즉시 응답했다.
“아닙니다. 아주 흥미로운 수입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방법으로 두 양수의 세제곱 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수들 중 가장 작은 수이기 때문이죠.”
1729=123+13=103+93
이 수는 후대부터 하디-라마누잔 수 (Hardy-Ramanujan Number) 또는 택시 수 (Taxicab number)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대 단어 기원에 해당하는 이 일화는, 라마누잔의 직관적 천재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회자되지만, 사실 라마누잔은 이미 몇 해 전 분할 함수를 연구하며 이 내용을 노트에 기록해 뒀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었다.
하디는 병상에 있는 라마누잔을 위해 노력했고, 1918년 라마누잔은 영국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왕립학회 (Royal Society) 회원에 임명된다.
그는 가장 젊은 축의 회원이자 ‘초기 인도 출신 FRS’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된다.
무한대를 넘어선 유산
1919년, 마드라스 (Madras)
라마누잔은 영국에 머무는 5년 동안 20여 편의 논문을 출간했지만, 악화된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인도로 돌아왔다.
고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의 수학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마드라스의 병상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수학 공식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는 아내 자나키 암말 (Janaki Ammal)에게 종이 조각을 달라고 해서, 모의 세타 함수 (Mock Theta Functions)에 대한 혁명적인 발견들을 해냈다.
그는 이 결과를 하디에게 편지로 보냈다.
1920년 4월 26일, 쿰바코남 (Kumbakonam)
라마누잔은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자나키, 나의 노트들을 부디 잘 간직해 주시오. 이것들이... 미래에 빛을 볼 것이오.”
라마누잔은 마지막 힘을 짜내며 말했다.
라마누잔의 죽음 이후, 그의 아내 자나키 암말은 남편이 마지막 순간까지 썼던 얇은 종잇조각들을 모아 케임브리지의 하디에게 보냈는데. 이처럼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이었지만, 남편이 중요한 일을 한다는 것을 깨달은 자나키의 헌신과 선견지명 덕분에, 라마누잔의 마지막 발견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조지 앤드류스 (George Andrews, 미국 수학자)는 1987년 라마누잔 탄생 100주년 행사에서 자나키에게 이 '잃어버린 노트' (Lost Notebook)를 보존해 준 것에 대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며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라마누잔이 남긴 세 권의 노트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으며, 낙서 같은 의미 없는 숫자 나열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1976년, 미국 수학자 조지 앤드류스 (George Andrews)가 우연히 영국 수학자 왓슨 (G. N. Watson)의 폐기될 자료 속에서 미발표된 결과물들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라마누잔의 잃어버린 노트’ (Ramanujan's lost notebook)였다.
앤드류스가 이 노트를 발견하게 된 이유는 당시 짧은 유럽 체류 기간에는 비행기 값이 비쌌기 때문에, 영국에 며칠 더 머물며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에서 왓슨의 자료를 보러 갔다가 사서가 건네준 서류 뭉치 속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라마누잔의 노트에 담긴 수많은 공식과 정리는 그가 죽은 후 수십 년 동안 다른 수학자들에 의해 세심하게 연구되었으며, 정수론 (Number Theory) 분야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연구는 블랙홀의 엔트로피 계산, 양자역학 및 끈 이론 (string theory) 등 현대 물리학의 연구에도 활용되면서, 그의 업적의 심오함이 재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그의 발견은 너무나 혁신적이고 독창적이어서, 그의 사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그와 유사한 연구가 없었다.
라마누잔은 오늘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하디는 자신의 최대 업적이 "라마누잔을 발견한 일이다"라고 공언했다.
그의 삶은 가난과 제도적 교육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칭송받는다.
심지어 2019년(테크니온 주도) 자료에 따르면, 인공지능 (AI)이 수학 공식과 이론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이르렀는데도, 라마누잔의 이름을 딴 '라마누잔 머신' (Ramanujan Machine)까지 등장하며, 그의 독창적인 발견 방식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직관)이 여전히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라마누잔의 천재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의 연구 방식은 서구 학계의 기준에서는 과실로 지적받을 수 있었다.
그는 학계에서 통용되는 수학 기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논리적 증명 없이 직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그의 작업이 이해받지 못하고 "조잡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공식들이 결국 정확하고 깊이가 있음이 판명되면서, 이러한 독창적인 접근 방식 자체가 인류 지성사에 큰 기여로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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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의 수학 천재 스리니바사 라마누잔 의 흉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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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을 발견하는 눈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의 짧고도 격정적인 삶은 단순한 수학 천재의 성공 신화를 넘어선다.
그의 이야기는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진정한 재능은 제도적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가?
가난, 교육의 단절, 문화적 충돌, 심지어 종교적 신념까지, 라마누잔의 삶을 짓누르는 모든 현실적 제약 속에서도 그의 수학적 통찰력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노트는 인간의 내면에 깃든 타고난 직관과 끊임없는 열정 (passion, perseverance)이 얼마나 폭발적인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둘째, 천재를 알아보는 통찰력 또한 위대한 재능인가?
라마누잔의 천재성이 영원히 인도의 작은 우체국이나 마드라스 항만청 (Madras Port Trust, 라마누잔이 잠시 일했던 곳)의 서류 속에 묻힐 뻔했을 때,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G.H. Hardy)라는 '백락' (말 감정사처럼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그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하디의 역할은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었다.
그는 라마누잔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었고, 외로운 천재에게 '친구'라는 인간관계를 선물했으며, 그의 번뜩이는 직관을 서양 학문의 틀 속에 정착시키는 조력자가 되었다.
하디가 자신의 최대 업적이 라마누잔을 발견한 것이라 말했듯이, 우리는 라마누잔이라는 천재 개인의 빛과 동시에, 그 빛을 보호하고 증폭시킨 하디라는 거울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인류의 지적 진보가 개인의 고독한 천재성뿐만 아니라, 그 천재성을 인정하고 육성하며, 때로는 그 결점을 보완해주는 인류애적인 협력과 연대의 힘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마누잔의 유산은 단지 수학 공식들이 아니라, 재능과 기회가 만났을 때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다는 인류의 희망의 증거인 것이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전기·논문·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를 최소한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도·지명·직함 등 핵심 사실은 검증했으며, 확실치 않거나 설이 갈리는 대목에는 [전승]·[논쟁] 표기를 사용했습니다(예: 1729 일화[전승], 사인 추정[논쟁]).
학교·재직·FRS 선출 연도 등은 최신 정합으로 교정했습니다.
본문은 역사 왜곡을 지양하며, 오류 제보를 환영합니다.
Ramanujan (1887–1920), a self-taught Indian mathematician from Tamil Nadu, rose from poverty to reshape number theory.
Aided by patron R. R. Rao and Cambridge’s G.H. Hardy, he produced deep formulas on partitions, zeta, and q-series; the 1729 taxi story is widely told [trad.].
Elected FRS in 1918, he returned to India in 1919 and died at 32.
His notebooks, later rediscovered, fuel research in mathematics and physics and inspired the 2019 “Ramanujan Mac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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