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걸물, 조조(曹操) - 하늘의 이치를 품은 자
난세의 서막과 간웅의 탄생
1. 풍류시대의 이단아
서기 155년, 후한(後漢) 예주(豫州) 패국(沛國) 초현(譙縣) [현 안후이성 보저우시]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조(操), 자(字)는 맹덕(孟德). 아명(兒名)으로는 아만(阿瞞) 또는 길리(吉利)라고 불렸다.
그의 이름 '조(操)'와 자 '덕(德)'은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에 나오는 '덕조(德操)'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덕행의 지조를 의미했다.
조조의 가문 배경은 당대 기준으로 볼 때 고귀하다고는 할 수 없는, 권세는 있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출신이었다.
그의 조부 조등(曹騰)은 후한 환제(桓帝) 때 중상시(中常侍) [환관의 한 직책]를 지낸 환관의 우두머리였고,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은 조등의 양자였다.
일설에 따르면 조숭의 본래 성씨가 하후씨(夏侯氏)였으며, 하후돈(夏侯惇)의 숙부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조조는 벼슬길에 나가서도 멸시를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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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상상화 |
어려서부터 조조는 기지와 총명함과 함께 권모술수에 능했고, 의협심이 강했으며 멋대로 놀기를 좋아하여 학업을 등한시했다.
그는 번뜩이는 재치와 순발력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특히 간질병 흉내를 내어 숙부와 아버지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든 일이나, 친구 원소(袁紹)와 함께 시집가는 처녀를 납치하려다 실패한 일화는 그의 자유분방하고 다혈질적인 기질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조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교현(橋玄)과 남양(南陽)의 하옹(何顒) 같은 당대의 명사들은 그를 남다른 인물로 알아보았다.
교현은 조조에게 "천하가 장차 혼란에 빠질 것인데, 이를 구제할 만한 재목이 그대에게 달려 있다"고 평했다.
당대 최고의 인물 평론가였던 허소(許邵 월단평으로 유명)는 조조의 관상에 대해 "귀하는 태평성세(太平盛世)라면 유능한 관리가 될 것이오. 난세(亂世)라면 간웅(奸雄)이 될 것이오"라고 평했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간웅'이라는 평가를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2. 치세의 능신: 청년 관료 조조
나이 스물에 효렴(孝廉 현인, 청렴한 자를 추천하는 제도)에 천거되어 낭관(郎官)이 된 조조는 동한(東漢)의 수도 낙양(洛陽) 북부위(北部尉 치안 담당)로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은 환관과 외척이 득세하고 부패가 만연했는데, 조조는 북부위 시절 엄격한 법 집행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그는 통금 시간 이후에 배회하던 환관 건석(蹇碩 십상시 중 한 명)의 숙부를 규정에 따라 처벌했다.
조조는 법과 규율을 바탕으로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냉철한 태도를 젊은 시절부터 보였는데, 이는 그가 후일 국가 운영에서 엄격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적용한 기반이 되었다.
이후 제남국(濟南國)의 상(相 태수와 동급의 관직)으로 승진했을 때도, 뇌물과 향락에 물든 상급 관리 8명을 파면하고 예법에 어긋난 제사를 금지시켜 군 내(郡內)의 질서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조조는 동군태수(東郡太守)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질병을 핑계로 고향(초현)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당시 기주자사 왕분(王芬) 등이 영제(靈帝)를 폐위하고 합비후(合肥候)를 옹립할 계획을 세우고 조조에게 가담을 제의했으나, 조조는 이를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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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常侍 십상시 |
난세의 피와 권모술수
3. 동탁 토벌전과 최초의 좌절
서기 184년, 황건적의 난(黃巾賊의 亂)이 발생하자 조조는 기도위(騎都尉 군사 직책)로 임명되어 영천(潁川)의 황건적을 토벌하며 공을 세운다.
이 전쟁은 그에게 힘(군사력)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했을 것이다.
