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구달: 미지의 숲, 희망의 기록 (Jane Goodall: The Wild Forest, The Record of Hope)
꿈을 좇는 소녀, 과학의 경계에 서다 (1934–1960)
1934년, 제인 구달(Valerie Jane Morris-Goodall, 밸러리 제인 모리스구달)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기였지만, 어머니 마거릿 마이판웨 조셉(Margaret Myfanwe Joseph, 밴이라고 불림)의 무한한 격려 속에서 동물에 대한 깊은 애정을 키웠다.
어머니 밴은 제인이 동물에 대한 연구를 위해 수많은 시간을 보낼 때마다 (예를 들어, 지렁이가 어떻게 다리 없이 움직이는지 이해하기 위해 흙지렁이를 침대에 가져온 일, 닭장에서 몇 시간 동안 숨어 알 낳는 것을 기다린 일 등), 이를 '제인의 첫 동물 연구 프로그램'이라고 부르며 용기를 북돋았다.
"엄마," 어린 제인이 말했다.
"이 지렁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미끄러지면서 움직이는 거예요? 마치 땅이 이들을 들어 올렸다 놓는 것 같아요."
밴(Vanne)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네가 알아내야 할 일이야, 나의 작은 연구자야. 네가 보고, 느끼고, 이해하려는 한, 세상은 너에게 모든 비밀을 열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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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구달 |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공학자였던 아버지 모티머 허버트 모리스 구달(Mortimer Herbert Morris Goodall)은 군대에 징집되었고, 점차 가족과 멀어지면서 부모님은 결국 이혼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제인의 집안 형편은 넉넉지 못했다.
195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할 여유가 없었던 제인은 옥스퍼드 대학교(Oxford University) 행정실 비서로 일하며 생계를 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늘 야생에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읽었던 소설 《타잔(Tarzan of the Apes)》을 통해 품었던 아프리카에 대한 꿈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1956년 5월, 제인은 케냐(Kenya)에 사는 학교 친구 클리오 옴(Clio Ome)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아프리카로 가기 위한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녀는 런던에서 웨이트리스와 영화 제작 회사 근무 등 여러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이듬해 1957년 그녀의 나이 스물셋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운명적인 만남과 새로운 길
케냐에 도착한 제인은 한 달 후, 나이로비 자연사 박물관(Nairobi National Museum) 관장이자 저명한 고인류학자 루이스 리키 박사(Dr. Louis Leakey, 인간의 진화 연구에 몰두했던 유명 고고학자)를 만났다.
리키는 영장류 연구자를 찾고 있었는데, 그녀의 동물에 대한 강렬한 집착과 열정에 매료되었다.
리키 박사는 당시 주류 동물행동학자들의 '환원주의적 사고(reductionist thinking)'에 물들지 않은 제인의 신선한 시각이 침팬지 연구에 중요한 통찰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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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리키 박사 |
리키 박사는 제인에게 말했다.
"제인, 나는 침팬지(Chimpanzees) 연구가 우리 인간의 진화적 과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이라고 믿소"
제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침팬지요? 저는 그들을 관찰하고 싶어요. 이름을 붙여주고,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리키 박사는 제인 구달을 조수로 채용했고, 그녀는 리키 가족(아내 메리 리키, 아들 리처드 리키 등)과 함께 올두바이 협곡(Olduvai Gorge) 등지에서 발굴 작업을 도우며 자연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후 리키의 권유로, 제인은 1960년 7월 탄자니아(Tanzania, 당시 탕가니카 호수 근처)의 곰베 스트림 침팬지 보호구역(Gombe Stream Chimpanzee Reserve, 현재 곰베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당시 식민 정부 당국은 젊은 유럽 여성이 홀로 야생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그녀의 어머니 밴이 동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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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베 공원에서의 제인 구달 |
곰베의 혁명과 '인간 도구 제작자'의 종말 (1960–1966)
고독과의 싸움
곰베(Gombe, 탄자니아 서부 탕가니카 호숫가에 위치한 침팬지 보호구역)에서의 첫 몇 달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침팬지들은 '하얀 유인원(White Ape)'을 본 적이 없었기에 경계심이 극도로 강했다.
