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미루나무 아래의 냉전
냉전의 끝자락, JSA의 미소
1976년 8월, 데탕트의 그림자 아래
1976년 여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 남북한 군인들이 군사분계선 없이 공동으로 경비를 서던 지역)은 전 세계 냉전의 긴장과 일시적인 화해의 무드가 교차하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데탕트(Détente; 미·소 간 긴장 완화) 체제는 점차 쇠퇴 기운을 보였고, 그 여파는 한반도에 직접적인 안보 불안을 드리웠다.
특히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하면서, 미국 내에서는 아시아에서의 군사적 고립주의가 등장했고, 주한미군 철수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한국과 미국 간의 동맹 관계는 흔들리고 있었다.
이른바 코리아게이트(Koreagate; 1970년대 한국 정부가 미국의 정치인들을 상대로 불법 로비를 펼친 사건)와 한국의 인권 문제(박정희 정부의 권위주의 체제 강화)가 미국 의회에서 첨예한 갈등으로 비화하면서, 북한은 이를 주한미군 철수라는 오랜 숙원을 달성할 수 있는 호기로 인식했다. (논쟁)
북한 지도부에게는 이 시기가 한미 동맹의 결속력을 시험하고 미국의 개입 의지를 측정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판문점 JSA는 그 평화롭던 외관과는 달리, 그 아래에 팽팽한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
사건 이전 JSA에서는 남북한 군인들이 때때로 사적인 대화나 물물교환을 하며 비교적 온건한 분위기를 유지하기도 했으나, 미군과 북한군 사이에는 유독 갈등이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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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 JSA | 
미루나무와 두 장교
UN군 제3초소(CP 3)와 고지대에 위치한 제5초소(OP 5) 사이에는 미루나무 (Poplar Tree; 양 초소의 시야를 가려 안전 문제의 발단이 된 나무)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이 나무는 유엔군 초소의 시야를 가려 북한군 초소 3개(KPA 4, KPA 5, KPA 8)에 포위된 3초소의 안전을 위협했다.
유엔군 측은 이 나무를 제거하거나 가지치기하여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서 조지 보니파스 대위 (Captain Arthur G. Bonifas; 미 육군 소속 유엔군 경비대 중대장)는 한국에서의 근무를 3일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유능했지만 때로는 고집이 센 군인이었다.
그의 후임 중대장이 이미 JSA에 도착해 인수인계 과정 중이었으므로, 사실 가지치기 감독은 후임에게 맡길 수도 있는 업무였으나, 그는 마지막까지 임무를 직접 수행하기를 원했다.
마크 토머스 배럿 중위 (First Lieutenant Mark T. Barrett; 보니파스 대위의 소대장)는 JSA에 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임 장교였다.
그 역시 미루나무가 초소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1976년 8월 6일, 이미 유엔군 작업반이 나무 제거를 시도했으나, 북한군 경비병이 "이 나무는 우리가 심은 나무다"라고 위협하며 작업을 중단시켰고, 유엔군은 일단 철수했다.
이 일은 당시 JSA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도끼가 부른 광기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 JSA
“자, 오늘은 가지치기다. 미친 북한 놈들이 나무를 ‘지들이 심었다’고 우기지만, 우리는 정전협정상 아무 문제 없는 우리 영역의 안전을 확보하는 거다. 작업 시작!”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 보니파스 대위는 한국인 노무자 5명(KSC 인력)과 한국군/미군 장병 11명으로 구성된 경비팀을 이끌고 미루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그들은 나무를 베는 것이 아니라 시야 확보를 위한 가지치기만 할 계획이었다.
작업이 시작되자마자, 북한군 군관 2명과 하전사(병사) 8명이 트럭을 타고 나타났다.
북한군 장교는 작업 중단을 요구했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군은 "가지치기 정도는 OK"라며 수긍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일부는 한국인 노무자들에게 가지를 잘 치는 법에 대해 조언하는 등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잠시였다.