후한 영제가 죽고 소제(少帝)가 즉위한 혼란기에, 동탁(董卓 하동태수)이 낙양(洛陽)에 입성하여 소제를 폐위시키고 진류왕(陳留王) 유협(劉協 헌제)을 새 황제로 옹립했다.
동탁은 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삼아 그를 측근으로 두려 했으나, 조조는 동탁의 한계를 간파하고 관직을 버리고 도망친다.
(연의에서는 칠성검(七星劍)으로 동탁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장면이 유명하지만, 정사 기록에는 단지 동탁이 준 관직을 버렸다고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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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상국 동탁 |
조조는 고향 진류(陣留 현 허난성 카이펑시 근처)에서 가산(家産)을 처분하여 군사를 모으고 동탁을 토벌할 준비를 했다.
190년, 조조는 반동탁 연합군 [18로 제후]에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참여한다.
그는 연합군이 주연만 베풀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홀로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성고(成皐 현 허난성 싱양시 근처)를 점령하려 했으나, 동탁의 장군 서영(徐榮)에게 대패하여 군대가 와해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조는 화살에 맞고 말까지 잃는 위기를 겪었지만, 사촌 동생 조홍(曹洪 조위의 장수)이 자신의 말을 주어 목숨을 건졌다.
이처럼 조조는 강한 결단력과 위기관리 능력을 바탕으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개척해나갔다.
(논란: 동탁에게 도망치던 중 벌어진 여백사(呂伯奢) 사건) 여백사는 조조 아버지 조숭(曹嵩)의 의형제 사이였다.
연의(演義)에서는 조조가 집 뒤에서 칼 가는 소리를 듣고 자신을 해하려는 것으로 오해하여 여백사 일가족을 몰살하고, 여백사마저 살해한 뒤 "차라리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寧敎我負天下人休敎天下人負我)"라는 냉혹한 명언을 남긴다.
이 일화는 조조를 간악함의 전형으로 만드는 극적 장치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정사(正史)에서는 이 사건이 조조를 야비하게 만들기 위한 허구이거나, 실제로는 여백사 일족과의 오해로 인한 정당방위였다는 주장도 있다.
모종강(毛宗崗)은 조조의 이 발언을 두고 위선자들보다 차라리 말과 마음이 일치한 조조가 더 낫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조조의 잔인하고 냉혹한 처세관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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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사 |
4. 서주 대학살: 지워지지 않는 낙인
조조는 연주목(兗州牧)으로 영입된 뒤 정예군 청주병(靑州兵)을 조직하며 세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과실이자 비판받는 부분은 서주(徐州)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이다.
서기 194년, 조조의 아버지 조숭(曹嵩)이 낭야(瑯琊 현 산둥성 린이시 근처)에서 도겸(陶謙 서주목)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격분한 조조는 복수를 위해 서주를 정벌한다.
그는 서주를 공격하여 10여 개 성을 함락시켰고, 그가 지나간 지역은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심지어 조조의 군대는 시체가 강(사수)을 메울 정도로 서주 지역 백성들을 학살했으며, 어린이, 노약자, 가축까지 모두 전멸시켜 다섯 현에서는 인간의 흔적이 사라졌다. (논쟁)
이 서주 대학살(徐州大虐殺)은 후한의 13개 주 가운데 하나였던 서주 전체를 초토화시킨 대규모 악행으로 기록된다.
이 악행은 당대에도 지탄을 받은 천인공노할 행위였으며, 서진(西晉)의 역사가 진수(陳壽 정사 삼국지의 저자)가 쓴 기록에도 '잔륙(殘戮 학살)'이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조조는 백성들에게 매우 나쁜 이미지로 각인되었으며, 서주의 인사들 중 상당수는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유비(劉備)나 손권(孫權 오나라를 건국한 인물)에게 합류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 학살에 질린 연주(兗州)의 진궁(陳宮 조조의 창업 파트너)과 장막(張邈)이 반란을 일으켜 여포(呂布 뛰어난 무장)를 끌어들여 연주를 장악하면서 조조는 멸망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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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때 그려진 삼국지연의의 해당 부분 삽화. 조조의 서주 침공 |
5. 인재 등용과 권력 장악의 기반
조조는 멸망 위기를 겪으면서도 순욱(荀彧), 정욱(程昱) 등의 도움으로 견성(甄城)을 지켜냈고, 2년에 걸친 공방 끝에 여포를 격파하고 연주를 수복한다.