그들은 제인을 포식자(predator)처럼 취급하며, 비명을 지르고, 나뭇가지를 흔들고, 심지어 바위를 던지기도 했다.
그녀는 망원경과 공책 외에는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제인은 살아남기 위해 기이한 전략을 사용했다.
그녀는 항상 같은 색 옷을 입고, 침팬지들에게 관심이 없는 척했다.
땅에 작은 구멍을 파거나 나뭇잎을 먹는 시늉(pretended to eat leaves)을 하며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그녀는 극도의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게다가 그녀에게 지원된 연구 자금은 단 6개월분이었다.
제인은 "4개월이 지났는데도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해 돈이 바닥나면 꿈이 끝날까 봐 정말 걱정했다"고 회상했다.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와 도구의 발견
하지만 그녀의 끈기는 한 특별한 침팬지에 의해 보상받았다.
1960년 10월, 다른 침팬지보다 경계심이 덜했고 턱에 아름다운 흰 털(white hair)이 나 있어 이름 붙인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David Greybeard, 흰 수염을 가진 수컷 침팬지)가 처음으로 그녀에 대한 두려움을 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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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 |
어느 비 오는 날, 제인은 실의에 빠져 길을 걷다가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가 흰개미 집(termite Mound) 위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쌍안경으로 그를 관찰했다.
데이비드가 손을 뻗어 풀잎 줄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그것을 흰개미 집의 작은 구멍 속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잠시 후, 그는 줄기를 부드럽게 빼냈고, 줄기 끝에는 둥지를 방어하기 위해 달려든 흰개미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데이비드는 개미들을 훑어 먹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데이비드가 잎이 달린 작은 나뭇가지(leafy twig)를 골라, 그것을 도구로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잎과 잔가지를 제거하는 모습을 관찰한 것이다.
이 행위, 즉 도구의 제작(tool manufacture)과 사용(tool use)은 과학계에 폭탄과도 같았다.
당시 과학계의 오랜 통념은 '인간만이 도구를 만들고 사용한다(Man the Toolmaker)'는 것이었다.
이 문구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은 탄환(silver bullet)' 이론의 핵심이었다.
제인은 흥분하여 루이스 리키(Louis Leakey)에게 편지를 보냈다.
리키 박사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역사적이었다.
"자네의 발견은 위대한 것이네, 제인! 이제 우리는 인간을 재정의하거나, 도구를 재정의하거나, 아니면 침팬지를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할 걸세! (Now we must redefine man, redefine tool, or accept chimpanzees as humans!)"
이 발견은 리키 박사가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회(National Geographic Society)로부터 연구 자금을 계속 지원받도록 설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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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자니아의 흰개미 집 |
카메라 앞의 사랑과 가족
1962년경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침팬지 연구를 기록하기 위해 재능 있는 야생 동물 사진작가 휴고 판라빅(Hugo van Lawick, 네덜란드 귀족 출신의 야생 동물 사진작가)을 곰베에 파견했다.
제인과 휴고는 곰베의 축축한 흙냄새 속에서 사랑에 빠졌고, 1964년 런던 첼시 올드 교회에서 결혼했다.
1967년에는 아들 휴고 에릭 루이스(Hugo Eric Louis, 애칭은 '그럽')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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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고와 제인 |
제인 구달의 침팬지 연구는 단순한 도구 사용 발견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침팬지들이 개인적인 특성(personalities), 복잡한 사고(complex minds), 감정(emotions), 그리고 대를 잇는 장기적인 유대(long-term bonds)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녀는 침팬지들의 행동을 가까운 이웃처럼 관찰하며, 그들이 이타적(altruistic)일 수 있고, 사냥을 하기도 하며 (식단의 3% 미만), 심지어 '원시적인 전쟁(primitive warfare)'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기록했다.