박철 중위의 등장과 집단 폭행
오전 10시 47분에서 50분 사이, 북한군 장교 2명과 15명의 병력이 추가로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을 이끈 인물은 조선인민군 박철 중위 (가명; 실제 본명은 홍성문이며, 평소 행실이 괴팍하여 미군에게는 'BULLDOG', 한국군에게는 '미친개'로 불렸던 인물)였다.
그는 1년 전 헨더슨 소령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의 전조로 불리는 사건)을 주도한 전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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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민군 박철 중위 | 
박철은 작업 중단을 재차 요구했고, 보니파스 대위는 여전히 거부했다.
박철 중위: "야, 당장 그만두라우! 내래 지난번에도 경고하지 않았는가!"
보니파스 대위: (영어로) "우리는 가지치기를 할 권리가 있다. 당신은 우리 영역에 있다. 물러서라."
보니파스 대위가 계속 작업을 명령하자, 박철은 북한군 병사 한 명을 경비본부로 보냈고, 곧이어 11시 30분경 트럭을 타고 북한군 20여 명이 추가로 도착하며 북한 병력은 약 3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 충돌은 북한의 상부 지시 (주한미군 철수라는 정치적 목표 아래 한미 동맹을 시험하고, 특히 후계자 수업 중이던 김정일이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총은 쓰지 말고 미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라'고 지시했다는 썰이 유력함)에 기반을 두면서도, 현장 초급 간부 박철의 과잉 충성 및 개인적인 광기가 얽힌 사건이었다.
박철 중위는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박철 중위: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보니파스 대위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인 노무자들은 이미 작업을 중단했으나, 보니파스는 작업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순간, 박철 중위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호주머니에 넣는 동작으로 공격 신호를 보냈다.
박철 중위: "죽여!"
이 짧은 한마디에 북한군 약 30여 명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트럭에 싣고 온 둔기와 현장에 있던 한국인 노무자들이 사용하던 도끼 및 괭이 등 흉기를 휘둘렀다.
보니파스 대위는 구타로 가장 먼저 쓰러졌고, 북한군 5명이 달려들어 도끼로 그의 머리를 찍어 무참하게 살해했다.
배럿 중위 역시 집중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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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사진 | 
단 4분간의 난투극.
미군 장교 두 명은 심각한 두부 손상을 입었다.
보니파스 대위(Arthur Bonifas)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배럿 중위(Mark Barrett)는 구타당한 채 이송 중 사망했다.
한국군/미군 사병 9명도 부상을 입었다.
북한군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Bridge of No Return; 정전협정 후 포로 교환에 사용된 다리)로 후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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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오지 않는 다리 | 
이 사건은 명백히 북한군의 잔혹한 만행이며, 정전협정 위반 행위였다.
특히 비무장 상태의 장교를 도끼로 잔혹하게 살해한 행위는 국제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한편, 북한 측은 사건 직후 "미군 측이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경비병들이 제지하러 나섰는데, 갑자기 미군이 자신들에게 도끼를 던졌고, 우리 하전사들이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 미군들에게 다시 던졌다"는 황당한 정당방위 주장을 공식 발표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이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북한의 태도는 당시 냉전 국가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비난을 받았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폴 버니언 작전
미국과 한국의 격앙된 반응
미국은 이 사건을 '유엔에 대한 무력 도발'로 간주하며 극도로 분노했다.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리처드 G. 스틸웰 육군 대장은 휴가 중 일본에 있다가 즉시 전투기를 타고 귀국했다.
미국 본국에서는 백악관 특별 대책반(워싱턴 특별대책단 회의)이 소집되었고,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 (당시 재선을 준비 중이었으며, 베트남 패배 이후 공산주의에 약하다는 비판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음)의 명령으로 군사적 응징이 논의되었다.
데프콘 발령과 전쟁 태세: 미국과 한국은 즉시 데프콘 3 (DEFCON 3; 전투 준비 태세, 훈련 용어 '라운드 하우스')를 발령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데프콘 3 발령이었다.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 (Henry Kissinger; 당시 워싱턴 특별대책단 회의를 주재)은 현장 사진을 보고 격노하며 "빨갱이들의 피를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고 소리쳤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CIA는 이 도발이 계획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고 참석자들은 이에 동의했다.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당시 유신체제를 강화하며 권위주의 통치를 하고 있었음) 역시 강력한 보복 조치를 요구했다.