서기 196년, 조조는 유랑하던 한나라 헌제(漢獻帝 후한의 마지막 황제)를 보호하며 허창(許昌 현 허난성 쉬창시)으로 천도한다.
이로써 그는 '천자(天子)를 끼고 제후(諸侯)들을 호령한다 (挾天子以令諸侯)'는 정치적 명분과 실권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한다.
그는 한나라의 충신을 자처하면서도, 실제로는 황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 무렵 조조는 유비를 일시 포섭해 예주 방면의 완충 전력으로 활용했으나, 곧 독자 세력화 조짐을 경계하며 결별 구도로 전환했다.
표면상 ‘능력 존중’과 실무 협력은 유지됐지만, 배치는 점차 견제·분산을 향했다.
이는 조조의 대인술이 ‘재능 인정’과 ‘정치적 경계’를 동시에 작동시키는 양면 구조였음을 보여준다.
조조는 혼란의 시대를 개척하기 위해 시대를 앞서가는 전략적 사고로 개혁적인 통치 시스템을 구축했다.
1. 둔전제(屯田制):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업에 전념하는 농민(둔전병)을 모집하여 허도 주변에서 경작하게 함으로써 곡물 100만 석을 확보하고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식량을 비축했다. 이는 조조가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2. 호조제(戶調制): 조세 정책으로, 농지 면적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고 호구(戶口)에 따라 비단과 솜을 징수하여 국가 세입을 안정화했다.
3. 병호제(兵戶制): 국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군사 시스템이다.
4. 사치 금지·검약령: 장례 사치와 사치재 사용을 금지하고 도량형·물자 통제를 병행해 전시 재정을 방어했다.
5. 엄격 군율: 군율 위반을 엄벌하고 보상 체계를 명확히 해 약탈·이탈을 억제, 동원국가의 윤리·규율을 정착시켰다.
<조조의 인재 등용술: 구현령(求賢令)>
조조 리더십의 핵심은 실용주의와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이다.
조조는 출신이나 신분(청렴함, 덕성)을 따지지 않고, 오직 실력(재능)만으로 인재를 기용했다.
그는 인재가 자신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포용하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조조는 210년에 유명한 구현령(求賢令)을 공포하여, "태평성세에는 덕성을 봐야 하지만, 난세에는 재능이 우선한다 (治平尙德行 有事賞功能)"는 원칙을 밝혔다.
심지어 형수와 사통(私通)하거나 뇌물을 받았다는 오명이 있더라도 재능만 있다면 등용하겠다고 했다.
그는 사마의(司馬懿 후일 서진의 기틀을 마련한 전략가), 순욱(荀彧), 정욱(程昱 군사 참모), 허저(許褚), 전위(典韋 무장) 등 다양한 인재들을 등용했으며, 심지어 적이었던 관로(管路 관리)를 받아들여 참모로 적극 활용했다.
조조는 숨은 인물을 발탁하고 '야생마' 수준의 인재를 준마(駿馬)로 만드는 능력과 더불어, 정확한 평가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고 능력을 길러주며 사람을 끄는 매력까지 겸비했다.
부하들은 조조를 두려워하면서도 따랐고, 자신의 능력이상으로 실력을 발휘했다.
청주병(靑州兵)은 황건 잔당을 편입해 만든 대규모 정예였지만, 전공과 약탈의 경계가 흐려질 위험도 내재했다[논쟁].