이 모든 것은 당시 주류 과학계를 뒤흔들었다.
숫자가 아닌 이름
제인은 침팬지들에게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David Greybeard) 외에도 플로(Flo, 나이 든 암컷), 피피(Fifi), 플린트(Flint, Flo의 아들) 등 이름을 붙이는 혁신적인 방식을 택했다.
이는 당시 동물행동학계에서 '감정 이입(empathy)을 통한 객관성 상실'을 이유로 금기시되던 행위였다.
주류 학계는 동물을 번호로 식별하고, 본능적인 행동을 기계적으로 기록하는 '행동주의적 학습 이론(behaviorist learning theory)'을 선호했다.
1962년, 제인은 학사 학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스 리키의 도움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Cambridge University) 동물행동학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녀는 학위를 받지 않고 박사 과정에 입학한 단 8번째 인물이었다). (학위수여 1966년. 논문 제목 Behaviour of Free-Living Chimpanzees)
"케임브리지에 갔을 때, 나는 숫자를 써야 했고, 침팬지들의 성격이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들었어요. 그들은 그것들이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라고 했죠"
"하지만 저는 러스티(Rusty, 그녀의 특별한 반려견)와 함께 자랐어요. 개, 고양이, 말, 앵무새든, 어떤 동물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사람이라면 과학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요. 나는 조용히 침팬지의 성격과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계속했어요"
제인은 감정 이입(empathy)이야말로 지적인 동물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불가피한 도구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름 붙이기'는 단순한 사생활의 영역을 넘어,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근본적인 논란이자 혁명적 전환점이 되었다.
그녀는 1966년 동물행동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어둠의 그림자, 인간적 갈등, 그리고 활동가로의 변신 (1967–1986)
'알파 메일'의 폭력성과 진화론적 성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제인 구달의 연구는 침팬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초기에는 서열 다툼이나 사냥에서만 폭력을 관찰했지만, 점차 조직적인 영역 다툼, 유아 살해(infanticide), 그리고 공동체 간의 잔혹한 전쟁이 목격되었다.
제인은 침팬지 폭력성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가, 1970년대 목격된 폭력은 굉장히 끔찍했다.
예를 들어, 원래 같은 무리였지만 지리적으로 갈라진 작은 무리가 새끼를 낳지 않은 젊은 암컷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해당하는 사건을 연구팀이 관찰했다.
이러한 발견은 침팬지를 '순수한 야생의 존재'로 이상화했던 대중의 인식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폭력성(선천적 경향이 있음)이 침팬지와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진화론적 성찰을 촉발했다.
제인은 훗날 "인간은 침팬지보다 조금 더 지적인 원숭이에 불과합니다"라고 언급하며, 이 두 종이 사랑과 연민뿐만 아니라 폭력성도 공유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사생활의 파국과 스캔들
제인의 개인적인 삶 역시 복잡했다.
그녀와 남편 휴고 판라빅(Hugo van Lawick)은 전 세계의 관심 속에 곰베에서 연구와 육아를 병행했지만, 1974년 결국 이혼했다.
잦은 다툼과 서로의 시각 차이에 대해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것이 이혼의 이유였다.
휴고는 사진작가로서, 제인은 연구자로서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며 물리적, 감정적 거리가 생겼던 것이다.
1975년, 제인은 탄자니아 국립공원 관리자이자 다르 에스 살람 의회 의원이었던 데릭 브라이슨(Derek Bryceson)과 재혼했다.
데릭은 제인의 든든한 동반자였으며, 특히 1975년 5월 곰베에서 발생한 연구원 납치 사건 (정치적 이해관계와 치안 문제로 인해 연구가 중단될 뻔한 위기) 때 연구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데릭은 1980년에 사망하며 (사별), 제인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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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릭과 제인 |
업적의 정점과 패러다임의 전환
이러한 사생활의 부침 속에서도 그녀의 연구는 빛을 발했다.