그는 1968년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이나 1.21 사태 때 미국이 미온적으로 반응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이번에는 단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유명한 발언은 현대에 와서 속담처럼 회자되는 단호한 응징의 상징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우리가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읍니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합니다.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다시 불법인 도발을 자행할 경우,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즉각적인 응징 조치를 취할 것이며,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오로지 그들 스스로가 져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의 도발에 대한 한국의 강경한 입장을 표현하며 사용한 대사로, 현대 한국에서 불의한 도발이나 폭력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야 할 때 쓰는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 라는 표현의 기원적 사례로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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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의 관이 미 헌병 의장대에 의해 운구되는 모습 | 
폴 버니언 작전 (Operation Paul Bunyan)의 실행
미국은 문제의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작전 폴 버니언 작전 (Paul Bunyan; 미국의 전설적인 거인 나무꾼 이름)을 준비했다.
이는 단순히 나무를 자르는 행위를 넘어, 북한이 저항할 경우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무력시위였다.
작전은 1976년 8월 21일 오전 7시에 개시되었다.
미국의 동원 병력 (군사력 과시): 미국은 데프콘 2 (DEFCON 2; 즉각적인 공격 준비 태세, 기지방호 용어 'Fast Pace')까지 발령하며, 가공할 만한 전력을 한반도에 집결시켰다.
• 공군력: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폭기 20대가 아이다호 주에서 대구 비행장으로 전진 배치되었고. 괌에서는 B-52 전략 폭격기 3대가, 오키나와 카데나 기지에서는 F-4 전폭기 24대가 발진하여 한반도 상공을 선회했다.
• 해군력: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국 해군 제7함대 (세계 7위 해군력으로 불리는 막강한 전력)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와 중무장 순양함 5척이 한국 해역 인근(서해안/동해)에 배치되었다.
• 육군력: 813명 규모의 태스크 포스 비에라(Task Force Viera) 등 정예 병력과 육군 약 12,000명, 해병대 1,800명이 증파되었으며, AH-1 공격헬기 7대와 다목적 헬기 20대가 엄호에 나섰다.
미군은 전술핵 사용까지 고려한 구체적인 전쟁 계획(우발계획)을 수립했다.
북한이 저항할 경우, 한국군 포병과 미군 포병이 개성의 인민군 막사 및 시변 지역을 초토화하고, 필요하다면 개성과 연백평야 탈환도 고려되었다.
한국 특전사의 비밀 작전 (독수리 작전)
한국군 역시 강력하게 대응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한민국 육군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소속 대원 64명으로 이루어진 결사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미루나무를 자르는 미군 공병을 엄호함과 동시에, 북한군이 무력 대응할 경우 북한군을 사살할 명령을 받았다.
당시 작전 참여자 (문재인 대통령)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문재인 (당시 특전사 공수부대 소속 상병) 역시 이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당시 상황이 "나무를 자를 때 북한이 제지하거나 충돌이 일어나면 바로 전쟁이 발발하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특전사 결사대원들은 카투사로 위장하고, 권총과 수류탄을 전투복 속에 숨기고, 도끼와 곡괭이 자루를 들고 JSA에 진입했다.
이들은 미루나무 벌목이 시작되자마자 북한군 초소 4개(KPA 4, KPA 5, KPA 8 등)를 파괴하는 독수리 작전을 수행했다.(전승)
특전사 결사대원 (김종헌 소령 지휘): (초소 안의 김일성 초상화를 깨부수며) "이게 너희들의 우상인가? 너희들이 미친개라면 우리는 몽둥이다! 다 도망가라!"
결사대원들은 초소 내부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북쪽을 향해 오줌발을 갈기는 등 극도의 도발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전승)
이들의 임무는 북한군이 총을 쏘면 즉시 응사하여 사살하는 것이었으므로, 출동 직전에 유서와 손톱, 머리카락 등을 남겼다는 비장한 증언도 전해진다.