조조는 엄격한 군율과 법치로 통제 리스크를 줄이며, 전리품 규정·전공 평가를 세밀화해 ‘야전 기동력’과 ‘치안 유지’를 병행했다.
이 이중 관리는 서주의 후유증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조조식 정치적 단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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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 |
6. 완성 전투의 비극
조조는 호색한(好色漢) 기질이 당대부터 유명했으며, 여러 명의 처첩을 두었다.
그의 정실 부인은 정부인(丁夫人)이었다.
조조의 배우자 중에는 하급 신분인 기녀 출신 변부인(卞夫人)도 있었는데, 그녀는 능력을 인정받아 아내(측실)가 되었다.
서기 197년, 조조는 완(宛 현 허난성 난양시 근처)으로 진군하여 장수(張繡 장제의 조카, 당시 군벌)를 항복시켰다.
그러나 조조는 항복한 장수의 진영에 머물면서 장수의 숙모(혹은 고모) 추씨(鄒氏 연의의 이름은 임의로 붙여진 것)를 탐하여 취했고, 이로 인해 장수의 분노를 샀다.
장수는 곧 배신하여 조조를 급습했고, 이 완성 전투(宛城 戰鬪)에서 조조는 맏아들 조앙(曹昂), 조카 조안민(曹安民), 그리고 충직한 호위대장 전위(典韋)를 잃는 치명적인 패배를 겪었다.
조조는 이 실책으로 인해 정실 부인 정부인(丁夫人)에게 이혼당했다.
정부인은 조앙의 친모는 아니었으나 조앙을 친자식처럼 아꼈는데, 조조가 조앙보다 전위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떠났다.
조조는 정부인에게 몇 번이나 재결합을 애걸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 사건은 조조의 사생활과 호색한 기질이 그의 패업에 어떤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과실이자 인간적인 결함이다.
조조는 전위의 죽음 앞에서 장남과 조카가 죽은 것보다 자신을 살리고 전사한 전위를 위해 더 서럽게 통곡했다.
이러한 감성적 요소는 부하들에게 감동을 주어 진심 어린 충성을 바치게 했다.
천하의 패권과 절망
백마·염현 전투(200) - 관도대전의 서막
원소가 하북을 압박하자, 조조는 병력 열세를 결정적 요충지 전투로 상쇄하는 전략을 택했다.
우금이 백마(白馬)에서 안량을 참수하고, 이어 장료가 염현(延現/延津)에서 문추를 격파하며 원소군의 선봉 기세를 꺾었다.
이 두 전투는 관도 본전 이전에 병참·사기의 균형을 무너뜨린 분기점이 되었고, 조조는 “선봉 절단→중앙 고착→병참 차단”의 3단 플랜을 밀어붙일 발판을 마련했다.
결국 관도에서의 승리는 이 선행 전투들의 결과 위에 세워졌다.
7. 관도대전: 운명을 가른 결전
하북(河北)의 지배자 원소(袁紹 조조의 옛 친구이자 강력한 라이벌)는 공손찬(公孫瓚)을 제압하고 황하 이북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조조는 황하 이남의 대부분을 장악하여, 두 영웅은 중원의 패권을 두고 격돌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관도대전(官渡大戰)이다.
전투 외적인 상황을 볼 때, 원소는 병력 수, 지배 지역의 인구, 경제력, 명문가의 배경 등 모든 면에서 조조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조조의 병력은 원소 군의 10분의 1 또는 연구에 따르면 2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조조 스스로도 "원소의 병사들은 많지만 부서가 마땅치 못하고, 장수들은 교만하며 명령에도 일관성이 없다"고 평했지만, 전황은 불리했다.
조조는 순욱에게 허도(許都 수도)로 돌아가고 싶다는 편지까지 보낼 정도로 마음이 흔들렸다.
순욱은 "지금이야말로 천하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시기"라며 조조를 격려했다.