1971년 출간된 《인간의 그늘에서(In the Shadow of Man)》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48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1986년에는 침팬지 행동에 대한 결정판으로 평가받는 《곰비의 침팬지: 행동 양식(The Chimpanzees of Gombe: Patterns of Behavior)》을 출판했다.
침팬지 도구 사용 연구의 심화
제인 구달의 초기 발견 이후, 영장류의 인지 능력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다.
침팬지들의 도구 사용은 단순히 시행착오적 행동이 아니라 계획 능력(planning)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계획은 과거 경험, 현재 문제, 그리고 사물의 작동 방식에 대한 지식 등을 이용한 '정신적 계산'을 통해 미래의 행동 방침을 미리 짜는 문제 해결 방식이다.
예를 들어, 콩고 공화국 구알루고 삼각지(Goualougo Triangle)의 침팬지들 연구는 도구 사용이 고도로 계획적임을 보여주었다.
1. 기억 및 추론에 의한 행동: 흰개미 낚시를 위해 보이지 않는 목표물(숨겨진 흰개미)을 추론해야 한다. 특히 건기에는 흰개미가 깊숙이 들어가기 때문에, 침팬지들은 구멍을 뚫는 도구(puncturing tool)와 낚시 도구(fishing probe)라는 두 가지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 2단계 과정을 개발했다.
2. 미래 필요에 대한 예측 (Anticipation of future needs): 곰베를 포함한 여러 연구 지역에서 침팬지들은 사용할 장소에 가기 전에 미리 도구를 제작하거나 적합한 재료를 챙겨 이동하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구알루고에서 침팬지들은 지하 둥지용 튼튼한 천공 도구(puncturing tools)와 낚시 도구(fishing probes)를 모두 가지고 도착하는 경우가 있었다.
3. 계층적 조직화(Hierarchical organization): 침팬지 행동은 '막대기 같은' 비유연적인(string-like) 행동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하위 루틴(subroutines)을 생략하거나 대체하는 유연한 구조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둥지 입구가 이미 열려 있다면 구멍 뚫기 루틴은 생략되었다.
4. '시험-작동-시험-종료(TOTE)' 패턴: 침팬지는 구멍을 뚫고 난 후 뚫는 도구의 끝을 냄새 맡거나 검사하여 (Test), 흰개미가 분비하는 페로몬(pheromones) 냄새를 통해 활성 둥지가 뚫렸는지 확인하고 (Criterion), 성공했을 때 행동을 종료했다 (Exit).
이러한 연구는 제인의 초기 발견이 얼마나 깊은 인지적 통찰을 담고 있었는지 후대에 증명했다.
활동가로의 변신: 곰베를 떠나 세상을 향하다
1986년, 제인은 '맥락 속의 침팬지 학술대회(Chimpanzees in Context symposium)'에 참석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급격한 삼림 파괴(deforestation)가 진행되고 있으며, 곰베 바깥의 침팬지 개체군이 급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제인은 이때 자신의 사명이 순수 연구자에서 환경 활동가로 전환되어야 함을 직감했다.
그녀는 침팬지를 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서식지 파괴로 인해 가난해진 아프리카 지역 공동체의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침팬지 보존은 인간 복지와 환경 관리가 연결될 때만 성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녀는 1977년 설립한 제인 구달 연구소(Jane Goodall Institute, JGI)를 통해 야생생물 보존 활동을 강화했다.
또한 침팬지가 유전적, 신체적으로 인간과 유사하여 의학 연구 및 임상 실험에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연구소를 방문하며 동물 실험 윤리 적용과 사육 환경 개선을 촉구했다.