미국은 원래 나무만 자르고 북한의 반응을 볼 계획이었기 때문에, 한국 특전사 대원들이 북한 초소를 공격하고 난장판을 만든 '급발진'에 대경실색했다.
미국은 확전을 우려했고, 특전사 대원들이 북측 도로 차단기를 제거하려는 미 육군 트럭 운전병을 권총으로 위협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결사대 지휘관인 김종헌 소령은 이 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일부 분석가들은 박정희 정부가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카터 대통령의 공약 등)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국지전을 발발시켜 미군을 한반도에 붙들어 놓으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 급진적인 작전을 지시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한편, 북한은 한미 연합군의 가공할 무력시위(머리 위를 선회하는 F-4 팬텀 전투기, 후방의 B-52 폭격기와 항공모함)에 압도되어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초소를 비우고 도주하거나 무표정한 채 대치만 했다.
나무는 40분 만에 성공적으로 절단되었다.
북한은 8월 20일 김일성의 명의로 전투 태세 돌입 명령을 내리긴 했으나, 이는 외화내빈에 불과했다.
북한 수뇌부, 특히 김정일은 사살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에 당황했고, 김일성은 "이런 짓을 왜 했느냐"며 크게 질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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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톱을 이용해 나무를 베어내는 한국군 | 
분단의 상징과 후대 평가
사건의 수습과 JSA의 분단
북한은 미루나무 절단 작전 이후 즉시 유엔군 측에 비밀 회담을 요청했고, 김일성 주석의 명의로 유감 성명을 발표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이는 휴전협정 이후 김일성이 직접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일성 주석: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다만, 북한은 여전히 사건의 전적인 책임이 미국에게 있다고 전제하긴 했다.)
북한은 미군의 폭격을 진지하게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후 1년 동안이나 전군에 준전시 체제(준전시 상태)를 유지했다.
평양 주민 소개 작업, 대학생 군 동원 등 대대적인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안그래도 경제난을 겪고 있던 북한 경제는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더욱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사건의 가장 큰 역사적 결과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경비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점이다.
사건 이전에는 자유롭게 왕래하던 JSA 중앙에 높이 20cm, 너비 50cm의 시멘트 군사분계선(MDL)이 명확하게 그어졌다.
이는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양측 군대는 경계선을 넘어갈 수 없게 되었고, 유엔군 초소와 북한군 초소도 모두 철거되었다.
사건으로 살해된 보니파스 대위를 기리기 위해 미 육군 부대 주둔지 이름은 원래 '캠프 키티호크'에서 '캠프 보니파스'로 변경되었다.
미루나무는 완전히 제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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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비 동판 | 
• 박철 중위 (홍성문): 처벌은커녕 한때 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았다고 알려졌으나, 8년 후인 1984년 판문점에서 소련 관광객 귀순 사건 당시 발생한 총격전에서 미군에게 사살되었다는 증언이 2018년에 확인되었다.(논쟁)
• 김정일: 사건을 지시했다는 증언(박병엽 등)이 있으나, 김일성은 아들이 아닌 인민무력부의 잘못으로 돌리며 인민무력부장 최현(혹은 오진우)을 불러 크게 질책했다.(논쟁)
• 김일성 로열 패밀리 피신: 이 사건 당시 미국의 강경 대응에 놀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 김경희 부부 등 소위 '로열 패밀리'의 여자와 자식들이 막대한 돈을 싸들고 모스크바(당시 소련)로 피신해 두 달간 고급 호텔에 머물렀다는 증언도 있다. 이는 북한 수뇌부가 핵전쟁을 상정한 미국의 무력시위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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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내 캠프 보니파스 메인 게이트 전경 | 
후대 평가 및 교훈
미국이 동원한 군사력은 김일성에게 휴전 이후 처음으로 '강압의 힘'을 인식하게 했으며, 유감 표명을 받아낸 것은 성과였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과의 데탕트 관계를 과도하게 의식하여 더 이상의 군사적 응징이나 보복 조치(예: 개성 탈환 계획)를 철회하고, 단순 미루나무 제거(최소한의 상징적 조치)로 만족함으로써 강압 외교는 "반쪽 성공"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은 미국의 개입 의지가 희박하고 전면전을 피하려 한다는 '학습 효과'를 얻었고, 이는 이후에도 북한의 무모한 도발(천안함 피격 사건 등)로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북한은 이 사건을 '판문점 사건'으로 축소하고, 2016년 40주년 담화에서도 "미제가 계획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며, 자신들이 미국에 완승했다는 황당한 역사 왜곡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분단과 대립의 상징으로 남았지만, 이후 판문점의 20cm 군사분계선은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이끌고 방북하며 평화와 협력의 상징적인 장소로 의미가 더해졌고, 2018년에는 남북 정상이 이 경계선을 자유롭게 오가며 평화의 의지를 다지는 역사적 장소가 되기도 했다.