조조는 이 강한 결단력과 위기관리 능력을 바탕으로 전장에서 버텼다.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순간은 원소의 모사였던 허유(許攸 조조의 옛 친구)가 조조에게 투항하면서 시작된다.
허유는 오소(烏巢 원소의 군량미 창고)의 병참 기지를 기습할 것을 진언했다.
조조는 5천 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오소의 식량과 군수 물자들을 모조리 소각하는 데 성공했고, 이로 인해 원소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전세는 역전된다.
조조의 승리는 군사 동원수 차이를 극복한 불가사의한 승리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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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대전 |
이때 몰수한 전리품 속에서 원소와 내통하던 조조 부하들의 편지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신하들이 이들을 처단하라고 진언하자, 조조는 편지를 읽지 않고 모두 소각하며 "원소의 대군이 강했을 때는 나조차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마음이 흔들렸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였겠는가"라고 말하며 내통한 자들을 용서했다.
이 관대함은 조조의 뛰어난 용인술과 사람을 끄는 매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관도대전 승리 후, 조조는 원소의 잔당(원상, 원희 등)을 격파하고 오환족(烏丸族)을 정벌하여, 마침내 중국 대륙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하며 화북 지역을 완전히 평정했다.
8. 적벽대전: 좌절된 통일의 야망
서기 208년, 조조는 승상(丞相 황제 다음의 최고 관직)의 지위에 오르고, 이미 대장군(大將軍)이었으므로 실질적인 후한 조정의 정치 권력과 군권(軍權)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해 가을, 조조는 형주(荊州 현 후베이성 지역)의 유종(劉琮)을 굴복시키고, 손권(孫權 오나라의 군주)과 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장강(長江) 유역 적벽(赤壁 현 후베이성 츠비시 근교)에서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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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적벽 |
<사실과 허구의 충돌>
적벽대전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諸葛亮 유비의 책사, 지혜의 화신)의 신묘한 지략과 (화살 빌리기, 동남풍 부르기 등) 주유(周瑜 손권의 대도독)의 활약으로 조조군이 대패하는 극적인 장면으로 묘사되지만, 정사(正史) 기록은 다르다.
정사 기록에 따르면, 조조가 군대를 철수하고 전략적 후퇴를 선택한 주요 원인은 조조군 내에 역병(疫病)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물론 조조는 주유와 유비의 화공(火攻)에 대패한 사실은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연합군이 불태운 배의 대부분은 원래 형주 병선이었고, 도망친 병사들 역시 유표의 수군이었기에, 조조의 핵심 군사력 기반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패배로 조조의 천하통일 야망은 좌절되었고, 중국 대륙은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 시대(三國時代)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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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백대전 |
조조는 강한 카리스마와 자기 확신을 가졌을 뿐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시(詩)를 통해 자신의 철학과 리더십을 표현했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조조가 지었다는 시 '단가행(短歌行)'은 그의 고뇌와 야망을 표현한다.
시의 서두에서는 "술을 마주하고 노래하세, 인생 그 얼마나 되리오!"라며 인생의 덧없음을 아침 이슬에 비유하지만, 핵심 주제는 인재에 대한 갈구와 천하 통일의 웅심이다.
그는 시경(詩經)의 구절을 인용하여 현인들의 옷깃(子衿)을 그리워하고, "산은 높은 것을 마다하지 않고, 바다는 깊은 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山不厭高, 海不厭深) / 주공(周公)은 먹은 것을 토해내며, 천하의 마음을 얻었네 (周公吐哺, 天下歸心)"라고 읊으며 주공(周公)의 고사(먹던 음식을 뱉고 인재를 맞이함)를 빌려 인재를 얻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을 피력했다.
조조의 시 세계는 원정의 체험과 패업의 자각이 포개진다.
「관창해(觀滄海)」가 대업과 무상의 감각을 광활한 이미지로 펼친다면, 「단가행(短歌行)」은 구현(求賢)의 절박함을 정치 언어로 전환한다.
