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역사: 17세기 체코, 불타는 창문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분노의 도시, 1618년 프라하
프라하(Prague), 1618년 5월.
신성 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의 변두리에 위치한 이 아름다운 도시의 공기는 이미 화약 냄새로 가득했다.
얀 후스(Jan Hus, 종교 개혁가)의 피가 흐르는 보헤미아(Bohemia, 현재의 체코)의 백성들은 대대로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싸워왔다.
15세기 후스파 전쟁(Hussite Wars) 이후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17세기에 접어들자 가톨릭과 개신교(주로 칼뱅파) 간의 갈등은 시계추처럼 다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황제 마티아스(Matthias,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비교적 온건했으나, 그의 후계자로 내정된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당시 보헤미아 국왕. 극단적 가톨릭 맹신자)는 달랐다.
페르디난트의 목표는 제국 내 모든 개신교를 뿌리 뽑는 것이었다.
보헤미아 개신교 귀족들은 불안에 떨었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방패는 황제 루돌프 2세(Rudolf II)가 1609년에 하사했던 '황제 칙서(Letter of Majesty,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문서)'뿐이었다.
![]() |
루돌프 2세 "황제 칙서" |
그러나 페르디난트가 보낸 가톨릭 대리 통치자들은 이 칙서를 공공연하게 위반하기 시작했다.
브로우모프(Broumov)와 흐로프(Hrob)의 개신교 교회가 강제로 폐쇄되거나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칙서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Explicit Insult)이었다.
분노는 보헤미아 전역에 들끓었고, 개신교 귀족들은 최후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흐라트차니 성의 최후 통첩
1618년 5월 22일. 개신교 귀족들의 지도자였던 하인리히 마티아스 폰 투른(Heinrich Matthias von Thurn, 개신교 귀족의 실질적 지도자)백작은 프라하의 개신교 인사들을 소집했다.
다음날, 그들은 무장한 채 흐라트차니 성(Hradčany Castle, 프라하의 왕궁)으로 향했다.
그들의 목적은 황제의 대리 통치자들에게 칙서 위반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그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 |
프라하의 흐라드차니 왕궁 |
5월 23일 아침, 흐라트차니 성의 보헤미아 청사(Chancellery)에는 황제를 대리하는 두 명의 가톨릭 총독(슬라바타·보르지타)과 서기관 파브리키우스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빌렘 슬라바타(Vilem Slavata, 강경 가톨릭파 섭정)와 야로슬라프 보르지타(Jaroslav Borita of Martinice, 빌렘과 함께 섭정으로 활동)는 개신교도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 인물들이었다.
투른 백작을 필두로 약 200명의 무장한 개신교 귀족들이 청사로 밀고 들어왔다.
분위기는 얼음장 같았다.
투른 백작은 차분하면서도 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의 자유가 보장된 칙서가 왜 무시되었는가? 누가 이 신성한 문서를 파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는가?"
섭정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황제께서 직접 명령하신 일은 아니다"라고 변명했지만, 이미 귀족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슬라바타와 보르지타는 페르디난트 2세의 강경한 의지를 대변해 왔던 자들.
그들의 존재 자체가 개신교 탄압의 상징이었다.
그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보헤미아의 미래는 없다.
귀족들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 |
빌렘 슬라바타 초상 |
21미터 아래로, 그리고 논쟁 (Defenestration)
긴 논쟁과 격렬한 고성이 오갔다.
성난 귀족들은 섭정들을 에워쌌고, 대화는 순식간에 난투극으로 변했다.
"그들은 우리의 자유를 배신했다! 황제께서는 이 배신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우리의 관리가 아니다!"
투른 백작이 외쳤다.
야로슬라프 보르지타가 먼저 붙잡혔다.
그는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건장한 귀족들이 그를 창문 쪽으로 끌고 갔다.
창문은 높았고, 창틀은 두꺼웠다.
그들이 바라본 아래는 성벽 아래의 마른 해자(Moat)였다.
![]() |
창문 투척 장면 |
"잠깐! 나는... 나는 아무런 죄가 없소!" 보르지타가 절규했다.
푸슉!
보르지타는 그대로 창밖으로 던져졌다.
그가 사라진 뒤, 다음은 빌렘 슬라바타였다.
슬라바타는 필사적으로 창틀을 붙잡았지만, 군중의 분노 앞에서는 무력했다.
"하느님, 제가 당신의 순교자입니까!" 슬라바타가 울부짖었다.
콰앙!
빌렘 슬라바타마저 약 21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뒤이어 섭정들의 서기였던 필립 파브리키우스(Philip Fabricius, 죄 없는 서기)까지 '배신자들의 공범'이라는 명목으로 세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 |
창문투척 장면 |
세 사람이 모두 추락한 뒤, 성 청사 안은 잠시 고요해졌다.