에필로그: 미루나무가 남긴 교훈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한 그루를 둘러싼 사소한 가지치기 작업은 핵전쟁까지 불사하는 일촉즉발의 위기로 비화했다.
이 비극은 단순히 두 명의 장교가 희생된 사건을 넘어, 냉전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이성을 어떻게 마비시키고 정치적 계산이 개인적인 생명의 존엄성을 얼마나 쉽게 짓밟을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미루나무 사건은 상호 간의 위협 인식과 신뢰 결여가 빚어낸 참극이었다.
북한 지도부는 자신들의 내부적 정치 불안(김정일 후계 체제 구축, 경제난)과 대외적 손실 영역(데탕트 쇠퇴와 한미 동맹의 균열)을 극복하기 위한 위험 감수 전략으로 도발을 선택했다.
그들의 도발은 한반도를 극단적인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으며, 이는 결국 북한 주민들 자신에게도 혹독한 군사 태세와 경제적 고통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이 비극적인 역사를 되새기는 이유는 단순한 반공주의적 교훈이나 승패의 기록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건 이후 JSA에 그어진 20cm의 콘크리트 선은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해 물리적인 경계를 명확히 했다는 실용적인 의미를 갖지만, 동시에 마음의 분계선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는 상징성을 지닌다.
강압 외교가 김일성의 유감을 이끌어냈을지라도, 진정한 평화는 힘의 과시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힘은 최소한의 억제력(Deterrence)을 제공할 뿐, 궁극적인 화해는 상호 존중과 책임 인정에서 비롯된다.
북한은 자신들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인정하고 관련자를 처벌하지 않았으며, 이는 미국의 강압 외교가 '반쪽 성공'으로 남은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유연함(softness)이 유약함(weakness)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강력한 의지와 억제력을 바탕으로 하되,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극한의 상황을 회피하고 평화로 나아가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진정한 선택이다.
미루나무의 그루터기(1987년 추모비로 대체됨)가 서 있던 자리에서, 우리는 단순한 적대와 대립을 넘어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는 인류의 숙제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분단의 상징을 넘어 평화의 상징이 되기를 희망하는 JSA처럼, 이 비극적인 사건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명확한 인문학적 진리를 후대에 전하고 있다.
본 글은 정부‧군 공식 기록, 유엔‧미군/국방부 자료, 주요 언론, 회고를 종합해 서사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공식문서 부재·보도 편차는 [추정], 증언·회고 중심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사안은 [논쟁]으로 표기합니다.
전력 규모·대수는 출처 차이가 있어 ‘범주+대표 전력’ 중심으로 기술합니다.
오류 제보는 확인 후 정정합니다.
On 18 Aug 1976 at the JSA, a U.S.–ROK work party trimming a poplar was attacked by KPA guards;
Capt Arthur Bonifas and 1LT Mark Barrett were killed.
Washington and Seoul responded with Operation Paul Bunyan—an overwhelming show of force that felled the tree without shots fired.
Kim Il-sung soon conveyed regret.
The incident reshaped JSA procedures with a concrete MDL.
Motives, force levels, and some attributions remain deb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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