두 작품은 ‘패업의 스케일’과 ‘인재 갈구’라는 조조 리더십의 내핵을 동시에 비춘다[해석].
연의에서는 조조가 술에 취해 단가행을 읊다가, 시(詩)를 불길하다고 평한 유복(劉馥)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는 조조의 잔혹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허구이다.
9. 권력의 절정: 위왕(魏王) 조조
적벽 이후 조조는 빠르게 세력을 재정비하여 중원에서의 우세한 기반을 유지했다.
211년, 마초(馬超)와 한수(韓遂)를 비롯한 반란군이 관중(關中 현 산시성 중부)에서 일어나자 조조는 토벌에 나섰다.
조조는 처음에는 마초의 도전에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가후(賈詡 전략가)의 교묘한 이간책을 받아들여 한수에게 글자를 고쳐 쓴 편지를 보내 마초와의 사이를 이간질했고, 결국 관중을 평정했다.
이 사건은 조조가 이념이나 명분보다 현실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실리 중심의 전략가였음을 보여준다.
213년, 조조는 열네 주를 병합하여 아홉 주로 만들고, 헌제로부터 위공(魏公 제후왕 작위)으로 책봉되었다.
조조는 위공이 되면서 하동(河東), 하내(河內), 위군(魏郡) 등 10개 군을 하사받았고, 214년 구석(九錫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9가지 특권)을 받았다.
이때 조조는 자신이 저축한 막대한 재산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기부하는 관대함을 보이기도 했다.
216년, 조조는 마침내 위왕(魏王) 에 봉해졌고, 황제와 마찬가지의 권력과 위세를 행사했다.
당시 헌제는 실권을 잃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중국 대륙의 실질적 지배자는 조조였다.
그럼에도 조조는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고 후한의 정통성을 존중하는 모습을 취했다.
<잔혹함과 군주의 자격 논란>
조조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나, 그의 인격적 결함과 냉혹함은 끊임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 황실 핍박: 조조는 헌제의 황후 복씨(伏氏)가 자신을 원망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이 발각되자, 그녀를 황후 자리에서 쫓아내고 죽였으며, 심지어 헌제의 아이를 임신한 후궁(논쟁)까지 처형하는 등 한 황실에 대한 지독한 핍박을 벌였다. 이는 황제 신분인 후대 군주들에게 역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패역한 행위였다.
• 지나친 의심과 숙청: 조조는 필요할 경우 비정한 선택도 서슴지 않았으며, 장수들이 배신할 조짐이 보이면 즉각 제거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던 양수(楊修 참모)를 후계자 다툼 문제와 아버지 양표(楊彪)에 대한 경고가 섞인 복합적인 이유로 처형했고, 자신의 야망에 반대하는 순욱(荀彧), 최염(崔琰) 등 공이 큰 인물들마저 거리낌 없이 죽이거나 정신적으로 몰고 가는 행위를 저질렀다. 심지어 군량이 부족해 되를 작게 하겠다는 담당자를 죽여 그 머리를 내보이며 부정부패의 죄를 물었다고 선포하여 (일종의 희생양을 만들어) 자신의 의혹을 벗고 기강을 바로잡는 간교한 술책을 쓰기도 했다.
10. 조조의 죽음과 계승
219년, 조조는 유비와의 한중 공방전에서 하후연(夏侯淵 친척 장수)을 잃고 후퇴했다.
이후 유비가 한중왕(漢中王 황제에 버금가는 작위)으로 즉위하자 조조는 사마의(司馬懿)의 권유를 받아 손권과 동맹을 맺고 관우(關羽 유비의 의제)를 격파한다.
관우가 손권에게 참수된 후, 손권은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보냈고, 조조는 관우를 왕후(王侯)처럼 제사지내며 예우를 다했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관우의 목을 보고 기절했다가, 화타(華佗 명의)가 관우를 칭찬하자 화가 나서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모두 허구이다.
