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의 불길한 메아리: 관동대지진 학살극
태풍 전야, 다이쇼 시대의 덧없는 평화
1923년 8월 말,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 당시 일본 제국의 수도)는 끓어오르는 찜통 같았다.
시계는 다이쇼(大正, 1912~1926년) 시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겉으로는 서구 문물과 민주주의적 움직임이 움트던 ‘다이쇼 데모크라시(Taisho Democracy)’의 시대였지만, 그 속내는 달랐다.
쌀 폭동(米騒動) 이후 불황은 깊어졌고, 사회주의 사상(Socialism)에 대한 정부의 공포와 민족주의(Nationalism)의 그림자가 거리를 짓눌렀다.
특히 조선인(朝鮮人, 당시 일본 식민 지배를 받던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일상의 공기처럼 스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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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경의 긴자 |
박철수(朴哲洙, 가상인물, 도쿄에서 노동하는 20대 조선인 청년)는 아사쿠사(浅草, 도쿄의 유흥가이자 번화가) 인근의 허름한 목조 건물에서 살았다.
그는 주로 요코하마(横浜, 도쿄만 연안의 주요 항구 도시)의 부두에서 짐을 나르는 고된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철수의 삶은 고단했지만,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동료들을 보며 언젠가 고향 땅에 돌아갈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밤, 철수와 동료들이 모여 살던 후쿠가와(深川, 도쿄 동부의 서민 거주 지역)의 공장 지대에는 '조센징(朝鮮人, 조선인을 비하하는 일본어 표현)'이라는 조롱 섞인 외침이 담벼락을 넘어왔다.
철수의 시선은 잠시 가네다 겐지(金田健二, 가상인물, 도쿄의 중산층 자경단원)를 스쳐 지나갔다.
겐지는 제대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지역 사회의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조직된 청년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겐지는 애국심이 강했지만, 불안한 경제 상황과 사회 혼란의 원인을 눈앞의 '이방인'들에게 돌리는 집단의 논리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인들이 '불온한 사상'을 퍼뜨리고 일본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배웠다.
그들의 눈빛에는 증오가 아닌, 미지에서 오는 불안이 서려 있었다.
1923년 9월 1일, 토요일이었다.
오전 11시 58분, 태양은 정수리 위에 걸려 있었다.
철수가 요코하마 부두에서 무거운 화물을 지고 막 땀을 닦아낼 때였다.
바다가 갑자기 웅장하고 기묘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직후, 관동대지진(関東大震災, 일본 관동 지방을 강타한 리히터 규모 7.9의 거대 지진)이 발생했다.
지축이 뒤틀리고, 땅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목조 건물이 대나무처럼 꺾였고, 벽돌담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지진의 충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건물 잔해에 깔렸지만, 진정한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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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대지진 |
지옥의 불길, 그리고 유언비어의 파급력
대지진 직후, 도쿄와 요코하마는 거대한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되었다.
수백 곳에서 동시에 발생한 화재(火災)는 곧 거대한 화염 폭풍(Firestorm)으로 변했다.
이 화염은 도쿄 전체를 집어삼키는 불의 바다가 되었고, 특히 후쿠가와와 혼조(本所, 도쿄 동부 지역) 같은 인구 밀집 지역에서는 수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혼조 지역의 육군 피복창(被服廠) 터로 대피했던 3만 8천 명은 화염 폭풍에 의해 순식간에 희생되었다.
정부 통신망과 행정력이 완전히 마비되자, 공포와 불안은 극단적인 형태로 폭발했다.
이때 일본 전역에 걸쳐 최악의 유언비어(流言飛語, 근거 없는 헛소문)가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毒)을 풀고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放火)와 약탈(略奪)을 일삼고 있다!”
이러한 소문들은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했던 조선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응축된 결과였다.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생존본능과 함께 ‘누군가를 비난할 대상’을 찾았다.
정부와 군부는 이 소문을 진압하기는커녕, 오히려 방조하거나 혹은 은밀히 조장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계엄령(戒厳令)이 선포되었으나, 이 계엄령은 질서 회복보다는 조선인과 사회주의자(Socialist)를 통제하고 제거하는 데 집중되었다.
겐지를 포함한 지역 청년단원들은 순식간에 자경단(自警団,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조직된 민간 무장 단체)으로 탈바꿈했다.