"저는 더 이상 곰베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어요. 밀림이 파괴되고, 침팬지들이 사라지고 있는데, 내가 보고서만 쓰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희망의 메신저와 인류애에 대한 마지막 응시 (1991–2025)
풀뿌리 운동의 시작: 뿌리와 새싹
1991년, 제인 구달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풀뿌리 환경 운동 단체 '뿌리와 새싹(Roots & Shoots, 루츠앤슈츠)'을 탄자니아에서 12명의 학생들과 함께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 70개국 이상에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지역 사회, 동물, 환경 문제에 대해 행동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녀는 이후 1년에 약 300일 동안 전 세계를 누비며 강연을 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활동가로 살았다.
그녀는 2002년 유엔 평화 사절(UN Messenger of Peace)로 임명되었고, 2004년에는 영국 찰스 왕세자(HRH Prince Charles)로부터 대영 제국 훈장 2등급(DBE, Dame Commander of the British Empire, 여기사 작위)을 수여받았다.
미스터 H와 인간의 지성
제인은 강연을 다닐 때마다 봉제 침팬지 인형 '미스터 H(Mr. H)'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이 인형은 21세에 시력을 잃었지만 마술사가 된 게리 혼(Gary Haun)에게서 25년 전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다.
게리 혼은 제인에게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마세요. 길이 열려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주며 이 인형을 주었다.
미스터 H는 제인과 함께 61개국을 여행하며, 그녀의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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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구달이 상징 인형 ‘미스터 H’를 들고 미소 짓는 장면 |
그녀는 세상의 상황이 "전보다 악화"되었지만, 인간의 지성으로 재생 에너지 개발 등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그녀는 공장식 축산 문제와 재생 농업(regenerative agriculture)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이가 매일 각자의 선택을 통해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현대 문명과 '알파 메일'에 대한 비판
말년에 제인 구달은 현대 사회의 파괴적인 리더십과 과학 기술의 오만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그녀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시진핑(Xi Jinping),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그리고 일론 머스크(Elon Musk) 등을 거론하며, 이들을 힘과 위협으로 집단을 지배하는 파괴적인 '알파 메일(Alpha Male)'의 원형으로 진단했다.
그녀는 트럼프의 과시적인 행동 양식(으스대고, 경쟁자를 위협하기 위해 실제보다 더 크고 공격적인 것처럼 자신을 투사하는 행위)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수컷 침팬지가 보이는 행동과 동일하다고 분석했다.
그녀의 관찰에 따르면, 침팬지 사회에서도 폭력과 위협으로 지배하는 수컷들의 통치는 허무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으며, 오히려 가장 성공적인 리더들은 온화하고 배려심 깊은 특성을 보인다.
현대 사회가 힘의 과시와 배타적 지배욕에 근거한 리더십을 추대하는 것은 명백한 문명적 퇴행이라는 경고였다.
특히 그녀는 기술 만능주의의 상징인 일론 머스크의 '우주선'을 강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화성에 로켓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적이지 않아요. 우리가 지적이었다면, 우리의 유일한 집인 이 행성(지구)을 파괴하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녀에게 우주선은 인류 진보의 상징이 아니라, "불타는 집은 내버려 둔 채 새로운 거처를 찾아 나서는 어리석음과 무책임의 상징"이었으며, 현재의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태도를 대변했다.
그녀는 머스크의 우주선을 "가장 실패한 리더들을 실어 나르는 우주적 쓰레기 수거차"라고 풍자적으로 명명하며, 이들이 지구 파괴의 책임을 나머지 인류에게 떠넘기려는 비도덕적인 '행성적 젠트리피케이션(Planetary Gentrification)'을 시도한다고 비판했다.
그녀가 이들을 "우주로 보내버리고 싶다"고 한 발언은, 이들이 상징하는 파괴적인 이데올로기 자체를 거부하자는 은유적인 외침이었다.