화타는 관우를 치료한 적이 없으며, 조조가 화타를 죽인 것은 화타가 포상금을 위해 병을 키우는 소인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조조는 50대 후반부터 후계 구도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는 삼남 조식(曹植 뛰어난 문학적 재능)의 총명함을 아꼈으나, 최종적으로는 성실한 조비(曹丕 조조의 둘째 아들, 후일 위나라 초대 황제)를 후계자로 결정했다.
이는 냉철함과 국익 우선의 실리적 사고가 반영된 결과였다.
서기 220년 음력 1월 23일 (향년 66세), 조조는 낙양(洛陽)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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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안후이성 보저우에 위치한 조조공원. |
<조조의 유언과 무덤>
조조의 유언은 매우 실리적이었다.
그는 "천하가 아직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장례가 끝나면 바로 상복을 거두라. 각 주둔지의 장병은 그곳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주검에는 평복(平服)을 입히고 금은보화 같은 부장품도 넣지 말라고 했다.
이는 권세와 어울리지 않는 그의 검소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조조는 생전에 도굴에 관심이 많아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과 모금교위(摸金校尉 도굴 전담 관직)라는 자리까지 만들어 군자금을 조달했다는 설이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의 무덤이 도굴당할 것을 염려하여 가짜 무덤 72개를 만들라고 위언(僞言)했다는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다. (전승)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연의에 기록된 것이며, 실제로 조조의 유언에는 페이크 무덤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무덤(고릉, 高陵)은 실제로 진위 여부 논란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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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무덤 입구 |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는 위왕(魏王)에 즉위했고, 아버지 조조에게 무왕(武王)의 시호를 올렸다.
그해 10월, 조비는 헌제로부터 제위를 선양(禪讓 평화적인 왕위 계승)받아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魏)나라를 건국했으며, 조조는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존되었다.
시대와 영웅의 양면성
11. 후대의 평가와 문화적 영향
조조는 중국 역사상 가장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하나이며, 그의 평가는 시대적 정통론(正統論)과 민간 정서에 따라 극단적으로 나뉘었다.
<간웅(奸雄) 조조>
조조를 악인으로 보는 관점의 뿌리는 명나라 나관중(羅貫中)이 14세기에 쓴 소설『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있다.
『삼국지연의』는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 유비의 촉한을 정통 국가로 보는 사상)의 기조 아래 유비를 높이고 조조를 깎아내려, 조조를 왕실을 배반한 간사한 영웅, 간웅의 전형으로 묘사했다.
이로 인해 조조는 '망탁조의(莽卓操懿)'의 일원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으로서 역적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남송(南宋) 시대 주희(朱熹 주자학을 집대성)가 촉나라를 정통으로 보면서 이러한 인식은 지배층에 확고히 자리 잡았고, 민간에서도 연극에서 조조 역할의 배우가 관중들에게 맞아 죽는 사건까지 발생할 정도로 조조에 대한 증오가 컸다.
<영웅(英雄) 조조>
한편, 정사(正史)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조조를 '비범한 인물로 시대를 초월한 영웅 (超世之傑, 초세지걸)'이라 극찬하며, 그의 명석한 지략과 인재 기용술을 높이 평가했다.
근세에 들어 조조는 실용주의적 리더이자 훌륭한 문인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의 시인 겸 역사학자 궈모뤄(郭沫若)와 마오쩌둥(毛澤東)은 조조를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영웅으로 평가하며 복권 운동을 선도했다.
조조의 군사적 재능과 제도 개혁 (둔전제 등)은 당 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 당나라 군주) 같은 후대 군주들에게도 높이 인정받았다.
당 태종은 조조의 능력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칭송하면서도, "나라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무군(無君)의 행적이 있던 셈"이라며 한나라 왕실을 핍박한 도덕적 결함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조조는 군사, 정치, 문학 모든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지만, "도덕적 흠결은 있으나 능력이 뛰어난 영웅"이라는 복합적인 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실리 중심의 냉혹한 통치는 백성들에게 공포를 주었으며, 한 황실을 능멸하고 종국에는 아들 조비가 제위를 찬탈하도록 기반을 다진 것은 군신 간의 신뢰를 무너뜨린 중대한 과실이었다.