그들은 낡은 군복과 죽창(竹槍, 대나무를 깎아 만든 창), 일본도(日本刀) 등으로 무장했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자경단을 '구원자'로 보았고, 이들은 스스로에게 '정의의 심판관'이라는 명분을 부여했다.
겐지의 눈에는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이제 합법적으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것이다.
자경단은 조선인들을 구별하기 위해 '15엔 50전(十五円五十銭)'의 일본어 발음, 즉 "주고엔 고짓센 (Jūgoen Gojissen)"을 시켜보았다.
이 발음은 일본어의 특정한 연음을 포함하고 있어, 조선인들은 일본어에 능숙하더라도 격앙된 상황에서 정확한 일본식 발음을 하기가 어려웠고, 이는 곧 '죽음의 암호'가 되었다.
발음이 조금이라도 어색하면 그 자리에서 조선인으로 낙인찍히고 살해당했다.
철수의 동료 중 하나였던 김영호(金永浩, 가상인물, 조선인 독립운동가이자 노동자)는 이 발음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잔인하게 구타당한 뒤 우물에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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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
광기의 파동, 학살과 침묵의 벽
지진 발생 후 며칠 동안, 관동 지방은 국가적 차원의 학살 현장으로 변했다.
일본 군대(日本軍), 경찰(警察), 그리고 자경단은 삼위일체가 되어 조선인 사냥에 나섰다.
특히, 치바(千葉), 사이타마(埼玉) 등의 외곽 지역에서도 수많은 조선인들이 집단 학살당했다.
철수는 동료들의 희생을 목격하고 도쿄를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불타는 아사쿠사 거리를 가로지르던 철수는 우연히 겐지가 이끄는 자경단 무리와 마주쳤다.
겐지는 흥분한 채 죽창을 휘두르고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공포와 희열이 교차했다.
“멈춰! 조센징이다!” 겐지가 소리쳤다.
철수는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겐지는 그를 쫓았다.
좁은 골목길, 지진으로 무너진 잔해 사이에서 겐지는 철수를 따라잡았다.
겐지가 죽창을 들어 올리는 순간, 철수는 외쳤다.
"나는 죄가 없다! 살려줘!"
겐지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무고한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라는 질문이 올라왔다.
그러나 주변 동료들의 함성과 분노에 찬 외침은 그 망설임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 광기는 개인의 양심을 압도하는 집단적 히스테리(Collective Hysteria)였다.
집단적 히스테리 속에서도 일부 경찰·교원·종교인·관청 직원이 조선인·중국인 피난민을 학교·사찰·관공서로 들여보내 숨겨 주거나, 자경단의 진입을 막아 학살을 저지한 사례가 기록돼 있다.
이 소수의 행동은, 광기 속에서도 개인의 윤리적 결단과 공동체적 연대가 생명을 지킬 수 있음을 증언한다.
보호 사례의 규모와 지역 분포는 사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논쟁].
이 학살극에서 가장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일본 정부의 책임이다.
내무성(内務省, 당시 행정과 치안을 담당)은 소문을 공식적으로 부인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한 생각을 가진 조선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조선인을 잠재적인 위험 대상으로 규정했다.
군대와 경찰은 자경단을 해산시키기보다는 그들에게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거나, 아예 조선인들을 군대 시설로 끌고 가 직접 살해하는 데 관여했다(논쟁).
관동 각지(도쿄·가나가와·사이타마·치바 등)와 후쿠가와 등지에서는 군인들에 의한 조직적인 살해가 이루어졌다.
이 기회를 이용해 정부는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Anarchist) 등 반정부 성향의 지식인들까지 탄압하고 살해했다.
1923년 9월 16일, 헌병장교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와 동지 이토 노에, 그리고 유아 조카를 체포 후 구타·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아마카스 사건’은 재난의 혼란이 반정부 인사 탄압으로 직결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였다.
짧은 형 선고 후 조기 가석방 등 경미한 처벌은 국가 폭력에 대한 책임 회피 구조를 드러냈다.
이 사건은 관동대지진 직후의 공포가 정치·이념적 숙청과 결합했음을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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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에서 2번째부터 이토 노에(伊藤野枝 / 伊藤ノヱ), 오스기 사카에(大杉 栄), 사카에의 딸 마코(魔子). |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 심지어 일본인 중에서도 유언비어의 희생자가 되었다.