귀족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되돌릴 수 없는 선(Line of No Return)을 넘은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암살 시도가 아닌, 엄청난 후폭풍을 낳았다.
그리고 곧바로 '기적 논쟁'이 불붙었다.
던져진 세 명은 죽지 않았다.
세 사람 모두 엄청난 높이에서 추락해 중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졌다.
가톨릭 측은 즉각 이를 성모 마리아(Virgin Mary)의 기적으로 선전했다.
"마리아께서 이 충실한 종들을 구원하셨다!"
반면 개신교 측은 냉소적인 설명을 내놓았다.
"그들이 떨어진 지점 아래에 분뇨 더미(Dung Heap)가 쌓여 있었고, 그 위에 떨어져 충격을 흡수했다!"는 것이다.
이 분뇨 더미 이야기는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의 가장 유명한 (전승) 혹은 (논쟁)의 핵심이 되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 일은 양측의 선전전(Propaganda War)을 격화시키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전쟁의 서막과 역사의 교훈
이 사건 직후, 보헤미아 개신교 귀족들은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1619년 새로운 지도자 프리드리히 5세(Frederick V, 칼뱅파 선제후)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것이 곧 보헤미아 반란(Bohemian Revolt)의 시작이었다.
![]() |
프리드리히 5세 초상 |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
보헤미아 반란은 곧 전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갈등과 얽히며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 중 하나인 30년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 전쟁은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고, 신성 로마 제국(주로 독일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은 단순한 개인 간의 다툼이 아닌, 유럽의 질서를 재편한 역사적 분기점(Historical Watershed)이 된 것이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폭력의 정당화(Justification of Violence)'에 대한 비극적 사례로 평가한다.
물론 섭정들이 보헤미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무장 세력이 정부 관료들을 물리적인 폭력으로 내쫓은 행위는 대화를 통한 해결책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이 폭력적인 행위는 페르디난트 2세에게 합법적인 무력 개입의 명분(Casus Belli)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즉, 개신교도들이 스스로 전쟁을 원하는 신호를 보낸 셈이었다.
![]() |
30년 전쟁의 비극 |
1차 사건(1419년)이후 벌어진 2차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은 곧바로 희극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섭정들이 똥더미 위에 떨어져 살았다는 이야기는 당시 유럽에서 큰 조롱거리가 되었다.
동시에, 이는 정치적 폭력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용어인 '데페네스트레이션(Defenestration, 창밖으로 내던지기)'이라는 단어를 전 세계적으로 각인시켰다.
이 단어는 이후에도 정치적 숙청이나 쿠데타 시도 등 극단적인 폭력 행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며,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인간의 충동적인 분노를 상징하게 되었다.
서기관 파브리키우스는 살아남은 뒤 황제로부터 ‘폰 호헨팔(von Hohenfall, ‘높은 추락’의 뜻)’ 작위를 받았다.
톨레랑스의 가치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은 폭력적인 종교 분쟁의 시대에 일어났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상대방의 신념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에 있었다.
가톨릭은 개신교의 자유를 억압했고, 개신교는 억압에 대해 극단적인 폭력으로 응답했다.
어느 쪽도 대화와 타협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종교의 자유를 얻는 대신,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인 전쟁을 초래했다.
역사는 우리에게 '톨레랑스(Tolerance, 관용)'의 가치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자신의 신념이 아무리 옳다고 확신하더라도, 타인의 존재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는 결국 자신과 공동체 모두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나 이념 대신 정치적 진영, 혹은 사소한 온라인 논쟁 속에서 '창문 투척'을 시도하는 현대판 폭력을 목격하곤 한다.
이 역사의 교훈은 분명하다.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지혜는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공존의 지혜라는 것을.
이 지혜만이 비극을 막고 진정한 진보를 이끌어낼 수 있다.
본 글은 주류 연구·학술서·공식 도록 및 1차·2차 사료를 우선하여 서사를 구성했습니다.
확인 가능한 사실을 중심으로 하되, 불확실하거나 해석이 갈리는 대목은 본문에 [논쟁]·[전승]·[추정] 표기를 즉시 달았습니다.
인물의 내면·대사 등 극적 요소는 최소 창작으로, 사건의 인과와 사실 흐름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사용했습니다.
연대·지명·직함·혈연 등 이견이 큰 부분은 보수적으로 기술하고, 주요 대표 견해를 병기했습니다.
본 건은 1618년 ‘제2차 프라하 창문 투척’을 다루며, 핵심 행위자·용어(예: Letter of Majesty, 섭정단, 페르디난트 2세 등)는 원어 병기로 식별성을 높였습니다.
생존 경위(‘기적’/‘분뇨·쓰레기 더미 완충’) 등 쟁점은 사료 근거와 함께 상반 견해를 병렬 제시했습니다.
오탈자·사실 오류·추가 사료 제보와 서지 보강 제안을 환영합니다.
댓글 쓰기