후대의 평가와 유산
제인 구달 박사는 2025년 10월 1일, 캘리포니아(California) 순회 강연 중 9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녀는 사망 후 공개하기로 약속했던 인터뷰를 통해 인류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그녀의 업적은 과학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 혁명적이었다.
그녀는 동물을 의인화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수십 년간의 장기 연구를 통해 침팬지 사회의 복잡한 구조와 지성을 증명함으로써, '동물은 본능적, 인간은 이성적'이라는 오만을 허물었다.
그녀의 길은 다이앤 포시(Dian Fossey), 비루테 갈디카스(Biruté Galdikas) 등 다른 여성 영장류학자들(여성 프리마톨로지스트)에게도 선구적인 길을 열어주었으며, 이제 여성들은 전 세계 장기 영장류 행동 연구를 지배하고 있다.
그녀의 삶은 생명 윤리, 동물권, 생물 다양성 논의로 이어지며 사회 담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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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구달 &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 조각(시카고 필드뮤지엄) |
문화적 영향: 플로의 부고
그녀의 연구가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침팬지 플로(Flo)의 죽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플로와 그녀의 많은 자손들은 국제적으로 유명해졌고, 플로가 죽었을 때 《더 선데이 타임즈(The Sunday Times)》에 부고(obituary)가 실리는 전례 없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침팬지가 단순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 이름과 감정을 가진 '개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문화적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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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로의 부고 소식을 전한 선데이 타임즈 |
과실 및 비판의 여지
제인 구달에 대한 주요 비판은 초기 연구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다.
'이름 붙이기'와 '감정 이입'을 통한 관찰은 당시 과학적 객관성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큰 과실로 지적되었다.
또한, 그녀의 초기 로맨틱한 침팬지 묘사가 1970년대 침팬지 폭력성 발견으로 인해 깨졌을 때, 그녀의 순수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혼란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침팬지의 행동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데 평생을 바쳤다.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
그녀는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희망(Hope)은 수동적인 낙관론이 아니라 '행동과 연결된 뜨거운 동사'라고 강조했다.
희망을 잃으면 무관심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는 인류애와 인문학적 성찰로 가득 차 있다.
제인 구달의 교훈
제인 구달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겸손한 연결'에 대한 깨달음이다.
첫째,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허물라. 제인 구달의 발견은 인간만이 도구를 만든다는 '인간 도구 제작자(Man the Toolmaker)'라는 낡은 정의를 무너뜨렸다. 이는 인간이 자연계의 정점에 군림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 세계의 일부"이며, 침팬지와 폭력성뿐 아니라 사랑, 공감, 지성까지 공유하는 존재라는 겸허한 인식으로 나아가게 한다.
둘째, 리더십의 본질을 성찰하라. 곰베 숲에서 관찰된 파괴적인 '알파 메일'의 통치가 결국 실패하듯이, 인간 사회의 폭력과 위협, 탐욕에 기반한 리더십은 문명적 퇴행을 의미한다. 진정한 리더십은 온화함과 배려, 그리고 공감에 기반해야 한다는 인문학적 가치를 일깨워준다.
셋째, 희망을 행동으로 정의하라. 제인 구달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절망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가 추방을 요구했던 문제적 리더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무관심의 극치이며, 대신 우리 스스로가 다른 가치 체계 위에서 작동하는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매일의 작은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녀는 "작은 행동이라도 100만을 곱하고 10억을 곱하면 큰 변화를 이룰 거예요"라며 개인의 실천이 만드는 집단적 인류애의 힘을 믿었다.
결국, 우주선을 만들어 지구를 탈출하려는 오만(傲慢)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푸른 별(지구)에서 인간과 모든 생명이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적이고 혁명적인 인류애적 과제이다.
제인 구달 박사는 인류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 위로를 남겼다.
"희망을 잃지 마세요. 희망을 잃으면 무심해지고 아무 일도 안 하게 돼요. 포기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는 미래가 있어요. 아름다운 지구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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