중국인 거주민 역시 각지에서 피습·학살당했고, 이 문제는 주일 중국 공관과 상인 단체의 항의로 이어져 외교 현안으로 비화했다.
일본 당국의 피해·책임 인식과 보상·사과의 범위를 둘러싸고는 이후에도 논쟁이 지속됐다 [논쟁].
희생자 수(犠牲者数)는 최소 수천 명에서 최대 수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숫자는 일본 정부의 은폐와 당시 혼란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논쟁(論争)의 대상이다.
일본 정부는 학살의 규모를 축소 발표하는 데 급급했고, 자경단원 대부분은 경미한 처벌만 받거나 아예 처벌을 면했다.
'침묵의 벽'이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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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이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 는 내용의 기사 |
끝나지 않은 역사, 후대의 비판적 성찰
관동대지진 학살은 일본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Trauma)를 남겼다.
이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Japanese Imperialism) 시대의 폭력성과 차별이 자연재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광기로 분출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 사건의 가장 큰 비판점은 국가 폭력의 방조 및 적극적인 가담이다.
재난 상황에서 국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국민의 안전과 질서 유지였으나, 당시 일본 정부와 군부는 오히려 특정 민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이용하여 정치적 희생양(Scapegoat)을 만들고 이를 체제 유지의 도구로 삼았다.
유언비어는 불안한 사회 심리를 반영한 것이었지만, 국가 권력이 이를 이용하고 묵인함으로써 대량 학살(Massacre)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자연재해가 아닌, 명백한 인재(人災)이자 반인륜적 범죄(Crime against Humanity)였다.
현재까지도 일본 내각부(内閣府)의 공식 추모식은 희생된 일본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며,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침묵하고 있다.
일본의 일부 시민단체와 양심 있는 지식인들은 매년 9월 1일, 학살 현장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며 진정한 역사적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식민지 시대의 폭력 구조와 인종차별 문제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는 사건의 인정·책임·기억 방식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공적 논의임을 보여 준다.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가르치고 추모할 것인가가, 동아시아 혐오·배제의 재발 방지와 직결된 과제로 남아 있다.
철수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눈빛은 도쿄의 불길과 자경단의 광기에 영원히 붙잡혀 있었다.
겐지는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렸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1923년의 비극이 개인의 삶과 집단의 기억 속에 어떻게 잔혹하게 새겨졌는지 보여준다.
관동대지진 학살극은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인문학적 교훈을 남긴다.
재난은 모든 인간을 평등한 피해자로 만든다.
그러나 그 재난 속에서 혐오와 편견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두 번째 재앙을 낳는다.
공포와 혼란은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해소하려 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불안과 공포가 극에 달할 때일수록, 우리는 이성(理性)의 끈을 부여잡아야 한다고.
인류애는 특정 민족이나 국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역사의 참혹한 페이지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자연의 힘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증오임을 깨닫게 한다.
1923년의 메아리는 우리에게 공동체의 질서와 안전은 혐오가 아닌, 연대와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만 지켜질 수 있다는 엄중한 교훈을 전하며, 미래를 향한 역사적 성찰을 요구한다.
본 글은 주류 연구·공식 보고·1차/2차 사료를 우선하여 서술했습니다.
확인 가능한 사실을 중심으로 하고, 불확실·가설·쟁점은 본문에 [논쟁]/[전승]/[추정] 등으로 즉시 표기했습니다.
인물 내면·대화 등 극적 재현은 사실 흐름을 해치지 않도록 최소한으로만 사용했습니다.
연대·지명·수치 등 견해가 갈리는 대목은 보수적으로 기술하고 대표 견해를 병기했습니다.
오탈자·사실 오류 제보 및 추가 사료 추천을 환영합니다.
After the 1923 Great Kantō Earthquake devastated Tokyo, fires and a communications collapse fueled rumors that Koreans were poisoning wells and rioting.
State organs and vigilantes launched massacres against Koreans—and also Chinese—while authorities used the chaos to suppress socialists (e.g., the Amakasu incident).
Sporadic rescue efforts existed, but justice was minimal.
The tragedy shows how disaster plus prejudice turns fear into organized violence, demanding remembrance and account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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