이는 후일 사마씨(司馬氏)가 조위(曹魏)로부터 제위를 찬탈하는 데 좋은 선례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12. 영웅과 인간 사이의 간극
조조의 삶은 능력과 도덕성이 분리될 때 발생하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그는 강한 결단력, 실용주의적 인재 등용, 엄격한 법 기반 통치 등 위대한 지도자의 덕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잔인함과 패역함은 그의 탁월한 업적 위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으로 남았다.
우리는 조조를 평가할 때, 그가 살았던 '난세(亂世)'라는 특수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난세는 생존 경쟁이 지배하며,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극단적인 시기였다.
조조의 냉혹함과 실리주의는 이 생존 투쟁의 결과였으며, 그가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서주 대학살이나 황실에 대한 핍박 같은 그의 행위는 단순히 난세의 필요성을 넘어선, 권력에 취한 인간의 광기와 비합리적인 감정의 발현이었다.
그 결과, 그는 당대의 민중에게 버림받았고,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악인의 대명사로 박제되었다.
인류애와 인문학적 성찰의 관점에서, 조조의 역사는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가르쳐준다.
탁월한 능력만으로는 위대한 역사를 완성할 수 없다.
조조는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모든 물리적 기반(위나라의 압도적인 규모의 군사력, 인재풀, 경제력, 국가 시스템)을 갖추었음에도, 최종적으로 유비와 손권에게 밀려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그가 지나치게 실리만을 추구하여 명분과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리더십은 냉철한 능력(才)과 인간적인 덕성(德)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데 있다.
조조는 이 두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으나, 개인적인 감정과 야망을 억제하지 못할 때마다 잔혹한 과실을 저질렀다.
우리가 역사적 인물을 도덕적인 잣대로만 단순화하여 선악 이분법으로 판단한다면, 그들이 남긴 복합적인 교훈과 지혜를 놓치게 된다.
조조는 '공로도 으뜸, 죄악도 으뜸(功首罪魁非兩人)'이었던 인물이며, 이는 곧 인간의 양면성이 투영된 결과였다.
조조의 생애는 능력과 야망이 인간적인 원칙과 충돌할 때 어떤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거대한 서사이다.
오늘날에도 그의 실용주의적 리더십은 높이 평가받지만, 역사는 그에게 천하의 인심을 얻는 데 실패한 대가를 혹독하게 물었다.
산이 높고 바다가 깊음을 마다하지 않고 천하의 인재를 구하려 했던 조조의 간절한 열망은 결국 인간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끝났던 것이다.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능력과 함께 원칙과 인류애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되새겨야 할 것이다.
본 글은 정사(陳壽 『삼국지』·裴松之 注)와 주요 연구서를 1차·2차 사료로 우선하여 서사를 구성했습니다.
불확실·가설·평가는 [논쟁], 전승·야사는 [전승], 해설·맥락화는 [해석]으로 즉시 표기했습니다.
인물의 대화·심리는 사실 흐름을 해치지 않는 최소 창작만 사용했습니다.
연대·지명·혈연 등 이견이 큰 대목은 보수적으로 기술하고 대표 견해를 병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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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o Cao (155–220) rose from a disputed background to master crisis rule: strict law, frugality edicts, tuntian farms, and talent-first recruitment.
After Baima–Yanjin he reversed Yuan Shao at Guandu, then secured the north with the Wuhuan campaign; yet his Xuzhou massacre stained his name.
He briefly used then checked Liu Bei, led elite Qingzhou troops, and wrote “Guan Canghai” and “Short Song.”
Defeated at Red Cliffs, he later became King of Wei.
Both innovator and tyrant, he shows power needs virtue as well as tal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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